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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독일교회목사로서 바라본 독일교회

페이지 정보

작성자 이영빈홈페이지 이름으로 검색 조회 6,210회 작성일 02-03-09 11:10

본문

작성일 : 1999/05/01  이영빈  조회수 : 137

■ 독일교회목사로서 바라본 독일교회    
                                                            -이영빈목사

  내가 독일에 정착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프랑크푸르트의 파울 게어하르트교회에서 목회하게 되고 부터 였다. 17년이란 긴 세월을 한곳에서 지냈다고 하는 이유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독일교회와 독일인들의 밑바닥까지 들어가서 그들과 같이 생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올해로 벌써 40년이 넘는 독일이지만 그동안은 한곳에서 4년이상 체류하지 않았었다.

  1974년 부임할 당시 6500명의 교인이 속하여 있는 파울게어하르크교회는 목사정원이 세사람이었다. 한 목사가 약 2천명의 교구를 맡고 있는 셈이다. 나를 동역자로 환영하는 두 독일 목사는 과거에는 신앙고백교회에 가담하여 나치반대운동을 하였고 전후는 이 항거운동의 후신인 '형제모임'의 일원이었다. 이들은 내 신학적 입장과 이때까지 겪어온 이력을 알고나서 같은 동역자로 받아 주었다.

   이 교회의 장로회는 내가 외국사람이란 점에서는 문제 삼지 않았지만, '교목'출신이라는 점에서 목사로 모시는 것을 주저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함께 일하는 두목사와 신학적으로 도저히 조화를 못이루고 4,5년간의 불화와 긴장관계에 있다가 다른 교회로 가버린 전직목사의 사건을 고려하여, 두 목사가 환영하는 나를 제3의 목사로 가결하고 받아들였다. 당시 목사들 사이의 긴장과 분쟁때문에 교인사이는 커다란 금이 가 있었다. 그리고 나간 목사를 따라 몇몇 교회직원도 다른 교회로 가 버렸다. 이 오랜 내부긴장으로 교회의 분위기는 초상집 같았다. 남은 교인과 당회는 오직 새로 부임한 목사인 나와 또 다른 새로운 긴장이 생기지 않기만 바라고 있을 형편이었다.

  내가 이 지역교회와 주민들의 생활에 적응하는데 큰 문제는 없었다. 그러나 거꾸로 교인들과 주민들이 외국인 목사인 내게 접근하는데는 좀 어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목회시작부터 '갓난 아이'를 대하듯 매우 조심스러웠다. 어느날 내가 사는 목사주택으로 젊은 남녀가 찾아 왔다. 목사와 이야기할 것이 있다기에 응접실로 인도했다. 한참 있어도 그들은 입을 열지 않고 있어 나는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한참 있다가 하는 말이 "목사님이 언제 들어 오십니까?"한다. 이 순간 나는 사태를 파악할 수 있었다. 나는 웃으면서 "내가 목사요"라고 했다. 그들은 매우 당황하면서 사과하였다. 나는 그들의 사회감각을 알 만했다. 목사라고 하면 좀 나이도 들고, 점잖게 검은 양복을 입고 있는 풍채로 일반시민들은 상상하고 있다. 당연히 물론 독일사람이어야 한다. 그런데 난데없이 젊은 외국사람이 검은 옷도 입지 않고 나타났으니 그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상황인 것이다.

  용건인즉 그들은 교회식 결혼을 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두가지 문제를 가지고 왔다. 하나는 신랑은 개신교요, 신부는 카톨릭이라는 점이다. 나더러 개신교예식으로 결혼식을 해 줄 수 있으냐 하는 것이다. 둘째는 신부의 부모들이 카톨릭인데 개신교 사위는 반대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보니 외국인 목사가 주례한다면 그 보수적인 부모는 더욱 반대할 셋째 난관이 첨가되는 셈이다. 나는 이 젊은 남녀의 고충을 충분히 상상하면서 그들의 청을 승낙하였다. 그들은 돌아가서 잘 토론된 후에 나를 다시 한번 찾아오라고 말했다. 만일 그들이 원한다면 예외로 나 대신 독일 목사에게 부탁할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그들은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이 일은 17년 목회 중 발생한 유일한 부정적 사건이다.

  카톨릭에서는 세례 받은 아이들이 여덟살이 되면, 개신교회는 13세가 되면 '견진례'(Konfirmation)를 받게 된다. 어린 아이때 받은 세례의 의미를 의식하게 한다는데 그 이유가 있다. 이 견신례를 준비하기 위해 1년이나 2년동안 매주일 두시간씩 교회에 나와 신앙교육을 받는다. 그리고 유치원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종교교육'(Religionsunterricht)을 받아야 할 의무가 있다. 또 기독교인이 성장하여 직업생활을 시작하고 세금을 납부하게 되면 소득세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 '교회세금'(Kirchensteuer)도 납부해야 한다. 독일의 이러한 역사적 배경과 구조를 '폴크스키르헤'(Volkskirche)라고 한다.

  그런데 이 전통적 구조는 이미 요동을 받고 있다. 이 교회의 담임목사로 취임할 때 교인수는 약 6천 5백명이었는데 지금은 3천5백명으로 줄어 들었다. 그때는 독일인구의 거의 85%가 기독교인으로 등록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55%밖에 되지 않는다. 그 원인은 경제 불경기에서도 유인하지만, 주로 시민들이 자각하면서 전통적으로 받아들이던 '자동적'으로 되는 기독교인을 거부하는데서 온다고 보겠다.

  독일교회를 말하는 구조와, 역사적인 성격을 총칭하는 표현인 '폴크스키르헤'는 직역하면 민족교회라는 말이나 오히려 '시민교회'라고 함이 원래의 뜻에 더욱 부합한다. 16세기 종교개혁과 17세기 종교전쟁이 일어난 후 독일의 여러 독립적 봉건영주들은 자기의 신앙에 따라 자기백성을 카톨릭이나 개신교로 만들었다. 즉 자율적으로가 아니라 타율적으로 기독교인이 된다는 말이다. 이런 정치적 강제와 역사적, 전통적 관습에 따라 지금도 어린 아이가 출생하면 곧 세례를 받는 것이 당연시 된다. 이와 같이 자기가 의식하여 결단한 신앙이 아니라 타자에 의하여 독일국민은 자동적으로 '기독교신자'가 된 것이다.

  내가 여기에서 '교인'과 '신도'라는 두가지 개념을 사용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두종류의 교인을 구별하기 위해서다. 즉 교인으로 등록은 되어 있어도 민든 자들의 공동체생활, 즉 교회생활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들을 '교인'이라고 하였고, '믿는 자들의 공동체'(사도신조에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 communio sanctorum)를 의식하고 이에 가담하는 교인들을 '신도'라고 하였다.

  내가 이 교회에 17년간 봉사하는 동안 보통 주일예배에 참석하는 신도는 평균 50명에 지나지 않았다. 단 성탄절 예배는 예외였다. 이 축하예배는 하도 많이 참석하기에 세차례로 해야 한다. 모두 약 천명쯤 모인다. 부활예배나 견신례예배도 두차례 드려야 한다. 이같이 명절예배에 교인들이 많이 참석한다는 현상은 습관과 분위기의 문제이다. 이와 같이 교회생활과 과제에는 게을리 하면서도 교회세금은 충실하게 납부하는 이유는, 인간봉사와 사회봉사의 상징인 교회조직을 간접적으로 돕는다는 것, '좋은 일을 하는 것'이라고 자기 양심을 달래는데 있고, 특히 늙어 가는 사람들에게는 죽으면 교회가 장례식을 해 주고 '저 세상' 또는 '영원히 사는 곳'과 관계지어 주는 것을 바라기 때문이다.

  17년 동안 목회하면서 나는 약 천명의 장례식을 집례했다. 이 죽은 자들의 대부분은 내가 전혀 알지 못한 사람들이다. 물론 그들의 유가족들도 교회생활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다. 그러기에 나는 '신도'가 아닌 낯설은 교인들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와 장소, 즉 장례식과 공동묘지를 '제 2의 교회'로 삼고 이런 만남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부임하고 초기에 공석으로 있는 목사의 교구까지 겸하여야 할 때믄 거의 매달 50여명에 달하는 장례식을 치러야 했다. 이 덕택으로 나는 일년도 되지 않아 우리 지역교회에 속하는 교인들과 시민들을 대부분 다 알게 되었다.

  목회후반부터는 사망률이 그 절반으로 줄어들었는데 그 이유는 1970년대에는 전쟁의 고난을 겪고, 동구권에서는 구사일생으로 서독으로 피난해 와 전후 독일을 맨손으로 건설하고 입에 풀칠하는데 고생한 노인네들(Trummer Frauen)이라, 생활이 안정되고 좀 마음의 여유가 생기게 되니 갑자기 죽는 현상이 일어 났기 때문이다. 이 늙은 세대에서 그 고비를 넘긴 노인들은 조심스럽게 휴양과 영양음식으로 건강을 유지하면서 더 장수하는 것이다. 현재 이 교회의 '노인들의 모임'의 평균연령이 80세이다.

  또한 지역교회 목회에서 부닥치는 장애물들은 '목사중심의 교회'라는 개념과, 일반신도들의 교회에 대한 의식에서 비롯되었다. 중세기부터 시작하여 종교개혁시대를 거쳐 오늘까지 존재하는 독일사회의 '교회개념'은 여러가지 측면을 포함하고 있지만, 나에게는 무엇보다 '목사지배'시대는 지나갔다 하더라도 '목사중심의 교회이해'가 눈에 거슬렸다. 교회에서 목사를 주인처럼 대접해 주어 목사의 입장에서는 유리할는지 모르지만, 내가 가진 신학에 따른 교회이해에서는 도저힌 용납될 수 없는 수직적, 권위주의적인 카톨릭적 교회의 개념과 다름 없었다.

  더군다나 교회신도들 사이의 수평선적 사귐, 형제자매로서 모임을 강조한 종교개혁적 교회이해, 사도 바울의 교회이해, 즉 "우리의 몸은 각 부분이 자기 구실을 다함으로써 각 마디로 서로 연겨되고 얽혀서 영양분을 받아 자라 납니다. 그리스로를 머리로 하는 교회도 이와 같이 하여 사랑으로 자체를 완성해 나가는 것입니다"(에페소 4:16)라는 말씀은 전혀 망각되고 종교개혁 이전의 사고방식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 문제에서는 강경한 입장을 내세웠다. 그리고 나를 '파러'(목사)라고 호칭하지 말고 신도들이 서로 호칭하는 '씨'(Mr./Herr) 또는 '형제'(Bruder)라고 불러 주기를 요청했다. 마침 새로 부임한 동료목사는 나와 같이 교목으로 있었던 사람이라 나의 제안에 찬동하였지만 또 다른 목사는 나의 제안을 지지하지 않았다. 몰론 이런 토론은 당회에서 결의할 문제는 아니지만, 점차로 개혁되어야 하는 교회의식의 문제였다. 이런 나의 입장과 제안은 표면적으로는 매우 소소한 것 같지만, 내적으로는 적지 않은 혁명적 폭탄 같은 동력을 발효했다. 이렇게 목사가 스스로 '내려 옴으로서' 신도는 목사와 같은 수평선에 '올라온 것'이 되었다. 이 사건은 외면적 변화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이런 변화를 통하여 교회공동체의 봉사와 책임을 신도전체가 같이 지도록 하는데 목표를 두었다.

  '목사교회'(Pfarrergemeinde)라는 의식의 후면에슨 '도와주는 것을 바라는 교회'(Betreueungskirche)라는 기대가 숨어 있다는 사실을 나는 빨리 발견하였다. 교인이나 신도는 당연히 목사가 자기들을 자주 방문해 주고, 자기들의 소원이나 요구를 잘 받아 봉사해 주는 것을 바라고 있다. 또 이런 심부름(봉사)를 위하여 목사에게 봉급을 지불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즉 이런 사고방식은 신도들의 공동체인 교회를 일종의 사회봉사기관처럼 생각하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사랑의 부름에서 모인 곳'이 아니라 봉사를 위하여 대가를 지불하는 기업체로 간주하는 것이 된다. 나는 신도들이 피동적으로 머물러 있지 말고 능동적으로 되기를 권고하였다. 목사가 신도들을 방문하는 것만 바라지 말고 신도들이 목사를 방문하는 것도 생각해 보라고 하였다. 이웃이란 목사의 이웃만이 아니라 모든 신도와 교인의 이웃을 말한다고 하고, 이웃을 방문하는 것은 목사만이 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항상 지적하였다. 이래야만 교회공동체가 '사랑이 자라나는 곳'이 되지 그렇지 않으면 현재와 같은 교회는 이웃에게 봉사하는 사람들을 사서 인간봉사를 시키는 일종의 '회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나는 항상 경고하였다. 우리 교회공동체가 '도움을 받으려는 교회' 에서 해방되지 않으면 장래가 없는 교회라고 나는 듣기 싫도록 설교하였다.

  이와 같이 신앙의 거듭남을 위하여 나는 한 상징적 실천을 제안하였다. 파울 게어하르트교회는 1935년에 건립되었는데 당시 유명한 교회 건축가 바우하우스가 설계한 '근대식 고전물'이다. 그러나 내부 예배실의 질서는 구식이요, 전통적이었다. 십자가와 성서가 놓여 있는 제단은 맨 앞에 단을 높이 쌓고 마치 구약시대의 제단과 같이 그 위에 설치하였다. 그리고 예배 보는 일반신도들의 좌석은 될 수 있는 데로 이 제단에서 멀리 격리되어 있었다. 그리고 설교단은 왼쪽정면벽 높은 곳에 달려 있어 나는 고딕식교회나 바로크식 카톨릭 교회당에 있는 것과 똑같은 분위기를 느끼고는 하였다.

  이미 시작된 교회이해에 관한 신학적 토론을 계속 하면서 어느날 나는 장로히에 제안을 내 놓았다. 제단과 설교단을 이동하여 예배보는 성도들의 가운데로 옮겨 놓은 것이 어떠냐고. 그리고 성도들의 좌섟은 제단과 설교단을 앞에 놓고 원형으로 놓아 성도들은 서로 서로 바라볼 수 있고 필요에 따라 서로 생각을 교환할 수 있도록 하면 좋지 않겠는가 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서 우리는 하나님을 멀리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를 낮추시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시며 우리와 같이 계시는 그리스도"(필립비 2:7-8)를 모시는 교회의 모습에 합당하며, 이러한 그리스도의 겸손을 본 받아 우리 신도도 "서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주는'(필립비: 1-5) 교회의 모범에 부합되기 때문이라고 신학적으로 설명을 하였다. 여러 차례의 토론을 통하여 이런 과정은 점차적으로 실행되었다. 제 1단계로 제단을 훨씬 앞으로 끌어오기로 하였고, 설교단은 제단보다 더 앞으로 네세우기로 하였다. 제 1단계는 1977년에 실행되고 제 2단계는 그후 2년만에 실천되었다. 나는 이 사건을 아주 귀하게 여긴다. 내가 이 교회의 신도들과 같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얼마나 성실하게 배웠느냐 하는 첫번째 시도였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앙이 숨쉬고 살아 잇을 수 있는 곳은 원래 이웃관계에서 즉 공동체안에서이다. 그런데 독일의 시민교회의 전통은 전후미국의 자본주의와 세속 자유문화의 영향을 받으면서 재래의 도덕질서가 무능하게 되었고, 그 대신의 윤리질서를 세울 수 있는 시민교회의 권위가 없어지고 말았다. 독일의 시민교회개념과 대조적으로 사용되는 개념인 미국의 자유교회는 무제한한 시장자본주의사회에서 낙오된 자들의 영혼을 위로해 주는 통풍기역할이나, 또는 소유한 시미들의 도덕적 장식물로서 존재이유를 가지고 있는데 비하여, 독일 국민교회는 그의 장점이었던 집단적, 사회적 연대의식이 약화되면서 대안이 없는 점점 비어가는 교회로 되고 말았다.

  또 독일 시민교회의 재래 주요과제였던 사회봉사기관이 유치원, 양로원, 병원, 장애자 수용소, 고아원 등 국가의 과제로 점차 넘어가면서 그 대신 새로운 과제를 찾지 못한 채 일종의 실업교회가 되고 만 곳이다. 독일사회에서 교회는 봉사하는 종업원을 가장 많이 쓰고 있는 커다란 기업주였는데 지금은 교인수가 격심하게 줄어지고 따라서 수입이 감소됨에 따라 재래의 사업을 많이 축소하고 따라서 종업원들을 절반 이상 감원하고 있는 실정이 되었다. 예를 들어, 내가 목회했던 교회는 그 당시 목사 세사람, 노인들을 돌 보는 간호사 두사람, 청소년 담당지도원 2명, 유치원 보모5명, 국민학생 탁아소 지도원 4명, 외국청소년 지도원 1명, 비서1명 그리고 교회건물 관리인 2명 등 전체 20명을 채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절반으로 감원되었다.

  지금 독일교회는 자기의 구조를 근본적으로 개조해야 하는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흐름3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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