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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겨레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2건 조회 1,126회 작성일 12-12-02 21:44

본문

 
이번에는 임 노무관의 능청스러운 말 휘갑에 중치가 막힌 성주가 임 노무관의 말을 끊었다.
"
사람에 따라서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요. 하지만 여기 에발트 광산에서 일하게 돼서 고맙다고 하는 동료 전 아직 만나 본 적이 없습니다. 또 우리 노동자들은 그 통계라고 하는 숫자놀음을 도깨비 강물 건너가는 소리쯤으로 여기죠. 미안합니다만 도무지 믿을 도리가 없으니까요. 또 제가 알아본 바로는 우리가 지금 적용받고 있는 노임등급표라는 것이 '시간 정액제 계약노동'을 하는 다른 광산에서는 최저임금의 개념으로 적용되는데, 여기 에발트 광산은 '도급제 계약노동'으로 사실상 노임등급표가 무용지물이 돼 있습니다. 그러니 작업성과가 높은 능력 있는 몇몇 동료 등급표의 두 배가 넘는 노임을 받고 있지만, 한편에서는 체력으로나 적성으로나 채탄막장에서 능률을 올리지 못하는 많은 동료 등급표에서 책정한 노임의 절반을 조금 넘게 받고 있습니다. 돈 벌겠다고 서독까지 온 꿈이 깨어지고 있는 겁니다. 실망 때문에 병도 많이 생기고 의욕도 없어져서 자연히 병가도 많아지게 마련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대책 없이 해고나 시키지 말고 무리한 채탄작업이 아닌 체력과 적성에 맞는 다른 일을 시키고 노임등급표에 정해진 임금을 최저임금으로 준다면 그야말로 저희도 에발트광산에 오게 된 것을 고맙게 생각할 텐데, 불행하게도 광산 측은 막장 채탄부로 데려왔으니 그 일 못하겠으면 한국으로 돌아가라는 식으로 막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조금 전에 노무관님이 평균 계산으로 따져서 여기 에발트 광산 근무자들의 한국 송금실적이 높다고 하셨는데, 그 통계가 지금 여기 앉아 있는 우리하고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우린 지금 노임을 올려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피땀 흘려가며 일하다가 지치거나 다쳐서 일을 못하고 병가로 쉬고 있을 때 어김없이 날아오는 경고장이나 해고통지서를 재고해 달라고 청원하고 있는 겁니다. 이번 일은 사실 해고당한 동료 구제해야 한다는 목적도 있지만, 더 큰 목적은 우리도 언젠가는 힘에 부쳐서 병이 날 것이 분명한데, 그때 어이없이 해고당하는 그런 경우가 생길 것이 두려워서 시작한 겁니다. 이런 우리의 요구를 노무관께서는 무리라고 생각하십니까? 한국 탄광에서조차 이런 식의 해고는 없는데 하물며 노동선진국이라는 서독에서 이런 불합리한 해고가 있다는 사실은 정말 믿기 어렵습니다. 이건 꼭 시정돼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린 노무관님의 말만 듣고 이번 일을 흐지부지 중동무이로 끝낼 수는 없습니다. 노무관께서 무어라 해도 우린 광산 측으로부터 최소한 경고장과 해고장 남발에 대해 재고하겠다는 정도의 답변이라도 들어야 하겠습니다. 그 정도 요구도 들어주지 않는 고용주라면 무더기 해고를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입갱 거부 같은 집단투쟁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
당신 말 참 잘하네. 그렇게 똑똑한 사람이 어쩌다 광부로 서독에 왔소? 여기 오기 전에 당신 뭘 했소?"
   임 노무관은 벌레 씹은 얼굴이 되어 송곳눈을 뜨고 성주의 얼굴을 뚫어라 바라보면서도 엉 너 리를 쳐가며 말머리를 돌리려고 했다.

   성주는 서독에 오기 전 한국에서 뭘 했느냐는 노무관의 질문이 어차피 진지한 답변을 듣기 위해 던진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마치 선방에서 좌선 입정에 들어간 스님처럼 입을 다물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임 노무관 역시 더 할 말을 잃고 눈을 감았다 좌중을 둘러보다 하면서 무언가 골히 생각하더니 결심한 듯한 표정으로 마지막 패를 던졌다.
"
좋소, 솔직히 말해서 내 개인적으로는 여러분이 자랑스럽소. 부당한 처사에는 항의할 줄도 알아야 사나이들이지. 아무튼, 이번 일로 독일 고용주들에게 한국광부들이 무지렁이 노동자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한국인의 자존심을 살렸다고 생각하오.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국가공무원의 신분으로서 고민이 있소. 여러분이 이러는 것이 내심으로는 든든하고 자랑스러우면서도 수석 노무관이라는 직책으로서는 여러분의 집단항의를 말려야 하는 어쩔 수 없는 이유가 있단 말이오. 그게 뭔고 하면, 지금 한국에서는 여러분과 같은 날 서울 수도공고에서 모래가마니를 들어 올리고 합격한 사람들 가운데 아직 서독에 오지 못한 백육십 명의 대기자들이 있소. 여러분도 다시피 이 사람들도 파독광부로 간다고 생업 다 집어치우고 한 해가 넘도록 허송세월하면서 서독에 갈 날만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오.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든 서독에 오게 하려고 요즘 이 광산 저 광산 인사담당자들을 찾아다니고 있는데, 여러분이 이렇게 일을 벌였으니 죽도 밥도 안되게 생겼소. 이 일을 어쩌면 좋겠소?"
   능구렁이 임 노무관의 마지막 패는 과연 결정적인 효과가 있었다. 가장 강경했던 부회장 최태영이 동요하는 눈치를 보였고 휴게실에 모인 회원들 대부분이 혀를 차며 맥빠져 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도 그럴 것이 늦은 밤까지 휴게실에 앉아 있는 사람들 모두가 짧게는 반년 길게는 세 해를 허송세월로 기다리다가 우여곡절 끝에 광부로 온 사람들이기에, 아직도 한국에서 서독 올 날만 기다리고 있는 예비광부가 백육십 명이나 남아 있다는 소리가 남의 일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
노무관님, 그게 사실입니까? 확실합니까?"
"
이게 어디 지금 헛소리할 일이오?"
   태영이 우직하게 다그쳐 묻자 임 노무관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매실매실한 표정을 지어 보였고, 어기차지 못한 좌중은 무거운 침묵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이윽고 부회장 두 사람과 무언가 한참이나 말을 주고받은 송 회장이 좌중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
여러분은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우리 회장단이 노무관님 모시고 다른 방에 가서 결말을 지어 보고하겠습니다. 4진 송 회장, 5진 이 회장, 6진 신 회장, 그리고 한 형도 함께 갑시다."
   성주는 이미 결말이 난 것과 다름없는 일을 가지고 입씨름할 필요를 느끼지 않아 '임원도 아닌데'라는 핑계로 송회장의 회의 참석 제의를 사양했지만, 태영이 팔을 잡아끄는 바람에 헐수할수없이 따라나섰다.
광부로 서독에 오기 위해 교육을 끝마치고 허송세월하고 있는 백육십 명 대기자들의 길을 막아서는 안 된다는 명분은 모든 것을 물거품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해고자 세 사람에 대한 구제 조치의 약속은커녕 걸핏하면 날아와 사람을 주눅들게 하는 경고장과 해고통지의 남발을 재고해 달라는 청원에 대한 광산 측의 답변을 일언반구도 듣지 못한 상태에서, 다만 가까운 시일 안으로 광산 측과 노동조합과 한국인 광부들이 함께 대화할 수 있는 모임을 열 것을 보장하겠다는 임 노무관의 약속 하나 얻고, 에발트광산 한인자치회회장단은 기세 좋게 루르 탄광노조에 접수던 청원을 없었던 일로 하기로 한 것이다.
"여러분, 우리 3진은 파독광부로 선발되고도 세 해씩이나 기다리다 못해 해외개발공사로 쳐들어가 난동을 부렸던 사람들입니다. 차라리 선발이 안 되었으면 모르지만, 선발되고 기다리는 심정을 너무나 잘 아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시끄럽게 해서 지금 한국에서 기다리고 있는 백육십 명이 오지 못한다면 아마 우리는 그 사람들의 평생을 두고 원망의 대상이 될 겁니다. 광산 측에서도 가까운 시일 안으로 대화를 갖자고 하고 또 이 약속을 임 노무관께서 보증하신다고 하셔서, 연명으로 제출한 청원서도, 입갱 거부 투쟁 결의도 없었던 걸로 하기로 회장단에서 결정했습니다."
   최태영 부회장이 회의실에서 기다리고 있는 회원들에게 회장단 회의 결정사항을 보고하자, 구레나룻이 거뭇거뭇한 5진의 김진화가 회장단을 향해 눈을 지릅뜨고 삿대질을 해가며 볼멘소리를 내뱉었다.
"
제미 씨발, 그럴라면 뭣한다구 밤새도록 회의다 뭐다 하고 사람을 귀찮게 했당가? 밀어붙이지도 못하는 허룹숭이들이 뭣 빤다구 용을 썼냐구? 아 씨발, 아무리 허룹숭이기로서니 사나이들이 칼을 뺏으면 하다못해 무라도 베어야 쓸 것 아녀? 서독 올라구 기다리고 있는 놈들은 기다리고 있는 놈들이고, 시방 우리가 여차하면 보따리 싸게 생겼는디, 아 우리가 시방 남의 사정 봐서 내 가랭이 벌려주고 언걸먹을 형편이냐 이 말이여. 차라리 우리가 일을 더 크게 벌여서 그 사람들 못 오게 하는 게 그 사람들 도와주는 일인지도 몰라. 암 것도 모르고 와서 지금 우리처럼 당할려면 차리리 못 오는 게 잘되는 일 아녀? 그려? 안 그려?"
"
진정하세요. 김형! 김형의 말씀이 다 옳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의 처지로서는 일을 자꾸 크게 벌이는 것보다는 될 수 있으면 빠르고 조용하게 광산 측과 타협을 보는 것이 여러모로 유리하다는 노무관님의 권고가 일리가 있다고 판단해서 이를 받아들인 겁니다. 김형 말씀마따나 남의 사정 봐 주다가 언걸먹을 수는 없는 게 우리 형편이지만, 우리 형편 역시 마냥 버틸 수 있는 상황은 아니라 이 말입니다."
   오한규 부회장이 차분한 목소리로 설득하려 했으나 김진화는 오히려 화를 벌컥 내면서 벌떡 일어나 회장단과 임노무관을 향해 번갈아 손가락질해가며 왜장을 쳤다.
"
참말로 벙거지 시울 만지는 소리 하고 자빠졌네. 언제 한번 버티어 보기나 했간디, 버텨 보지도 않고 마냥 버틸 수 없다고 혀! 맥없이 혼자 섰다가 제풀에 까부러지는 것이 꼭 치마말기 내리면서 풀 죽어 버리는 고자 거시기 아녀 이건. 아나 타협, 타협 좋아하네, 타협 한답시구 이렇게 코푸렁이 처럼 제풀에 물러서는 놈들 뭣이 무섭다구 달라는 걸 주겄어? 줄줄이 해고장이나 주지 않으면 다행이여."
 

댓글목록

숲에서놀기님의 댓글

숲에서놀기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저는 Glück Auf란 표현을 한겨레님 글에서 처음 접했습니다. 그리고 며칠 전 박물관에서 Bergbau -규모가 엄청났던 그 박물관 지하 전체는 될 법한-에 대한 것을 살펴보고 왔어요. 갱도 입구에 Glück Auf가 적힌 팻말이 붙어 있더군요. 한겨레님 생각이 딱 떠오르더군요. 그래서 다른 데보다 더 관심 있게 둘러보았구요. 저는 그냥 구경만 하는데도 숨이 턱턱 막히고 언제쯤 밝은 빛이 비추는 곳으로 나올까, 싶었더랬어요, 죄송하게도.
이제 집으로 돌아왔으니 고대하던 글을 읽을 수 있어 마음이 설렙니다. 고맙습니다.

한겨레님의 댓글의 댓글

한겨레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Glück Auf ! 란 인사는 광산에서만 쓰는 말이니, 광산관계자가 아니면 모르는 것이 당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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