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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 녹색의 세계권력 -2. 70년대 현대환경운동의 개벽

페이지 정보

작성자 자유로니 이름으로 검색 조회 2,120회 작성일 02-03-14 03:26

본문

작성일 : 1999/05/03 조회수 : 159 , 줄수 : 19



2. 70년대 현대환경운동의 개벽(Aufbruch)



사민당과 자민당이 연합정권을 수립한 1969년에 가서야 비로소 환경운동에 도약의 계기가 찾아온다. 자민당이 이끄는 연방정부 내무부소속의 한 관리는 처음으로 "환경보호"(Umweltschutz)라는 말을 만들어 사용한다. "유럽 자연보호의 해"이기도 했던 다음해인 1970년은 현대적 환경운동이 탄생한 해로서 기억된다.



1961년 이미 "루르공업지역의 상공에 푸른하늘"을 약속한 바 있는 Willy Brandt 연방총리는 동물학교수이자 TV를 통한 계몽가인 Bernhard Grzimek를 정부의 최초의 자연보호사절로 임명한다. 1970년 가을에는 내무장관 Hans-Dietrich Genscher의 주도아래 "즉각적 환경보호 프로그램"(Sofortprogramm Umweltschutz)를 내 놓는다.



국민들사이에 점차로 환경문제에 대한 의식과 문제해결의지가 싹트기 시작한다. 1968년의 반권위주의의 반역자들에게 고무되어 점차 많은 시민발의단체들이 생겨난다. 이 단체들은 프랑크푸르트의 Westend의 투기, 공항소음, 고속도로계획과 원자력발전소건설계획에 반대한다.



몇년후에 자르주와 헤센주의 환경부장관이 된 Josef("Jo") Leinen과 Joseph("Joschka") Fischer와 같이 정치적으로 복무하는 운동가들은 환경운동에 새로운 모습을 가져온다. 이들과 같은 적극적인 시민들(Aktivbuerger)은 1972년 환경보호 시민발의 연방연뱅(BBU)를 창설한다. 이 단체는 자기들의 지역적인 이해관계때문에 생겨난 지역행동단체들을 서로 연결하고 정치화시킨다.



같은 해 72년에 로마클럽은 "성장의 한계"라는 환경강령을 발간한다. 그 메시지는 간과할 수 없는 것이었다. 서방국가경제를 비틀거리게 하고 서독이 자동차없는 일요일을 제창하는 계기가 된 73년 석유파동은 지구의 부존자원이 실제로 제한된 것이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런 불길한 징조를 보면서 전통적인 자연보호운동은 자기변모를 시작한다. 그때까지 독일의 자연보호권에서는 보수적인 승마객, 낚시꾼, 사냥꾼, 요트객, 고양이와 조류애호가들이 목에 힘을 주어왔다. 서로 분열되어 있는 이들 자연의 이용자들은 새로운 뜨거운 테마인 환경기술, 교통정책과 원자력에너지에 대해서는 도무지 뭘 어찌할 바를 모르던 사람들이었다.



왼쪽부터 Grzimek(1970), Jungk(1990), Fischer70년대 중반에 5명의 유명한 독일인들은 고전적인 자연보호와 현대적인 환경보호를 하나로 묶어세우는데 성공한다. 투쟁적인 TV 동물보호가 Horst Stern, 바이에른의 자연보호선구자  Hubert Weilzierl, 회색거위 연구가 Konrad Lorenz, 원자력비판가 Robert Jungk와 빌리 브란트가 임명한 인기있는 자연보호사절 Grzimek는 1795.7.20  바이에른의 Marktheidenfeld에 모여 "환경보호와 자연보호를 위한 독일연맹"(Bund fuer Umwelt und Naturschutz Deutschland, BUND)를 창설한다.



면모를 쇄신한 이 환경운동은 이탈리아의 Seveso(1976), 함부르크의 Boehringer Werken(1979)에서 벌어진 것과 같은 디옥신 재앙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더욱 힘을 얻었고 특히 원자력에 대한 점증하는 두려움이 큰 자극이 되었다.  "앉아서 방사능을 쐬기보다는 기꺼이 능동적이고자 하는"(lieber aktiv als radioaktiv) 수만의 시민들은 Wyhl, Brokdorf, Kalkar와 Gorleben에서 시위를 벌였다. 처음에는 헬리콥터와 물대포로 대응하던 니더작센의 기민당소속 주총리 Ernst Albrecht는 1979년 마침내 지역항의시위에 굴복해서 시민 대다수가 원자력시설의 필연성과 안정성에 대해 확신하지 않는한 어떤 원자력재가공시설(Wiederaufarbeitungsanlage, WAA)도 짓지 않겠다고 발표한다.



몇년후에 WAA공사는 바이에른주의 Wackersdorf에서도 실패를 경험한다. 플루토니움경제의 WAA광기(WAAhnsinn)에 반대한 시민항의는 뻣뻣하기로 소문난 기사당주정부조차 무릎을 꿇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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