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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칼 5세: 무한권력자인가 무능력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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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재석이름으로 검색 조회 5,801회 작성일 02-03-08 06:49

본문

칼 5세: 무한권력자인가 무능력자인가 Macht oder Ohnmacht Europas: Kaiser Karl V

2000년 2월 24일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Karl V.의 500번째 생일로써 이날을 맞이하여 Bonn, Gent, Wien 그리고 Toledo에서는 다양한 그의 치적과 활동상 그리고 좌절된 그의 전 지구적 황제에의 꿈과 그의 생애에 대한 학문적인 토론회가 개최되었고 동시에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쉴러의 저작  Don Carlos 에서의, 그의 제국에서는 태양이 지지 않는다는 인용과 같이 그는 에스파니아와 그 식민지역, 오스트리아 및 독일, 네덜란드, 보헤미아와 헝거리, 프랑스의 콩테, 밀라노, 나폴리, 시칠리아, 사르디니아 및 기타 지중해 연안의 에스파니아 공령을 포함하는 광대한 신성로마제국의 지배자였다. 한마디로 비록 유산에 의한 제국의 건설이라는 측면은 차치하고라도 당시 그는 중국이라는 아시아의 제국을 제외한 전세계적인 황제였다. 한 측면으로 그는 강대한 제국의 지배자였고 카톨릭의 대변자였으며 이슬람의 침입으로부터 제국의 영토와 신앙을 지키는 기사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는 유산으로 물려받은 제국내의 영주들을 통제하기에는 너무 허약한 군주였으며 프랑스의 발보아 왕조(Valois)와의 전투에 무모한 정열을 소비한 소모적인 황제였고 그의 정책조언자에게 지나치게 치우친 의존적인 지배자이며 카톨릭과 기독교의 종교갈등에서 번뇌했으며 이슬람의 침입에 오스트리아의 Wien을 상실하기까지 한 실패한 기사였다.

이글은 따라서 그의 생애를 재 조명한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독일에서 특히 군주제가 발달하게 되는 계기로서의 그의 정책과 마틴루터의 95개조 반박문으로부터 시작되는 본격적인 종교상의 분쟁 등 시대상황의 변화를 중심으로 작성될 것이다.

◆세계적 지배자로서의 Karl V.의 등장

  지리상의 발견으로 유럽인이 신대륙과 아시아 방면으로 진출하던 16세기초반 그는 부르군드의 영주이며 오늘날 스페인 중부지역에 해당하는 카스틸리엔의 왕이며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막시밀리안 I.의 아들 필립 I. (Philipp I. der Sch ne), 와 카스틸리엔의 왕인 이사벨라와 오늘날 스페인 동북부지역의 아라곤 왕 페르디난트 II.의 딸이며 그녀의 부모가 사망하면서 스페인의 왕이 된 요한나 (Johnna die Wansinnige)의 첫 아들로 Gent에서 1550년 2월 24일  태어났다. 그에게는 후에 프랑스의 프란즈 I.세와 결혼하게 되는 누이 엘레노아와 덴마크의 왕과 결혼하게 되는 여동생 이사벨라, Karl V.에 이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는 동생 페르디난트 I., 네덜란드의 여군주가 되며 보헤미아와 헝거리의 왕인 루드비히와 결혼하게 되는 여동생 마리아 그리고 포루투갈의 왕 요한과 결혼하게 되는 여동생 카타리나의 형제자매가 있었다.  

당시 스페인은 유럽에서 교황청이 있는 로마를 포함한 이탈리아의 중부지역을 제외한 남,북부이탈리아 및 네덜란드, 시칠리아등을 지배하는 국가였으므로 그의 어머니 요한나는 항상 그녀의 왕국통치를 위해 Karl을 남겨두고 여행을 많이 했으며 따라서 그의 교육은 이모인 네덜란드의 여군주이며 아버지 필립I.의 여동생인 마가레트가 맡았다. 아이를 혼자 누고 여행하면서 그녀는 Karl이 10세를 넘어서야 비로서 상봉을 했다고 하며 폐쇄적이었다니, 그녀의 호칭이 Wahnsinnige라고 불리울 만하다. 이곳에서 Karl은 에라스무스를 스승으로 그의 민문주의에 대한 사고를 일깨우게 되었으며 착실한 카톨릭 신앙으로 무장한 기사단의 일원으로 성장하게 된다. 1506년 그의 아버지가 사망하자 그는 부르군드의 영주가 되었고 카스틸리엔의 왕으로 임명되었다. 1516년 그의 외할아버지, 아라곤의 페르디난트 II.가 사망하자 16세의 그는 스페인의 왕으로서 스페인을 지배하게 된다. 스페인의 왕으로서 그는 대다수의 국민들과 귀족들의 저항에 부딫히게 된다. 이유는 당시 스페인에는 인종적인 차별과 카톨릭에의 맹목적인 믿음 그리고 유대인에 대한 적대가 지배적이었던 것 같고 그가 순수한 스페인인이 아니라는 것과 스페인어를 할 줄 몰랐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가 카톨릭 주교와 교회에게 기존 법령의 존중과 귀족들의 권리를 손상하지 않겠다는 맹세, 그리고 스페인어를 배우겠다는 맹세를 한 후에야 비로서 스페인의 왕으로서 행세할 수 있었다고 한다.

  1519년은 그에게 있어, 그리고 유럽의 강력했던 왕들에게는 하나의 기회적인 해였다. 이유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막스밀리안 I.가 사망했기 떄문이었다. 막스밀리안 I.의 혈통으로 보아 당시 스페인과 네덜란드 그리고 오스트리아의 영주인 그와, 그의 누이와 결혼한 형부인 프랑스의 프란쯔 I. 그리고 Karl의 이모, 스페인의 캐더린과 결혼했던 영국의 헨리 VIII. 가 황제에의 계승권이 인정되고 있었다.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왕위는 황제선출에 관한 분쟁을 에방하고자 제정한 1356년의 금인칙서를 통해 계승의 방식이 아닌 선출로서, 독일영방의 7선제후에게 그 선출권이 있었다. 7선제후란 마인쯔, 트리어 및 쾰른의 대주교들, 작센과 팔쯔, 브란덴부르크 그리고 보헤미아의 군주를 의미한다. 교황은 이미 1516년 프랑스와 맺은, 프랑스내에서의 교회에 대한 교황(레오 X.: Leo X.)의 영향력을 인정하겠다는 종교협약으로 인해 프랑스의 프란쯔 I.의 편에 서 있었으나 Karl에게는 아우구스부르크의 대상인 후거의 재정적 지원을 받고있었다. 금전의 힘은 독일의 7선제후의 표를 움직일 만큼의 힘이 있었고, 소위 표현한다면 황위를 샀다는 표현이 아마 옳을지도 모른다. 그는 1520년 아헨에서 자신의 권한은 제국내의 법률의 적용항도내에서만 가능하다는 제한하에 Karl V.로서 황제로 등극한다. 당시 7선제후들의 세력은 막강했고 그들의 영향력에 제한을 가하려는 황제의 무제한적인 권력에 반감이 많았고 이에따라 제국내에서 황제의 권한을 축소하려는 쪽으로 법령을 개정하려는 움직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Karl V.의 황제선출에 가장 불만이었던 왕은 당연히 프랑스의 프란쯔 I.이었다. 신성로마제국이라는 거대한 제국을 경계에 두고 있는 프랑스로서는, 제국의 확장과 팽창은 프랑스를 위협하기에 충분한 요소였으며 이 위협에의 제거노력은 프랑스의 경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 북부이탈리아의 도시국가 및 남부이탈리아의 나에팔 왕국, 그리고 지금의 독일과 프랑스의 경계상에 위치하고 있는 부르군드의 소유권을 놓고 항상 황제와 불편한 관계로서 표출되고 있었다. 반면 Karl V.에게 이탈리아는 그의 정책조언자인 가티나라의(Gattinara)에 의해 주장된 "신성로마제국의 카톨릭의 대변자"라는 이상에 의거한 중요한 그의 정치적인 지역이었다. 프란쯔 I.와의 이탈리나 쟁탈전은 후에 프란쯔 I.가 이교도인 오스만 터어키와의 연합까지도 체결할 만큼의 중요하고 기나긴 갈등으로서 Karl V.의 거의 모든 통치기간에 해당되게 된다.

◆합스부르크 vs. 발보아

  발보아 왕실은 중세말 이래 나폴리 왕국에서 에스파니아의 아라곤과,  이틸리아 북부에서는 합스부르크 왕실과 대립관계에 있었다. 백년전쟁이후 프랑스는 사를르 VII. 부터 본격적인 절대군주제에의 기초를 다지기 시작했다. 백년전쟁은 프랑스에 2가지의 잇점을 가져다 주었는데 하나는 쟌 다르크에 의해 상징되듯이 국민의식 혹은 민족적 자각의 형성이며 또 하나는 플랑드르등의 프랑스내 영국령의 회복에 있었다. 영토의 확장에 따른 지배수단의 확고화를 위해 사를르 VII.는 1445년부터 약 6천여명에 이르는 기사단을 창설하는등 상비군의 확충과 관료제의 시행노력이 이끌었다. 동시에 15세기에 실전에 사용되기 시작한 대포는 기존 전투의 전술을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에 따른 봉건영주는 그 기반이 약화되게 되면서 절대군주정이 발전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프란쯔 I.는 절대군주제의 토대를 다진 군주라고 통상 여러 참고자료에 소개되어 있는데, 그의 치적으로는 프랑스내 왕권에 대한 강화와 국가의 국왕에 의해 임명되는 관료를 통한 국가의 통일노력에 힘을 기울였다고 한다. 합스부르크 왕실과의 전투수행에 필요한 전비를 위해 전국을 16개 주로 나누고 2번씩이나 재정부의 재조직과 확장을 노력하였다고도 한다. 이러한 추세속에서의 신성로마제국은 하나의 거대한 위협이었으며, 특히 Karl V.가 주장하는  Monarchia universalis 의 이상은 황제하에 다른 모든 왕들의 종속을 요구하는, 프랑스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었다.

  1519년의 황제선출에서의 경쟁을 시작으로 프랑스의 발보아 왕실의 프란쯔 I.와 합스부르크 왕실의 신성로마제국 황제 Karl V.의 갈등은 피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갈등은 1521년에서 1526년의 전투에서 더욱 가속화 되었다. 1525년 2월 24일 Pavia에서의 전투는 프란쯔I.의 패배로 결정되었고 그는 황제의 포로가 되었다. 이에 따라 황제 Karl V.는 1526년 1월 14일에 마드리드의 평화회담에서 그의 요구조건을 권위적으로 프란쯔 I.에게 명령하게 된다. 물론 프란쯔 I.가 다시 자유의 몸이 되었을 때 황제의 요구조건에 대한 저항과 황제에 대항하기 위한 교황 클레멘스 VII.의 교황군, 플로렌쯔, 게누아, 베네치아, 마일란트 그리고 영국으로 구성되는"신성동맹(Heilige Liga) 의 결성에 성공한다. 지속되는 황제와의 갈등은 다시금 1526년에서 1529년의 두번째 전투에서 재현된다. 이번 전투에서 역시 프란쯔 I.에게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그는 결국 부르군드의 프랑스 소유로 인정하는 대신 이탈리아에 대한 그의 요구를 모두 포기할 것을 인정하기에 이른다.

  1536년에서 1538년 사이의 세번째 전투에서는 프란쯔 I.는 당시 오스트리아의 Wien을 위협하는 오스만 투르크의 술탄 슐레이만(S leiman)과의 동맹에도 불구하고 그리 성공적이지는 못했던 것 같다. 1542년에서 1544년까지 시행된 네번째의 전투는 스페인의 북부이탈리아에 대한 영향력의 감소를 위한 명분으로 시작했으나 역시 별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는 1547년에 사망하였으며 그의 아들인 앙리 II.에 의해 그의 의지는 계속 이어지게 된다. 결국 후에 1559년 카토-켐브리지 조약(Cateau-Cambre'sis)으로 이 두 왕실간의 갈등은, 프랑스는 이탈리아를 포기하는 대신 라인강변의 Metz, Toul 그리고 Verdun을 얻는 것으로 종결되었다. 그는 Karl V.의 거대한 정치적이며 군사적인 저항자로서 프랑스의 민족주의적 군주정의 발전과, 신성로마제국의 중세적이며 보편적인 정치적 사고에 대항한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형부이자 황제의 어릴적 마상시합의 친구였다.

◆마틴루터와 종교갈등 오스만 터어키와의 갈등:

이슬람 세력의 위협이 없었다면 종교개혁은 성공할 수 있었을까?
카톨릭과 기독교의 갈등은 이미 마틴루터 이전의 문제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여기서는 마틴루터의 95개 반박문에서 시작된 갈등들을 조명해 보면서 당시 동시적으로 발생하였던 이민족의 침입의 문제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1517년 10월의 루터의 당시 면죄부 발행과 관련한 기존의 성직자의 부정과 타락에 대한 반박문은 "신앙에 의해서만 의롭게 된다"는 확신에 근거한 것으로 오직 신에 대한 신앙과 자비로운 신의 은총에 의해서만 인간은 구제될 수 있다는 견해를 피력한다. 교회는 이에 대해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곧 독일어로 번역되어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게 되자 문제가 달라졌다. 심지어 신앙과 관련한 저항운동들은 루터가  주창한 것보다 훨씬 과격한 사회개혁운동의 성격까지도 포함하게 되었다. 예를 들면 재세례파의 토마스 뮌쩌(Thomas M nzer)와 라이덴의 존 그리고 독일에서의 농민전쟁 등이 있다. 루터는 그후 계속하여 "독일국민의 귀족에게 고함", "교회의 바빌론 유수" 그리고 "크리스트인의 자유"라는 3개의 논문을 발표하는데, 교회는 이러한 책자의 발행과 그의 주장을 기한부로 철회하라는 교황의 칙서를 교부한다. 그가 교황의 칙서를 대중 앞에서 불살라 버렸을 때 그와 그리고 그를 지지하던 독일영방 군주, 특히 프리드리히(FRiedrich der Weise von Sachsen)와 교회화의 대립은 첨예해져 갔다. 이에 카톨릭의 옹호자로 자처하던 황제는 1521년 보름스(Worms)제국의회에서 그에게 그의 견해의 철해를 명령하였고 루터는 그 유명한 "나는 여기에 서 있으며 달리 될수 없다"라는 대답으로 그의 명령을 거부한다. 그는 황제에 의하여 법의 박탈을 당하게 된다.

  독일내의 루터파 영주들에 대한 황제 Karl V.의 태도는 그와 적대관계에 있었던 프랑스의 프란쯔 I.와 제국의 남동쪽으로부터 제국을 위협하던 오스민 터어키와의 관계에 따라서 크게 좌우되었다. 1526년 프랑스와의 2번째 전쟁과 1529년의 오스만 터어키에 의한 Wien의 함락은 루터파 영주들에 대한 황제의 양보를 끌어내기에 충분하였다. 각국 영주들의 지원없이는 황제는 자신의 뜻, 즉 프랑스와 오스만 터어키에 대한 전투에 제한이 많았기 때문이다. 본 글의 내용과 상관없는 것이지만, 1529년 Speyer회의에서 루터파에 압박을 가하려고 했던 황제에 대해 저항한 것과 관련 이들을 "프로테스탄트", 저항하는 사람들이라는 말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1530년의 아우구스부르크 제국의회에서 루터파의 영주들은 황제가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신앙고백 "Confessio Augustana 을 작센의 영주이름으로 제출한다. 이러는 사이 루터파의 영주들은 정치적인 결사체로서 조직되게 되며 벌써 1529년부터 중요한 변화들이 독일영방내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1526년에서 27년에 작센과 헤센에서 영주에 의해  제정되었고 1530년에는 각 영방으로 확대적용 된 교회령이 영방영주의 교회에 대한 통제를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루터에 의한 새로운 교리는 영방영주에게는 권력과 재정을 풍부하게 하는 효과를 가져왔는데, 이는 교회령에 의해 교회가 지금까지 소유하고 있었던 토지와 조세징수권을 박탈하고 영주에게 복속시켰기 때문이었다. 황제의 이에 대한 거부감의 표현과 독일 루터파 영주들의 이에대한 저항은 곧 1531년의 헤센의 영주인 필립(Pilipp von Sachsen)에 의해 주창된  슈말칼텐 동맹(Schmalkaldischer Bund)로 나타나게 된다. 증가하는 오스만 터어키의 위협은 1532년 뉴른베르크 회의에서 루터파 영주들에게 임시적인 종교상의 자유를 인정하는 대신, 여기에서 자유를 인정한다는 의미는 종교상의 분쟁에 관한 일종의 휴전을 의미한다. 한국어로는 통상 "화의"라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2번째로 Wien을 위협하는 오스만 터어키에 대한 지원을 조건으로 협정을 맺는다(Nuernberger Religionsfriede oder Anstand). 황제는 이시기 대략 2가지로 요약될 수 있는 대항자를 맞아 싸워야 했는데 하나는 위에서 설명한  황제에 의한 자신들의 정치적 권력의 제약을 극복하려는 강대한 영방영주들이고 또 하나는 점점 조직적이며 거세지고 있는 종파에 관련된 모든 조직들이다. 교황은 이 경우에 해당하는데 종교상의 갈등에 대한 토론을 위한 공의회의 소집을 황제가 요청해도 교황이 종종 거부했기 때문이다.

  1545년에는 황제가 그토록 기다리던 공회의를 교황이 허용했으나 루터파의 영주들이 참여를 하지 않았다 이에 격분한 황제는 군대를 동원한 강제로서 그들의 신앙을 다시 카톨릭으로 되 돌리려고 하였고 이에 영주들과 전쟁이 발생하게 된다. 1546년에서 47사이의 슈말칼텐 전투에서 중요한 점은 작센의 영주인 모리츠가 황제의 편에 섯다는 점이다. 지금까지의 선제후는 작센의 프리드리히(Kurf rst Johann Friedrich von Sachsen)으나 이 전투에서의 슈말칼텐 동맹의 패배로 프리드리히는 그의 선제후의 명예를 모리츠에게로 내 주어야 했고 헤센의 필립은 사망하였다. 이시기를 황제 Karl V.의 절정기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1548년 아우구스부르크의 무장된 기사들의 제국의회에서는 기독교 교리를 따르던 영주들과 종교세력은 굴복하지 않았고 이를 달래기 위한 조처로서 황제는 다시 종교전쟁의 휴전을 승인하였다(Augsburger Interim). 그러나 이와 같은 조처는, 지금까지의 소모적인 전쟁과 갈등을 종식시켜줄 것을 기대하였던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저항을 동시에 받게 된다. 1552년에 이르러 독일영방 선제후중 우위를 황제로부터 인정받은 작센의 모리츠는 황제의 영방군주들에 대한 제한과 세속화된 교회의 영토및 조세징수권에 대한 환원에의 요구에 맞서 프랑스 프란쯔 I.의 아들 앙리 II.와 동맹을 맺고 황제를 압박하였다. 압박된 황제는  Innsbruck에서 Villach으로 피신할 수 밖에 없었다. 황제 Karl V.의 동생 페르디난트는 황제의 이름으로 파사우 조약(Vertrag von Passau)을 체결하고 종교전쟁의 휴전을 종결하고 프로테스탄트들에게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였다.  
  
1555년은 프로테스탄트들에게는 역시적이었으나 황제에게는 체념의 해였다.. 황제대리인 Karl V.의 동생 페르디난트는 제국내의 각 신분들과의 협상을 통해, 여기에서 각 신분(St nde)이라는 용어는 귀족및 영주, 승려 그리고 시민대표를 의미한다, 파사우 조약을 통해 인정된 아우구스부르크의 종교화의를 다루었으며 이 종교화의로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크의 법적 지위가 동일시 되었다. 법적 지위의 동일성은 단지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에만 해당되며 이 이외의 교파, 예를들면 캘빈파나 재세례파 등은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역시 각 영방의 영주는 신앙을 선택할 수 있으며 그 시민이나 국민, 국민이라는 용어의 사용을 하기에는 아직 이른 시기이지만, 은 군주의 종교와 자신의 종교가 일치하지 않을 때는 다른 영방으로 이주할 수 있도록 허용된 것이다. 이 아우구스부르크 종교화의는 황제의 이름으로 선포되었으나 정작 황제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모든 자신의 정책이 실패로 돌아가고 종교상의 분열로 인한 자신의 보편적인 세계황제에 의 목표  Monarchia universalis 에 대해 그는 회의와 체념을 느꼈음에 틀림없는 것 같다. 그러나 여기에는 하나의 의문이 남아있다. 왜냐하면 그해 10월 네덜란드의 통치를,  다음해 1556년에는 스페인의 왕위와 이탈리아에서의 공령 그리고 해외 식민지를 자신의 아들인 필립 II.에게 양위하였고 9월 12일에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위를 그의동생 페르디난트에게 양위하였기 때문이다. 무슨 이유로 황위를 사퇴하였을까...? 오늘날까지도 많은 해석들이 제기되고 있으나 정확히 밝혀진 것은 없다고 한다. 그러나 그중 가장 유력한 가설이라면 그의 대에서 이루지 못한 제국의 꿈을 자신의 아들을 통해 아루려고 했다는 의견이 그것이다. 그가 비록 황위를 동생에게 물려주기는 했지만 아들을 영국의 메리여왕과 결혼시킨 것이 그 이유라고 본다. 영방군주의 저항이 심한 독일을 포기하고 대신 유럽의 세계경제의 중심으로 서서히 떠오르는 에스파니아와 네덜란드에 영국을 결합하여 합스부르크와는 다른 제국을 꿈꾸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대는 바야흐로 절대왕정으로 흐르고 있었고 황제는 그것을 막지 못했다. 그것은 그의 Ohnmacht 였던 것이다. 그후 그는 카스틸리엔의 San Jeronimo de Yuste에서 2년을 살다가 1558년 9월 21일 사망하였다.
  
◆결론

  그의 치세에서의 헌법의 개정 움직임은 확실히 자국군주를 중심으로 하는 권력의 집중화를 촉진시켰고 종교와 세속적인 통치에의 분리라는 이념이 군주의 수중으로 통합되게 하였다. 후의 30년 전쟁은 이러한 움직임에 불을 당겼고 특히 이러한 정신은 독일에서 프로이센의 흥기를 가져오는 계기로서 작용하였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역사에서 배워 알고있다. Karl V.의 아들이 스페인의 군주로서만 머물고 합스부르크의 왕실은 나름대로운 군주정을 발전시켰다는 것이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보편적 황제로서의 중세의 꿈은 그의 치세를 고비로 새롭게 근대라는 시대의 문으로 이어지면서 그 종말을 맞는다. 그러나 지리적으로 지나치게 갈라진 유럽 여러곳의 광대한 제국을 통치하기에는 그리고 변화하는 시대정신과 사상의 흐름에 맞서 그나마 제국을 오스만 터어키에 잃지 않으면서도 종교상의 갈등을 지나치게 확대시키지 않은 것을 두고 그의 치적을 칭송하는 의견도 있는 만큼, 과연 어떠한 관점에서 그의 시대와 그를 이해하는 것.....이 문제는 이제 우리들 독자의 두 손에 놓여있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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