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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종교 개혁(the Reformation)

페이지 정보

작성자 동영이네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이름으로 검색 조회 3,129회 작성일 02-03-07 14:56

본문

종교 개혁은 새로운 교회의 탄생임과 함께 교회의 분열을 의미하는 것이다. 1057년 우상 숭배의 문제로 Roman Catholic과 Greek Orthodox로 분열된 것을 최초로 생각할 수 있다. 대체로 동유럽에 전파된 정교회는 황제가 종교의 수장을 겸했다. 종교가 정치를 지배했던 중세의 가톨릭과 달리 종교가 정치의 지배를 받는 모습을 보였다.

그 후 1517년에 Protestantism이 로마 교회에서 분리된다. 그것은 다시 ①우파적, 보수적으로 톨릭의 성격을 강하게 가지고 개혁에 비교적 불철저했던 Luthern Church ②혁신적이고 가톨릭과 완전히 다른 종파를 성립했던 Calvin Church ③좌파로서 가장 과격했으며 자신들만이 진정한 종교 개혁으로 주장하였고 성경보다는 Inspiration(영감)을 중시하던 Ana baptist(재세례파)로 나눌 수 있다.

종교 개혁에 대한 평가 역시 다양하다. Protestant사가들은 이것은 새로운 정신의 부활(휴머니즘과 연관됨)이고 원시 종교(그리스, 로마와 연관됨)의 부활을 위해 꼭 필요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기본적인 시각과 함께 각 교파는 자신들의 역할을 강조한다. 더욱 중요하게 보고 있다. ①루터파의 경우, 루터와 그의 개인적인 업적을 찬양했고(개혁 정신이 불철저했으므로 후에 다시 가톨릭으로 바뀌게 된다) ②개혁 교회파, 칼빈파의 경우는 칼빈, 쯔빙글리, 녹스 등의 업적을 높이 평가 ③루터파와 칼빈파를 가톨릭과 마찬가지로 싫어하는
개혁파인 재세례파는 그들의 주장을 종교 개혁의 정신적 기원으로 삼았으며 ④가톨릭에서는 종교 개혁을 이단이라고 주장하고 이것은 없었어야 한다고 하면서 부정했다(그러나 현대에 이르러 진보적인 가톨릭 사가들은 프로테스탄트는 이단이 아니라 분리된 형제들이라고 말하여 신  구교의 융합의 의도를 보이고 있다)  ⑤종교 개혁을 신앙의 차원이 아닌 다른 시각에서 보는 세속(secular) 학파는 종교보다는 경제적, 사회적 변화에 따른 정치적, 민족주의적 혁명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배경  동기
종교 개혁의 본래 의미를 중세 크리스트교의 세속화와 교회 제도의 쇄신에 근거하여 마르틴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의 제기를 그 시점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밖으로 노출된 현상이었다. 그 요인은 훨씬 이전부터 야기되고 있었다. 로마 교회의 세속화에 대한 저항과 비판이 중세 말에 일어났기 때문이다. 1076년, 카놋사(Canossa)의 굴욕, 십자군 운동의 실패 그리고 교항의 아비뇽 유수(1309-1379) 등이 그것이다.

그와 같은 상황에서 {제정론}(De Monarchia, 1310-2)에서 황제의 권위는 교회에 의해 위임되는 것이 아니고 신으로부터 직접 받아드리는 것으로 제국은 세속계의 최고라고 주장하는(카놋사의 굴욕 당시의 교황, 그레고리 7세와 상반) 단테(Dante Alighieri, 1265-1321)와 위글리프(John Wyclif, 1330-1384)와 후스(John Huss, 1470-1415) 등이 성서 중심을 주창하면서 교회 부패의 개혁 운동을 제기하였다.  

독일에서 먼저 일어난 이유
종교 개혁은 1517년 독일에서 시작되어 유럽 각국에 전파되었다. 비텐베르그(Wittenberg) 신학 대학의 성서 교수였던 루터(Martin Luther, 1483-1546)가 1517년 10월 31일, 95개조의 반박문을 제시한 것이 발단이었다. 그러면 독일에서 종교 개혁이 먼저 일어난 이유는 무엇인가?

당시 962년 이래로 신성 로마 제국(Holy Roman Empire)으로 불렸지만 실제는 약 360개의 연방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황제도 7인의 유력한 제후가 선거를 하여 선출되었기 때문에 황제의 권력은 취약했다.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남부의 발전에 비해 북부가 낙후되어 지역에 따른 차이가 현저했다.

그러한 후진성과 분열이 독일이 로마 교황에 대한 저항력을 가지는데 부정적인 작용을 하였다. 그 결과 당시 독일을 두고 '로마의 젖소'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즉 재정적 후원의 많은 부분을 독일이 담당했던 것이다. 중앙집권적 국민 국가를 수립한 영국과 프랑스의 경우 교황청에 대한 세금 공헌은 이적 행위로서 엄단되는 것과 상반되는 것이다. 그와 같은 상황은 당시 독일의 황제, 카알 5세(Karl Ⅴ, 재위 1519-56)가 친교황적이었다는 사실로 더욱 악화되었다.

루터의 95개조 반박문
교황 레오 10세(Leo Ⅹ, 1513-21)는 1517년 3월 라테란 종교 회의에서 투루크 전쟁을 위해 1/10세의 징수와 함께 성 베드로 성당의 개축을 위해 이른바 면죄부(indulgence)의 발행을 결의하였다. 면죄부는 중세 후반기에 십자군 종군자나 자선 행위자에게 교황이 발급하는 것으로서 죄, 그것도 비교적 가벼운 죄를 교회에 누적된 성자의 공덕으로 면제해 주는 것이며, 고행을 비롯하여 교회가 정한 일정한 속죄 행위를 수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중세 말에는 그것이 남용되기 시작하여 교황의 재정적 필요를 보충하는 방편으로 이용되고, 15세기에는 그 효능도 확대되어 연옥으로부터의 구제까지 포함되어 교회  내에서도 시비가 없지 않았다.

면죄부를 둘러 싼 시비는 마인쯔의 대주교 알브레히트(Albrecht)가 차입금(借入金) 변제를 위해 면죄부의 판매권을 얻어내면서 더욱 증폭되었다. 특히 수도사 테셀(Tesel)은 면죄부를 산 사람의 죄뿐만 아니라 그의 부모 친지의 영혼까지도 구원받는다고 선전하였다. 여기에 루터가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은 라틴어로 쓰여져 있었고 그 내용도 일반 대중보다는 학자들의 논의를 목적으로 하였다. 신앙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교황과 교회의 제도상의 문제를 제기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95개조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 다음해 봄에 독일어로 번역  인쇄되어 독일 전국에 배포되었다.

루터는 처음에는 이른바 면죄부의 남용만을 비판하였을 분 교황의 권위는 존중하고 있었다. 그러나 1519년에 당시의 유명한 신학자 엑크(John Eck)와의 라이프지히에서 공대 토론을 가지게 되었다. 그 때 그는 교회사 및 정통 교리의 연구 부족으로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루터는 일년간 연구를 하여 1520년에 3개의 팜플릿을 발표하였다. ①크리스트교 국가의 개선에 관해서 독일 민족의 귀족 계급에 보는 글 ②교회의 바빌론 유수 ③크리스트교 신도의 자유가 그것이다. 세 편의 논문은 로마 교회와의 분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의 팜플릿은 두 측면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①성서주의로서 신과 신자를 중개하는 것은 오직 성서뿐이며 교황과 성직자가 관여할 것이 아니라 오직 신의 말씀은 자기의 양심에 의해서 해석될 뿐으로 교회가 정하는 것이 아니며 ②어떠한 죄인이라도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게 되며 그러한 사랑에 의해 사람은 구원을 받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람은 오직 신앙에 의해서 의로울 수 있다는 것이다.

가톨릭 교의에 의하면 어떠한 인간을 구원하는 결정의 최고권은 신에 의해 그의 수제자인 베드로에게 부여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로마 교황정은 신으로부터 그 임무가 위촉된 신성한 조직으로서 교황권은 어느 누구로부터도 침범 당할 수 없었다. 그와 같은 주장이 루터의 주장에 의해 반박된 것이다. 신과 인간과의 관계와 교회 조직이 부정하는 것이었다.  

이에 로마 교황청은 루터의 주장을 반박하는 문서를 공포하고 루터를 파문했다. 신성 로마 황제는 1521년 루터를 보름스(Worms) 국회에 소환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나는 지금 여기에 서있다. 다른 어떠한 것도 할 수가 없다. 신이여 나를 도와 주십시오). 황제는 그에 대한 제국 법률의 보호 정지를 선언하게 되었다. 그는 삭소니選帝侯 프레드리히公의 보호 밑에서 바르트부르크 성에 은거하면서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는 한편 활판 인쇄를 이용한 성서 보급을 통해 독일어의 문체 통일과 독일 국민의 정신적 단합에 기
여하게 되었다.

이 무렵에 이르러 루터의 종교 개혁은 전국적으로 확대되기 시작했다. (西洋史槪論, pp.383-6 참조)

칼뱅의 종교 개혁
루터의 종교 개혁이 시작 된지 얼마 안 되는 1519년, 스위스의 쮜리히에서는 쯔빙글리(Zwingli, 1484-1531 )의 종교 개혁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는 루터파보다 더 철저하게 성경주의를 내걸고 성체 성사도 폐지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1531년 그의 개혁에 반대하는 삼림지대의 가톨릭 세력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쯔빙글리의 뒤를 이어 스위스에서 종교 개혁을 성공시킨 사람이 칼뱅(John Calvin, 1509-1564 )이었다. 그는 프랑스의 중산 계급 출신으로서 법률을 공부하다가 개혁 사상에 물들고, 1530년을 전후한 시기에 신의 계시를 받았다. 그러나 독일 황제에 대항하기 위하여 루터파를 적극적으로 지원하던 프랑스와 1세도 국내에서는 이를 철저하게 탄압하였기 때문에, 칼뱅은 스위스 바젤로 피신하여 쯔빙글리의 주장을 연구하면서 스스로의 사상을 체계화하여 {크리스트교 강요}(The Institutes of the Christian Church, 1536)를 저술하였다.  

{크리스트교 강요}가 발간된 1536년 칼뱅은 제네바로 들어가 그 곳에서 종교 개혁을 단행하고, 죽을 때까지 제네바를 종교적으로 지배하였다. 그의 지배는 일종의 신정 정치였으며, 축재와 오락적인 모임을 금지하고 극장도 폐쇄하는 등, 시민들에게 매우 엄격한 금욕적인 생활이 강요되었다. 그러나 칼뱅의 명성은 전유럽에 퍼져 각처로부터 그에게서 배우고자 하는 숭배자들이 모여들어 칼뱅을 '프로테스탄티즘의 교황'으로 불렀다. 그리하여 칼뱅의 새로운 교리는 유럽의 여러 곳에 널리 전파되었으며, 프랑스의 위그노(Huguenots), 네덜란드의 고이센(Geussen), 스코트랜드의 장로파(Presbyterians), 영국의 청교주의(Puritanism) 등은 다 칼뱅파(Calvinism) 계통에 속한다.  

칼뱅의 교리 중 가장 핵심적인 것은 예정설(Predestination)이다. 이에 의하면 인간은 죄악으로 타락함으로써 모든 정신적 선과 구제를 초래할 수 있는 것에 대한 의지 능력을 완전히 상실하였으며, 신은 스스로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하여 그 결의로써 어떤 사람들을 영원의 생명으로 예정하고, 다른 사람들은 영원의 죽음으로 예정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어떤 의미에서 무서운 교리이다. 그러나 이 교리는 그것을 받아들인 사람에게 역사상 보기 드문 영웅적 행동을 할 수 있는 힘을 주고, 그들의 교회를 '전투적인 교회'(ecclesia militans)로 만
들었다. 예정설을 받아들인 칼뱅교도들은 구제의 확신과 더불어 신에 의하여 선임되었다는 선민 의식을 가지고 신의 영광을 이 지상에 나타내기 위하여 현세로 향하였기 때문이다.  

영국의 종교 개혁
영국의 종교 개혁은 독일이나 스위스 등에 비하여 그 개혁의 동인이나 정신 및 결과에 있어 크게 다른 점이 있다. 왕권의 절대화가 유독 빨랐던 영국에서는 일찍부터 로마 교회로부터의 이탈 경향을 보여 왔고, 마침내 위클리프라는 선각자를 배출시켜 종교 개혁의 씨를 뿌려 놓았다.

위클리프의 파종은 180년 후, 헨리 8세(Henry Ⅷ, 1491-1547)에 의하여 1534년 수장령(Act of Supremacy)이라는 결실을 얻게 되었다. 불린(Anne Boleyn)과의 결혼을 위해 제기된 왕비 캐더린(Catharine)과의 이혼 문제를 둘러싸고 교황과 대결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켄트베리 추기경인 울지(Thomas Wolsey)를 반역죄로 파면하고 크랜머(Thomas Cramner)를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하고 그의 승인으로 이혼을 강행하였던 것이다.

그는 로마 교회로부터 이탈을 완성하여 정교의 실권을 아울러 장악하였을 뿐만 아니라 수도원을 해산시켜 그 토지를 몰수함으로써 국가 재정을 강화하고 젠트리(Gentry)에게도 혜택을 주어 그들과 긴밀한 제휴를 가질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헨리 8세의 개혁이란 로마교회에서의 분리만을 가리키는 것이요 결코 교의나 의식상의 개혁은 조금도 없었다.

영국의 종교 개혁은 엘리자베드(Elizabeth  Ⅰ, 1558-1603)에 의해 더욱 구체화되었다. 즉위 후 여왕은 신구 양교를 동시에 탄압하고 1559년 통일령(Act of Uniformity)을 발포함으로써 신구교를 절충한 영국 국교(Anglicanism)를 완성시켰다. 영국인의 종교를 독립적으로 창립한 이것은 영국 절대주의의 완성을 시사하는 것이다. 이후 국교의 강압으로 신교의 순수성을 지킬 수 없게 되자 청교도들은 신천지로 종교적 자유를 찾아가게 되었다.

종교 개혁의 결과
종교 개혁에 대하여 공정한 객관적인 태도를 가진다는 것은 힘드는 일이다.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가 종교 개혁에 대하여 정반대의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은 차라리 당연한 일이라고 하겠다. 이를테면 가톨릭의 입장에서는 프로테스탄트의 운동은 종교 개혁이 아니라 '반란'(revolt)이며, 가톨릭의 개혁이야말로 참된 종교개혁이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의 입장에서 본다면 가톨릭의 개혁은 '반동 종교개혁'(Counter-Reformation)인 것이다. 이렇듯 명칭부터 다르니 세부적인 내용에 이르러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따라서 종교 개혁의 결과를 논하
는 경우 입장에 따라 서로 다른 다양한 의견이 나오리라는 것은 짐작하고 남음이 있다. 그러므로 가능한 한 역사적인 입장에서 공정하게 객관적으로 살피도록 노력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학자에 따라서는 프로테스탄티즘이 신앙을 내면화하고 심화시켰다고 주장한다. 개신교가 가톨릭 교회의 교리나 의식의 번잡함을 피하고, 신앙과 그것의 근거로서 성경을 내세우며, 원시 크리스트교로 돌아가고자 한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종교 개혁 당시의 가톨릭 교회나 성직자의 타락과 세속화를 생각한다면 어느 정도 긍정이 가는 견해인 것 같다. 그러나 공정하게 보아 개신교의 신앙이 가톨릭의 그것보다 더 참되고 내면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지는 의심스럽다.

이 보다 좀 더 타당성이 있어 보이는 종교 개혁이 유럽 근대 사회의 가장 중요한 이데올로기라고 할 수 있는 개인주의와 민주주의와 더불어 자유주의의 중요한 구성요소인 종교적 관용을 초래하고 발전시켰다는 견해이다. 개신교 전체에 공통되는 개인의 신앙을 가장 중요시하는 점이라든가, 캘비니즘 계통의 교회조직 등을 본다면 종교 개혁이 개인주의와 깊은 관련이 있고, 민주적인 발전에 어느 정도 공헌한 점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종교 개혁이 개인주의나 민주주의의 원천이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지나친 견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종교적 관용에 이르러서는 전혀 해당되지 않는다. 루터나 칼뱅은 다 같이 편협하고 배타적이었으며, 가톨릭에 대해서는 물론이지만 같은 개신교내의 다른 교파에 대해서 이를 서로 용납하려 하지 않았다. 종교 개혁의 1차적이고 가장 두드러진 결과는 각 교파간의 대립과 배척, 그리고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간의 치열한 무자비하고 잔인한 종교적 대립과 분쟁이었다. 사실 루터의 종교 개혁이 일단 성취된 후, 약 1세기 동안은 바로 종교 전쟁시대였던 것이다. 신, 구교를 포함한 각 교파간의 무자비한 박해와 피비린내나는 살육을 거듭하고 지친 끝에 종교적 관용은 서서히 자리를 잡게 되었으며, 그것도 국가의 정치적인 배려에서 취해졌다.

새로운 프로테스탄트교회의 성립과 그 내부에서의 끊임없는 새로운 교파의 발생은 로마교황을 중심으로 유지되어 오던 크리스트교 세계의 통일을 파괴하고 크리스트교 세계의 분열을 가져오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로마 제국의 보편적 이념을 계승하였던 중세 가톨릭 교회의 보편적 이념도 현실적으로 파괴되고, 이념상으로도 사멸하였다. 이제 종교적으로 또한 정치적으로 통일된 유럽 세계라는 이념은 사라지고, 국가가 역사의 전면에 나서고, 교회는 좋든 싫든 점차로 그 그늘에 아래애 있게 되었다.

이러한 결과는 반드시 종교 개혁자가 본래 의도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크리스트교 세계의 통일의 파괴와 크리스트교 세계의 분열을 결과적으로 중세 말 이래의 각 분야에서 세속적인 발전을 촉진시키고 강화시켰다. 이제 종교는 세속 세계에 대한 지배력이나 통제의 힘을 상실하고, 점차로 개인의 영혼의 문제로 국한되게 되었으며, 이는 어떤 의미에서는 그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가게 된 것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맥락에서 종교 개혁은 국가 중심의 세속적이고 현세적인 유럽의 근대 세계의 성립과 발전에 간접적으로 공헌하였다고 할 수 있겠다.

끝으로 일부 프로테스탄티즘, 특히 캘비니즘은 크리스트교적인 금욕을 수도원으로부터 '생활의 장터'로 끄집어 내어 세속적인 일상생활의 개조를 시도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근대적인 직업윤리와 새로운 금욕적인 생활 윤리가 탄생하게 되었다.  

직업 윤리  
어느 시대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傳統社會에서는 사회 전체가 하나의 有機體로 간주어 왔다. 따라서 각 개인은 이 유기체의 구성 분자, 즉 하나의 세포로 비유되기도 한다. 이러한 입장에서 볼 때, 직업 윤리는 하나의 신분 윤리로서 개인은 자기의 직업을 잘 지키는 것이 사회 전체에 봉사하는 길이고 나아가서는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다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전통 사회에서의 신분이나 직업은 대부분 세습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직업 선택의 자유는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따라서 개성의 신장을 도모한다던가 적성이나 능력에 맞는 일은 거의 무시된 채 신분 계급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가문과 사회에 대한 기여라는 측면에서 오직 봉사만이 강요되었던 것이다. 막스 베버(Max Weber)는 이러한 직업 윤리를 근대 자본주의 사회의 禁慾的 職業倫理와 구분해서 有機的 職業倫理라 불렀다.

직업을 생물체의 여러 기관이나 부분에 비유할 수 있다. 그것들을 구성하는 세포로서의 기능을 다하는 것이 각 개인에게 주어진 직업의 임무라고 유기적 직업 윤리는 해석한다. 하나의 유기체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그 유기체의 모든 분야에서 맡은 바 기능을 충실히 수행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사회도 각자가 맡은 바 직책을 충실히 이행할 때만 비로소 건전한 사회가 이룩되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有機的 職業倫理는 개인이 직접적으로 속해 있는 집단에 공헌하게 되고 간접적으로는 사회 전체의 안녕과 번영에 이바지하게 되는 것이다. 유기적 직업 윤리에서는 개인은 직업을 통해 개성을 발휘하며 자아를 실현시킨다는 목적 의식을 가져서는 안되며 오직 사회 전체를 위해 희생하고 봉사한다는 입장을 취해야 한다. 또한 직업은 전통적으로 정해진 방식에 의해 행해져야 하며 개인의 창의성이나 능력보다는 윗사람에 대한 忠誠과 秩序를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러한 직업관에 의해 뒷받침되던 유기적 직업 윤리는 전통 사회의 붕괴와 더불어 자취를 감추어야만 했다. 資本主義는 사유재산, 경제활동의 자유, 영리 추구를 본질로 삼고 합리적 사업 경영에 의해 끊임없이 이윤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이윤을 계속해서 창출하지 않으면 그 존재 가치를 상실하고 만다. 이러한 입장에서 자본주의를 규정할 때 자본주의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미 존재했던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서양의 자본주의는 다른 지역에 비해 양적인 측면에서 유례없는 발전을 해 왔을 뿐만 아니라 이를 수행하는 과정에 있어서도 유형이나 방법 등이 딴 지역에서 찾아볼 수 없는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베버는 그것은 바로 노동력의 합리적 조직에 기초한 자본주의라고 지적한다. 그는 또 근대 자본주의의 기원을 근대 자본주의 정신에서 찾고 있다. 근대 시민계급이 주로 프로테스탄트 속에서 발견된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근대의 기업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사람들은 금욕주의의 이념을 가지고 성실히 일해 온 사람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금욕주의자들은 절제 있는 생활을 영위하여 과시욕을 갖지 않으며 현란한 생활이나 일상적인 쾌락에 탐닉하는 태도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칼뱅주의적 프로테스탄트들은 자기 직업에 충실함으로써 하느님께 봉사한다고 생각하였다. 카톨릭의 수도원이나 교회 안의 내적 금욕주의가 프로테스탄트에 의해 세속 생활에로 전이되기 시작했고, 도덕적 훈련의 수단이 된 것이다. 세속을 떠난 수도승이 가장 엄격한 규율에 인생의 전부를 봉헌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제 칼뱅주의자들은 세상을 떠나는 것이 아니고 오로지 세상 안에서 자신을 엄격하게 다스려야만 했다. 이들은 세속의 영역에서 엄격한 규율의 삶을 영위하는 것이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확신을 가졌다.

베버는 청교도들의 생활 양식에서 다음과 같은 경제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있었다는 몇 가지 이유를 들고 있다("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의 정신"). 첫째로 금욕적 생활은 소비를 억제하는데 크게 이바지했다는 것이다. 중세 귀족들의 낭비적 생활에 대한 반항으로 감각적 향락을 거부한다는 것이다. 생활을 즐기는 데에는 비용을 최대한도로 억제해야 하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소비적인 요소를 엄격히 배제하였으며, 근검절약의 생활 태도가 최상의 미덕이었던 것이다.  

둘째로 이윤 획득을 정당화한 것이다. 이러한 직업관에 힘입어 청교도주의가 직업에 열성적인 활력을 불어넣어 생산이 크게 증가되었다. 이제 재산의 축적이나 이윤의 획득이 전통적인 오명으로부터 해방되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한편에서는 소비를 엄격히 규제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합리적인 생산 방법으로 획기적인 재산의 축적이 뒤따랐다.  

셋째로 이윤은 소명의 충실한 이행이며 하느님이 부여하는 은총이라고 보았다. 이는 직업의 성공적인 징표로 간주되어 왔고, 자본가는 언제나 하느님의 심부름꾼으로서 은총을 받은 자다. 자본을 축적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교회나 사회 전체를 위해 사용해야 할 것을 시사하고 있다.  

넷째로 모든 사람을 위해 근면해야 한다는 것이다.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는 가르침은 소비와 사치의 풍조를 제한하게 되었고 아울러 자본의 증가를 가져온다고 하였다. 계속적인 노동은 저축을 촉진시켰고 저축의 촉진은 자본의 축적이라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와 같이 노동은 하느님께 대한 봉사이다. 하느님의 은총을 얻기 위해서는 꾸준한 노력이 필요하며 결코 태만은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충동을 억제하기 위해서는 항상 근면해야 하며 쾌락의 추구나 자신의 탐닉을 철저히 배격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이윤을 기꺼이 사용하는 태도가 절실하게 요청되는 바, 이러한 금욕적 프로테스탄티즘의 태도를 베버는 '禁慾的 職業倫理'라고 불렀다.  

이 금욕적 직업 윤리는 유기적 직업 윤리와 같이 국가 사회에 헌신하고 인간 질서에 한 몫을 담당하고 있지만 이 윤리는 직업을 통해 하느님께 봉사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한다. 그리고 금욕적 직업 윤리가 유기적 직업 윤리와 다른 또 하나의 특색은 일에 대한 헌신이 어디까지나 자발적이라는 점이다. 유기적 직업 윤리에서의 헌신적인 봉사는 전체를 위한 자기 부정적이다. 자신의 이익이나 개성까지도 무시되는 입장에서 전체라는 사회적 유기체 속에서 작은 세포로서만이 활동할 수 있는 숙명적인 운명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 정해진 직업으로 만족해야 했다. 이에 반해 금욕적 직업 윤리는 금욕이 지니고 있는 의의가 보다 적극적이다. 전념해야 할 직업 활동에 방해되는 요인들, 즉 나태심, 이기심, 소비성, 무절제, 공명심 등과 같은 인간의 약점을 과감히 제거하는 것이 이 경우의 금욕이다.

또한 금욕적 직업 윤리는 집단 사회와 개인과의 관계를 전체와 개체라는 고정적 개념으로 파악하려 하지 않는다. 개인은 직업 선택의 자유가 완전히 보장되어 있으며 자유롭게 직업을 변경할 수 있다. 유기적 직업 윤리에서처럼 조직이나 집단 속에 하나의 부품처럼 숙명적인 희생을 요구하지 않는다. 개성의 발휘가 우선되기 때문이다. 금욕적 직업 윤리는 인간이 감정을 억제하고 일에 성의를 다할 것을 바라고 있지만, 일 자체를 통하여 자아를 실현하고 자신의 개성을 최대한도로 발휘할 수 있도록 한다.
출처:http://myhome.netsgo.com/ksn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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