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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국민배우 Heinz Ruehmann의 100번째 생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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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하일트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조회 2,339회 작성일 02-03-07 04:13

본문

200.jpg하인츠 뤼만은 연극 배우로 성공하고 싶었다. 무대 위의 주인공이 되어 유장한 대사를 읊는 것이 그의 꿈이었고 이 꿈을 위해 그는 아비투어를 포기하고 학교를 그만두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절대 매력적인 젊은 연인이나 카리스마적인 영웅 역을 맡을 수 없는 핸디캡이 있었으니 바로 165cm의 키였다. 실제 삶에서야 이보다 더 작은 남자들도 연애하고 대장 노릇하며 살지만 무대 위의 조건은 엄격했다. 뤼만은 울분을 삼키며 조연으로 만족할 수 밖에 없었는데 엎친데 덮친 격으로 관객들은 무대 위에 선 땅딸막한 뤼만의 연기를 보고 웃느라 뒤집어져버렸다.

전혀 그럴 생각이 아니었는데도 본의 아니게 관중들의 환호와 박수갈채를 받고 만 뤼만, 그리고 여기서 희극배우 뤼만의 전설이 시작된다.

배우로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뤼만의 생은 1902년 3월 7일, 즉 100년 전에 시작되었다. 에센에서 호텔을 경영하는 부모의 두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고 한다. 별로 특기할만한 점은 없는 어린시절이었지만 1913년 아버지가 파산하고 급기야 자살을 하면서 집안 사정은 어려워진다.

뤼만의 어머니는 배우가 되겠다는 아들의 결심을 지지해주었다. 뤼만은 뮌헨에서 연기 수업을 받았고 여기저기 극장과 계약을 맺게 된다.

뤼만이 1930년 영화 'die Drei von der Tankstelle' 출연하면서 그의 명성은 전국적으로 퍼진다. 각기 외모와 성격이 다른 세 청년을 주인공으로 한 이 코미디 영화에서 뤼만이 맡은 것은 작달막한 희극적 캐릭터로 결국 다른 키 큰 라이벌에게 밀려 사랑 쟁취에 실패하는 역이었다. 캐릭터의 운명이야 어쨌든 이 영화는 성공을 거두었고 희극 배우로서 뤼만의 이름은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새겨진다.

그 후 뤼만의 경력은 승승장구였다. 1933년 나치가 정권을 잡으면서 정부에서는 선동 도구로서의 영화 산업에 큰 관심을 보이게 된다. 그러나 어떤 영화가 선동 영화이고 어떤 영화가 나치 이념과 관련이 없는지를 가르는 것은 쉽지 않다. 예를 들면 'Ohm Krueger'같은 영화의 경우 중간에 나치식 인사도, 히틀러의 초상화도, 나치 친위대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도 그럴것이 이 영화는 20세기 초엽 아직 파시즘이 탄생하기 전 남아프리카에서 있었던 보어 전쟁을 다루고 있고 등장 인물들도 네덜란드 이민의 후손이거나 영국인으로 그려져있기 때문이다. 영화 제작 당시 영국과 독일이 전쟁중이었고 이 영화에서 영국인들이 보어인을 억압하는 악역으로 그려져있다는 점을 연결하지 않으면 이 영화가 갖는 정치적 의미를 충분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진지한 영화가 아닌 희극 영화의 경우 판단은 더욱 어려워진다. 전쟁이 치열해지면서 선전부에서는 국민들의 사기를 고양하기 위해 비참한 현실을 잊고 웃어댈 수 있는 코미디 영화들을 장려했는데 이런 영화들은 대부분 이념과는 상관없는 연애 코미디를 담고 있기 일쑤다. 그리고 희극 배우 뤼만이 빛을 발했던 것은 바로 이런 장르의 영화에서였다.

따라서 제 3제국 시대 뤼만의 활동을 평가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가 주연한 44년작  'Feuerzangenbowle'는 히틀러가 가장 좋아했던 희극 영화였고 다른 나치 고관들도 그의 활동 가치를 높이 평가했다. 뤼만은 몇 편의 좀더 노골적인 선전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고(개중에는 2차 대전 후 상영 금지된 것도 있다) 독일 최고의 스타로서의 삶을 즐겼다. 그러나 그가 나치들에게만 인기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암스테르담 안네 프랑크의 방 벽에도 그가 출연한 영화 사진이 붙어있다고 전해진다.

흥미로운 것은 뤼만과 그의 유태인 아내와의 관계다. 아내 마리아의 출신 때문에 뤼만은 유형 무형의 압박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비슷한 처지였던 콘라트 바이트는 망명을 택했지만 뤼만은 아내와 다시 결혼해줄 중립국 스웨덴 출신 남자를 구한 뒤 아내와 이혼한다. 이혼 뒤에도 뤼만과 마리아는 친구 관계로 남았고 그 관계는 다음해 39년 뤼만이 재혼한 후에도 이어졌다. 마리아가 독일을 떠나 스웨덴으로 이민간 후에도 뤼만은 그녀에게 재정적 원조를 했다고 한다.

2차 대전이 끝난 후 한때 독일 최고의 코미디언이었던 뤼만에게는 한동안 어려운 시절이 이어진다. 나치 협력 문제는 일단 혐의가 없는 것으로 일단락 되었지만 뤼만이 세운 영화제작사가 파산하여 빚더미를 지는 등 그의 경력에는 먹구름이 꼈다. 몇 년 동안 그는 변변한 히트작 하나 내지 못했다.

그의 경력이 다시 꽃피기 시작하는 것은 57년 'Der Hauptmann von Koepenick'의 주연을 맡을 무렵이다. 칼 추크마이어의 희곡을 원작으로한, 폭소보다는 냉소를 자아내는 이 작품을 통해 뤼만은 단순히 웃기기만 하는 개그맨에서 단순하지 않은 캐릭터를 소화해내는 성격 배우로 자리바꿈한다. 이런 스타일이 'Der Brave Soldat Schweyk'등의 작품으로 이어지면서 뤼만은 국민 배우라는 이름이 전혀 아깝지 않은 서독 최고의 스타로 군림하게 된다. 만약 전쟁 후 제 2의 전성기가 아니었다면 뤼만은 20세기 독일 영화계의 상징중 하나가 아닌 나치 시대에 한동안 반짝 했던 코미디언으로 기억될 뿐이었을 것이다.

'20세기 독일 영화계'라는 말은 과장이 아니다. 1993년 개봉한 빔 벤더스 감독의 'In weiter Ferne, so nah'에서도 뤼만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독일 국내에서의 명성에 비해 독일어권을 벗어나면 뤼만의 이름을 아는 영화팬은 흔치 않다. 필자의 경우 하인츠 뤼만이라는 이름을 비로소 의식하게 된 건 아무생각 없이 봤던 영화 몇 편, 그것도 반세기라는 격차를 갖고 있는 영화들에 모두 이 인간이 출연했다는 걸 알고 경악한 다음이었다. 그전까지는 뤼만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기억이 없었다. 이는 뤼만이 한 번 헐리우드에서 스탠리 크레이머 감독과 작업한 것을 제외하면 거의 평생 독일 내에서 영화를 찍었기 때문일 것이다. 뤼만은 독일의 스타지만 동시에 독일만의 스타기도 하다. 세계적인 명성을 쌓았지만 그 대신 고향을 등져야 했던 마를레네 디트리히와는 상반되는 경우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는 20세기 독일 영화계를 대표하는 배우들 중 하나이고 그것도 가장 인기있는 배우였지만 영화계 그 자체라고는 할 수 없다. 오랜 경력 동안 뤼만은 한번도 악역을 맡아본 적이 없다. 로맨틱하고 정열적인 연인도 그의 역할은 아니었다. 익살맞고 미워할 수 없는 어릿광대, 결코 관객을 불편하게 만들거나 시끄러운 문제작을 만드는 법이 없는 배우, 그것이 뤼만이었다.

1994년 10월 3일 뤼만은 긴 생애를 매듭짓는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가 잊혀진 것은 아니다. 그의 100번째 생일을 맞아 수많은 텔레비전 프로그램과 신문 기사, 영화박물관 등이 이 스타를 기념하고 있으니까.

덧붙임: 이런 글을 쓸 땐 뤼만이 출연한 영화 사진들을 잔뜩 링크시켜놓는 게 제격이겠으나 유감스럽게도 링크시킬 수 있는 사진들을 제공하는 사이트를 찾을 수 없었다. 뤼만 팬 사이트 쥔장 왈, 법적인 문제 때문에 사진을 함부로 갖다놓을 수 없다나. -_-a IMDB같은 유명한 영화 사이트도 헐리우드 스타가 아닌 뤼만에 대해서는 자료가 빈약하기 짝이 없다. 칼리갈리 박사의 밀실이나 노스페라투같은 뤼만 것보다 더 오래된 영화들도 한국 비디오가게에서 빌려볼 수 있는 작금이지만 정작 뤼만 출연작은 찾아보기 힘들다. 정녕 뤼만은 독일만의 스타인가.




'217.225.72.231'고스라니: Der Hauptmann von Koepenick 봤어요. 베를린 지역 방언 때문에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재밌었지요. 뤼만이 그 영화의 선량하고 초라하고 쓸쓸한 주연 배우군요.  슈타트뷔허라이에서 Feuerzangenbowle 비디오 보면서도 늘 그냥 지나쳤는데 꼭 한번 빌려봐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03/06-23:53]
'80.133.45.72'자유로니: 저도 한때 무대에 선 적이 있는데 맡을 배역이 없었어요. 너무 키가 커서리. 제가 움직이는 쪽으로 무대중심이 기운다나 어쨌다나... 극장도 작고 배우들도 작았던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은 이제 지나갔을려나...  [03/07-02:23]
''.: index.jpg  [03/07]



''Berlin, 1953: index.jpg  [03/07]
'62.104.208.74'하일트: 앗, 사진 퍼다주신 분 감사함다 ^^  [03/08-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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