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 로스트로포비치 여든살
첼로연주계의 살아 있는 큰 별
페이지 정보
작성자 서동철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1건 조회 3,814회 작성일 07-03-27 11:43본문
러시아의 한 젊은 청년이 20세기 러시아 작곡가 쇼스타코비치를 찾았다. 그 당시 이미 이름이 나있던 이 큰 작곡가의 제자가 되고자 해서였다. 그래 자신의 피아노 연주를 선보인 후 가르침 받겠다고 부탁할 참이었다. 단지 그 청년 생각에 그 유명한 쇼스타코비치의 시간을 자기의 볼품없는 피아노 연주로 뺐고 있으니 되도록 빨리 연주해 불필요한 미안함을 모면해 보고자 했다. 연주 후 쇼스타코비치는 그 청년에게 말하기를, 자기가 가르침을 줄 수 있음에 자기로선 영광이며 매우 기쁘다며 제자로서의 입문을 승낙했다. 후에 로스트로포비치는 회고하기를, 자기 평생 그 때만큼 피아노를 빨리 연주한 적이 없단다.
Mstislaw Leopoldowitsch Rostropowitsch, 1927년 3월 27일 러시아의 카스피 호수 옆 바쿠에서 태어났다. 피아노 연주자였던 어머니로부터 4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웠으며 첼로연주자인 아버지로부터는 6살 때부터 첼로를 배웠다. 성인이 된 후엔 지휘자로서도 작지 않은 성공을 거두었다. 음악계에선 따라서 20세기 초반 첼로연주자와 지휘자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누렸던 파블로 카잘스의 후계자로 로스트로포비치를 꼽는다. 내 귀엔 허나 최소한 슈베르트 현악오중주(D956)의 연주에 있어서 카잘스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듯 들린다만.
그는 스탈린 시대의 러시아에 살며 쇼스타코비치, 프로코피예프 등의 작곡가들과 친분이 두터웠으며 이들로 부터 때론 첼로 곡을 선물로 받기도 했다. 덧붙여 피아노 연주의 큰 사람 리히터와도 친분이 두터웠다. 지금 듣고 있는 베에토벤의 첼로-피아노 이중주는 이 두 사람들의 연주작품이다.
스탈린 시대를 거의 문제없이 거칠 수 있었던만큼 그는 정치적이지 않았다. 그 후 허나 브레즈네프 집권 당시 러시아의 소설가 솔제니친을 알고 난 후 로스트로포비치의 삶은 180도 바뀌었다. 이에 1970년 대 외국여행불가에 이어 기한 내 허락 후 결국 소련에서 추방당한 뒤 국적까지 잃고 말았다. 그는 이러한 일련의 사태를 회고하며 자신은 두 가지 완전 별개의 삶을 꾸렸다고 말한다. 이 추방 시절 미국의 워싱턴 심포니 악단에 지휘자로 일하며(1977-1994) 이 악단을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렸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 이 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후 추방생활은 끝이 났으며 이 전에 잃었던 국적과 업적에 대한 표창등을 1990년 다시 찾을 수 있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날 그는 베를린으로 달려가 챨리 검문소 앞 장벽 옆에서 Bach를 연주하는 모습은 전파를 타고 세계로 전해지기도 했다.
결혼은 소프라노 가수 Galina Wischnewskaja와 1955년에 했으며 슬하에 딸 둘을 두고 있다. 그는 종종 자신의 아내를 위해 피아노 반주자로도 무대에 등장하곤 했다. 둘이 처음 알게된 때에 갈리나는 이미 딴 사람의 아내였다. 허나 둘 사이에 불붙은 사랑의 힘은 갈리나로 하여금 결국 재혼을 위한 이혼을 하게 만들었다. 들리는 일화로는 갈리나는 전 남편이 자기가 떠나면 자살하겠다는 협박에 머뭇거리며 괴로와 하고 있었는데, 로스트로포비치는 어느 날 갈리나에게 말하기를, 그 전 남편한테 가 작별을 고하고 오후 4시까지 자기 집에 오지 않으면 더 이상 자기를 볼 생각 말라는 엄포를 내렸다 하는데, 갈리나는 결국 집에 돌아가 짐싸고 전 남편한테 작별을 고하고야 말았다 한다.
그는 제자들한테 꽤 엄격했다. “You must compose! Keine Kopie sein!”, 그가 제자들에게 즐겨 들려주었던 교육지침이다. 곡을 연주함에 있어 베끼지 말고 모방하지 말고 그 곡의 의도를 나름대로 파악한 후 스스로의 독창력으로 소화시켜야 함을 일컫는다.
로스트로포비치는 2005년 이후 공개연주는 하지 않고 있으나, 자기 자신을 위한 연주는 계속 하고 있다. 오늘 생일파티는 모스크바의 크레믈린 궁전에서 벌어진다.|
Mstislaw Leopoldowitsch Rostropowitsch, 1927년 3월 27일 러시아의 카스피 호수 옆 바쿠에서 태어났다. 피아노 연주자였던 어머니로부터 4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웠으며 첼로연주자인 아버지로부터는 6살 때부터 첼로를 배웠다. 성인이 된 후엔 지휘자로서도 작지 않은 성공을 거두었다. 음악계에선 따라서 20세기 초반 첼로연주자와 지휘자로서 세계적인 명성을 누렸던 파블로 카잘스의 후계자로 로스트로포비치를 꼽는다. 내 귀엔 허나 최소한 슈베르트 현악오중주(D956)의 연주에 있어서 카잘스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듯 들린다만.
그는 스탈린 시대의 러시아에 살며 쇼스타코비치, 프로코피예프 등의 작곡가들과 친분이 두터웠으며 이들로 부터 때론 첼로 곡을 선물로 받기도 했다. 덧붙여 피아노 연주의 큰 사람 리히터와도 친분이 두터웠다. 지금 듣고 있는 베에토벤의 첼로-피아노 이중주는 이 두 사람들의 연주작품이다.
스탈린 시대를 거의 문제없이 거칠 수 있었던만큼 그는 정치적이지 않았다. 그 후 허나 브레즈네프 집권 당시 러시아의 소설가 솔제니친을 알고 난 후 로스트로포비치의 삶은 180도 바뀌었다. 이에 1970년 대 외국여행불가에 이어 기한 내 허락 후 결국 소련에서 추방당한 뒤 국적까지 잃고 말았다. 그는 이러한 일련의 사태를 회고하며 자신은 두 가지 완전 별개의 삶을 꾸렸다고 말한다. 이 추방 시절 미국의 워싱턴 심포니 악단에 지휘자로 일하며(1977-1994) 이 악단을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렸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 이 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후 추방생활은 끝이 났으며 이 전에 잃었던 국적과 업적에 대한 표창등을 1990년 다시 찾을 수 있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날 그는 베를린으로 달려가 챨리 검문소 앞 장벽 옆에서 Bach를 연주하는 모습은 전파를 타고 세계로 전해지기도 했다.
결혼은 소프라노 가수 Galina Wischnewskaja와 1955년에 했으며 슬하에 딸 둘을 두고 있다. 그는 종종 자신의 아내를 위해 피아노 반주자로도 무대에 등장하곤 했다. 둘이 처음 알게된 때에 갈리나는 이미 딴 사람의 아내였다. 허나 둘 사이에 불붙은 사랑의 힘은 갈리나로 하여금 결국 재혼을 위한 이혼을 하게 만들었다. 들리는 일화로는 갈리나는 전 남편이 자기가 떠나면 자살하겠다는 협박에 머뭇거리며 괴로와 하고 있었는데, 로스트로포비치는 어느 날 갈리나에게 말하기를, 그 전 남편한테 가 작별을 고하고 오후 4시까지 자기 집에 오지 않으면 더 이상 자기를 볼 생각 말라는 엄포를 내렸다 하는데, 갈리나는 결국 집에 돌아가 짐싸고 전 남편한테 작별을 고하고야 말았다 한다.
그는 제자들한테 꽤 엄격했다. “You must compose! Keine Kopie sein!”, 그가 제자들에게 즐겨 들려주었던 교육지침이다. 곡을 연주함에 있어 베끼지 말고 모방하지 말고 그 곡의 의도를 나름대로 파악한 후 스스로의 독창력으로 소화시켜야 함을 일컫는다.
로스트로포비치는 2005년 이후 공개연주는 하지 않고 있으나, 자기 자신을 위한 연주는 계속 하고 있다. 오늘 생일파티는 모스크바의 크레믈린 궁전에서 벌어진다.|
추천0
댓글목록
빅토리아님의 댓글
빅토리아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언제봐도... 언제 들어도...
존경스러울 따름입니다...
아름다운 사랑 까지도...
어쩌면 전 남편의 슬픔이 더 컸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