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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8.21 프라하의 봄과 그 이후

페이지 정보

작성자 자유로니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이름으로 검색 조회 2,335회 작성일 02-03-07 17:31

본문

작성일 : 1999/08/31 조회수 : 72

체코의 공산정권에게 8월21일은 항상 뜨거운 날짜였다. 1968년 여름 이날 바르샤바조약군이 프라하에 진입한 날이기 때문이다. 매년 이날만 되면 정권은 초긴장상태에 들어갔다. 사태가 재현돼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그럼엗 1969년 첫주기 때 체코의 수많은 도시들에서 항의시위가 있었고, 폭력적으로 진압되었다. 이 해에도 5명이 사망했다. 이 첫주기때 쓰라린 교훈을 배운 정권은 이후 18년동안 이날 정부반대세력들의 집회를 금지했다.이 날만 되면 전국은 마비상태에 들어갔다.

1989.8.21에 들어서야 비로소 상황은 달라졌다. 프라하의 봄, 그러니까 외국군대가 침입한지 20주년이 되는 이해에 수천명의 시민들이 거리로 뛰쳐나가 자유르 외쳤다.

물론 이때도 정권은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경찰은 시위시민들을 무자비하게 해산시키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런 명령을 내릴만한 충분한 이유를 정권은 갖고 있었다. 고르바쵸프의 "페레스트로이카"의 바람이 불면서 헝가리와 폴란드에서 공산당의 권력독점을 깨부수려는 움직임이 거세게 일고 있었기 때문이다.

국내정치상으로도 정권은 곤혹스런 상황을 겪고 있었다. 20주기가 오기 몇주전에 반대저항인사들은 처음으로 공산당지배의 철폐를 요구하는 문서에 대한 광범위한 지지를 획득할 수 있었다. 약 3만명의 시민들이 이 선언문서에 서명했다. 서명자중에는 유수한 학자와 예술가들이 망라되었다.

총서기 밀로스 야케스는 고립무원의 상황에 처했다. 그가 "가끔씩 울타리를 지키는 보초처럼 고독하다"고 한 말이 테이프에 녹음되어 그만 시중에 유통되면서 전국에서 웃음거리로 삼을 정도였다.

물론 반대진영도 쉬운 상황만은 아니었다. 정권은 항상 거듭해서 "안녕과 질서"를 외쳤으며, 이를 저해하는 움직임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대처하겠다고 위협하는 상황이었다. 당시 천안문 사태의 비극적인 대량학살도 시민들을 주저하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거기다가 세대간의 갈등도 있었다. 한때 77헌장운동의 대변인인 언론인 페투르스카 수스트로바는 이것을 다믕과 같이 묘사한다. "77헌장에 서명한 젊은이들은 급진적이었고 항의시위를 벌여햐 한다고 공공연하게 밝히고 나서는 상황이었지요. 그러나 바츨라프 하벨은 젊은이들이 정권의 속성을 너무 모른다면서, 위험한 상황이 예상된다고 경고했습니다."

이처럼 반대진영내에서의 이견이 좁혀지지 못해 결국 공개적으로 권고안을 밝히는 정도로 낙착되게 되었다. 대부분의 저항인사들은 최소한의 것에 합의하는데 만족해야 했다. 즉 그들은 8.21일 도심지에서 이리저리 거닐다가 오후 5시에 2분간 서서 묵념을 하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도 하벨은 이에 반대해서 외국방송을 통해 시민들에게  이날 거리로 나서는 것을 피할 것을 촉구하고 나섰다.

정권이 자신의 위협이 먹혀들지 못했음을 발견하듯이, 이 근심많은 극작가는 자신의 그러한 촉구가 거의 먹혀들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했다. 엄청난 경찰상주에도 불구하고 프라하의 벤쩰스광장에는 수천명의 시민들이 모여 들어서 "우리는 자유를 원한다" "폴란드여 영원하라"와 같은 구호를 외쳤다. 이 군중속에는 헝가리의 저항인사들까지 연대의 표시로 참가해 섞여 있었다.

마침내 경찰과 진압군이 투입되어 시위자들은 방망이로 해산시켰고 약 160명을 체포했다. 밤늦게까지 도심에서는 양측의 충돌이 있었다. 경찰은 많은 혐의자들을 이미 시위전에 체포했다. 페트라 플라칵은 당시 자신도 시위에 무지 애를 썼지만 전혀 벤쩰스광장으로 접근할 수가 없었다고 회상할 정도로 경비는 삼엄했다.


(SZ 99.8.21)
자유를 외치는 시민에 정권은 경찰폭력으로 화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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