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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역사에쎄이 : 이순신 장군의 戰死에 의문을 제기한다

페이지 정보

작성자 교포신문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조회 9,072회 작성일 02-09-29 15:51

본문

장군의 죽음은 이미 작정된 것

"세상이 말하기를 이순신의 공로가 클수록 살아남기 어려움을 스스로 알았으며, 드디어 싸움에서 자기의 몸을 버렸다고 하였다. 장군의 죽음은 이미 작정한 것이었다고들 한다. 당시에 그가 처한 환경과 처지를 보면 , 이런 말에 가깝다. 오 슬프구나 ! "
  이 글은 조선 숙종임금때의 영의정 최석만이  자신의 문집에 남겨 놓은 내용이다. 최석만은 병자호란 때 외롭게 청나라와의 화의를 주장하여 나라의 위기를 구한 명신 최명길의 손자로서 임진왜란 이후 조정대신들 사이에 있었던 권력투쟁의 실상을 한탄하는 영의정 '이 여'라는 대신의 논평기록을 옮긴다고 하면서 "당시의 정치상황으로 보아서 이순신 자신이 스스로 죽어지기를 원하여 엄동설한의 전투 지휘 중임에도 불구하고 투구와 갑옷을 벗고 왜구들의 조총탄환을 가슴으로 기다린 심정을 이해할 수 있다."고 안타까워 했다.    또 그는 이와같이 인재를 억울하게 희생시키는 사건을 유발시키는 정치의 타락이 민족역사에 얼마나 큰 걸림돌이 되는가를 직시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우리 민족의 성웅(聖雄) 이순신 장군은 왜적이 철수하는 마지막 해전 노량전투를 승리로 이끌고나서 마지막 순간에 장렬하게 전사했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 조정은 장군의 전사통보를 받고 선무일등공신 '충무공'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우의정으로 추증했지만, 2백년 후의 임금인 정조는 다시 영의정으로 추증하고  비문까지 내려 충무공의 혼령을 위로했다. 실학에 관심을 갖고 썩어빠진 양반정치의 근본적인 개혁을 통해 국력을 신장시켜 세계로 뻗어나가려는 꿈을 꾸었던 정조는  충무공 이순신의 전사가 단순히 치열한 전투 중에 일어난 불상사가 아님을 파악했던 것이다.

  전후상황이 전사로 보기 어려워

  선조 31년(AD 1598) 11월 19일은 임진왜란을 일으킨 전범 풍신수길이 죽은 후였으며,왜적들은 철군명령을 받아 이미 대부분의 함대가 빠져나간 상태였다.이때 이순신 같은 명장이 적군이 후퇴하는지 철군하는지를 구별하지 못했다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또 충무공이 전사했다고 하는 동짓달 열아흐렛날은 바다바람에 살을 에이는 엄동설한이었으며 전투가 치열해 갑옷을 벗고 투구까지 벗어 버릴 상황은 아니었다. 더구나 충무공 자신의 기록에 의하면 잠을 잘 때에도 북을 베고 자면서 언제라도 지휘를 할 수 있는 태세를 풀어본 적이 없으며 잠자리에서도 융복(전투복)을 벗어본 적이 없다라고 했는데, 유독 이날만은 투구를 벗고 갑옷을 벗어던진 채 가슴으로 조총탄환을 맞이했단 말인가?
  평소에 이순신 장군은 척후를 계속 파견하여 적의 동태와 여론을 수집하고 대국

적인 견지에서의 전투상황을 냉철하게 분석하는데 게으르지 않은 현명한 지휘관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렇다면 수군의 폐지명령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 당시 조정의 돌아가는 형편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주의할 점은, 전투중인 함대 사령관 주변에 아들과 조카 이완장군만 있었으며 통제사의 죽음을 목격한 병사가 하나도 없었다는 점이다. 또 전투 중에는 전사를 숨겼다 하더라도 장례를 80일간이나 치르지 않았다는 점이다. 기록에 의하면 80일만에 가묘(假墓)를 썼다가 15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야 이장을 했다고 한다. 이 점을 두고 후일의 학자들 가운데서는 '전사일로부터 80일이 지나서 장사지냈다는 것은 전사를 위장한 후 전사사실을 증거하기 위해 임시의 묘를 만들었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다. 또 당시의 상례로 보아 15년만에 이장을 하였다는 것은 더욱 말이 안된다는 것이다.    
  가묘(假墓) 쓰고 15년만에 이장

  결국 이순신 장군은 왜란이 끝난 후 당쟁으로 인하여 자신에게 닥쳐 올 화(禍)를 예견하고 전사를 가장, 최소한 15년을 초야에 숨어서 살았다는 추측을 가능하게 하는 역사기록들이다.
  왜란이 끝난 후 조정의 논공행상으로 야기된 당쟁으로 인해 김덕령 장군을 비롯한 수많은 의병대장들이 억울하게 역적으로 몰려 희생 당한 사실만 보아도 이순신 장군의 전사가 위장이라는 가설이  설득력이 있다.
  어떤 이들은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것 보다는 미화되어 온 '충무공의 전사(戰死)'를 묵인하는 것이 더 좋다고 역설할 것이다. 물론 장렬하게 전사를 하는 것이 죽음으로 위장을 하고 살아남는 것 보다는 더 위인전기의 가치가 있을 것이며 군인정신의 표상에도 도움이 된다. 그러나 만약에 전사의 위험을 무릅쓰고 싸워야 할 명분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죽음을 무릅쓴 전투를 벌여 어리석은 죽음을 자초했다고 한다면 오히려 억울한 죽음을 피하기 위해 전사로 위장하고 살아남은 것에 비해 더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위대한 성웅 이순신장군의 당시 심정을 헤아리고 정치상황의 희생양이 되어 두 번씩이나 사형에 처해질 뻔 했으면서도 그때마다 백의종군으로 종사하면서 애국애족의 험로를 외롭게 걸어간 장군의 한(恨)을 풀어주어야 한다고 믿는 마음에서 당시 기록들의 의문점을 제기해 보는 것이다.
  임진왜란에서도 우리나라에 상륙한 왜적의 전투력을 사실상 무력하게 만든 최대의 전공을 세웠으면서도 왜적과 내통했다는 올가미에 걸려 사형선고를 받기까지 한 이순신장군의 한(恨)은, 그가 비록 지금은 민족의 성웅이라고 불리우고 있어도 아직 해원(解寃)이 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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