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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독일통일에 대한 또다른 글

페이지 정보

작성자 jayuroni이름으로 검색 조회 2,542회 작성일 02-03-07 14:52

본문

다음은 독일통일에 대한 또다른 글입니다. 비교적 앞의글보다 짧습니다.
출처: http://rose0.kyungpook.ac.kr/~z971554/start.htm
                      
    독일의 통일
                                                      
                                              배승일

통일 이전의 독일에는 1815년에서 66년 사이에 "독일 영방(Deutscher Bund)"이 존재했고 그 이전에는 962년부터 1806년까지 제 1제국이라는 Holy Roman Empire가 있었는데 내부적으로는 많은 영방국가로 분열되어 있었다. 그리고, 1871년에 통일이 되어 1919년까지는 비스마르크 제국이 유지되었는데 이것을 제 2제국이라 하고 1920년~1932년 사이에는 Weimar공화국이 있었으며 1933년부터는 Hitler에 의해서 제 3제국이 성립된다.

비인 회의 후 독일에는 39개의 영방국가가 형성되는데 각 영방은 독자적인 외교 및 정치 활동을 폈으며 각 영방에서 파견한 군대로 영방군을 조직하였다. 이 중 프러시아는 비인 회의에서 라인 강 연안에 위치한 비옥한 Westphalia를 얻게 되는데 통일문제에 관심을 가진 프러시아로서는 이것이 통일을 위한 유리한 조건이 되었다. 그리고, 프러시아의 재상인 비스마르크는 덴마크,오스트리아,프랑스의 삼국과 전쟁을 겪으며 통일을 이루는 과정에서 능란한 외교술을 발휘하게 된다.

당시 독일 통일을 위한 방안으로는 프러시아 중심의 통일을 주장하고 통일 독일에서 오스트리아는 제외하는 소독일주의와 오스트리아 중심의 통일을 주장하고 오스트리아를 포함한 통일 독일을 주장한 대독일주의가 대립하였다. 1848년 3월에 베를린에서 3월 혁명이 발생하고 자유헌법을 제정한 영방국가가 나타난다. 그리고, 49~50년 사이에는 프랑크푸르트에서 국민회의(연방회의)가 열리고 이 회의에서 소,대 독일주의가 대립하는데 당시까지는 오스트리아가 강했으므로 소독일주의가 크게 나타나지 못 하였다.하지만, 당시 프러시아는 넓은 지역을 가지고 있었고 국경수비의 부담을 가지고 있음에 따라 점차 통일에 적극적이 된다. 그리고, 자본가 세력이 중심이 되어 통일을 주도했으며 정치적 통일 이전에 "관세동맹"이라는 경제적 동일이 이루어진다.

독일 통일의 전제로서 먼저, 관세 동맹이 이루어지는데 이것은 정치적인 통일보다도 우선시 되었다. 이것은 독일이 내부에서 경제적 분리주의를 하기 위해 무수한 국가들간의 관세 장벽,화폐,도량형의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는 필요성과 영국의 경제적 침략에 대비한다는 목적에서 이루어졌는데 특히, 부르조아층들은 사업할 때 겪게되는 어려움을 없애기 위해 이것을 주도하였다. 당시 자유무역을 주장한 Adam Smith에 반해 Friedrich List는 외국의 경제침략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보호무역 정책을 실시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독일의 경제적 분립으로 인한 폐해를 실감하고 있는 나라가 오스트리아 보다는 프러시아였고 따라서 이것을 없애기 위해 프러시아가 주도적으로 노력하게 된다. 그래서, 1818년에는 60여개의 관세가 폐지되고 1820년에는 지역적으로 남부독일 관세동맹, 중부독일 관세동맹, 북부독일 관세동맹이 체결되는데 이것은 독일의 부르조아가 프러시아를 독립의 수반으로 만들었다는 의의가 있다.

1848년의 3월 혁명은 독일 자본주의의 발전에 유리한 체게를 조성했는데 그래서 1850년대는 독일에게 산업혁명의 추진시대였으며 이 시기 건설된 철도망은 경제적 분립주의를 제거하는데 기여하게 된다. 또한, 프러시아는 라인강 연안의 Westphalia를 병합했는데 이 지역에는 철과 석탄의 매장이 매우 풍부하여 프러시아 자본주의의 발전에 기초가 되었고 산업혁명이 진전되면서 성장한 부르조아가 정치적 통일을 열망하게 되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가 연방의장국으로서 반동정책을 추구했기 때문에 프러시아는 오스트리아를 제거하기 위하여 전쟁이 불가피하게 되었고 또, 산업혁명의 결과로 프러시아가 중심이 되어 성장하게 되자 이를 오스트리아가 방해하였다.

프러시아의 국력 양성은 군제 개혁과 군비증가를 통해 이루어졌는데 이탈리아 통일의 3걸을 카부르, 마찌니, 가리발디라고 할 경우 독일 통일의 3걸은 Wilhelm 1세와 Moltke, 그리고 Bismark를 들 수 있다. 먼저, 빌헬름 1세는 프러시아의 왕으로서 1861년에 즉위하여 7년 만에 통일을 완성한다. 그리고, 오스트리아를 타도하기 위하여 군제 개혁을 추진했고 융커 계급 출신의 새로운 훌륭한 참모들을 많이 채용하는데 이 과정에서 육군대신 Roon을 채용하고 그의추천으로 참모총장에 몰트케를 그리고 1862년에 수상 비스마르크를 기용한다. 군제 개혁은 Roon에 의해서 주도되었는데 그는 모든 사람에게 3년의 병역 의무를 부과하여 병력의 수가 19만에서 45만으로 증원되게 했고 이러한 개혁에 부르조아지들은 통일을 위해 군사비를 지원하였다.

몰트케는 Junker 게급 출신의 부르조아층으로 보수적인 성향을 지닌 인물이었고, 비스마르크는 수상으로서 대,내외 정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는데 그 역시 융커 출신으로서 1847년에는 의회의 의원을 역임하였고 1851년에는 프랑크푸르트 연방회의에 프러시아의 대표로서 참석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1859년에는 러시아 주재 대사를 그리고, 1862년에는 파리 주재 프러시아 대사를 맡았다. 그는 독일 통일과 프러시아의관료체제를 유지하기 위하여 군사력 강화를 추진하는 강격책을 수행하였는데 의회 등의 반대 세려이 그를 억압하자 의회에서 유명한 "철혈연설(Eisen und Brut)" 하였다. 이 연설에서 그는 "우리 시대의 중대사는 의회의토론에 의해서가 아니라 철과 혈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다." 라고 주장하였다.

통일을 위한 작업은 1864년 Denmark War를 통해 시작되었는데 이 전쟁의 발단은 덴마크의 지배를 받고 있으나 주민의 대부분은 독일인인 Schlewig와 Holstein 주에서 주민들이 독일에 병합되기를 희망하면서 비롯된다. 1848년에 2월 혁명이 벌어지고 프러시아와 덴마크 사이에는 전쟁이 발생한다. 그리고, 1852년에 "런던 조약"이 체결되는데 이 조약에서는 양 주에 대한 덴마크의 주권을 인정하되 양 주는 불가불이의 자치권을 가진다고 명시하였다. 하지만, 덴마크 왕이 양 주를 분리시켜 홀스타인을 병합하고자 시도함에 따라 프러시아는 이것이 런던 조약에 위배됨을 주장하고 1864년 덴마크에 선전 포고하게 된다. 전쟁은 프러시아가 오스트리아와 공동 작전을 편 결과 승리하는데 1864에 "비인 조약"이 다시 체결된다. 이 조약으로 덴마크는 양 주를 독일에 할양하고 양 주에 대해서 프러시아와 오스트리아는 다시 조약을 체결하는데 이것이 "Gastein 조약"으로서 프러시아와 오스트리아는 양 주를 양 국의 공동 관리하에 둘 것을 약속하고 대신 행정권은 프러시아가 슐레스비히를 관리하고 오스트리아가 홀스타인을 관리한다는 것을 약속하였다. 하지만, 프러시아가 홀스타인을 오스트리아에 양도하려 하지 않아서 다시 전쟁이 발생하는데 이것이 보,오 전쟁이다.

보,오 전쟁(Austro-Prussian War)은 1866년 6월 15일에서 8월 3일까지 진행되었는데 7주 동안 전쟁이 있었기 때문에 "7주 전쟁(Seven-Weeks War)"이라고도 한다. 전쟁의 원인은 두 개의 주를 두고 양국간에 대립,갈등이 생긴 때문인데 프러시아는 오스트리아를 이용하여 양 주를 자국에 병합시키고자 하였고 오스트리아는 양 주를 연방내의 독립국으로 자치화 시키고자 하였다. 그리고, 대오스트리아 전쟁을 준비하는 프러시아는 양 주를 병합하는 것과 소독일주의로 통일을 이루기 위한 목표를 지니고 있었고 이를 위해 대내적으로는 군비 강화에 주력하였고 대외적으로는 먼저, 러시아에 대해서 러시아와 오스트리아가 불화관계에 있음을 확인하였다. 이러한 양국간의 불화관계는 헝가리 반란시에 러시아가 오스트리아를 지원하였으나 크리미아 전쟁시에는 오스트리아가 러시아를 지원하지 않음을호써 러시아가 오스트리아에 대해 배신감을 느낌에 따라 발생하였다. 그리고, 프랑스에 대해서는 나폴레옹 3세와 제휴해야 할 필요성을 인식하고 Biaritz에서 1865년 10월에 만나 회담(Biaritz 회담)을 하고 이 회담에서 비스마르크는 프러시아가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할 시에 프랑스가 중립을 지켜준다면 벨기에와 라인강 좌안을 프랑스가 병합하더라도 묵인할 것을 암시하였고 프랑스가 이탈리아와 프러시아간의 동맹을 체결할 수 있도록 주선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래서, 1866년에 프러시아와 이탈리아 사이에는 "공수동맹"이 체결된다. 이 동맹의 내용으로는 첫째 보,오 전쟁이 일어나면 이탈리아는 대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 한다. 둘째 단독 강화는 하지 않는다. 셋째 전쟁에 승리할 경우에는 베네치아를 이탈리아에 돌려준다는것 등이었다.

이상과 같이 대,내외적인 준비를 갖춘 프러시아는 홀스타인에서 분쟁이 일어나도록 조종하고는 그 책임을 오스트리아에 묻는다. 그리고, 이에 분노한 오스트리아는 홀스타인에서 철병하고 연방회의에 해결을 요청하게 되는데 연방 의회는 오스트리아의 요구를 받아들여서 작은 나라들을 보호하기 위해 연방군의 동원을 6월 10일에 가결한다. 이 때 프러시아는 연방 회원국 중에서 오스트리아를 제거할 것을 요구하나 묵살 당하고 6월 16일에는 먼저 오스트리아에 선전 포고한다. 그리고, 6월 17일에는 오스트리아가 프러시아와 이탈리아에 선전포고함에 따라 오스트리아 대 이탈리아와 프러시아간에 전쟁이 발발한다.

전세는 오스트리아에 불리하게 진행되었는데 7월 3일 Sadowa 전투에서 오스트리아는 대패하고 수도 비인이 함락되기 직전의 상황에 처한다. 이 때 이런 위급한 상황에 놀란 프랑스는 나폴레옹 3세가 참여하여 휴전을 제의하고 비스마르크는 이 제의를 받아들인다. 그래서, 1866년 8월 23일에 "프라그 조약"이 체결되는데 이 조약에서는 독일 연방의 해체와 독일 재조직에 오스트리아와 합의할 것을 결정하였고 홀스타인, 슐레스비히, 하노버 공국, 섹소니,튜닝기아를 프러시아에 그리고, 베네치아를 이탈리아에 할양할 것을 결정하였다. 반면, 비스마르크는 오스트리아에 대해 오스트리아의 영토나 배상금을 전혀 요구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비스마르크의 외교적 묘수라 할 수 있다. 즉, 그는 오스트리아를 비참하게 패배시키면 다음 전쟁에서 적이 될 수 있으므로 오스트리아에게 선심을 베풀어 자신들에게 동조하게 만든 것이었다.

이로서 프러시아는 북독일 연방을 체결하여 프러시아 왕이 연방의 의장이 되고 비스마르크는 재상이 되었는데 이 연방의 의결기관으로는 보통 선거에 의해 선출되고 법률과 예산의 표결권을 가지는 "제국의회"와 프러시아가 지배권을 가지고 제국의 표결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었던 "연방의회"가 있었다. 그리고, 당시 비스마르크가 추구했던 통일 정책은 연방 내에서는 주소 이전의 자유와 교통의 자유를 보장하고 화폐와 도량형을 통일하며 길드를 폐지하는 것 등이었다. 한편, 남독일 지역은 프랑스의 영향하에 있었는데 이 지방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프랑스와의 전쟁이 불가피하였고 이로 인해 "보.불 전쟁"이 발생한다.

보,불 전쟁(Franco-Prussian War, 1870~1871)은 이 전쟁의 결과로서 1871년에 독일과 이탈리아의 통일이 완성된 전쟁인데 원인으로는 먼저, 비스마르크의 배신과 그에 대한 나폴레옹 3세의 분개를 들 수 있다. 즉, 당시에 국내적인 실정으로 난처해진 나폴레옹 3세는 룩셈부르크를 매수하고 벨기에를 병합코자 하였는데 이 문제를 두고 런던회의를 개최한다. 그런데 이 회의에서 비스마르크가 나폴레옹 3세의 정책에 반대함으로써 룩셈부르크는 중립국이 되는 결과가 나타난다.그리고, 이 일로 인해 프랑스와 프러시아 사이에서는 전쟁불가피론이 일어나는데 나폴레옹 3세에게는 비스마르크와의 일전으로 인기를 만회하고 국위선양을 꾀한다는 목적이 있었고 비스마르크는 독일 통일을 위해서는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비스마르크는 1866년에 보,오 전쟁 후 처음으로 의회를 소집하여 지난 4년간의 헌법 유린을 사죄하고 헌법 부활을 선언하여 자유주의자들의 지지를 받는다.

두 번째 원인으로는 스페인 왕위 계승 문제를 들 수 있는데 이것은 프랑스와 프러시아 양국이 모두 왕위 계승권이 있음을 주장함으로써 비롯된다. 1868년에 스페인에서는 혁명이 발생하여 이사벨라 여왕이 추방당하고 혁명 정부는 프러시아 왕의 사촌동생인 Leopold를 스페인 왕으로 추대했고 이것을 프러시아의 빌헬름 1세는 쾌히 승낙한다. 그러나, 프랑스가 이것을 강력히 반대하자 빌헬름 1세는 겁을 먹고 사퇴하는데 이것을 기회로 니폴레옹 3세는 강경책을 더욱 강화하여 프랑스 공사 Benedetti를 파견하고 빌헬름 1세로 하여금 앞으로도 Hohenzollern 왕가에서 스페인 왕위를 포기할 것을 문서로 확약하도록 요구한다. 이 때 Ems에 휴양을 가있던 빌헬름 1세에게 베네데티가 찾아가 위의 사항을 요구하자 굴욕적이라고 느낀 빌헬름은 불복하고 비스마르크에게 이 사실을 알리는 전보를 친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Ems 전보사건(Ens Dispatch)"이 발생하고 이것은 양국간에 전쟁으로 이어지는 도화선이 된다.

당시 빌헬름으로부터 전보를 받은 비스마르크는 이 전보를 양국민 모두를 자극 시킬 목적으로 단축,변조하여 전매스컴에 공개한다. 즉, 독일인에게는 프랑스 공사의 무례함에 대해 분노케 하고 프랑스인에게는 독일 국왕이 프랑스 공사에게 모욕을 주었다고 과장하여 그들 역시 격분 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양국민은 모두 상대방에 대해 격분하고 나폴레옹 3세가 먼저, 1870년 7월 19일에 프러시아에 대해 선전포고를 한다. 그러나, 프러시아군은 이미 대 오스트리아전과 대 덴마크전을 통해 실전 경험이 풍부한 상태로서 파죽지세로 진격하여 9월말에는 Strassbourg를 함락시킨다. 당시 프랑스 군대는 Mets에 17만 병력을 가진 Bajaine 장군과 Sedan에 Macmahon 장군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프러시아군에게 포위되어 결국 항복하고 만다. 그리고, 당시에 포위된 맥마흔 장군이 지원을 요청하자 나폴레옹 3세는 직접 지원부대를 이끌고 출전하지만, 그 역시 포위되고 10월 13일에는 항복하고 프러시아의 포로가 되었다. 그래서, 결국 1870년 10월에 패전하고 이것은 프랑스 제 2제정의 붕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프랑스 본국에서는 시민이 중심이 되어 "국민방위정부"를 조직하고 항쟁을 계속한다. 그리고, 이들이 만든 정부가 바로 "Paris Commune"인데 이것을 마르크스는 최초로 인민에 의한 정부 탄생으로 높이 평가하였다. 70년 10월에서 71년 1월까지 이들은 항전을 계속하지만 프러시아군은 20만명의 프랑스군 포로들을 이용하여 파리 코뮌과 싸우게 하였고 3개월간 시민들은 결사 항전하였으나 추위와 굶주림으로 인해결국, 1월초에 파리는 함락되고 만다. 그리고 연이어 "프랑크푸르트 강화조약"이 체결되는데 이 조약으로 프랑스는 알자스와 로렌 지방을 독일에게 할양하였고 50억 프랑의 배상금을 지불하여야 했다. 또한, 1871년 1월 18일에 비스마르크는 독일 제국(제 2제국) 성립을 베를린에서 선언하고 황제로 빌헬름 1세를 추대하여 그와 함께 베르사이유 궁전으로 가서 Mirror Hall에서 대관식을 거행한다. 이 일로 프랑스 인들은 민족적인 굴욕감을 느꼈으나 반면에 독일은 통일이 완성되었고 이것은 독일 Nationalism의 승리였다.

보.불 전쟁은 결국 독일의 통일을 완성시키는 작용을 하였는데 남독일의 여러 나라들은 정식 수속에 의해 북독일 연방에 편입됨으로써 통일이 완성된다. 그리고, 독일의 통일을 계기로 프러시아의 편을 든 이탈리아는 실지를 회복하여 그들 역시 통일을 완성하게 되었으며 1875년에 프랑스에서는 제 3공화정이 성립된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Nationalism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시기 이후 Nationalism은 Imperialism 으로 변형되고 1875년 이후 "제국주의 시대"가 계속되다가 각 민족간의 Nationalism이 충돌하면서 제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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