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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여장부였던 루터부인 케테

페이지 정보

작성자 자유로니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이름으로 검색 조회 3,298회 작성일 02-03-07 17:42

본문

작성일 : 1999/10/21  조회수 : 91

■ 수도원에서 수녀인 부인을 유괴한 루터

    "프랑스와 베니스를 다 준대도 나는 그녀와 바꾸지 않겠다."
                                                  
                                                    Von Roland Mischke

모든 성공적인 남자들 뒤엔 강한 여성들이 있다고 말해진다. 이 민중의 지혜는 독신가구와 여성해방의 시대엔 더 이상 들어맞지 않는다. 그러나 옛날엔 바로 그런 공식이 들어 맞았다. 공적으로 성공한 화려한 남편뒤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처럼 그 남자의 성공을 지휘하는 단호함에 찬 여장부들이 있었다. 종교개혁의 환상적인 커플, Martin Luther와 도망친 수녀인 그의 부인 Katharina von Bora는 그런 격언에 딱 들어 맞는 경우이다.

  동시대인들은 그녀에게 "Lutherin"라는 명칭을 붙여주었다. 그녀의 영향력은 교회정책과 교리문제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걸쳐 있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루터연구는 이것에 거의 주목하지 않았다.  그렇게 된 이유는 원전이 충분치 않았기 때문이라고 Martin Treu는 말한다. 그는 세계쵀대의 종교개혁사 박물관인 Wittenberger Lutherhalle의 소장이다. 카타리나 편지는 겨우 8통이 남아있다. 이 편지는 별볼일 없는 하급귀족출신의 딸인 그녀가  확실히 루터기업의 "총경영자"였음을 보여준다. Lutherhalle에선 3월부터 탄생5백주년을 맞은 카타리나에 대해 지금까지중 가장 포괄적인 전시회가 열린다. 이 전시회는 종교개혁가의 부인이 단지 살림과 자녀양육에만 신경쓴 것이 아니라, 루터회사의 경제문제, 금전문제를 보살폈음을 보여주게 된다. 이 루터회사는 루터부부, 6명의 자녀, 그리고 루터가족과 함께 살았던 약 30명의 종업원과 학생들로 구성되었다.

아무 학위도 갖고 있지 못했지만 존경스럽게 "Doktorissa"로 불렸던 그녀는 그 능력을 증명이라도 하듯 루터학생들과 지지자들이 모였던 유명한 회합(Tischgespraech)에 참여가 허락된 유일한 여성이었다. 규칙적으로 그녀는 자기의견을 공포했다. 그러나  남자들은 그녀가 "너무 나선다"(anstoeBig)고 느낀데다가, 루터도 항상 그녀가 "너무 기고만장하다는 의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나중엔 그녀이름은 이 모임회의록에서 삭제되어버렸다. 그 때문에 그녀가 이 토론에서 무슨 말을 했는지, 그리고 그녀가 독일과 유럽의 신질서를 가져온 정신적인 혁명인 종교개혁의 성공에 그녀의 몫이 어느정도로 평가될 수 있는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루터는 어쨌든 그녀를 과소평가하지 않았으며 그녀를 명예롭게 "Herr Kaethe"라고 호칭하곤 했다. 바로 이 호칭은 이번 카타리나-폰-보라-전시회의 타이틀로 사용된다.  

그녀는 1499년 1월 29일 라이프찌히 남쪽인근의 Lippendorf에서 태어났다. 6섯살 때 이미 베네딕트수도원 Brena에 들어간다.  엄마가 죽자 아버지가 그 딸을 수녀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그녀는 16살때 Grimma시 Nimbschen마을의 Zisterzienserinnen수도원에서 정식으로 수녀가 된다. 이 시기엔 이미 높은 수도원담벼락을 넘어 교회혁신의 바람이 불어왔다. 그 운동의 주종자는 Martin Luther박사였다. 자신도 승려였던 그는 1519년 처음으로 이 수도원에서 설교를 한다. 이 해에 수녀들은 동요했다. "그리스도의 신부들"은 친척들에게 수도원에서 꺼내달라고 부탁하곤 했다. 그런데 이게 잘 안되자 급기야는 Luther에게 부탁하게 됐다. 루터는 Torgau의 한 상인을 시켜 1523년 텅빈 청어을 담는 통에 8명의 수녀를 담아 Wittenbeg로 데려오게 한다. 수녀들은 3일후에 그를 만나보게 된다.이 스펙타클한 유괴는 엄청난 소란을 일으켰다. 그는 급히 서둘러 "처녀들이 신성하게 수도원을 떠나게 된 것에 대한 원인과 답변"이라는 제목의 글을 써야 했다. 그 글에서 그는 이 젊은 여성들이 Wittenberg의 시민들의 집에 잘 머물고 있으며 곧 결혼하도록 하기위해 힘쓸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검은 머리의 카타리나는 결혼을 원하는 남자들에게 전혀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한 명문가의 자제가 관심을 보였지만 보기 좋게 퇴짜를 맞는다.(Er bekommt dann aber kalte FueBe) 한 목사에게도 냉담한 반응만을 보였다.(Sie zeigte ihm dei kalte Schulter) 루터는 화가 나서 도대체 고마워할 줄 모르는 여자에게 답변을 요구했다. 그럼으로써 이미 낚시밥에 물린 것이다. 이 어느덧 20대중반이 된 영리하고 근면한 그녀는 더이상 소녀가 아니었고 속사포같은 혀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앞뒤재고 할 것없이 막바로 핵심을 친다. 당신이 나와 결혼하고 싶은거 아니냐!  루터는 주위의 만류도 뿌리치고 아무도 원하지 않았던 그녀를 신부로 맞이한다. 루터연구가들에겐 지금도 이것이 수수께기이다. 이미 Philipp Melanchthon도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말하지 않았던가.

  "독일이 그의 힘을 필요로 하는 이 절박한 시기에 그는 축복받지 못할 행동을 하면서 그의 명성을 훼손하고 있다."

  그녀는 1523년에서 1552년까지 Wittenberg에서 살게 된다. 루터가정은 한때 3개의 대정원, 넓은 들, 연못, 그리고 말이며 소, 염소같은 각종 동물사육소를 소유했다. 이 "Lutherin"은 꿀벌사육도 새로 하고 신의 은총을 받은 루터가 자신이 가장 애음하는 음료수를 마음껏 마실수 있도록 보살폈다: 즉 그녀가 관리하는 수도원양조장을 통해 항상 충분한 맥주를 공급되었다. 한번은 추기경 Albrecht von Mainz가 50굴덴의 돈을 보내왔을 때 루터는 그 선물을 거절했고, 그녀에게도 받아들이는것을 금지했지만, 그녀는 남편볼래 사신을 다시불러 돈을 거두었다. 그녀는 루터의 자부심만으로 먹고살수는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재물에 대한 실용주의적 처세는 그녀가 살림잘하는 여자라는 이미지를 갖게 만들었다. 그래서 루터 한때 "여자와 남자간의 공동체란게  대단한 힘을 발휘하는 요물일세"라고 말할 수 있었다.

  이 뷔텐베르크시절에 물론 그녀의 성격적 특징도 급속히 모습을 드러냈고, 그것은 그녀에게 나쁜 평판을 안겨주었다. 그녀는 지배욕과 독단이 강하다고 수군대는 소리를 듣게 됐다. 그녀는 세상모르는 수녀에서 그토록 짧은 시간에 논쟁의 여지가 없는 가장(家長)이 됐다. 그녀는 자녀양육문제에서도 남편에게 그저 주변부역할만을 허락했다. 그래서 자주 루터와 격렬한 충돌이 있었다. 루터는 마침내 체념하고는 자신의 일속으로 후퇴해버린다. 그리곤 그녀에게 집안의 왕위를 넘겨주었다. 그러나 정신적인 문제에서도 그녀는 간섭을 해왔다. 루터가 "Kaethe박사" 혹은 "Moses Kaethe"라고 비야냥거릴 정도였다. 루터는 한번은 화가 극에 치민 나머지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내가 다시한번 자유의 몸이 된다면 나는 여자석상하나를 조각하겠다.어차피 나야 절망적일 정도로 모든 여자에게 순종하는 사람이니까."

  그러나 1546년 죽기 바로 전에 그는 자기 부인이 사실은 "순전한 하녀"였고 그의 분신이며, 또한 급진적인 교회혁신이라는 작품의 일부였음을 인정한다. 루터가 죽은 후에도 그 과부는 뷔텐베르크집에서 사업을 계속 해 나가면서 6명중 살아남은 4명의 자식을 돌본다. 딸2명은 일찌감치 병으로 죽어버렸다.

  1552년초 뷔텐베르크에  페스트가 발발하자 그녀는 어린 자녀두명을 데리고 시를 떠나 Torgau로 간다.  루터가 1523년 Worms에서 용감하게 나타났다가 구출된 이후로 루터집안은 특히 이 Torgau에 친밀감을 느끼고 있었다. 떠들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루터가 혼자 40번도 넘게 이 시를 방문했고, 이곳시민들은 루터가 올때마다 "Torgisch Bier"한통을 선사했다고 주장한다. 그녀는 KatharinenstraBe 11번지 집에 피신을 했다. 이 집은 오늘날 "Katharina Luther-Stube"와 함께 추모장소이다. 이곳엔 그녀의 물품이 몇개 없다. 그래서 루터연구가들은 카타리나가 자신생애의 마지막 몇달을 이 집에서 보냈다는 것을 의심한다. 그녀는 이곳에서 딸 Margarethe의 생일도 맞았고, 아들 Paul을 Torgau의 명문가 딸과 약혼시켰다. 그녀가 죽은 하루후 이 시의 많은 시민들과 모든 뷔텐베르크대학사람들이 장례행렬에 참가해서 그녀가 마지막으로 머무를 시교회 St. Marien으로 향했다. (FAZ,99.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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