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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겨레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조회 1,661회 작성일 12-12-22 21:20

본문

 
         열네 번 째 마당: 또 하나의 고향

늦은 아침을 먹고 오복과 함께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초인종이 울렸다. 문을 열어보니 문앞에 웬 여자애가 방실방실 웃는 얼굴로 서 있었다. 누구냐고 물으니까 아래층 할머니의 손녀 페트라라고 하면서, 윤기-준기와 놀고 싶어서 왔는데 들어가도 되느냐고 물었다. 그렇지 않아도 독일말을 배워야 하는데 잘됐다 싶어 그러라고 했더니, 방문을 열고 내다보는 윤기와 준기를 안으로 떠밀며 조금도 거리낌 없이 아이들 방으로 들어갔다.
누군가 싶어 부엌에서 얼굴을 내밀고 있던 오복도 눈치로 알아들었는지, “참 별일이야, 서독 여자애들은 수줍음도 없는 모양이지---.“ 하면서 하던 설거지를 계속했다. 잠시 후 페트라가 두 아이를 데리고 방에서 나왔다. 어딜 가느냐고 윤기에게 물으니, 페트라가 자전거를 타고 동물공원에 가자고 했다. 성주가 페트라에게 얘들은 아직 자전거가 없다고 했더니, “헤르 한, 걱정 마세요! 제가 오빠와 함께 윤기와 준기를 하나씩 자전거 뒤에 태우고 갔다 오겠습니다. 허락하시는 거죠?” 하고 답했다. 성주가 고개를 끄덕이자, 페트라는 신이 나서 두 아이 손을 양손에 하나씩 잡고 방문을 나섰다.
재미있게 놀다 와라.“
눈치를 살피는 두 아이에게 오복이 웃음을 보이며 어서 나가라는 손짓을 하자, 아이들은 그제야 가벼운 발걸음으로 페트라를 따라나섰다. 창문으로 내다보니 린데만 부인의 딸과 사위가 사는, 길 건넛집 앞에서 페트라의 오빠인 듯한 남자애가 윤기를 자전거 뒤에 태우고, 페트라의 자전거 뒤에는 준기가 타고 있었다. 창문을 열고 성주와 오복이 손을 흔드니, 네 아이는 함께 손을 마주 흔들며 떠났다.
참 좋은 사람들이고, 좋은 애들이네. 이름이 뭐라구? 피터갈?“
하하하~피터갈? 그렇구나! 그렇게도 들릴 수가 있겠구나---, 피터갈이 아니고 페트라야.“
성주가 폭소를 터뜨리며 바로 잡아주자 오복도 따라 웃었다.
피터갈인지, 페트라인지, 그 애 몇 살이나 됐을까?“
글쎄 , 열두어 살 돼 보이던데, 그건 왜?“
애들하구 오래 친구가 되어줄까 해서---.“
곧 친구도 많이 생기고, 말도 서독 애들하고 똑같이 하게 될 터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그건 그렇고, 아이들 자전거부터 사 주어야 하겠네, 저렇게 어울리려면.“
자전거도 못 타는데---?“
아이들은 금방 배워. 이참에 당신도 자전거 배우지?“
? 난 싫어, 무서워.“
무섭기는, 시장도 보고, 아이들하고 피크닉도 가고 하려면 꼭 배워야 해. 자동차 사려면 한참 있어야 하니까 .“
그럼 배워볼까.“

아이들이 즐거운 표정으로 돌아왔다.
엄마, 밥 줘. 페트라가 밥 먹고 또 놀러 가제.“
잘 놀다 왔어? 동물공원에는 뭐가 있든?“
커다란 호랑이가 열 마리도 더 있어, 독수리도 있고, 여우도 있고, 또 엄마 노루와 아기노루도 있고.“
아기노루가 있다는 윤기의 말에 성주는 순간적으로 영주가 떠올랐지만 머리를 흔들며 애써 영주의 모습을 지워버리고 준기에게 물었다.
밥 먹고 어디 간대니?“
볼프강 형이 자기 집에서 놀재”
그래? 그러면 남의 집에서 놀 때엔 너무 떠들지 말고 얌전하게 놀아야 해.“
오복이 조심스러운지 아이들을 단속했다. 성주는 아이들이 반나절 만에 페트라, 볼프강 하는 독일어 발음이 자기보다 훨씬 자연스러워졌다는 사실에 놀랐고, 독일말을 하나도 못하는 아이들이 어떻게 페트라 남매와 의사소통을 했는지 신기하기만 했다.

다음날, 연수원에서 돌아와 아이들과 함께 저녁밥 상에 앉으니 오복이 쇠고기를 다져 넣은 미역국을 밥상에 내놓았다.
웬 쇠고기를, 당신 오늘 혼자 시장 봤어?“
성주의 묻는 말에는 대답을 하지 않고 오복은 기분 좋은 얼굴로 말했다.
아무래도 당신, 마리아 누님한테 무슨 선물 하나 크게 해야 하겠어.“
? 무슨 일 있었어?“
오늘 낮에 누님이 차를 갖고 와서, 나 하고 아이들 여권 갖고 아이들 데리고 나오라는 거야. 아이들 여권이야 내 여권에 동반자로 기재되어 있으니까 그걸 들고 나갔더니, 아이들은 바바라하고 함께 놀고 있으라고 자기 집에다 내려놓고, 나만 시청으로 데리고 가서 아마 주민등록 같은 걸 하는 모양이야. 그리고 여권 비자 난에 한국에서 찍어준 삼 개월 여행비자를 지우고 일 년 체류 비자로 새로 찍어주면서, 당신한테 전해주라고 누님이 쪽지에 무얼 써서 주었는데, 밥 먹고나서 읽어봐. 그리고 또 차에 태우더니 시가지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있는 알 카우프라는 큰 백화점으로 가서, 글쎄 나한테 선물 할 테니 옷을 하나 고르라는 거야. 한국에서 가져온 옷이 많아서 필요 없다고 손짓 발짓으로 사양해도 막무가내로 하나 고르라고 하도 재촉하는 바람에 추우면 입으려고 앙골라 스웨터 하나 골라서 선물로 받았지 뭐야. 그리고는 또 시장 달구지에 쇠고기 한 덩어리, 아이들 잘 먹는 거라고 병에 들어 있는 소시지 두 병, 사과, 바나나 등을 담더라구. 난 누님네 시장 보는 줄 알았더니, 글쎄 우리 주려고 산 거라며 집 앞에서 들려주는데, 미안해서 죽을 뻔했어. 정말 친 올케 같았어.“
오복은 미역국물 속의 쇠고기를 골라 아이들 국그릇에 더 넣어주며 마리아가 다녀간 이야기를 마쳤다.
큰일 났군, 계속 신세만 지게 되니 이를 어떻게 갚지? 이번 주말시험에는 꼭 일등을 해야겠네. 그래야 반나절 말미를 얻어 금요일에 시장을 볼 수 있으니, 당신 오늘 갔었다는 알 카우프에 가서 한번 선물을 골라보자고.“
그 백화점이 크긴 엄청나게 크더라구. 다 돌아보려면 두 시간도 더 걸릴 것 같애.“
그래? 그렇게 커?“

성주는 밥을 다 먹고 나서 마리아의 쪽지를 받아 읽었다.
성주, 네가 낮시간이 없을 것 같아서, 오늘 오복과 함께 시청에 가서 오복이 서명하고 너희 식구들 주민등록을 마쳤다. 이제 확실하게 레데의 시민이 된 거야. 그리고 주민등록 하면서 보니까 오복의 비자가 삼 개월짜리 여행비자로 되어 있기에 한국 여권의 유효기간인 올해 십이월 초까지 체류 비자로 갱신했다. 이사 오던 날 우리 집에서 만난 적이 있는 주민등록과의 스테판 말로는, 한국에서 발급한 유효기간 만료 한달 전에 한국대사관에 가서 유효기간을 이삼 년 연장해 갖고 오면, 바로 체류 비자를 더 연장해 주겠다고 하더라. 잊지 마라, 물론 그때 가서 이 누나가 또 알려주겠지만. 추신: 오복이 참 예쁘고 귀엽다. 넌 행운아다.
 
마리아의 쪽지를 읽으며 우리말로 오복에게 들려주다가 성주는 마지막 구절에서 쿡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뭔데 웃어? 뭐야?“
오복이 궁금해하며 편지를 드려다 보았다.
여기 맨 마지막 줄에, ‘오복이 참 예쁘고 귀엽다. 넌 행운아다.‘ 이렇게 쓰여 있네.“
누님이 사람 볼 줄 아네.“
오복은 으쓱해서 의기양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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