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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오스트리아 정치 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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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라인킨트이름으로 검색 조회 3,327회 작성일 02-03-08 06:39

본문

지난달 극우적 성향의 자유당과의 연정수립으로 유럽연합으로부터 광법위한 정치외교적 압력에 직면하고 있는 오스트리아의 2차대전 이후 현대정치사를 연 2회에 걸쳐 살펴본다.


1. 전사
20세기 끝머리에서 오스트리아는 역사적으로 다민족 도나우군주제의 찌꺼기다. 이 군주제는 1918년까지 중부유럽의 많은 지역에 뻗쳐 있었다. 1차대전의 전승국은 여러 정치세력에 의해서 요구되었던 독일에의 병합을 압도적으로 독일어를 사용하는 이 잔재국가 오스트리아에게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독.오제국에서는 또한 도나우 연방을 추구하는 세력들도 있었다. 가장 서쪽의 연방주인 포어아르베르크주의 대다수 국민들은 이와는 달리 국민투표에서 스위스와의 병합을 주장했으나 거부당했다. 1920년의 제 1 공화국 헌법은 우익정부와 좌파 야당세력간의 갈등을 단지 10년정도만 견디어 냈다. 1933년에 의회의 해산과 1934년의 내전 이후에 오스트리아 파시스트정부 즉 신분제 국가가 수립되었고 이는 불법적인 민족사회주의자 집단의 테러에 저항했으나 실패했다.
1938년 3월 독일군대의 진주 그리고 병합후에 오스트리아는 나찌점령지역에 편입되었다. 그리고 주민들은 히틀러의 침략전쟁에 참가했다. 1945년 3월과 4월에 소련군대는 오스트리아 동부를 해방했고, 그후 45년 4월 27일에 빈에서는 카알 렌너 수상하의 과도정부는 오스트리아의 독립을 선언했다. 1945년 4월과 5월에 오스트리아의 나머지 지역을 해방시킨 서방연합군은 이 신정부를 인정하지 않았다.

2. 2공화국시기
서부 연방주 대표들의 편입을 통해서 과도정부는 마침내 서방연합군들의 인정을 요구할 수 있었다. 1945년 11월 25일 치루어진 민족의회를 위한 전 오스트리아 선거에서 공산당은 놀랍게도 참패했다. 공산당은 단지 5.2%만을 획득했다. 기독교사회주의 보수당인 오스트리아 국민당이 절대다수를 확보했다. 그들은 사회당과 대연정을 구성했고, 여기에는 공산주의 각료도 한 명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1947년 통화개혁에 대한 항의로써 탈퇴했다. 1949년 10월의 제 2 회 선거에서야 비로서 자유주의적인 독일민족주의 전통에 속하는 단체들 즉 독립파 연합은 선거에 참여 할 수 있었다. 그들은 국민당과 사회당으로부터 엄청난 득표수를 빼았아 왔지만 내부의 분란으로 인해 약회되었다. 1955년 자유당이 그들의 후신으로서 등장했고, 하지만 처음에는 별 영향력이 없었다. 1945년 정부수립으로 오스트리아는 독일과는 달리 모든 점령국가에 의해서 인정된 자신들의 모든 영토에 대한 민주적 정당성을 갖는 정부를 수립했다. 식량확보와 경제재건의 과제 이외에 이제 오스트리아 정치의 주요한 과제는 완전한 독립의 요구였다. 우선은 이제 시작되고 있는 냉전으로부터 그리고 형성되어지고 있는 적대적인 두 진영으로부터 벗어나려 했다. 몇몇 사례에 있어서 이미 벌써 중립적 정책을 이야기 할 수 있다.

1947년 6월, 7월 마샬플란 참여에 관한 결정으로 연방정부는 최소한 경제정책에 있어서의 서방화를 결정했고, 이는 서유럽과의 강화된 무역에서 명확해 졌으며 반면 중부, 동부유럽과의 경제관계는 점점 의미를 잃어 갔다. 그와 함께 동시에 서유럽에 대한 경제의 개방이라는 강제가 있었고, 미국의 주도하에 서유럽 국가들의 무역, 통화교류의 포괄적인 자유화는 마샬플란과 유럽경제협력기구의 중심적인 국제경제 사안이었다. 동부지역에서의 소련점령군의 중요 산업시설에 대한 제약 때문에 오스트리아는 유럽경제협력기구에서 하나의 특수 지위를 차지했고, 수입자유화와 외환통제 철폐를 단계적으로 수행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의 국제수지가 기대했던 것 보다 훨씬 더 좋게 되자 그 유럽경제협력기구는 1953년 12월에 오스트리아를 위한 그 예외 규정을 철회했다. 유럽석탄 철강 공동체 수립에 오스트리아는 참가하지 않았지만 곧 비제도화된 특수 지위를 요구했는데, 왜냐하면 그 기구에는 오스트리아의 가장 중요한 무역 파트너가 속하기 때문이었다. 과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의 동의는 그러나 부여되지 않았다. 결국에 관세협정이 시작되었고, 그러나 그것은 1954년 7월에 실패했다.

유럽석탄철강공동체는 그 점점 중요해지는 협상을 위한 어떤 설예도 생겨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오스트리아에게 더 이상 양보하려 하지 않았다. 오스트리아 정부측의 특수 지위에 대한 강조는 그 기구의 협상가들을 감동시키지 못했다. 서방에의 정치적 경도는 결코 점령 정부의 종식을 가져오지 못했기 때문에 1952년 53년 국가조약을 둘러싼 노력들 속에서 다시금 중립지위가 강화되었다. 무엇보다도 소련과의 관계에 있어서 그러나 1955년 초에서야 이런 노력들은 성과를 거두었다. 1955년 2월에 소련군은 오스트리아 제국과 독일문제간의 연계를 포기했다. 이로써 국가조약을 위한 길이 열렸고, 독일문제의 해결을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이로써 그 국가조약 즉 점령군의 철군을 위한 국제법적 기초인 그 조약은 4강대국의 외무부장관과 오스트리아 외무상에 의해서 1955년 5월 15일 서명되었다. 오스트리아의 저항 때문에 소련은 국가조약에서의 중립화 조항을 포기했다. 이는 소련에게 이 조항의 해석의 가능성을 주었고, 이로써 오스트리아의 외교정책에 관련된 법적근거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는 이미 마지막 외국군대가 철군한 다음날 오스트리아의 중립화에 대한 연방헌법을 결정할 준비가 되어있다고 선언했고, 1955년 10월 26일에 그 헌법은 결정되었다. 이 헌법은 오스트리아와 당시 외교관계를 맺고 있던 모든 국가들에게 영구중립화의 인정에 관한 요청으로 비준되었다. 모든 국가들은 그 중립화 지위를 부분적으로 명백하게 인정하거나 또는 부분적으로 이의없이 인정함으로써 그러한 요청에 응했다. 이러한 인정 또는 묵인으로써 국제법 학자들은 오스트리아와 국제사회간의 준 조약관계를 언급했고, 거기에 양자는 구속되어 있으며 오스트리아의 지속적인 중립성의 일방적인 포기는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정부에 의해서 내려진 이러한 해석으로부터 오스트리아는 냉전의 종식이후에 비로서 벗어났다. 그 이후 오스트리아 정부의 노선은 오스트리아는 자신의 중립성을 일방적으로도 끝낼수 있다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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