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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하버마스 70세 기념 가다머의 기고

페이지 정보

작성자 고스라니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조회 2,878회 작성일 02-03-09 09:44

본문

작성일 : 1999/09/08  조회수 : 148

■  세계전쟁 이후 비판과 판단력의 새로운 역할: 위르겐 하버마스 70세 생일을 맞아(한스-게오르크 가다머)(SZ 99.6.18)


스스로 100세 생일을 앞두고 있는 한 사람이 자신의 제자의 60세나 70세 생일을 축하하려고 할 때는 그 자신의 삶의 특정한 시기가 떠오르기 마련이다.(1900.2.11 태어난 가다머는 내년 100세 생일을 맞는다.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가다머에게 배우고 그의 해석학적 입장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던 하버마스는 가다머가 언어가 가지는 대화적 본질을 강조하는데 동의하면서도 가다머의 전통과 권위에 대한 강조가 정치적 보수주의를 변호할 수 있다고 보고 이에 대해서는 반대하는 입장을 취해 60-70년대 가다머와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역주) 그러면 또한 그 이전의 출발이 훌륭한 끝을 가져올 수 있었음을 알게 된다. 이제 위르겐 하버마스가 70세를 맞이하게 되었다면 이제 나의 과제는 물론 완전히 다른 어떤 것이리라. 여기서 그가 나의 제자라는 것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고 그가 나의 철학적 작업에 대해 모범적으로 연구하고 더욱 발전시켜 나갔다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다. 그는 오히려 나의 능력과 한계에 관련해서 모든 측면에서 그 극단적인 반대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최근 어느 논문에서 하이데거와 플라톤과 관련해서 '정치에 있어 부족한 철학의 능력'이라는 테마를 다루었고 그 때 나 스스로에 대해서도 염두에 두었음은 공연한 일이 아니었다.

위르겐 하버마스는 이와는 반대로 완전히 정치적으로 사고하는 인간이다. 그러나 그가 사고하는 인간이고 내 인생의 길에서 나와 다양하고 우호적인 방식으로 만났기 때문에 그의 70세 생일은 내게는 모든 차이에도 불구하고 애착과 경의가 뒤섞이게 되는 매우 특별한 일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어쩔 수 없이 그의 생일 축하에 있어 나 자신의 한계를 끊임 없이 생각하게 되고 동시에 이렇게 완전히 다르지만 내게 우정의 연대를 가지고 있는 한 사람에게 찬양과 감사의 말을 할 수 있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 이를 적절하게 나타내기 위해 나는 물론 우리 세기의 역사적 운명이 가지는 일반적 성격과 함께 이 세기가 우리에게 던져준 과제들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 칸트주의자냐 고독이냐


우리가 되돌아보는 금세기는 두 개의 세계전쟁으로 특징지워진다. 하버마스와 관계해서는 우선 이 중 두번째 세계대전의 파괴력이 우리 모두를 재건으로 나서게 했던 긴박한 문제들을 남겨놓았음을 상기해야 한다. 그러나 사유의 길을 파악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와 함께 철학사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좀더 앞선 시대까지 되돌아 봐야 한다. 그래야만 1차대전의 종말과 함께 한 세기를 마감했던 정신적 상황의 전체상을 파악할 수 있다. 당시는 선진공업국과 군사대국으로의 도약의 시기였다. 그리고 그 때는 독일 관념론의 개화기가 그 유명한 면모를 얻었던 세기이기도 하다.

그 때부터 우리는 소위 칸트주의자이던지 아니면 그로부터 결정적인 탈피를 통해 스스로의 특징을 나타내고 다소간에 고립되어야만 했었다. 물론 우리는 칸트와의 대결을 통해 자신의 고유한 사고의 기준을 발견하고 동시에 그 기준이 학문의 진보와 결부되어 있음을 발견할 가능성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칸트는 1차대전 이후 독일 철학에서 거의 모든 곳에 버티고 있었다. 비록 칸트와의 논쟁이 독일 관념론을 지배하는 헤겔의 영향력을 포함해서 독일 관념론 전체 속에서 언제나 이루어졌지만 말이다. 그러나 동시에 자연과학 연구의 진보는 1차대전 전후에 바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나는 젊은 시절 브레스라우와 마르부르크에서 이러한 칸트와의 대결 아래서 대학 공부를 시작했다. 당시에는 1차대전의 파괴와 독일의 패배 이후 당혹감과 혼돈, 그리고 새로운 출발을 향한 갈망이 학계를 지배하고 있었음을 인식하게 되었다. 사실상 우리는 우리에게 완전히 새로운 질문을 던지는 어떤 해소의 시대에 있었다. 당시 나는 처음으로 현상학의 개념에 대해 들었는데, 이 개념은 시대의 혼돈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는 길을 향한 요구와 함께 그러한 완전히 새로운 길을 약속했었다.

독일의 학계에서는 현상학의 창시자인 훗설과 함께 여전히 영향력을 미치고 있던 딜타이와 또한 두 위대한 사상가, 하이데거와 야스퍼스가 이러한 시작을 대표하고 있었다. 우리의 생각이 지향하는 마지막 귀착점은 분명히 학문이 아니었고 전체적으로 변화하는 삶에의 감정, 모든 미래의 불확실성, 20세기을 열어젖힌 학문 문화의 진보 이념이 가졌던 낙관주의에 대한 회의 등이었다.

왜냐하면 베르사이유 조약 이후 패배한 독일에 대해 가해졌던 압력 등 정치적 상황도 전혀 미래에의 새로운 길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상황은 더 나빠졌다. 1차대전의 패배는 복수심을 불러일으켰을 뿐 아니라 그동안 어렵게 배워왔던 민주주의도 무너뜨렸다. 그래서 결국 2차대전이 발발했는데 이는 의심할 바 없이 나치 독일의 공격성 때문이었다.

물론 1차대전도 엄청난 인명 피해를 가져왔다. 그리고 이미 당시에도 전쟁은 그 기사도(Ritterlichkeit)를 잃어버렸다. 시적인 젊은이는 이를 표현주의적인 서정시에서 불평했고 일반적인 언중들은 새로운 단어인 '물량전(Materialschlacht)'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그러나 이제 훨씬 더 무서운 2차대전의 종말 이후 이는 단지 인명 피해와 뒤에 남겨진 곤경 뿐이 아니라 이러한 절망적 전쟁이 전쟁의 규범(Kriegsrechte)의 몰락을 가져왔다는 심각한 느낌이었다. 전쟁이라는 사태는 동부 전선이나 독일 국내에서 거리낌 없는 살인과 심지어 전체 종족과 민족에 대한 계획적인 몰살로 변화되었다.

우리에게 이제 남아있게 된 것은 그 당시와 같은 당혹감 뿐 만이 아니라, 어떻게 그러한 일이 도대체 가능했던가라는 질문 앞에서 무력했다는 것이다. 그러한 질문은 독일인들에게 전혀 제시된 적이 없던 것이었다. 어떻게 이제 재건이, 더구나 분단 독일에서,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 더우나 이런 부인할 수 없는 죄의식을 가지고?

이 지점에서 나는 다시 내 개인사로 돌아오고 그 다음에 하버마스로 돌아오겠다. 나 자신은 당시에 라이프치히 대학의 재건과 함께 한 국가적 조직에서 활동했는데, 이 국가조직은 한 국가의 새로운 건설을 위한 전제조건들이 불가능하게 만들었던 것이었다. 이에 대한 결정적인 원인은 정권을 잡은 공산당이 더이상 정치적 삶에 자신을 관철하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었다는데 있다. 사민당마저도 러시아 점령 당국으로부터 폭력적으로 공산주의적 그룹으로 밀려들어갔다. 이와 함께 참된 건설의 의지가 결핍되었다는 독일의 문화 전통과 어울리지 않는 상황이 일어났으며, 나 자신은 곧 이러한 조직에서 나의 활동을 포기해야만 했다.(가다머는 종전 후 라이프치히 대학 총장직을 역임했으나 소련 점령군측과의 갈등으로 1947년 서독 지역의 프랑크푸르트로 이주했으며 49년 하이델베르크 대학에 야스퍼스의 후임으로 부임한다.-역주)

내가 프랑크푸르트에서 다시 일을 시작했을 때 나는 대학이 사회의 근본적 변화와 이에 따라 새로운 국민적 의식을 형성하는데 기여해야 한다는 본연의 임무에 대해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이는 서독의 다른 대학들을 새롭게 꾸리는데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내가 마침내 나의 작업을 계속할 수 있었던 하이델베르크에서 이 임무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실감하게 되었는데, 이는 하이델베르크가 폭격으로 파괴되지는 않았으나 그 대학은 히틀러의 독일에서 특별히 고통을 받았기 때문이다. 당시 교수진을 새로이 구성하는데는 성공했으나 매우 많은 일들이 뒤늦게 이루어져야 했다.

이것이 내가 위르겐 하버마스를 만나던 당시의 상황이다. '철학의 조망(Philosophische Rundschau)'지의 편집인으로서 나는 하버마스가 쓴 논문들을 통해 그를 주목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맑시즘에 대한 방대한 작업을 부탁했다. 나 자신은 분명히 정치이론을 판단할 만한 능력을 가지지 못하고 있었지만, 하버마스가 제출한 원고는 내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하버마스가 맑시즘의 근본 이념에 대해 긍정적 태도를 가지고 있으나 어떠한 정치적 판단도 엄격히 배제하면서 맑시즘 문헌들에 대한 개념적 논증에 국한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가 이 양자를 구분하고 이 잡지의 학술적 요구에 부응하는 방식이 인상적이었다. 많은 측면에서 나 자신의 작업 방향에 대해 비판적 거리를 두고 있는 칼 뢰비트라는 동료를 만나게 된 이후 하버마스를 만난 것은 당시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상황에 좋은 보완이 된다고 느꼈다. 그리하여 제3의 독립적인 철학적 입장이 교수진에 포함될 수 있게 되었고 이로서 학생들 간의, 그리고 교수들 간의 의견의 교환이 확장될 수 있었다.

나는 아직 교수자격논문을 쓰지 않았던 하버마스를 교수진에 포함시키기 위해 철학 학부와 교육부를 설득하는데 성공했는데 이는 내가 볼 때는 하나의 포상과도 같은 것이었다. 이렇게 재건의 시기가 바람직하게 진행될 수 있었다. 철학이나 다른 학과에서 특정한 학파의 견해가 일방적으로 지배하는 것을 지평의 확장을 통해 피할 수 있었고 우리들 모두 간의 진정한 학문적인 공통점을 형성해 갈 수 있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하버마스는 너무 일찍 우리를 떠나 프랑크푸르트 대학에 호르크하이머의 후임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물론 그는 자신의 프랑크푸르트 대학 전임자를 대학의 정책에서 사라져버리게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학문적 에너지와 능력을 사회 비판을 위해, 그리고 사회과학을 위해 투여했다. 좁은 의미의 철학적 토론을 위해 그는 곧 칼-오토 아펠이라는 동료 교수를 강력한 지지자로 얻었는데, 그래서 프랑크푸르트에서는 '의사소통(Kommunikation)'이라는 개념이 다른 지역에서 해석학이 얻은 것과 같은 중심적 위치를 가지게 되었다. 물론 내 자신의 철학적 노력이 모든 측면에서 대화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비해 프랑크푸르트의 토론들은 최종 근거의 문제에 집중하고 있었다. 내가 다루던 대화의 문제는 하버마스 시스템의 지지 기반이던 헤겔 변증법이 아니라 우리 철학의 고대적 기원, 즉 플라톤의 모범에 근거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럴수록 하버마스를 특징지우던 정확한 비판이 그 다음의 힘겹던 여러 해 동안에도 간직되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는 학생 운동의 과정에 대해 지신의 비판적 태도를 유지했다. 이는 학생 운동이 여러 측면에서 하버마스에게 공감을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했던 것이다. 바로 하버마스로부터 '좌익 파시스트'라는 그 용기있는 표현이 나온 것이다. 마찬가지로 점점 대중매체에 종속되어 가는 공공의 의사소통과 여론 형성에 대한 여러 편의 비판적 에세이도 그러한 용기있는 것이었다. 알다시피 이 논문들이 이제 우리 사회에서 커다란 동조를 얻어냈으며 자신의 판단을 형성하도록 교육했던 것이었다.


▶ 말과 글에서

이러한 상황에서 하버마스의 비판적 날카로움과 독립성은 아무리 높이 평가해도 부족한 감이 있다. 점점 규칙들이 많아져서 다 알아보기도 힘들어지는 시대에는 공공 대중매체의 영향력은 너무나 막강해서, 내가 추구했고 하버마스에게도 자신의 비판과 판단력을 위해 중요한 전범이 되었던 해석학적 노력은 대중매체에 의해 도전을 받게 되었다. 그럴수록 내게는 우리들의 철학적 입장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판단의 능력(Urteilskraft)을 양성하는 것이 하나의 공동의 과제인 것으로 보여지고 있다. 분명히 내가 영향을 미치는 방식은 대화 속에서 비로소 발견할 수 있는 살아있는 구어(das lebendige Wort)로 이루어진 반면 하버마스는 엄격하게 이루어진 텍스트들을 발표하는데 역점을 두었다. 그러나 이는 우리들의 공통점을 저해할 수 없는 외적인 차이에 불과하다. 나와 하버마스 모두, 타인이 자신과 맞서고 있을 때에도 타인은 1차적으로 적이 아니라 대화의 상대라는 점에 원칙적으로 동의한다고 본다. 우리들의 평생의 작업은 이를 위한 노력이다. 그 외에 우리들의 노력에 있어 차이점이 분명하고 우리들 간의 어떤 거리가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 노력 간의 우정 어린 가까움도 간과되어서는 안된다. 나의 카시러에 대한 강연이나 최근 하버마스가 하이델베르크에서 행한 '법률가 강연'은 이에 대한 훌륭한 실례가 된다. 우리들이 함께 하이델베르크에서 가르쳤던 그 짧았던 시기에 그랬던 것처럼, 우리들은 모두 서로가 자신의 한계를 주의하고 상호간의 사고의 교류를 통해 이 한계를 넓혀 나가도록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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