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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회   

  
한국 육군에는 주둔지 지명을 두고 지어낸 참언 같은 말들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구만리 같은 내 청춘 부평초처럼 떠돌다 인제 가면 언제 오나 가로리 가로리 원통해서 못살겠네!"라는 구절이 가장 유명하다.
70
년대까지만 해도 한국 육군 야전군 3군단 사령부 장교 관사가 있던 강원도 인제군 남면 부평리에서 버스나 군용트럭을 타고 군단사령부가 있는 구만리를 지나 첩첩산중으로 들어가면서 차례로 지나가게 되는 가로리, 인제읍, 원통리 등의 지명을 인용해서 3군단 최전방 오지로 전속 가는 군인들이 지어낸 신세타령이다.
성주가 육군 제2훈련소와 공병학교 과정을 마치고 배속명령을 받은 1102 야전공병단은 그런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공병단 본부에서 주특기에 따라 다시 전입명령을 받은 506 철교중대는 해발 860미터 고지 아래 깊숙한 산골짜기에 자리 잡고 있었다. 아침마다 기상 점호를 받으며 올려다보는 하늘이 사방의 산봉우리들로 막혀 담요만 하게 보이고, 이쪽 산등성이에서 저쪽 산등성이로 바지랑대 걸쳐놓고 빨래 널어도 되겠다 할 정도로 하늘이 빠하게 열린 이름 없는 골짜기여서 3군단 군인들은 그냥 '506 골짜기'라고 불러왔다. 506 골짜기에 봄이 오면 앞산 뒷산에 진달래꽃이 만발하고 뻐꾸기들이 이 산봉우리 저 산봉우리를 옮겨 다니며 종일 울어대다가 진달래가 지기 시작하면 철쭉꽃이 다투어 피어나 506 골짜기를 온통 꽃동네로 만들었다.
6.25 전란 때 7사단 소속으로 인제 한계에서 사단 병력이 거의 전멸하는 치열한 전투에서 간신히 살아남았다는 중대 인사계 박 상사는 해마다 진달래꽃이 피어나면 넋을 놓고 앞산을 바라보면서, "저 꽃 한 잎 한 잎이 모두 원통하게 죽어간 전우들이 이 산하에 뿌린 핏방울, 산봉우리마다 저토록 처절하게 울어대는 뻐꾸기들은 억울하게 죽어간 원혼들의 환생"이라고 중얼거리면서 혼자 소주잔을 기울이곤 했다.
진달래꽃도 지고 철쭉꽃도 시들기 시작하면서 위병소 앞 부대 진입로 양쪽으로 아카시아 꽃이 눈부시게 피어난 초여름에 천만뜻밖에도 영주가 그런 깊은 산골짜기를 찾아왔다. 위병의 전갈을 받고 서둘러 위병소로 내려간 성주 앞에 영주는 벌떼들이 윙윙거리는 아카시아 꽃 사잇길에 연빛 양산을 받쳐 들고 성숙한 여인으로 눈부시게 서 있었다.
세 해 전 온다 간다 말도 없이 자취를 감추었던 단발머리 소녀의 모습만 가슴속에 묻고 있었던 성주였기에 눈앞에 서 있는 눈부신 여인이 영주라고 알아보기까지는 한참이 걸렸다.
"
-아니? 영주야, 어떻게 여기를…"
허둥대는 성주를 그윽한 눈길로 쳐다보며 영주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 눈길에 애절한 그리움과 다시 만났다는 반가움이 서려 있었다.

"
한 선생님! 영주 양, 내가 모시고 왔어요. 자 우리 한 선생님 외출증 받아왔으니 우리 집으로 갑시다."
인사계 박 상사 부인이 웃음 가득한 얼굴로 위병소에서 나와 넋 잃은 듯 말문 막힌 채 서 있는 성주를 재촉했다. 일과 후 저녁 시간에 두 시간씩 부대 밖 박 상사 집에서 초등학교 6학년인 중대장의 딸과 5학년인 박 상사 아들의 서울 학교 진학을 위한 가정교사 역을 맡 성주를 부대 장교 부인들과 하사관 부인들은 '한 선생님'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서울 신당동이 친정인 박 상사 부인은 특히 성주에게 피붙이같이 살뜰한 정을 주면서 가끔 서울 가는 길에 명륜동에 는 성주어머니를 찾아가 언니야 동생이야 하며 지내는 처지여서 성주도 스스럼없이 '이모'라고 불렀다.
월남 파병 차출 특명이 떨어지면 탈영하는 사병이 나오던 무렵에 월남 파병 지원서를 낸 성주를 말리다 못해 서울에 연락, 어머니를 오게 해 끝내 파월 지원을 취소시킬 정도로 성주를 친조카처럼 여기고 있던 박 상사 내외이기에 성주대신 박 상사 부인이 중대본부에 들어가 외출증을 끊어와도 부대원 그 누구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
이모가 영주를 어떻게 알아서 부대까지 데리 왔어요?"
꿈에도 상상해 보지 못했던 엉뚱한 상황에 기가 막힌 성주가 비명에 가까운 목소리로 묻자 박 상사 부인은 재미있어 죽겠다는 표정으로 성주와 영주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며 대답했다.
"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이 있잖아. 영주 양이 우리 한 선생님을 지성으로 찾아다니다 보니 나를 만나 소원을 이루게 된 거지 뭘. 그런데 왜들 그러지? 몇 년 만에 그리던 사람들이 만났으면 남들 눈 때문에 포옹은 못 할 망정 손이라도 잡아 주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그제야 성주는 나갔던 정신이 돌아온 듯 영주의 손을 잡으며 나지막하게 말문을 열었다.
"
영주야, 정말 몰라볼 뻔했어. 떠날 때는 단발머리 소녀였는데, 어느새 어른이 됐네. 아주 못 만날 줄 알았는데, 이렇게 갑자기 내 앞에 나타나다니---"
"
오빠---"
비로소 성주가 손을 잡으며 다정하게 말을 건네자 영주는 양산을 내팽개치고 와락 성주를 끌어안으며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
울기는, 영주야, 자 그만 그쳐, 남들이 보잖아 "
등을 또닥거리며 달래는 성주의 정겨운 목소리에 더욱 자극을 받은 듯 영주는 더욱 서럽게 흐느꼈다.
"
오빠 잠깐만, 잠깐만 이대로---"
영주의 흐느낌이 진정되자 어깨를 감싸 안았던 손을 풀려고 하자 영주는 화들짝 놀라며 성주의 손을 잡았다.
"
우리 오빠 얼굴 좀 보자, 자나 깨나 보고 싶던 우리 성주 오빠 얼굴 얼마나 어른스러워졌는지 한번 자세히 보자"
영주는 눈물 자국 있는 얼굴 그대로 성주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두 손으로 성주의 두 뺨을 감쌌다가 귀도 만져보고 코도 만져보고 입술도 더듬으며 어쩔 줄을 몰랐.
"
, , 여기서는 그만 하구 어서 집으로 가자니까 그러네. 집에 가서 실컷 회포를 풀라"
영주에게서 둘의 관계를 대강 들어 아는 듯한 박 상사 부인이 재촉하는 바람에 두 사람은 손을 잡은 채 무엇엔가 떠밀리듯 벌떼가 윙윙거리는 눈부신 아카시아 꽃길을 따라 박 상사 집으로 향했다.
"
영주야,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말 한마디 없이 어느 날 훌쩍 사라지더니, 어떻게 내가 여기 있는 줄 알고 이 산골까지 이렇게 갑자기 찾아왔어? "
"
오빠, 나 지금 인제군청 옆에 있는 인제의원에 있어. 거기서 오늘 아침 진찰받으러 온 저 부인이 데리고 온 아들과 주고받는 말 가운데 오빠의 이름이 들리기에 허심 삼아 물었더니, 글쎄 서울 명륜동에 집이 있는 '한성주 상병'이 여기 이 산골짜기 부대에 있다는 거지 뭐야. 내가 애타게 찾고 있는 사람이라는 말을 듣고 저 부인이 자기 아들 가정교사하는 선생님이라고 반색을 하면서 부대까지 안내해 준다고 해서 따라왔어."
"
그럼 날 찾으려고 인제의원에 취직했다는 거야?"
"
그때는 어머니께서 다시는 눈앞에 얼씬거리지 말라고 엄포를 놓으시는 바람에 오빠를 잊겠다고 결심하고 말없이 떠났지만, 하루도 못 가서 오빠를 잊을 수가 없다는 걸 알았어. 오빠는 나 같은 건 염두에 두지도 않고 없어졌어도 찾지도 않았지만 나는 늘 오빠네 집 근처를 서성거리면서 먼발치에서나마 오빠 소식을 들어야 마음이 놓이고 잠을 편하게 잘 수 있었어. 그러다가 오빠가 사병으로 입대했다는 소식을 들었지. 오빠는 모르겠지만 나 논산훈련소에도 갔었어. 훈련병은 면회가 안 된다고 해서 오빠를 만나지 못하고 돌아오는 열차 안에서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 울면서도 오빠가 군대에 있는 동안은 어머니 눈치 보지 않고 오빠를 자주 찾아가 만날 수 있다는 생각으로 꿈이 부풀어 오르기도 했어.
오빠가 김해 공병학교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병원에 사정사정해 이틀 말미를 받아서 달려갔는데 오빠는 바로 하루 전에 춘천 3 보충대로 떠났더라, 헛걸음하고 돌아오면서 어찌나 야속하던지 하늘을 원망하면서 펑펑 울었지. 남의 병원에서 일하는 처지니 마음대로 짬을 낼 수도 없는데, 겨우겨우 짬을 내어 또 춘천 3 보충대라는 델 찾아가 물으니 말도 못 붙이게 하면서 아예 이상한 여자 취급을 당했어. 하긴 지금 내가 생각해도 누이동생이라 하면서 그렇게 군번도 소속도 주소도 없이 이름만 내세우면서 찾는다는 게 참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는데, 그때는 그냥 모르쇠로 고개를 가로젓는 그 군인들이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어---. 도저히 안 되겠기에 마음을 다잡으면서 명륜동 어머니를 찾아가 물었지. 다시는 오빠 앞에 얼씬거리지 말라고 하셨는데도 감히 또 찾아와서 오빠 있는 곳을 묻는 내가 못마땅하셔서 건성으로 '강원도 인제에 있다더라.' 하는 말 한마디 듣고 버스로 여덟 시간 걸리는 인제 땅을 석 달 걸러 한 번씩 네 번이나 다녀갔어.
골짜기 부대 위병소마다, 버스나 길에서 만나는 군인마다, '한성주'라는 이름 석 자 물으며 한 해가 넘게 인제 땅을 뒤지고 돌아다니다가 안 되겠다 싶어서, 버스정류장 거리에서 올려다보이는 군청 옆 인제의원에 들어가 떼를 썼지. 사연이 있어서 그러니 한 일 년만 간호원으로 써 달라. 그랬더니 신원을 증명할 수 있게 먼저 있던 병원 원장의 추천서를 갖고 올 수 있느냐고 물어. 그 길로 되짚어 서울 올라가서 원장 선생님 사정을 말씀드렸어. 내가 오빠 찾으려고 짬만 나면 강원도행 버스를 타는 속내를 알고 있던 원장선생님이 추천서를 써 주면서 손수 인제의원 원장에게 전화까지 해 주셨어. 오빠 찾으면 다시 돌아오라 하시면서."
"
이 바보야, 날 찾아서 어쩌려고 그렇게 애를 쓰고 다녔어?"
자초지종을 듣고 있던 성주가 기가 막혀 꾸짖듯이 말을 끊어도 영주는 말을 멈추지 않고 오히려 성주의 팔에 애틋하게 매달려 왔다. 그 애틋한 몸짓에서 주위를 감싸고 있는 아카시아 꽃 향기와는 또 다른 성숙한 여인의 야릇한 체취가 풍겨와 성주를 당황하게 했지만 싫지는 않았다. 귀밑에 솜털이 보송보송했던 열다섯 살 배기 소녀가 어느 사이 열아홉 살 성숙한 여인이 되어 '나 당신이 그리워 이렇게 힘들고 먼 길을 헤매 돌아 찾아왔노라'고 하소연하는 영주의 절절한 그리움이 가슴을 두드려 성주는 처음으로 영주를 여인으로 안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
하늘이 도우셨는지 마침 인제의원에서도 간호원이 필요하던 참이라 경험도 있고 또 서울 병원에서 원장이 추천하고 부탁도 하는 나를 하루라도 빨리 내려오라고 해서 옷 가방 하나 들고 기약 없는 먼 길을 왔는데, 글쎄 온 지 한 달 만에 오빠를 만나게 됐지 뭐야. 이런 걸 두고 천우신조라 하는 건가 봐, 천우신조? 아니, 아니지, 이런 건 숙명이라 할 꺼야, 그렇지? 오빠! "

"
얘길 듣자니까 정말 예 사연이 아니네, 영주양, 그럼 우리 한 선생님 찾으려고 꼬박 두 해를 논산으로, 김해로, 춘천으로, 인제로 헤매고 다녔단 말이잖아---"
앞장서 가고 있던 박 상사 부인이 영주의 하소연을 다 귀담아들은 듯 돌아서서 말참견을 하고 나서자 영주는 더 신이 나서 이른 봄 들녘 끝 푸른 하늘을 날아오르는 종달새 마냥 끝없이 재잘댔다.
"
왜 아니에요, 그래도 이렇게 오빠를 만나니까 찾아 헤맸던 일들이 모두 까맣게 사라지네요. 두 해가 이틀쯤 지난 것 같기도 하고, 어때요? 마치 무슨 영화 의 한 장면 같지 않아요? 수 천 리 길을 찾아온 여인이 사랑하는 이를 만나 아카시아 꽃잎이 흰 눈처럼 휘날리는 눈부신 꽃길을 팔짱을 끼고 걷고 있는 이 광경, ! 기뻐라! ! 행복해라!"
영주는 성주의 팔을 놓고 떨어져 내리는 아카시아 꽃잎을 두 손 벌려 받으며 초여름 산기슭에 엄마 따라 첫나들이 나온 아기 노루처럼 이리저리 깡충거렸다.
 

초롱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012-11-29 (목) 08:10 6년전
매우 감명 깊고 기쁜 마음으로 단숨에 읽었어요. 사람이 왜 글을 써야 하는지, 왜 글을 읽어야 하는지 다시 한번 절절하게 생각하게 됩니다. 이렇게 소중하고 좋은 소설을 접하게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애독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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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012-11-29 (목) 10:38 6년전
지루할 수도 있는 평범한 이야기를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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