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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1866년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전쟁

페이지 정보

작성자 배승일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조회 3,710회 작성일 02-03-07 15:03

본문

■  1.독일연방(Germanic Confederation)과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대결


독일연방은 1815년에 성립되었는 데, 독일어를 사용하는 거의 모든 주를 포함함으로써 적어도 민족적인 면에서 완벽한 독일 연합을 형성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오스트리아는 19세기 전반까지는 연방의 일에 압도적인 힘을 행사하였으나, 구성원을 통치하는 데는 거의 영향력을 미칠 수 없었다. 심지어 가장 작은 독일의 주들조차도 독립을 완벽하게 유지하고 있었고, 프로이센 ( 독일 지배에 있어서 오스트리아의 유일한 강력한 라이벌 )이나 오스트리아에 의한 연방의 지배를 막기 위해 서로 연합하였다.


19세기 중반쯤에 이러한 독일의 세력 균형은 정치의식 소유자들 중에서 민족 감정이 발흥함으로써 위협을 받게 되었다. 그들은 독일 국민이 하나의 정부에 의해 완전하게 통일되기를 바라였다. 이탈리아처럼, 독일에서도 민족주의자들은 통일의 방법과 바람직한 정부 형태에 관하여 서로 의견을 달리하였다. 좀 더 강력한 연방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고, 오스트리아 혹은 프로이센 지도하에 연합할 것을 주장하는 자도 있었으며, 또한 범게르만 연합을 주장하는 자도 있었고 국민의회를 구성할 것을 주장하는 자도 있었다..


1848년의 혁명 동안, 독일연방은 슐레스비히-홀스타인을 둘러싼 덴마크와의 전쟁에서 독일의 민족주의를 효과적으로 지지할 수 없었기 때문에 불신되어졌다. 같은 시기에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에 의한 독일 통일의 시도는 실패하게 되었다. 그 결과 1850년 이후 민족주의자들은 통일능력이 있어 보이는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에 주의를 기울였다.


이러한 경쟁관계 속에서, 오스트리아는 오랫동안의 우월권을 점유해 온 이점을 지니고 있었다. 오스트리아는 기존의 연방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리고 카톨릭 국가였기 때문에 남부 독일의 카톨릭 교도들의 지지를 받았다. 무엇보다도,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보다 좀 더 강력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고 자원이 더 풍부하였다. 오스트리아의 약점은 제국의 다민족적 성격에 있었다. 오스트리아는 최근 혁명의 위기에서 겨우 살아 남을 수 있었고, 그것의 피지배자 다수는 거의 독일인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비록 오스트리아의 카톨릭교 신봉은 남부독일의 카톨릭교도들에게 호감을 샀을지 모르지만, 북부의 프로테스탄트들과는 유리되었다.


프로이센은 독일인구의 거의 대부분을 지배하는 이점이 있었고 , 독일 자유주의자들이 수용할 만큼 그것의 독재적인 전통을 개혁하였으며, 프로테스탄티즘은 독일 프로테스탄트들을 끌어들일 자산이었다. 프로이센의 가장 큰 힘은 관세동맹(Zollverein)을 통한 독일 경제의 지배에 있었다. 이러한 급속한 경제 발전, 특히 라인란트 지방의 경제 발전은 그것의 가장 큰 힘이었다.



■ 2.1866년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전쟁

비스마르크가 1865년 Gastein협약을 정했을 때, 그가 독일의 주도권을 두고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협약 후, 그의 정책은 대개 유연했고, 가능한 방법을 다양하게 시도해 보았다. 그는 오스트리아를 설득해서 프로이센이 Main의 북부지역을 지배하면서, 독일의 지배권을 분할하는 것에 동의하도록 했다. 또한 그는 독일민중들과 독일 소국 정부가 프로이센의 지도를 평화적으로 받아들이도록 설득하는 열렬한 정치유세를 행하였다. 동시에, 그는 오스트리아를 고립시키고, 강대국의 지지를 획득함으로써 앞으로 일어날 분쟁에서 승리할 토대를 쌓았다.


러시아와의 관계는 어렵지 않았다. 러시아인들은 독일이 하나의 권력에 의해 지배되는 것으로 보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러시아인들은 프로이센의 완벽한 승리를 바라지 않았다. 더군다나, 러시아인들은 독일을 약화시킬 것 같은 전쟁을 환영하였다. 알렉산더 2세는 최근 폴란드 반란때 프로이센의 지지에 감사했고, 폴란드 반란과 크림전쟁 때 오스트리아의 태도에 분개했었다. 황제의 태도를 확인한 후 ,비스마르크는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서 적어도 처음 단계에서는 러시아의 중립을 기대할 수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덴마크 전쟁으로 중요한 이익이 위태로운 가운데 있을지라도, 활발하게 간섭을 하지 않은 영국은 독일에서의 분쟁에도 가만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프랑스의 태도였다. 나폴레옹 3세를 대할 때, 비스마르크는 훌륭한 외교적인 게임을 했다. 그는 프랑스가 멕시코 원정의 실패를 만회하고, 국내의 체제 비평을 멈추게 하기 위해서 국제적인 승리를 절실히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았다. 나폴레옹은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전쟁을 원했는 데, 이 전쟁은 두 강대국의 힘을 고갈시켜서, 프랑스에게 라인란트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시킬 수 있는 기회를 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1865년, 10월 비스마르크는 Biarritz에서 나폴레옹을 만났는 데, 그는 거기서 만약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전쟁에서 나폴레옹이 중립을 약속하면 라인란트를 프랑스 영토로 받을 수 있다고 넌지시 말했다. 나폴레옹은 기꺼이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나폴레옹은 다만 혹시 프랑스가 이 전쟁에서 충분히 이익을 얻기 전에 프로이센이 패하지 않을까 하고 걱정했다. 왜냐하면, 그의 군사 관측자에 따르면 덴마크 전쟁에서 오스트리아 군대가 프로이센의 군사력을 훨씬 능가한다고 보고하였기 때문이다. 이 두 나라의 세력균형을 위해 나폴레옹은 비스마르크가 통일의 방편으로 오스트리아로부터 베네치아를 빼앗을 기회를 찾고 있는 이탈리아 왕국과 동맹 협정을 맺도록 도와주었다. 독일에서의 전쟁 결과가 어떠하든 지간에 승리를 확신한 나폴레옹은 1866년 6월 12일에 오스트리아와 비밀조약을 체결하였다. 만약 오스트리아가 승리하면, 프랑스에게 베네치아를 양도할 것이고, 아마도 프랑스의 보호령이 될 라인강 주변의 신생독립국가 성립을 승인할 것을 오스트리아는 동의했다.


1866년 봄, 비스마르크는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을 피할 수 없다고 확실히 결심했다. 독일에서 프로이센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그의 시도는 독일 소국들로부터 강한 지지를 받고 있는 오스트리아에 의해 계속 저지되었다. 그 사이 비스마르크는 외교적인 만반의 준비를 하였고, 프로이센 군대는 재정비, 근대화되었다. 1866년 4월 8일 이탈리아와 동맹을 맺었기 때문에 비스마르크는 3달 이내에 오스트리아와 전쟁이 일어난다면 이탈리아의 지지를 받을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이탈리아와 동맹을 맺은 직후, 비스마르크는 독일 정세를 위기로 몰아넣기 시작했다. 오스트리아인들은 도전을 받아들이는 것을 꺼려하지 않았다. 오스트리아인들은 그들의 군대가 우수하고, 독일 소국들의 지지를 받을 것이라고 확신했었다. 1866년 6월 초, 오스트리아의 홀스타인 정부의 재조직 노력을 구실로, 비스마르크는 오스트리아가 Gastein조약을 어기고 프로이센 군대를 공국에 파견했다고 선언했다.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이 홀스타인 연방 영토를 침입하였다고 하면서 독일 연방 의회를 설득해서 군대를 동원하려고 하였다.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은 이제 확정되었고, 독일 소국들은 오스트리아와 공동전선을 펴는 것을 주저했다.


프로이센의 패배를 예언한 어떠한 사람도 프로이센의 새 군대를 고려에 넣지 않았다. 훈련과 재무장한 프로이센의 군대는 이제 오스트리아를 능가하였다. 프로이센의 군사도로망은 군대의 기동성을 높였다.


프로이센은 또한 훌륭한 지도력을 지니고 있었다. 참모총장 몰트케(Moltke)는 대담한 전략을 세웠다. 그 중에는 대규모 군사 작전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철도와 전보와 같은 기술적인 혁신도 있었다. 한 지점에 군사를 집중하는 전통적인 전략을 고집 하는 대신, 그는 군대를 분할하였는 데, 적절한 시기에 한 곳에 모을 수 있는 곳에 배치하였다. "군사 지도자의 가장 주요한 일은 적시에 군사를 모을 수 있는 가운데 군대를 분할 배치하는 것이다." "


전쟁초기부터 프로이센은 우위를 차지하였다. 전쟁선포 직후인 1866년 6월 15일 프로이센 군대는 오스트리아 편인 하노바, 삭소니를 침입하였다. 동시에 프로이센 군사력 대부분은 오스트리아에 대항하기 위해 전진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의 동맹국인 이탈리아의 동시 침입에 대항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군대를 분할하여야 했다. 6월 29일 Langensalza전투에서 패배한 후하노바 군대는 항복했다. 4일 후 1866년 7월 3일 오스트리아 군대는 Sadowa전투에서 결정적으로 패배했다. 단 2주만에 프로이센은 완벽한 승리를 획득했다. 이것은 역사상 가장 짧고 결정적인 전쟁 중에 하나였다.


몰트케의 전략은 그의 군대의 압도적인 승리에도 불구하고 군사전문가들에 의해 많은 비평을 받았다. 프로이센의 승리는 needle gun과 프로이센 군대의 우수성, 오스트리아 사령관의 무능과 운 때문이었다. 단지 몇 명의 군사전문가들이 몰트케의 군사 지휘의 중요성을 인정했다. 비록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이 어쩔 수 없이 군대를 분할했어야 했을 지라도, 각 편에서는 거의 군사의 반을 Sadowa 전장에 파견했다. 전통적인 책략에 따르면 군대를 포위, 격파하기 위해서 그렇게 많은 군사를 배치한 몰트케의 방법은 군사적인 혁신이었다.


국제관계에서의 비스마르크의 균형 감각은 Sadowa전투 이후 시기보다 더 분명한 적은 없었다. 전쟁 전, 비스마르크는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 대한 국왕과 군사 전문가들의 의구심을 극복해야만 했었다. 이제 그는 그들의 승리를 부당하게 이용하여 오스트리아 영토를 합병하고, 비엔나로의 행진을 계획하는 그들의 욕망을 억제해야만 했다. 한 편에서는 러시아, 다른 편에서는 프랑스 때문에, 이들 강대국들이 간섭할 기회를 주고, 오스트리아와 다른 독일 소국들을 철천지원수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 프로이센은 전쟁을 연장할 수 없었다. 전재에 있어서 비스마르크의 가장 큰 목적은 독일정세에 대한 오스트리아의 간섭을 배제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목표는 오스트리아의 자존심을 손상하면서도 정치적으로 어떠한 목표도 성취하는 것 없는 오스트리아의 영토 합병과 비엔나로의 행진을 하지 않고도 실현될 수 있었다.


1866년 7월 26일 Nikolsburg임시 평화회의에 이어 8월 23일 Prague 최종 평화회의가 열렸다. 오스트리아는 모든 독일국가에 대한 영향력을 박탈당하였고, 옛 정체를 보유하고 있던 북부 독일국가들은 프로이센 지도하에 북 독일 연방으로 조직되었다. 패배한 남부독일국가들은 독립상태로 남았지만, 외국과의 전쟁 시 그들의 군대는 프로이센의 지도하에 둘 것을 허락하는 조약에 서명해야만 했다. 오직 프로이센의 요구를 거부한 하노바와 Hesse-Cassel의 통치자들만이 폐위되었고, 영토를 상실하였다. 이 지역들은 슐레스비히와 홀스타인과 프랑크푸르트 자유도시와 함께 프로이센에 합병되었다.

출처: http://rose0.kyungpook.ac.kr/~z971554/start.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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