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바이마시의 쉴러의 두개골, 가짜임이 판명
페이지 정보
작성자 Lisamarie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1건 조회 3,914회 작성일 08-05-03 22:12본문
바이마.Weimar
독일의 정신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괴에테(Goethe )와 쉴러(Schiller) 의 도시입니다.
전 세계에서 많은 이들이 이 도시를 찾아 옵니다.
독일문학이나 고전을 사랑하는 이를 비롯, 역사에 관심있는 이, 호기심에서 등등.
한 번은 독일 TV 에서 한국서 단체 수학여행 온 한국의 청소년들이 괴에테와 쉴러의 동상 앞에서 사진 찍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었습니다.
이 도시에 " 귀족들의 지하묘지ㅡ 퓌어스텐 그루프트( Fuerstengruft) "에 쉴러와 괴에테의 관이 나란히 누구나 손을 내밀면 닿을 만한 거리를 두고 안장되어 있습니다.
몇 년 전 필자도 처음 그 관앞에 섰을 때의 감격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180 년간 진짜라고 믿어온 그 쉴러의 두개골이 가짜임이 판명 되었습니다.
오늘 바이마의 " 클라씩재단"의 공식 발표에 따른 내용입니다.
2년 전 중부독일 방송국에 " 프리드리히 쉴러 코드 " 라는 기록영화를 만든 여 감독 우테 겝하르트( Ute Gebhard) 씨의 노력으로 2006년 5월 쉴러의 관을 열고 조사가 시작되었었다고 합니다.
" 바이마 글라씩 재단"( Klassikstiftung Weimar) 과 인류학자, 화학자 그리고 계보학자들이 한 팀이 되어 지난 2년간 확실한 증거를 찾기위해 모두 다섯 명의 유골의 DNA를 연구조사 하였다고 합니다.
그 다섯은 쉴러와 그의 여형제 루이제와 크리스토피네 , 아들 에언스트 그리고 어머니 살롯테입니다.
두 연구소,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와 미국 메릴랜드 연구소의 조사결과 그 두개골은 쉴러의 것이 아님이 판명되었다고 합니다.
쉴러는 1759 년에 바덴뷔르템베르크주의 마바흐에서 태어나서 1805 년 그의 두번째 고향인 바이마에서 생을 마쳤습니다. 그의 시신은 이 도시의 공을 끼친 시민들을 위한 공동무덤에 안장되었다고 합니다.
1826 년 바이마 시장 칼 슈바베는 쉴러의 두개골과 골격들을 당시 새로 지어진 아름다운 귀족들의 관 안치실인 "퓌어스텐 그루프트"에 옮기기 위해 공동무덤에서 모두 23개의 두개골을 꺼내오게 했는데 그 중 가장 커다란 두개골이 쉴러의 것으로 믿어졌다고 합니다. 그 당시 그의 아들과 의사 두사람 또한 죽은이의 얼굴가면이 쉴러와 가장 비슷하다고 증언을 한 결과 입니다.
학자들은 진짜 그의 두개골은 이미 19세기 후반경에 도둑을 맞았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독일의 정신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괴에테(Goethe )와 쉴러(Schiller) 의 도시입니다.
전 세계에서 많은 이들이 이 도시를 찾아 옵니다.
독일문학이나 고전을 사랑하는 이를 비롯, 역사에 관심있는 이, 호기심에서 등등.
한 번은 독일 TV 에서 한국서 단체 수학여행 온 한국의 청소년들이 괴에테와 쉴러의 동상 앞에서 사진 찍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었습니다.
이 도시에 " 귀족들의 지하묘지ㅡ 퓌어스텐 그루프트( Fuerstengruft) "에 쉴러와 괴에테의 관이 나란히 누구나 손을 내밀면 닿을 만한 거리를 두고 안장되어 있습니다.
몇 년 전 필자도 처음 그 관앞에 섰을 때의 감격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180 년간 진짜라고 믿어온 그 쉴러의 두개골이 가짜임이 판명 되었습니다.
오늘 바이마의 " 클라씩재단"의 공식 발표에 따른 내용입니다.
2년 전 중부독일 방송국에 " 프리드리히 쉴러 코드 " 라는 기록영화를 만든 여 감독 우테 겝하르트( Ute Gebhard) 씨의 노력으로 2006년 5월 쉴러의 관을 열고 조사가 시작되었었다고 합니다.
" 바이마 글라씩 재단"( Klassikstiftung Weimar) 과 인류학자, 화학자 그리고 계보학자들이 한 팀이 되어 지난 2년간 확실한 증거를 찾기위해 모두 다섯 명의 유골의 DNA를 연구조사 하였다고 합니다.
그 다섯은 쉴러와 그의 여형제 루이제와 크리스토피네 , 아들 에언스트 그리고 어머니 살롯테입니다.
두 연구소,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와 미국 메릴랜드 연구소의 조사결과 그 두개골은 쉴러의 것이 아님이 판명되었다고 합니다.
쉴러는 1759 년에 바덴뷔르템베르크주의 마바흐에서 태어나서 1805 년 그의 두번째 고향인 바이마에서 생을 마쳤습니다. 그의 시신은 이 도시의 공을 끼친 시민들을 위한 공동무덤에 안장되었다고 합니다.
1826 년 바이마 시장 칼 슈바베는 쉴러의 두개골과 골격들을 당시 새로 지어진 아름다운 귀족들의 관 안치실인 "퓌어스텐 그루프트"에 옮기기 위해 공동무덤에서 모두 23개의 두개골을 꺼내오게 했는데 그 중 가장 커다란 두개골이 쉴러의 것으로 믿어졌다고 합니다. 그 당시 그의 아들과 의사 두사람 또한 죽은이의 얼굴가면이 쉴러와 가장 비슷하다고 증언을 한 결과 입니다.
학자들은 진짜 그의 두개골은 이미 19세기 후반경에 도둑을 맞았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추천0
댓글목록
Bahnkarte님의 댓글
Bahnkarte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23개의 두개골 중에서 쉴러의 것을 찾아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나보죠. '가장 큰 것'과 '가면이 비슷한 것'을 고른 것은 원초적인 선택이 아니였나 싶네요.
이제까지 진품으로 믿다가 2백년전에 두개골이 도둑맞았을 거라고 말하는 학자들도 재밌네요. 19세기에는 유명인들의 두개골을 수집하는 풍습이 있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