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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겨레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조회 979회 작성일 12-12-14 20:53

본문

 
 열 한 번째 마당 : 한민건과 인권세미나

네 주일의 연차휴가를 보내고, 기숙사로 돌아와 출근하기 시작한 첫 주말, 태영을 통해 이 박사의 연락을 받은 성주는 영주에게 행방을 알린 다음, 태영과 함께 성규의 차를 타고 ‘한국민주사회 건설협의회’가 창립 이후 처음으로 개최하는 국제행사라는 <인권세미나>에 참석하기 위해 부퍼탈로 갔다.
한적한 산속에 있는 세미나 장소는 기독교기관의 가족휴양관으로 사나흘 휴양을 겸한 세미나 장소로는 안성맞춤이었다. 휴양관을 둘러보며 성주는 한국의 종교기관들은 어째서 이런 시설 하나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나 하는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회의실에 둘러앉은 참석자들은, 이 박사의 사회로 한 사람씩 일어나 자기소개를 했다. 주최자인 이 박사 내외, 보쿰교회의 이정우, 김명호 집사와 두이스부르크교회의 천명운 집사, 도르트문트교회의 정기종 집사가 한민건 회원이라고 자신들을 소개했다. 이어서 최태영, 최성규, 한성주는 현직 노동자로서 방청인 자격으로 초대받아 왔다고 자신들을 소개했다.
<조선말 천민집단의 인권운동>이라는 주제로 강연할 임순만 박사가 미국으로부터 초대됐고, <유학에 나타나는 인권사상>을 주제로 강연할 초청강사 이영모씨는 자신을 늦깎이 유학생이라고 소개했다. 이어서 주독한국대사관의 영사로 근무하다가 군부독재-유신헌법 반대성명을 발표하고 망명한 김승태 씨가 자신을 무국적자라고 소개했다. 또 반파쇼-민주화 연구 학술단체인 ‘버트란트 럿쎌 협회’의 배동환, 김인문 씨, 그리고 김동락 씨가 늙은 유학생들이라고 자신들을 소개했다. 또 정현화, 이상백, 최재헌 등 스무 살 후반의 유학생들이 선배들로부터 한국의 정치문제와 사회문제를 배우기 위해 왔노라고 자신들을 소개했으며, 마지막으로 캐나다 토론토에서 반독재 민주화를 주창하는 한글판 주간지 ‘뉴 코리아 타임스’를 발행한다는 전충일씨가 취재차 왔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결혼식으로 위장하여 명동성당에 모인 재야인사들과 민주운동가들이 ‘삼일 민주구국선언문’을 발표하고 모두 체포 구금된 사건의 경위와 그 의미를 이 박사가 보고하는 것으로 시작된 첫날 저녁의 세미나에서, 화제의 주제는 김대중 선생을 비롯한 수감자들을 국제사회의 압력으로 석방시키는 방안 모색과 박정희의 군부독재를 어떻게 하면 빨리 종식시키느냐 하는 이야기들로 집중되었다.
성주가 듣기에는 모두가 인텔리들의 탁상공론이었다. 이 박사가 무슨 말끝에선가, ”우리들의 이러한 토론 모임을 가리켜 어떤 이들은 ‘창백한 인텔리들의 말장난이요, 자위행위 라는 비판도 있을 수 있다.“라고 하는 말에 귀가 번쩍 뜨인 성주는 “듣기만 하자”고 작정했던 초심을 잊고 처음으로 대화에 끼어들었다.
제가 옆에서 듣기에도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토론하는 내용을 듣자하니, 여러분이 말하는 인권의 개념과 저와 같은 노동자들이 생각하는 인권의 개념 사이에는 하늘과 땅 같은 간격이 있는 것 같아 한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 서슴지 말고 말씀하세요.“
이 박사가 기다렸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발언을 허락했다.
이른바 수출공업 육성, 고도경제성장을 주장하는 박정희 정권이 공업육성에 필요한 값싼 노동력을 농촌에서 끌어내기 위한 방책으로 시행한 ‘새마을 운동’은 엄밀한 의미에서 산업혁명 당시 영국에서 시행된 ‘농촌 황폐화 정책’과 맥을 같이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로 생계를 유지해 오던 두서너 마지기 농사마저 건사하지 못하고, 처자식을 거느리고 무작정 상경한 농민 가장이 당장 갈 곳이 없어 남산 어린이공원 여우굴 속에 처자식을 눕혀 놓고 밤이슬을 맞으며 생각하는 ‘인간의 권리’, 그것이 어떤 것인지 여러분은 짐작이나 할 수 있습니까?
어렵사리 상계동 산비탈에 움막집 하나 얼기설기 얽어놓고 행상을 나간 지아비를 기다리며, 홍역의 고열에 신음하는 어린 딸을 부여안고 눈물 흘리는 지어미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한탄 속에 서리어 있는 ‘인간의 권리’의 의미를 지금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은 알지 못하고 계십니다.
식구들과 함께 사흘을 굶어야 했던 어느 가장이 허기진 어린 자식들에게 먹여주고 싶어 가게에서 몇 개의 빵을 훔쳐 달아나다가 경찰관에게 붙잡혀 가면서도 차마 빵 봉지를 손에서 놓지 못하고 터져 나오는 그 오열 속에 삼켜지는, 오늘날 한국의 인권 사각지대를 여러분은 보지 못하고 계십니다. 이러한 인권 사각지대의 참상을 전혀 모르면서, 김대중 선생의 구명운동이나, 구속된 민주운동가들의 석방운동을 인권운동이라고 말씀하시는 여러분, 또 박정희 독재의 타도만이 한국 민주화의 지름길이라고 말씀하기는 여러분, 외람되지만 저는 감히 말씀드립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은, 죽지 못해 살고 있는 밑바닥 서민들의 눈물과 한탄을 어루만져주며 인간다운 삶을 보장해주어야 하는 국가의 의무가 제도화되지 않는다면, 박정희가 아니 군부독재가 타도되고, 김대중 선생이 대통령이 된다 하더라도, 우리 사회의 인권유린은 개선되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정치의 민주화도 요원합니다.“
성주가 말을 마치자, 늙은 유학생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배동환이 못마땅한 말투로 대꾸했다.
박정희가 타도되고 민주정권이 들어서면, 그런 문제들이 모두 해결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럼, 그럼!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모여 독재타도 방안에 관하여 토론을 하고 있는 거지.“
무국적자라고 자신을 소개한 김승태씨가 배동환의 말을 거들었다.
그렇습니까? 정말로 박정희만 제거되면 민주정권이 들어설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저는 박정권이 무너진다 해도 지금의 민주운동권이 민주정권을 창출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고 봅니다. 지금 한국사회의 어느 부문도 군부 세력의 장악밖에 있는 곳은 없습니다. 이들이 박정희 한 사람 제거되었다고 해서 순순히 권력을 내어주고 물러날 것이라고 믿는다면, 그건 너무 순진한 것이 아닐까요? 단언하건데, 어느날 갑자기 박정희가 제거된다면, 민주사회가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군부후계자에 의한 더욱 엄혹한 군사독재로 이어질 것이 불을 보듯 뻔합니다.“
으흠, 으흠, 한 선생의 말이 옳은 것 같소. 그렇다면, 한국의 민주화는 아직 요원하다는 말인데, 다른 방법은 없다는 말인가?“
초청강사로 미국에서 온 임 박사는 물음도 아니고 한탄도 아닌 신음 섞인 소리를 내뱉으며 애꿎은 탁자만 두드렸다.
가장 빠른 방법은 하루라도 빨리 군사독재정부가 민간정부에 정권을 넘겨줄 명분과 기회를 만들어 주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국지성인들의 책무가 아닐까 합니다.“
하아---. 이거 갈수록 어려워지는구만, 민간정부에 정권을 이양할 명분과 기회를 만들어주어라---? 그것 참 알 것도 같은데---, 하여튼 이 명제는 토론할 가치가 충분히 있는 것 같구만.“
중년의 나이에 늦게 유학을 왔다는 김동락씨가 성주의 말에 공감을 표했다.
다르게 말하자면, 군부독재가 쌓아 놓은 거대한 댐은 몇몇 민주투사들의 투창질로는 절대로 무너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 댐을 흘러넘칠 수 있는 민중의 도도한 물결에 민주화의 의지가 실린다면, 군부독재인들 댐의 수문을 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댐이 붕괴하면 그 위에 안주하고 있는 자신들도 살아남을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죠.“

어느새 할애된 시간이 다 지나서 다음 순서로 넘어가야 하겠습니다. 더 이야기를 듣고 싶지만, 미진한 이야기들은 이따가 취침시간을 이용하여 관심 있는 분들끼리 모여 다시 토론하기로 합시다.“
이 박사의 토론 종결 선언에 따라 다음 순서인 친교의 시간으로 이어졌다. 친교 시간은 레크레이션 진행의 전문가인 듯한 자칭 늙은 유학생 김인환의 사회로, 한국의 운동권에서 애창되고 있다는 ‘아침이슬’을 비롯한 김민기 작사, 작곡의 노래들을 몇 가지 배운 후, 웃음이 절로 터져 나오는 게임에 참여하면서 낯선 참석자들과 가까워지는 시간을 가졌다.
특히 '아침이슬'을 배울 때에는 그 비장한 곡조와 뜻깊은 노랫말에, 성주와 태영은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불렀다.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 이슬처럼
내 맘에 설움이 알알이 맺힐 때
아침 동산에 올라 작은 미소를 배운다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떠오르고
한낮에 찌는 더위는 나의 시련일지라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내 맘의 설움이 알알이 맺힐 때
아침 동산에 올라 작은 미소를 배운다
.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떠오르고
한낮에 찌는 더위는 나의 시련일지라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
                                    <45회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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