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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독일의 통일(긴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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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자유로니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조회 2,569회 작성일 02-03-08 01:02

본문

작성일 : 1999/03/08  조회수 : 444  

다음글은 김종현님(deutsch@channeli.net) 의 졸업논문 "유럽통합과 독일통일"의 독일통일편입니다. 길이때문에 일부만 실었습니다. 유럽통합부분은 따로 싣도록 하겠습니다.


목차
1. 독일의 분단
2. 아데나워의 서방통합정책
3. 빌리 브란트의 동방정책
4. 1989년, 그리고 1990년 10월 3일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고, 1990년 10월 3일에는 독일이 통일되었다. 또한 거의 같 은 시기에 동유럽의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은 몰락하게 되었다. 소련 역시 해체되고, 새로운 독립국가연합(CIS)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가 유럽통합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된 것은 당연하며, 냉전의 소멸로 유럽공동체의 대외 안보 정책구조에 변화가 따라야 함은 물론이었다.

독일이 통일된 이후, 한국도 통일될 수 있다는 생각이 광범위하게 퍼졌다. 그리고, 통일에 많은 관 심을 갖고 있던 사람들은 독일의 예에서 어떤 교훈을 창출하고자 애썼고, 독일통일에 대해서 많은 연 구서와 논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글은 독일통일의 또 다른 측면을 간과하고 있으 며, 그 간과된 부분은 독일과 한국의 매우 다른 측면을 보여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시되고 있다. 독일통일의 요소로 흔히 소련의 붕괴를 든다.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독일이 통일될 때, 이웃 국가들이 그것을 인정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런 인정을 함에 있어서 중요한 매개체 로서 역할은 유럽공동체가 담당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는 별로 알려지지 않고 있다.

2차대전이후 유럽통합은 진정한 의미의 유럽통합이 아니라, 냉전이라는 정치적 상황에 맞물린 서유 럽만의 통합이었다. 즉, 독일문제와 냉전구조가 서유럽통합의 추진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이었던 것이 다. 그런데, 이제 독일이 통일되고, 현실 사회주의권이 붕괴하면서 기존의 서유럽통합은 그 의미를 잃 었고, 이제 실질적인 유럽통합을 이룩해 낼 수 있을 것인지에 문제의 초점이 맞추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이미 앞에서 보아 온 바대로, 독일은 유럽통합에 매우 적극적인 자세로 임했으며, 경제적으로 많은 기 여를 했다. 이것은 초대 수상 아데나우워(K. Adenauer)의 적극적인 서방통합정책에 기인한 것이었고, 그 의 서방통합정책은 빌리 브란트의 동방정책으로 보완되었다. 먼저 독일의 분단 과정에 대해 간략하게 개괄하고, 그 다음으로 넘어가고자 한다.



1. 독일의 분단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에, 독일은 미국·영국·프랑스·소련의 4대 강국에 의해 점령되었다. 그 러나 이 '군사적 점령'은 구체적인 점령기간을 정하지도 않은 상태였고, 분할된 각 점령지역이 장차 별개의 국가가 될 것이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 물론 독일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연합국의 전후 독일정책은 전쟁중에 수립되었다. 1944년말, "독일통제기구협정"이 베를린에 설치되 었고, 이 기구의 임무는 全독일에서 통일된 점령군 정책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조정이 불가능할 경우 각 군사정부의 사령관은 자국 정부의 지시에 따라 해당 구역 내에서 독자적인 결정을 할 수 있었 다. 이로써 전승국의 독일정책에 관한 거부권이 도입된 셈인데, 全독일에서 사태 발전이 어느 일방 점 령군의 목표대로 되지 않을 경우 점령지역 내에서는 독자적인 행동이 가능해졌다. 이미 독일분단의 씨 앗은 뿌려지고 있었던 것이다.

독일의 역사학자 안드레아스 힐그루버는 그의 저서 {독일현대사}에서 연합국이 서로 대립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배상문제라고 언급하고 있으나, 이는 매우 지엽적인 문제라고 생각한다. 보다 중요한 문제는 소련의 동유럽으로 진출야욕과 1919년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고 세계의 패권을 장악하려는 미 국간에 세력다툼이 주요한 요인이라 여겨진다. 그렇지 않다면, 미국이 소련의 배상요구에 대해 그렇게 완강하게 반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소련은 배상을 통해 소련의 경제력을 미국과 동등한 수준으로 끌어 올리려 했고, 그럼으로써 그들의 영향력을 확실하게 중·동부 유럽에 뻗으려고 했다. 미국으로선 이러 한 소련의 의도를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힐그루버가 "결정적인 원인"이라고 언급하면서 상당히 비중있게 다루고 있는 배상문제는 이러한 대립 속에서 배경을 찾아야 할 것이다. 여기에 그들의 이념 적인 대립 또한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독일이 항복한 후에 열린 포츠담회담에서 연합국은 "독일을 경제적 통일체로 간주한다."라는 것에 동의했으며, 독일을 "민주화하고, 민주주의 이념의 성공적 발전"을 추구한다는 것에 합의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일반적이고 화려한 수사 뒤에 숨겨진 그들의 서로 다른 생각들이다. 미국 등 서방측은 자본주의 경제체제 및 서방식 민주주의 체제를 생각했던 것이며, 소련은 소련식 사회주의 체제를 구상하고 있었다. 이미 소련은 독일이 항복하기도 전인 1945년 4월 30일에 발터 울브리히트를 중심으로 한 독일인 공산주의자들을 모스크바로부터 독일로 파견하여 소련식 행정체계를 구축하고 있었다.

소련은 소련으로부터 미국과 영국을 분리시키기 위해 병합, 인민민주주의 지대, 완충지대를 구사했고, 완충지대가 실패로 돌아가자 동부 독일을 인민민주주의, 즉 소련식 체제로 개편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전략 아래 소련은 1946년 독일사회주의통일당(SED)을 강제로 만들어 냈고, 미국 군사정부 사령관 클레이는 1946년 5월 3일 배상물품 인도 거부로 맞대응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46년 6월에서 7월에 걸쳐 파리 외상 회담에서 소련의 몰로토프 외상은 "소련 지역의 예를 따른 민주화"를 요구했고, 미국은 이에 대해 "미국은 유럽으로부터 힘의 정치적 군사적 퇴각을 생각하지 않는다"고 강조하였다. 덧붙여서 미국지역에서부터 연방제 독일을 수립하겠다고 밝혔다.

이 무렵부터 구체화되기 시작한 미국의 공격적 외교방향은 1947년, 트루먼 독트린과 마샬플랜으로 명확하게 드러났다. 마샬플랜을 수용하느냐 하는 여부를 둘러싸고 유럽은 이제 분명하게 동서진영으로 구별되기 시작했다. 마샬플랜에 독일의 서방 3국 점령지역을 포함시킨 것은 독일을 서방식으로 해결하겠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소련으로선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소련은 마샬플랜에 대항하여 1947년 7월 14일에 소련점령지구에만 해당되는 "독일경제위원회"를 신설하였고, 미국은 서부지역만의 재건을 정책을 바꾸었다. "全독일" 표방은 미국에게는 더 이상 부합되지 않았으며, 특정조건하에서만 소련과 일치하였다.

1947년 11월 25일에서 12월 15일까지 열린 런던 외무장관 회담은 이제 냉전을 사실상 공식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회담에서 미국 국무장관 먀샬과 영국 외무장관 베빈은 슐레지엔의 독일 귀속을 주 장했다. 이것은 소련은 미국이 그들의 지배권을 소련 점령지역인 동쪽으로 확대하려는 시도로 보았고, 미국의 독일정책은 마샬의 한 마디에 급선회하게 된다. 미국은 '서방식' 해결을 위해 서방점령지역의 독일인의 지지를 유도하게 되었다. 독일인들은 사실 미국이 소련보다 더 독일에 파괴적이었음에도 불 구하고 소련을 따르지 않고 다수가 서방측에 기울고 있었다.

이 시기 독일인들은 어떠했는가? 그들은 크게 세 그룹으로 나뉘었다. 첫째는 정통적인 독일 외교정 책인 '줄다리기'정책을 계승한 소국으로 축소된 중립국 독일을 지향하는 그룹과, 동방화된 독일, 그리 고 마지막으로 서방으로 통합된 독일을 지향하는 그룹이었다. 이 세 집단의 공통점은 하나의 독일, 즉, 이른바 '全독일'을 지향했으며, 어느 누구도 독일의 분단을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는 점이다.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그룹은 중립국 독일을 지향하는 세력과 서방통합을 주장하는 이들이었다. 소련은 독일에서는 인기가 없었다. 따라서 동방화를 추구하는 세력은 독일 내에서 소수집단이었으며 큰 영향력을 갖지 못했다. 중립국 독일을 지향하는 세력은 그것이 독일의 전통적인 대외 정책이었으므로 중요하다. 반면, 서방화를 지향하는 그룹은 당시만 해도 별로 알려지지 않은 집단이나, 전후 독일의 재건을 담당한 이들은 바로 이들 서방화지향 세력으로부터 나왔다. Konrad Adeunauer가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이다. 특히 이들은 서방 3개국 연합국으로부터 충분한 지원을 얻을 수 있다는 이점도 갖고 있었다. 2차대전 직후의 독일에서 서방 3개국의 지원은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논쟁 역시 주로 중립국 독일을 지향하는 그룹과 서방화를 지지하는 세력 사이에 논쟁은 1949년 1,2차 연방하원선거에서 후자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이제 독일은 분명하게 서유럽통합에 적극 나서게 된다. 이것은 미국·영국·프랑스에게는 매우 고무적인 사실이었다. 이제 서방 3개국, 특히 미국은 그들의 계획을 적극적으로 추진할 수 있게 되었다.

1947년 런던 외무장관 회담의 결렬 이후, 미국은 독자적인 서방국가 계획 실현에 소련과 어떠한 종류의 합의를 도출하는 것을 포기하였다. 이후 미국은 본격적인 대소련 봉쇄를 시도하게 되며 소련에 대한 효과적인 전진기지로서 서독의 부흥과 서유럽통합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게 된다. 1948년 3월에 브뤼셀 조약이 체결되어 서유럽 국가들의 공동 방위를 꾀하게 되었다. 이것에 대해 힐그루버는 소련을 대상으로 한 동맹체제로 평가하고 있으나, 실상은 독일에 대한 방어체제로 기능하였다.

그러나, 서유럽이 소련과 동구 국가들에 대항하여 제대로 방위하기 위해서는 독일의 부활이 필요했다. 부언하자면, 독일의 막강한 경제력이 서유럽 방위에 필수적이었다. 이에 미국은 본격적으로 독일의 부활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적어도 서부 독일 지역만이라도 다시 부흥시켜 서독을 서유럽방위의 전초기지로 삼고자 했다. 프랑스가 여기에 반대하면서, 베스트팔렌 조약과 같은 해결책을 시도했지만, 프랑스로서는 미국을 따르지 않을 수 없는 처지였다. 동부 독일이 소련의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임이 분명해지자 미국과 영국, 프랑스는 서방 3국의 점령지대를 하나로 통합하여 새로운 국가를 수립하는데 합의하였다. 1949년 9월 21일, 정식으로 독일연방공화국(서독)이 출범한다. 동독은 조금 뒤인 10월 7일에 독일민주공화국을 수립하였다. 이로써 독일은 전범국가라는 멍에를 쓴 채, 분단국가로 다시 부활하게 되었다.



2. 아데나워의 서방통합정책

서독의 초대 수상은 콘라드 아데나워라는 73세의 보수주의자였다. 그러나, 아데나워의 독일부흥에 대한 신념은 누구 못지 않았다. 전쟁의 결과, 독일은 완전히 파괴되었고, 국토는 승전국들에 의해 분할 점령되었으며, 주권은 엄격하게 제한되어 있었다(후주46). 국민들은 자신감을 잃고 패배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다. 또한, 소련이 점령하고 있던 동부 독일은 사회주의 국가가 되어 민족의 분단이라는 비극적 상황이었다. 아데나워는 이런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수상으로 취임한 것이다. 이러한 문제들의 원만한 해결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이웃 국가들과 관계개선이 시급한 문제였다. 특히 프랑스와 화해가 독일의 재건에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프랑스와 화해, 이웃 국가들과 관계개선을 위해 아데나워는 적극적으로 서유럽통 합에 앞장서게 된다.

아데나우어가 서유럽통합에 적극적인 자세를 보인 이유는 명확하다. 독일이 나치범죄의 멍에를 벗 고 이웃 국가들의 불신과 두려움을 불식시키면서 번영하기 위해서, 그리고 군사적 피점령국의 상태에 서 국제사회에서 동등한 주권국가로 조속한 회복은 서유럽에 굳건하게 독일이 통합됨으로써만이 가능 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럼으로써만이 독일의 통일이 가능하다고 그는 믿었다. 즉, 유럽통합 을 통해 독일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독일통일은 단지 비운의 역사가 반복될 따름이라고 보았던 것 이다. 독일의 극단적인 민족주의 전통을 유럽이념으로 대체하고, 그 위에서 독일통일을 달성해야 한다 는 견해였다. 서독에 주어지지 않고 유보된 주권은 회복될 민족국가를 위해 되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통합된 서유럽에 이관되는 것이었다(후주47).

아데나워는 독일의 유럽으로 귀속하는데 우선 서독을 견고하게 유럽에 통합시킬 것을 상정했다. 무 엇보다 서방 세계의 견고한 단결과 발전을 통해 힘을 모으고 그 힘을 바탕으로 동유럽세계를 움직여 유럽의 분단을 극복하고 독일을 통일한다는 견해였다. 서유럽이 견고하게 단결하고 경제적으로 번영을 누림으로써 소련으로 하여금 서방의 힘에 굴복하게 하고, 서독은 번영과 분배 정의의 실현을 통하여 동독을 끌어들인다는 것이다. 그는 독일통일은 유럽 안보의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져야 함을 분명히 했 다. 서유럽 민주주의의 질서 속에서 집단안보체제를 이룩하고, 서독과 서유럽 자체 내의 개혁으로 눈부 신 경제 성장과 평등한 분배를 보장하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정착시키는 것이 통일의 지름길이라고 보았던 것이다(후주48).

사실, 서독은 소련에 대항하는 미국의 세계전략 가운데에서 하나의 기능을 갖기 위해 출발하였다. 더구나 서독은 궁극적으로 서방지향적인 전독일을 달성할 핵심으로 이해되었기 때문에 제 4점령세력인 소련의 정책과 날카롭게 반대되는 입장에서 건국되었으며, 세계 열강 사이에서 이제 "냉전"이라고 부르는 대립의 초점 가운데 서 있게 되었다(후주49). 아데나워에게는 독일의 분단은 이미 기정사실이었다. 그러나, 적어도 서부독일과 서유럽이 소련의 영향력안에 들어가지 않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서유럽에 서독을 통합시키고, 미국과 공동으로 잠재력을 완전히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아데나워의 정책은 동독을 포함한 동유럽과 단절하고, 이 지역과 소련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내어 유럽통합을 이루고 독일통일을 달성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극히 호전적인 정책으로 비판받았으며, 특히 핵무기를 보유한 소련이 항복하리라고는 그 당시에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데나워는 시대착오적인 인물이거나 교활한 분단고착자로 공격을 받기도 했다.



3. 빌리 브란트의 동방정책

Bily Brandt는 베를린장벽이 세워지기 전부터 분단의 고통을 완화시키고자 노력했던 인물이다. 베를 린시장으로 재임하고 있던 1961년, 그는 베를린에 장벽이 세워지는 것을 보고만 있어야 했고, 바로 앞 에서 벌어지고 있는 기가 막힌 사건에 대해 아무 조치도 취할 수 없다는 현실에 무력감을 느꼈다. 무 엇보다 그는 이때의 경험에서 강대국들에 의존만 하고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을 굳히게 된 듯 하다(후주51). Brandt는 동서간의 무모한 대결은 독일문제의 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1963년 Tutzing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Bohn정부는 경주에 승리하고자 하며, 동쪽에서 제시하는 모든 제안에 대해 그 제 안이 단지 동쪽에서부터 왔다는 이유만으로 가장 빠르고 결정적으로 부정적인 답변을 하고 있다. ……… 독일문제는 세계정치적 측면, 유럽적 측면, 안보문제, 인간적·국가 적 측면 등을 고려해야 한다.……… 우리 민족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인간적 삶에 편의 를 도모하기 위해 우리끼리 많은 이야기를 나눌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한다. ……… 독일 내에서 이에 대해 서로 의견을 교환해야 한다. ……… 소련과 함께만이 독일문제의 해 결책을 찾을 수 있지, 그들에 반대하고 대립적 입장을 취해서는 해결방안이 없다. 우리 는 우리의 권리를 포기할 수 없다. 권리를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동·서간의 새로운 관 계가 요구되며, 독일과 소련과 관계 역시 요구되며 정립되어야 함을 우리 모두는 잘 알 아야 할 것이다."  

그의 또 다른 말을 들어보자 : "작은 발걸음의 정치는 인권이 뿌리내릴 수 있는 토양 확보에 있다. 이것은 민주주의보다는 작은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경직성과 평화를 위협하는 긴장에 대한 완화는 민 주주의가 성장할 수 있는 기후를 조성해 준다. 인간의 권리가 보장되지 않고는 진정한 민주주의는 결 코 있을 수 없다." (후주53) 즉, 인간문제의 해결과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긴장완화가 필요하며, 그것은 아데나워의 일방적인 서방통합정책이 아닌 서방통합정책과 병행하여 동방과 접근을 통해 이룩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던 것이다.

Brandt의 동방정책이 단순한 외교정책이 아님을 이 두 가지 언급은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인간의 권리를 보장하고, 민주주의 성숙을 위해 긴장완화가 필요하며, 그것은 소련 및 동구권과 교류와 대화 속에서 이룩될 수 있다는 그의 분명한 신념이라고 하겠다. 여기에서 한국의 북방정책과는 배경에 깔린 이념부터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고 할 것이다. 보다 분명하게 얘기하자면, 남한의 북방정책은 아무런 이 념적 배경없이, 그럴듯한 겉모습만 갖추고 있을 따름이다(후주55).

각설하고, Brandt에 따르면 긴장완화는 동·서 양진영의 세력균형을 전제로 한다. 서방세계가 튼튼한 방위능력을 보유할 때 동·서 간에 긴장완화를 위해 노력할 수 있는 기반을 갖게 되고, 거꾸로 동·서간의 긴장완화가 이뤄질 때 서방의 안보가 보장된다는 것이다. 빌리 브란트의 동방정책은 바로 아데나우어의 정책을 바탕으로 성공할 수 있었고, 브란트의 동방정책 Ostpolitik은 아데나우어의 서방통합정책을 보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동방정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동서 양진영의 세력균형이라는 전제 위에서 국제적인 긴장완화가 필요했다. 그 세력균형은 서독의 NATO가입과 동독의 바르샤바조약기구WTO 가입으로 가능했 던바, 브란트의 동방정책은 결국 아데나워의 서방통합정책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동방정책은 서방통합이라는 기반 위에서 동독 및 동유럽 국가들과 접근을 통한 통일정책이라고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브란트는 세력균형 원리에 기반한 전쟁 방지에 만족한 것이 아니라, 세력 균형 원리에 기반한 적극적인 평화정책을 실현하고자 했다. 서독의 지속적인 서방 통합과 적극적인 동방정책은 상호 보완적인 것이었다. 이제 양독일은 각각 진영에서 충실한 구성원이 됨과 동시에 이러한 기반 위에서 긴장 완화 또는 화해정책을 주도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역할을 통해 긴장완화정책을 통해 유럽분단이 극복되고, 독일통일이 달성될 수 있다는 논리였다(후주56). 이러한 긴장완화는 유럽의 운명을 유럽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할 수 있는 여지를 한정적이나마 부여해주고, 아울러 이것은 독일문제에서 독일이 주체적으로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논리를 바탕으로 브란트는 1민족 2국가를 인정하는 정책을 취했다. 대표적인 예가 UN가입이다. 브란트의 정책이 동·서독 분단의 현실(status quo)을 인정하는 것이었고, 동시에 분단의 극복을 위한 대장정이었다. 영구 분단을 상징하는 듯한 UN가입 이후 서독은 이후 장기적 통일정책을 추구하는데 있어서 좀더 능동적이고 자유롭게 임할 수 있는 국제적·국내적 여건을 조성할 수 있었다. 독일이 통일되기 위해서는 소련의 이해가 필수적이었다(후주57). 그리고 소련의 양해를 구하기 위해서는 양국간에 공통 분모를 찾아야 했다. 이 공동의 이해 관계는 새로운 유럽평화질서의 구조에 관한 것이었고, 최종적으로 1989년에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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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1989년, 그리고 1990년 10월 3일

1989년에 들어와 동구사회주의권은 엄청난 변혁의 물결에 휩싸였다. 동구의 공산주의 국가들은 하나 둘씩 사라졌으며, EC는 이제 서유럽통합이 아니라 범유럽통합의 중심이 되었다. 공산주의에서 벗어난 동구국가들은 EC에 가입을 원했다. EC가 이들을 거부할 수는 없을 것이나, 바로 받아들이기에는 현실적으로 어려운 면이 있었다(후주58). 그러나 동독은 달랐다. 이미 동독은 서독과 연결을 통해 EC내에서 특혜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EC라는 테두리 안에서 독일 통일의 가능성을 높였다. 또한, 그것은 서독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바로 독일의 과거사때문이다.

이 기간 동안 유럽통합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독일이었다. 독일로서는 독일통일이 야기할 이웃 국가들의 두려움과 불신을 씻어야 할 필요가 있었고, 따라서 그들은 독일이 통일되어도 NATO와 EC에 귀속될 것을 주장하였다. 독일은 독일통일의 유럽적 차원을 강조하였다. 통일은 단순한 동서독의 통합이 아니라, 서독이 이미 견고하게 결속되어 있는 서방체계로 동독을 편입시킨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독일은 유럽통합을 심화시키기 위해 가시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역내공동시장의 창설과, 경제통화동맹의 실현에 독일은 앞장섰으며, 통일 이후에도 공동체에 대한 재정적 기여를 줄이지 않을 것임을 천명하였다. 독일이 통일되면 유럽통합이 가속화될 수 있다는 기대감이 일 정도로 독일통일과정에서 많은 고무적인 조치들이 취해졌고, 통합 분위기가 고양되었다.

독일이 통일되기 1년전인 1989년 12월 8일에서 9일까지 개최된 유럽이사회는 다음과 같은 공식선언을 했다. "우리는 유럽에서 평화의 상태가 정착되도록 노력한다. 이러한 가운데 독일 국민은 자유로운 의사결정권을 통해 통일을 달성할 수 있다. 이 과정은 민주적인 그리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달성되어야 하고, 기존의 모든 협정과 조약들을 이행해야 하고 헬싱키 최종 선언문에 표현되어 있는 모든 사항이 동서간의 화해라는 취지에서 이행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이 통일은 유럽통합과 부합되어야 한다......"(후주59)

결국 당시 EC집행위원장 자크 들로르가 동독이 독립국가로서 EC에 가입한 후 독일통일을 달성하는 방안과, 동서독이 통일된 후 EC에 가입하는 두 가지 안을 제안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러한 요구는 사실상 독일의 과거사와 통일독일의 강력해질 힘에 대한 이웃 국가들의 두려움과 우려를 표명한 것이었다. 독일은 이러한 불신감을 해소하고자,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은 다 기울였으며, 그 결과 유럽통합은 가속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독일통일도 순조롭게 이루어 질 수 있었던 것이다.

유럽통합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바로는 경제적 지역공동체이다. 그러나, 그 출발은 단순한 경제적 지역공동체가 아니었다. 공동시장이라는 매력적인 겉모습외에 유럽통합은 다시는 독일이 침략전쟁을 일으키지 않도록 통제하는 목적과, 소련에 대항한 서유럽 국가들의 통합이라는 이중적인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독일이 '가해자'였기 때문이다.

한국의 상황은 어떠한가. 한국은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이기 때문에 독일이 했던 일을 우리가 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분단되었다. 독일은 침략자로서, 가해자로서 죄과를 참회하며, 유럽이라는 지역의 평화와 번영을 확고하게 책임지겠다는 것을 분명히 함으로써 그들은 이웃 국가들의 불신감을 없애고, 통일이라는 민족적 과제를 달성할 수 있었다. 일본이나 중국은 결코 우리의 통일을 바라지 않을 뿐더러 현상유지만을 바랄 뿐, 그 이상은 결코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우리의 통일을 위해 움직일 까닭이 없다. 단지 그들은 현상유지만을 바랄 뿐이다. 일본은 북한의 핵문제가 걸려 있는 까닭에 북한과 협상을 시도하겠지만, 단지 그것뿐이다. 핵문제가 해결되면, 더 이상 능동적인 대북외교를 펼칠 필요성을 일본은 가지고 있지 않다.

흔히 서독의 동방정책이 통일의 밑바탕을 마련했다고 한국에서는 얘기되어진다. 그러나, 결코 Bily Brandt의 Ostpolitik가 통일의 밑바탕을 마련한 것은 아니다. 유럽통합이라는 대목표 안에서 독일의 외교정책이 수행되었기 때문에 브란트의 동방정책은 성공할 수 있었고, 독일통일도 가능했다. 또한, 내부적으로도 동독인을 흡수할 충분한 여력을 갖추었으며, 그것은 사회민주화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독일통일은 거기에서부터 시작한다. 노태우대통령이 시작한 북방정책은 단지 Bily Brandt의 동방정책을 겉모습만 따라 했을 뿐이다.

독일이 통일될 때, 독일은 유럽공동체에 헌신을 적극적으로 수행하면서, 또한 그러한 면을 강조하면서, 통일을 이룩했다. 독일의 공동체에 대한 헌신을 유럽 이웃 국가들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수용할 수 있었던 것에는 독일의 과거사에 대한 끊임없는 반성에 기반한다. 그렇지만 근본적으로 상황이 다른 한국에서 과연 독일식 통일이 가능할 것인가. 그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말하고 싶다.

콜수상과 겐셔 외무장관은 이런 말을 한다. "우리는 독일의 유럽을 건설하는 것이 아니라, 유럽의 독일을 건설하려 한다. Wir wollen nicht ein deutsche Europa, sondern ein europaeisches Deutschland schaffen."(후주60) 일본은 아시아의 일본을 건설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을 위한 아시아를 만들려고 한다. 우리가 일본이나 중국과 공동체를 구성하는 날에는 공동의 번영이 아닌 일본이나 중국을 위한 번영의 길을 제공할 따름이다. 결코 그럴 수는 없다. 독일은 통일 이후에 예상보다 더 심한 후유증을 앓고 있고, 그것때문에, 신나치들이 설치고 있기는 하나, 다수 독일인들은 유럽통합의 구조 속에서만이 독일이 번영할 수 있음을 잘 알고 있다. 장기적으로 볼 때 독일인들은 유럽의 발전을 위해 그들이 져야 할 부담은 피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신나치의 존재는 거꾸로 유럽통합의 필요성을 부각시켜 준다고 할 수 있다. 유럽인들의 통합에 대한 정열이 무르익었을 때가 바로 나치에 저항하여 투쟁할 때였던 것이다.

한국은 독일식의 통일을 추구할 수 없다. 우리는 독일통일 과정에 대해 정확하게 알고 있지도 않지만, 정확하게 안다고 하여도 대외정책적 측면에서 그들을 따라 할 수 없다. 그럴 만한 여건이 동북아시아에는 전혀 조성되어 있지 않다. 무엇보다 남한은 아데나워의 '힘의 정책'과 브란트의 유화정책(동방정책)을 모방하고 하나로 합쳐 놓은 듯한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대화당사자를 국가가 아닌 교전상태의 이적단체로 규정하고 있는데, 과연 독일식으로 성공할 것인가. 물론 북한도 결코 제 2의 동독이 되지 않고자 필사적으로 노력할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독일식 통일정책을 추구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것인지, 필자는 회의적이다.
출처:http://galaxy.channeli.net/deuts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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