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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코소보 사태의 진원지, 암젤펠트 전투

페이지 정보

작성자 고스라니이름으로 검색 조회 2,745회 작성일 02-03-07 17:22

본문

작성일 : 1999/04/12   조회수 : 105

한국인이 반일 감정을 가지게 된 것은 언제부터일까. 아마 임진왜란을 훌쩍 지나서 왜구가 들끓던 고려 말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테니, 14세기쯤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럼, 혐일 감정은 그 역사가 자그마치 6백여년이 되는 셈인데, 우리는 아마 이런 역사의 질곡을 21세기까지 지고 갈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미움은 미움을 받는 사람 뿐 아니라 미워하는 사람에게도 일종의 부채이다.

지금 발칸에서 들려오는 포성도 실은 6백년 묵은 역사의 부채라고 할 수 있다. 1989년에 코소보에 있는 한 들판에 백만명 이상의 세르비아인이 모여들었다. 물론 밀로세비치 대통령도. 거기서 밀로세비치는 "코소보는 다시 세르비아에 속하게 되었다"고 선언했다. 아마도 이 날이 지금의 코소보 사태가 시작된 날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1989년은 역사가들이 암젤펠트(Amselfeld) 대첩이라고 부르는 전쟁의 600주년이다. 이 전투에는 외적에 항거해 조국을 방어해 온 세르비아인들의 자존심과 긍지가 서려있다. 그리하여 이 전투에 대한 무수히 많은 전설이 구전되어 오고 있으며 이 전쟁의 영웅인 라자르(Lazar) 왕자는 우리나라의 이순신처럼 민족 정신의 한 구심점으로 작용하고 있다.

1389년 6월 28일, 지금 유고슬라비아 신연방의 코소보주 주도인 프리스티나 북부 지역에 터키인들과 세르비아인들이 각각 진을 쳤다. 세르비아 진영에는 보스니아, 독일, 헝가리 등이 가담했고, 세르비아의 라자르 왕자가 이들을 이끌었다. 당대의 대제국이던 오스만 투르크는 13세기에 소아시아 지방을 완전히 정복하고 14세기에 들어서 유럽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는데, 이를 위해서는 코소보 지역을 반드시 통과해야만 했다. 오스만 투르크의 술탄은 1359-1371년 사이에 발칸 지역에 침입해 불가리아, 트라키아, 마케도니아 등을 차례차례 점령했다.

오스만 투르크의 유럽 침입이 더 심각한 양상으로 전개되고 6백년에 걸쳐 역사에 깊은 상흔을 남기고 있는 것은 이 갈등이 단순히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것일 뿐 아니라 종교적인 것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즉 오스만 투르크는 이슬람 국가였고 세르비아는 정교를 믿는 국가였으니, 이는 역(逆) 십자군 운동이라고나 할까? 그러니까 유럽 전체에 반감과 공포를 불러일으켰음은 명약관화하다. 종교가 21세기에도 문화 간의 충돌에 있어 가장 핵심적인 갈등 요소가 될 것이라는 말이 세르비아 정교도들이 이슬람 교도들에 대한 '인종 청소'을 자행해온 보스니아나 지금 코소보 사태로 입증되는 것이라면, 인류는 21세기에 어쩌면 이데올로기적 대치보다 더 근본적이고 무서운 갈등을 겪게 될지도 모른다.

한편 세르비아는 14세기에 도나우강에서 에게해까지 영토를 확장, 강력한 지역 강국으로 성장해 왔지만, 당시 세계 최대 제국이던 오스만 투르크에게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세르비아는 지금의 코소보 지역을 제외하고 자신의 영토를 모두 터키인들에게 내주어야만 했다. 지금 세르비아인들이 코소보 지역을 성지화하는 것은 여기에도 한가지 이유가 있다.

코소보 지역은 지형적으로 높은 산들이 진입로를 가로막고 있는 요새와 같다. 그러나 오스만 투르크군은 파죽지세로 산맥의 좁은 길을 지나 코소보 땅 안으로 쳐들어왔다. 그리하여 1389년 6월 세르비아의 운명이 달린 한판 승부가 암젤펠트에서 벌어지게 된 것이다. 이 전쟁이 누구의 승리로 끝났느냐는 의견이 분분하다. 세르비아측은 자신들의 승리를 주장하고 다른 쪽에서는 오스만 투르크가 이겼다고 한다. 어떻게 이런 중대한 전투의 결과에 대해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는지 사실(史實)과 사실(事實)의 간격에 대해 실감할 뿐이다.

어쩌면 이 전투의 결과는 그리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세르비아는 그후 70년이 지난 1459년에 오스만 투르크에 병합되었고 1911년 발칸 전쟁에서 독립을 쟁취할 때까지 450여년이나 오스만 투르크의 지배를 받았다. 세르비아가 암젤펠트 전투에서 일단은 오스만 투르크를 막아냈다면 이 전투가 세르비아의 승리였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결국 세르비아는 터키인들의 손에 떨어질 운명이었던 것이다.

극적인 이야기가 있다. 이 전쟁을 이끌었던 두 전쟁 영웅들이 둘 다 이 전투에서 전사했는데, 세르비아의 라자르 왕자는 오스만 투르크 진영에 직접 침입, 술탄을 피살했고, 그 다음 터키인들에게 붙들려 처형되었다는 것이다. 이 정도면 라자르 왕자가 성웅으로 떠받들여지는 이유를 알만 하지 않은가! 전쟁과 운명을 같이했다는 점에서는 이순신과 마찬가지이지만 그 죽음이 가진 극적인 요소는 오히려 한 발 더 나아간다. 라자르 왕자는 곧 세르비아 정교회로부터 성인으로 추대되었고 그후 지금까지 세르비아인의 순교자로 추앙받고 있다.

세르비아인들은 이 전쟁을 수많은 시와 전설을 통해 예찬해 왔다. 전쟁터의 부상자들에게 차가운 물과 붉은 포도주로 원기를 회복시켜주던 한 소녀의 이야기가 있고, 라자르 왕자의 비였던 밀리카의 영웅적 행동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이야기가 좀 빗나가지만, 친구 말에 의하면 역사적으로 중국이 몽고인들의 민족의식을 말살하기 위해 내몽고에서 자행했던 잔악한 정책은 일본인이 한반도에서 저질렀던 행위들을 훨씬 능가하며 따라서 몽고인들의 반중 의식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고 한다. 그런 몽고 사람들이 징기스칸의 이야기를 할 때면 눈이 반짝거리고 주먹을 불끈 쥔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수백년간 오스만 투르크의 지배에 시달려 온 세르비아인들이 암젤펠트와 라자르 이야기를 할 때도 가슴이 쿵쾅 쿵쾅 뛰고 혈압이 저절로 올라가는 것이 아닐까? 그러니까 코소보 문제는 더 복잡한 일이 되어 버렸다.

과거 암젤펠트에서 이슬람 세력에 대항해서 싸우던 세르비아의 민족적, 종교적 영웅 전설이 이제 같은 곳에서 코소보의 이슬람계 주민들을 향해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해 본다. 종교는 분쟁을 일으키는 종합적인 원인들 중의 한 가지 부분에 불과하겠지만, 의외로 끈질기고 근본적인 부분일 수도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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