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동포 미디어 베를린리포트
커뮤니티 새아리 유학마당 독어마당
커뮤니티
자유투고
생활문답
벼룩시장
구인구직
행사알림
먹거리
비어가든
갤러리
유학마당
유학문답
교육소식
유학전후
유학FAQ
유학일기
독어마당
독어문답
독어강좌
독어유머
독어용례
독어얘기
기타
독일개관
파독50년
독일와인
나지라기
관광화보
현재접속
378명
[독일개관]독일에 관련된 유용한 정보를 이곳에 실어 주시기 바랍니다. 이 게시판은 독일관련 데이타베이스를 구축하기 위한 곳입니다. 그러니 1회용도의 글(구인,질문 등)은 정보의 가치가 없으므로 이곳에 올리시면 안됩니다.

역사 독일, 11월 9일에 얽힌 역사의 아이러니

페이지 정보

작성자 고스라니이름으로 검색 조회 7,593회 작성일 02-03-11 08:46

본문

독일, 11월 9일에 얽힌 역사의 아이러니



김태희 thcomm@hanmail.net




올해 11월9일은 베를린 장벽 붕괴 12주년이다. 그러나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 이전까지만 해도 11월 9일은 독일인들에게는 잊고 싶은 악몽의 날을 상징했다. 1938년 그 날은 나치의 유태인 박해가 충격적으로 본격화된 소위 '수정의 밤'인 것이다. 그러나 이 외에도 독일 현대사에서 11월 9일은 또다른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1918년 11월 9일, 독일의 제2제국이 멸망하고 최초의 공화국이 수립된다. 그리고 그로부터 5년 후인 1923년 11월 9일에는 히틀러의 쿠데타가 일어나는데 이 쿠데타는 비록 실패로 끝났으나 독일의 나치즘이 본격 부상하는 계기가 된다.





독일에 있어서 11월9일은 이상한 날이다. 이 날엔 독일 역사의 환희(바이마르 공화국 선포, 베를린 장벽 붕괴)와 비극(히틀러 쿠데타, 유태인 박해)이 교차하고, '광기와 우연'이 되풀이된다. 다음은 11월 9일이라는, 일년 가운데 단 한 날짜로 엮어짠 독일 역사의 연대기이다.





1918년 11월 9일, 독일 최초의 공화국 성립





독일이 1차대전에서 패색이 짙어가던 1918년 11월 9일, 독일에서는 군주제가 종말을 고했다. 베를린에서 대규모 봉기가 일어나자, 막스 폰 바덴 제국수상은 독일제국의 '마지막 황제' 빌헬름 2세의 퇴위를 선언하고, 사회민주당의 프리드리히 에버트(후에 초대 대통령 역임)에게 정부 조각을 위촉한다. 이 날 사회민주당의 필립 샤이데만 의원이 베를린 제국의사당 발코니에서 공화국을 선포, 독일 최초의

공화국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이 공화국은 다음해 바이마르에서 첫 의회가 열려 '바이마르 공화국'으로 불리게 되는데, 괴테와 실러가 활동했던 고전주의의 도시 바이마르에서 첫 의회를 연 것은 이 공화국이 '정치인과 군인의 나라'가 아니라 '시인과 사상가의 나라'(이 말은 독일인들이 독일을 칭할 때 즐겨 쓰는 표현이다)가 될 것임을 선언하고자 하는 의도였다고 한다. 독일은 공화국 성립 이틀만인 11월 11일 전쟁의 휴전을 선언한다. 위의 사진은 당시 베를린 군중들 앞에서 연설하는 독일 공산당의 칼 립크네히트. 그는 사회민주당의 에버트와 함께 새로운 공화국을 이끌었으나 1919년 1월 로자 룩셈부르크와 함께 암살되는 비참한 최후를 마친다.



훗날 나치는 1차대전 휴전에 조인했던 사민주의자들을 '11월의 범죄자'라고 불렀다. 요아힘 페스트의 히틀러 전기에 의하면 히틀러는 혁명이 일어나 호엔촐레른 왕가가 붕괴하고 공화국이 선포된 뉴스를 육군 병원에 입원한 상태에서 들었다고 한다. 히틀러는 후에 이를 "내 인생의 가장 끔찍한 소식"이라고 말했다. 히틀러는 [나의 투쟁]에서 이 날에 대해 "나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더 이상 견디는 것은 불가능했다. 눈 주변이 다시 캄캄해져서 나는 더듬고 비틀거리며 침대로 돌아와서 내 자리에 몸을 던졌다. 타는 듯한 머리를 이불 속에 틀어박았다. 어머니의 무덤에 섰던 날 이후로 나는 운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 순간 울지 않을 수가 없었다"고 회고했다.



이로부터 나치가 바이마르 공화국에 대해 가지는 적대감을 능히 헤아려 볼 수 있다. 1919년의 11월 혁명은 역설적으로 히틀러에게 확고한 반혁명 의식을 심어주었다. 이전까지 건축가, 화가, 군인 등을 희망하던 서른 살 안팎의 젊은 히틀러는 자신이 정치가가 되려고 결심한 것이 바로 1918년 11월 9일 때문이었다고 [나의 투쟁]에서 밝히고 있다. 그후 그는 극우정당인 독일 노동자당에 참여해 발군의 연설 솜씨를 발휘하면서 단번에 지도적 위치로 뛰어오른다.



1923년 11월 9월, 히틀러 쿠데타와 [나의 투쟁]




그리고 그로부터 5년 후인 1923년 바로 11월 9일에 히틀러는 뮌헨에서 쿠데타를 일으켰다. 뮌헨의 육군장관실을 점거하고 뮌헨 시장을 체포한 히틀러는 이날 "나는 5년 전 육군병원에서 눈먼 병신의 몸으로 자신에게 맹세하였던 일을 이제 실현할 것입니다. 11월의 배신자들이 땅에 쓰러지기까지, 현재의 비참한 독일의 폐허에서 권력과 위대함, 자유와 장엄함의 독일이 부활해 일어나기까지 쉬지 않고 일하겠습니다. 아멘!"이라고 연설했다. 그리고 "1918년 11월 9일 국가반역 주모자들에게 오늘 날짜로 추방을 선언하고" 그들을 "죽여서든 산 채로든 민족국가 정부에 양도하는 것"을 하나의 의무로서 요구했다.




이 쿠데타는 경찰의 진압에 의해 실패로 돌아갔지만, 전기 작가 요아힘 페스트는 "11월 9일의 실패한 쿠데타는 히틀러의 생애에서 결정적인 한 획을 긋는 것이었다. 그는 수업시절을 끝낸 것이다 ... 그것이야말로 히틀러의 정치입문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히틀러는 쿠데타 실패로 1년 간 감옥생활을 하면서, 후에 유태인 학살의 이론적 토대가 되는 [나의 투쟁]을 집필했다. 히틀러는 이 쿠데타를 계기로 본격적인 반유태주의를 내건 게르만 민족의 진정한 지도자이자 순교자로 다시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뮌헨 쿠데타 후 10년이 지난 1933년 히틀러는 정권을 장악하고 제3제국을 선포했다.




1938년 11월 9일, '제국 수정의 밤'



그리고 또 하나의 무시무시한 11월 9일이 있다. 정권 장악 후 5년이 지난 1938년 히틀러는 뮌헨협정을 통해 체코슬로바키아의 수테텐을 지역 점령했다. 그는 이를 영국과 프랑스 등 강대국들로부터 승인받았지만, 이에 그치지 않고 프라하와 바르샤바 등의 침공을 호시탐탐 노리면서 초조해 하고 있었다. 집권 당시부터 대대적인 반유태인 정책을 펼쳐오던 히틀러는 독일 국민들을 전쟁으로 몰아가기 위한 심리적 동원 방법의 하나로 반유태주의를 이용하기로 했다. 이를 진두 지휘한 것은 나치 선전장관 괴벨스였다.



이해 11월초 파리 주재 독일 대사관의 한 서기관이 17세의 유태인 망명자에게 살해된 사건이 발생했는데, 히틀러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포괄적인 반유대주의 선전을 펼쳐나갔다. 그는 이 사건을 '세계 유태주의'의 음모로 돌렸고, 각급 학교와 기업체에서 거대한 장례식, 베토벤 음악, 선동적 애도 등으로 이루어진 행사를 펼쳐나갔다. 그리고 나치 돌격대가 마지막 역할을 맡았다. 1938년 11월 9일 저녁 나치 당원들과 돌격대원이 앞장서고 평범한 독일 시민들까지도 합세해 손에 손에 횃불과 벽돌 조각과 몽둥이를 들고 유태인 사냥에 나섰다.





나치는 스스로 이 날에 '제국 수정의 밤(Reichskristallnacht)'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붙였다. 산산히 부서져서 거리에 널린 유태인 상점의 유리조각들이 수정처럼 빛났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 붙였다고 하니, 끔찍하지 않은가. 나치의 그로테스크한, 변태적인 시적 재능이. (영어로는 Night of Brocken Glasses라고도 한다.)



이 날 저녁에만 독일 전역에서 2백여 유태교 회당과 유태인 묘지, 수천개의 유태인 주택과 상점이 파괴되고 불탔다. 3만명이 체포되고 이날 최소한 91명이 살해되었다. 대다수의 독일 국민들은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게다가 유태인은 '자신 때문에 일어난 이 손해'들을 배상하기 위해 11억 제국마르크를 지불해야 했다. 이것이 또다른 11월 9일, 즉 '유태인 대박해의 밤(Pogromnacht: Pogrom은 러시아어로 박해를 의미)'이다.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 붕괴를 이뤄낸 한 마디 "즉시"



독일은 자신의 오만의 대가로 그동안 2차대전 패전과 분단의 쓰라린 고통을 맛보았다. 그러나 오랜 분단의 세월을 보내던 독일에도 1980년대 말 냉전의 약화와 함께 통일의 시기가 무르익었고 이는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 붕괴로 이어졌다. 그런데 이와 관련해서는 재미있는 사연이 있다. 한마디로 이 날 장벽 붕괴는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우발적인 사건이었으며 이 사건은 동독 정치국원이자 정치국 대변인이던 귄터 샤보브스키의 말 실수 때문에 일어났던 것이다.



1989년 11월 9일 샤보브스키는 에곤 크렌츠 동독 공산당 서기장으로부터 '새로운 여행 규정'을 담은 용지를 받는다. 크렌츠 서기장은 아직 내용을 파악하지 못한 샤보브스키에게 "이걸 알리시오. 엄청난 센세이션이 될거요"라고 말한다. 샤보브스키는 이 날 저녁 전세계 기자들과의 기자회견을 준비하면서, 이 여행 규정에 대해서는 회견 막바지에 알리기로 생각했다. 그렇지만 샤보브스키는 이때까지 내각에서 이를 완전히 결정하지 않은 상태이고 그래서 국경수비대에게 훈령을 내리지 않은 상태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이 용지의 두번째 페이지에 있는 다음과 같은 문장을 읽지 못했다. 거기에는 "이 규정에 대해서는 첨부한 언론 보도자료를 11월 10일에 공표할 것"이라고 적혀 있었던 것이다.



1시간에 가까운 지루한 기자회견에서 샤보브스키는 새 선거법 등에 대해 설명하다가, 회견이 다 끝나갈 때쯤 마치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을 알린다는 투로 오늘 정치국이 "동독 국민들이 국경을 넘어 여행할 것을, 에- 또-, 허용하도록" 하는 결정을 내렸다고 설명한다.



이 날 기자회견을 담은 TV 화면을 보면, 기자들은 잠시 동안 전혀 동요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 말을 언뜻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잠시 후에야 말뜻을 알게 된 한 기자가 질문한다. "이 규정이 언제부터 발효되느냐?" 너무도 당연한 질문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 정확한 정보가 없었던 샤보브스키는 서류를 뒤적거리면서 머리를 긁적인다. 그는 언제부터 이 규정이 발효되는지 정확히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는 규정을 서둘러 읽어보았는데, 거기엔 "인민경찰의 이를 담당하는 여권과 신고기관은 상시적 여행을 위한 비자를 즉시 내주어야 한다", "이 (여행) 허가는 짧은 시간 내에 내려진다" 등의 말이 적혀 있었다. 이런 문장을 보면 동독 국민들은 여행을 하기 위해서 우선은 관청에 가야 하고 신청서를 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기자회견이 있던 저녁 시간에 관청들은 문을 닫았기 때문에 출국은 아무리 빨라도 내일에야 가능하다.



여기에서 샤보브스키는 동독의 운명에 결정적이었던 실수를 하게 된다. 기자가 다시 한번 묻자 그는 말을 더듬으면서 "내가 알기로는, 에, 즉시, 지금 당장 적용된다"고 말한다. 물론 그는 이 '즉시'라는 말로 '내일 아침 일찍 관청이 문을 여는 대로'를 의미했던 것이지, 동독 국민들이 이를 말 그대로 받아들여서 그야말로 '즉시' 장벽으로 달려들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이 기자회견이 동독 TV 뉴스를 타고 모두에게 알려지자 동독 국민들은 거리로 거리로 밀려나오기 시작했다. 그 날 저녁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장벽을 넘기 시작하자 이제 동독의 붕괴는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기정사실이 되었던 것이다.





만일 그가 '내일 아침부터'라고 대답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동독인들의 자유로운 여행과 이를 통한 동독의 개방이 일어났을 것이나, 이러한 베를린 장벽 붕괴는 아마 없었을 것이다. 동독의 개방과 민주화는 더 이상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대세였으나, 베를린 장벽이 유지된 상태에서의 점진적 개방은 독일 통일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가져왔을 것이라고 가정해 볼 수도 있겠다.



'내일 아침' 대신 '즉시'라는, 단 한 마디의 잘못된 혀놀림이 그를 '동독 정권의 사형집행인'으로서 영원히 역사에 남게 했다고 독일 언론들은 말한다. 샤보브스키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독일 통일과 냉전 붕괴에 공헌한 일등 공신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노벨문학상을 받은 독일의 문호 귄터 그라스는 당시 독일 통일이 아우슈비츠를 생각나게 한다면서 통일에 대해 우려하기도 하였다. 독일 현대사에서 11월 9일에 기록된 역사적 사건들은, 역사의 환희가 또다른 비극과 얼마나 가까울 수 있는가를 잘 보여주는 상징이며, 이 때문에 우리는 귄터 그라스의 이러한 우려에 공감할 수 있게 된다.


컬티즌에 게재한 글입니다.

추천3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독일개관 목록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52 역사 Jesus☆하나님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0861 08-22
51 역사 yean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7115 04-29
50 역사 교포신문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9072 09-29
49 역사 궁금이이름으로 검색 5504 08-27
48 역사 김경래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7315 03-15
47 역사 시습이름으로 검색 9299 03-15
46 역사 freiheit이름으로 검색 8233 03-15
45 역사 자유로니이름으로 검색 13326 03-14
열람중 역사 고스라니이름으로 검색 7594 03-11
43 역사 자유로니이름으로 검색 6878 03-09
42 역사 김종현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5247 03-08
41 역사 외교통상부이름으로 검색 7419 03-08
40 역사 뭐하니이름으로 검색 7791 03-08
39 역사 라인킨트이름으로 검색 7397 03-08
38 역사 김경래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7247 03-08
37 역사 최성만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5846 03-08
36 역사 최성만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5445 03-08
35 역사 이 서규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4625 03-08
34 역사 김재석이름으로 검색 5801 03-08
33 역사 슈피겔이름으로 검색 4689 03-08
게시물 검색
이용약관 | 운영진 | 주요게시판사용규칙 | 등업방법 | 개인정보취급방침 | 이메일무단수집거부 | 비밀번호분실/재발급 | 입금계좌/통보방법 | 관리자문의
독일 한글 미디어 베를린리포트 - 서로 나누고 돕는 유럽 코리안 온라인 커뮤니티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