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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세계 제 1차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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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자유로니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조회 2,968회 작성일 02-03-07 11:29

본문

작성일 : 1999/02/15 조회수 : 136

#############■ 세계 제 1차대전

참호의 비밀  
-(Von John Keegan, 슈피겔, 앞부분만 번역)  




■ 1. 들어가는말  - 전쟁은 일종의 기분전환(Abwechselung)이며 미풍처럼 솔솔 불어오는 모험이며 새로운 우정이었다.

   서부전선에 총성이 멎은지 이제 80년이 흘렀다. 이제 극소수의 나이든 노인만 1918년 11월11일의 대전쟁의 끝을 기억한다. 승리자들의 수도에서는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춤을 추며 환호했고 차들은 경적을 울려댔다.

  프랑스와 벨기에의 생존자들은 다른 장면을 연출했다. 연합군들은 마지막으로 Mons를 진격할 때 오래되어 낡은 참호의 미로를 넘었다. 그럼에도 그 전장은 이 세계대전의 유명한 장면을 보여준다. 참호와 폭탄포격으로 파헤쳐진 대지, 꺽여버린 나무와 숲.

  아직도 전쟁전을 기억하는 극소수의 백살정도의 군인들도 있다. 그들은 전쟁을 하나의 스포츠행사로 생각했다. 그것이 죽음을 동반하더라도. 독일과 프랑스의 젊은이들도 다르게 보지 않았다. 유럽의 군대는 1914년 아직 술이 달린 전투복의 경기병(Husaren, 輕騎兵), 네모난 모자의 창기병(槍騎兵, Ulanen), 번쩍거리는 가슴갑옷의 중기병(重騎兵,Kuerrassier)과 같은 기병(騎兵,Kavalleristen)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중기병의 흉갑(가슴갑옷)은 Waterloo전투땐 아직도 머스켓총의 총탄을 튕겨내곤 했었다. 러시아의 기병에는 의 카자흐족 기병이 있었다. 그들은 길죽한 상의(Kaftane -터키나 동유럽의 유태인들이 입음)과 휘어진 칼(Krummsaebel)을 갖고 있었고 징키스칸군대장비를 모방한 수준이었다.

군대통솔자들은 현대전이 더이상 과거의 것과는 같지 않다는 점을 경고할 수도 있었다. 러시아는 1904/5년 러일전쟁때, 처칠도 말했듯이 "보병의 가슴"(Der Brust des Infanteristen)으로 전쟁을 치뤘다간 기관총(Maschinengewehr)와 가시철조망이 공격을 무화시킬 수도 있다는 것을 배웠다. 영국군은 같은 교훈을 1899/1902년의 남아프리카 네덜란드계와의 보아전쟁(BurenKrieg)때 배웠다. Modder강과 Tugela강가에 잠복해 있던 보어농부들은 큰 자체손해없이 Tommys(영국보병의 애칭)을 수백명 사살했던 것이다.

  프랑스인과 독일인들은 그들이 마지막으로 전쟁을 치른지 이미 40년이 흘렀는데도 아직도 여전히 개개기병의 돌파력에 대한 믿음을 보존하고 있었다. 1914년장군들이 끔찍한 인명희생자들이 속출해도 승리를 위한 장애이유가 될 수 없다고 지껄였던 것은 그들이 이제 새로운 경험을 했음인가, 아니면 여전히 오래된 믿음에 머무르고 있음인가? 그들은 사령관의 "의지"(Der Wille)와 명령에 복종잘하는 부하들만 있으면 승리는 따논 당상이라는 생각에 차있었다.

  1914년 8월 전쟁으로 가는 행진에 참가한 젊은 직업군인들(Berufssoldaten), 의무병들(Wehrpflichtige), 예비군(Reservisten), 재복직군(Reaktivierte)들은 아무것도 몰랐다. 그들이 돌잡석으로 포장된 길을 징을 박은 장화로 요란하게 밟아대면서 국경으로 진격했을 때 그들이 기대했던것은 자명하게도 짧고 성공적인 전투였다. 모든 군인들은 1914년 불사의 신념을 가지고 있었고 빠른 귀환을 기대했다. 그들이 떠날때 받았던 키스와 휘파람소리로 곧 다시 환영받으리라고 믿었다. 전쟁은 재미있는 것이리라. 대부분의 군인들은 노동자나 농부출신이었고 촌동네와 공장에서 일로 잔뼈가 굵으면서 단조로운 생활을 하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에게 전쟁은 일종의 기분전환(Abwechselung)이며 미풍처럼 솔솔불어오는 모험이며 새로운 우정이었다.

군인유니폼을 입는 것이 얼마나 재미있는 일인가. 특히 프랑스인들은 나폴레옹시대의 파랑색, 눈부신 빨강색의 복장이었다. 심지어 변변치 않은 독일군과 오스트리아군 복장도 얼룩얼룩한 색깔로 화사해만 보였다. 군인들은 명성과 영예가 보장되어 있었고 정의는 자기들 편이라고 믿었다.

성 피터스버그 겨울궁전에서 전쟁선포때 사람들은 성인의 아이콘을 손에 들고 무릎을 꿇으며 "신이여 황제를 보호하소서"라고 노래를 불렀다. 베를린에서도 사람들은 교회에 가서 우리의 용감한 군대를 도와달라고 무릎을 꿇었다. 파리에서는 세례를 받으려는 군인들로 교회가 복작거렸고 런던에선  Buckingham궁전앞에도 사람이 몰려들어 발코니의 왕실가족들을 환호했다. 영국정부는 그들이 독일에 전쟁을 선포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  2. 전쟁의 발발
  1차대전의 진원지는 세르비아이다. 세르비아에 대한 선전포고로 1차대전의 발발을 야기시킨 오스트리아는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에서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드의 살해에 깊이 개입된 나라가 그에 대한 충분한 보상을 해야한다고 주장했다. 러시아는 전쟁에 개입하는 구실로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군사동원을 내세웠다.

   프랑스는 영국과 함께 벨기에를 독일의 침공으로부터 보호하는데 관심이 있었지만 표면적인 선전포고의 이유는 독일의 공공연한 군사동원이었다. 한편 독일은 스스로 다른 나라들을 자극시켜 놓고도 자신이 그 나라들로부터 위협을 당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모든 바이에른의 대학 총장들은 "뮤즈의 여신들 (문예, 학술을 관장하는 아홉 여신들) 이 침묵하고 있다" 고 선언하였으며 공동성명을 통해 독일이 일으킨 전쟁은 공격이 아니고 방어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독일은 1914년 8월에 주변 국가들로부터 심각한 군사적 위협을 당하고 있다고 믿었으며 군인들이 프랑스와 밸기에를 침입할 때 그들은 자기 나라가 침입을 당했기 때문에 정당방위인 것처럼 싸웠다. 벨기에는 벨기에서 일어나는 어떤 종류의 저항이든 점령국이 가지는 정당한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되어 처벌될 것이라는 선전벽보가 나붙었다. 곧이어 수십명씩 또는 경우에 따라서는 수백명씩의 벨기에인들이 독일의 진군에 대해 저항하는 것으로 간주되어 사살되었다.

   러시아 군대가 독일의 군사 수뇌부들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빨리 전쟁에 동원됐던 동부에서는, 적들의 대대적인 공격에 대한 독일의 두려움이 현실화되었다. 8월 15일 러시아군은 독일 장교층의 본산인 동프로이센의 국경을 넘었다. 동프로이센의 역사적 중심지들이 Samsonow의 군대와 시가전에 의해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1905년에 작성된 독일의 전쟁시나리오인 슬리펜 작전 (Schlieffen-Plan; 20년 이상 이 시나리오의 작성에 몰두한 참모장의 이름을 따서 붙여진 명칭)에 따르면 동부전선에는 독일 병력의 8분의 1만이 배치되고 나머지는 서부전선에 투입되도록 되어 있었다. 서부에 배치된 이 병력으로 벨기에를 통과하여 프랑스군의 북쪽 측면을 강타하고 그 여세를 몰아 2주 내에 프랑스에 대한 결정적인 승리를 쟁취한다는 것이다. 1914년 8월 마지막 주에 이 승리는 거의 눈앞에 보이는 듯 했다.

   프랑스군은 자신의 공격력을 과신했다. 그래서 1970/71년에 독일에 뺏겼던 ElsaBlothringen에 있는 독일의 방어기지들에 1만명만의 병력을 투입했다. 처음에는 그들의 공격이 성공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곧 독일의 반격에 의해 1천명의 사상자를 내고 퇴각하고 말았다.  한편 여기서는 뚝 떨어진 벨기에에서는 독일침략군중 우측날개를 맡은 쪽이 연달아 요새를 접수하면서 낡은 무기로 무장한 소수의 벨기에군을 해안쪽으로 내몰면서 프랑스군의 좌측날개를 압박해 갔다. 프랑스군사령관들은 파리로 가는 통로인 이 지역에서 시시각각 다가오는 그 위험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독일군에겐 거의 거칠 것이 없었다. 프랑스 5군단의 최고명령자인 Lanrezac는 병력보강을 요청하기 시작했다. 그의 상관이던 참모총장 Joffre는 그 요청을 거절했다. 벨기에에서 유일하게 언급가치가 있는 정도의 저항이라면 대륙에서 파견된 한 작은 영국부대에 의해서였다. 런던정부는 독일의 벨기에 진격이 국제법위반일 뿐만 아니라 영국의 이해관계에도 위협이 된다며 뒤늦게 군대파견을 결의했던 것이다.

영국군이 도착하고, 뒤늦게 거의 마지막에 가서야 군대재배치가 필요하다고 Joffre가 깨달으면서 위협적인 포위상황은 지연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영.프 양국군이 Sambre와 Mons에서 쓰라린 심정으로 대결을 시도했을때는 건너편 상대방의 힘은 너무 압도적이어서 도저히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Joffre가 자기군대를 잘못된 장소에 갖다놨다는 것을 깨닫고, 후방에서 방어선을 짜기 위해 후퇴를 명령하기까지 그들은 계속 이리저리 쫓겨다녔다. 그 후퇴는 1914년 8월 24일부터 9월 5일까지 이루어졌으며 전선은 벨기에 국경에서 파리쪽으로 더 바짝 다가서게 됐다. 군대는 후퇴하면서 매일 20킬로미터, 30, 혹은 50킬로미터까지 작열하는 태양아래 먼지투성이의 북부프랑스의 거리를 행진했다. 독일은 희망에 부풀었고 프랑스는 절망에 가득 찼다.

Marne선까지 도착했을 때 Joffre는 마침내 위치와 군대역량을 고려할 때 유리한 지점에 왔다고 보고 역공을 시도했다. 그러자 이제는 되려 독일군들이 포위될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프랑스수비대가 충분한 전력을 갖고 있었던데 비해, 독일군의 우측날개는 파리를 서부쪽에서 포위하기에는 너무 역부족이었다. 앞쪽과 측면에서 위협을 받으면서도 버티다가 독일군을 전투에서 패배했다. 이 Marne전투는 전쟁에서는 좀처럼 드문 결과를 가져왔다. 즉 결정적인 승리를. 구출당한 파리는 프랑스를 구했고 독일의 속전승리(Blitzsieg)의 희망을 산산히 부숴버렸다. 그리곤 독일군을 그들이 왔던 원점으로 쫓아버렸다.

  9월초 영.프군은 그들이 왔던 길을 되밟았고 그들이 포기하고 후퇴했던 건물들을 지나갔다. 그들은 곧 다시 벨기에 국경이 나올 것이고 그러면 전쟁의 끝이 보일 것이라는 희망을 뿜었다. 영.프의 고위참모인 Wilson장군과 Bwethelot장군은  3주내지 한달이면 그렇게 되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두사람은 약 4년의 계산착오를 했다.  9월중순에 후퇴했던 독일인들은 Aisne언덕에 눌러앉는데 성공했고 전열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그후 얼마안되어 모든 프랑스의 부대사령관들은 독일군의 참호들이 그 이상의 진격을 가로막고 있다고 보고하기 시작했다. 11월이 되자 그 참호전선은 장장 760킬로미터나 되었다. 북해에서 스위스의 알프스산악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전쟁에서 참호는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 "서부전선의 참호"는 새로운 현상이었다. 왜냐하면 그 참호는 그것을 넘어서려는 연합군의 모든 움직임을 다 무산시켰기 때문이다. 비슷한 전선이 동부쪽에서도 만들어졌다. 러시아는 독.오에 대한 처음의 극적인 성공이후로 자신들을 보호할 참호를 파지 않을 수 없도록 내몰렸다. 1915년 5월에는 더 나아가 오스트리아-이탈리아 국경의 높은 바위투성이 고지에도 참호가 만들어졌다.

  어떤 전쟁당사자도 이런 정적인 참호전쟁을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속전계획이 무산된 이후에는 모두들 전투를 지속하는데 몰두했다. 프랑스는 전쟁이 자신들의 땅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고, 러시아도 비슷한 이유에서이다. 독일은 서부와 동부에서 동시에 벌이는 대전쟁이 여전히 가능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는 그들의 영락이 독일에 묶여있다고 믿었다. 영군은 독일은 천적(Todfeind)이었기 때문이다. 독일은 영국의 영향권에 있던 세계해상에서 영국의 열강의 위치에 도전했고 프랑스를 도와주려고 했다. 영군은 그들의 원양함대로 독일제국을 정복할 때까지는, 자신의 동맹국들을 잃고 싶지 않았다.





##############     ■    1차대전 연표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의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드가 사라예보에서 살해되자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 간에 긴장이 고조되었다.
7월 23일; 세르비아에 대한 오스트리아의 최후통첩.
7월 28일; 세르비아에 대한 오스트리아의 선전포고.
8월 1일; 러시아에 대한 독일의 선전포고.
8월 3일; 프랑스에 대한 독일의 선전포고; 독일군이 중립국인 밸기에를 침공함.
8월 4일; 독일제국의회에서 사민당 (SPD) 의 동의로 전쟁이 승인됨; 독일에 대한 영국의 선전포고.

1916년

3월 24일; 좌파 사민당이 더 이상의 전쟁지원을 거부하므로써 사민당이 분열됨.
8월 29일; 힌덴부르그와 루덴도르프가 독일 군사령부를 장악하므로써 루덴도르프의 군사독재가 시작됨.
12월 12일; 중립국들이 휴전을 제안했으나 연합국들은 이를 12월 30일 거부함.

1917년

1월 22일; 미국 대통령 윌슨이 "승자없는 평화"를 요구함.
3월 12일; 페트로그라드에서 사회민주주의적 "2월혁명".
3월 15일; 러시아 황제 니콜라우스 2세 폐위됨.
4월 6일; 독일의 무제한적인 잠수함 전투로 인해 미국이 독일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게됨.
11월 7일; 러시아에서의 "10월혁명"; 레닌이 케렌스키 시민정부를 전복시킴.
12울 15일; 러시아와 중립국들 사이의 휴전.

1918년

1월 8일; 윌슨이 "14개 조항"에서 전후질서의재정립과 국제연합의 창설을 제안함.
3월 3일; 러시아와 중립국들 사이에 브레스트-리토브스키 휴전조약; 러시아가 발칸반도와 폴란드를 포기하고 핀란드와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인정함.
9월 29일; 서부전선에서의 예측불허한 상황에 직면하여 루덴도르프와 힌덴부르그가 즉각적인 휴전협정을 제안함.
10월 3일; 윌슨의 "14개 조항"에 근거하여 독일이 휴전을 시도함; 주요 정치인들과 사민당원들이 진보적인 수상 프린츠 막스 폰 바덴 정부에 참여함.
10월 24-28일; 수상은 의회의 신임을 받아야한다는 내용의 헌법개정이 받아들여짐.
10월 26일; 루덴도르프의 해임. 루덴도르프는 후에 나찌와 함께 10월혁명가들이 "전투에서 패하지 않은" 군대의 배후를 습격했다고 주장했다. (1차대전에서 독일은 배후로부터 단도에 찔려, 즉 사회주의자들의 배반으로 말미암아 패망했다는 주장).
10월 28일; 독일함대 내에서의 선상반란의 시작.
11월 7-8일; 뮌헨에서의 혁명; 사회주의자인 쿠르트 아이스너의 주도하에 노동위원회, 농민위원회 그리고 군사위원회로 구성된 정부가 탄생함.
11월 9일; 뮌헨의 필립 샤이데만과 베를린의 카알 립크네흐트에 의해 공화정이 주창됨.
11월 10일; 빌헬름 2세 네델란드로 망명.
11월 11일; 콤피녜에서 독일과 연합국들 사이의 휴전 (점령지인 서부전선과 서쪽 라인강변에서의 철군).

1919년

6월 28일; 베르사이유 평화조약; 독일은 엘사스로트링겐, 포젠, 서프로이센 그리고 메멜지역에서 철군하며 식민지들을 포기하고 군대를 10만명으로 축소하며 전쟁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고전쟁보상의 의무를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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