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동포 미디어 베를린리포트
커뮤니티 새아리 유학마당 독어마당
커뮤니티
자유투고
생활문답
벼룩시장
구인구직
행사알림
먹거리
비어가든
갤러리
유학마당
유학문답
교육소식
유학전후
유학FAQ
유학일기
독어마당
독어문답
독어강좌
독어유머
독어용례
독어얘기
기타
독일개관
파독50년
독일와인
나지라기
관광화보
현재접속
433명
[독일개관]독일에 관련된 유용한 정보를 이곳에 실어 주시기 바랍니다. 이 게시판은 독일관련 데이타베이스를 구축하기 위한 곳입니다. 그러니 1회용도의 글(구인,질문 등)은 정보의 가치가 없으므로 이곳에 올리시면 안됩니다.

문화예술 귄터 그라스와의 대담

페이지 정보

작성자 퍼옴이름으로 검색 조회 3,924회 작성일 02-03-09 13:41

본문

작성일 : 2001/09/30  조회수 : 105

■ 권터 그라스와의 대담 (출처: 현대문학)

김누리

김누리:주제를 세 가지로 나누고 이야기를 진행했으면 합니다. 첫째는 당신의 삶과 문학에 대한 것이고요, 둘째는 당신이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입장을 개진한 독일 통일과 관련된 것이고, 마지막으로는 이른바 <세계화>라는 말로 집약되는 오늘날의 세계에 대한 것입니다. 우선 당신의 근황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하지요. 당신은 1999년 20세기의 마지막 노벨상을 수상하셨습니다. 노벨상 수상 이후 당신의 삶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귄터 그라스:저는 여전히 예전과 똑같은 담배를 피우고 있습니다. 변한 건 아무것도 없어요. 노벨상을 받고 나서 많은 선물을 받았습니다. 그 중엔 아주 기발한 선물도 많았어요. 특히 파이프를 세 개나 선물 받은 것이 그렇지요. 당신도 아시겠지만 독일에선 모든 것이 잘 조직되어 있지 않습니까. 물론 파이프 끽연자 클럽도 있지요. 파이프 선물은 각기 다른 곳에서 왔는데요, 매번 편지가 한 통씩 동봉되어 있었어요. 첫 문장은 대체로 짧았습니다. [노벨상 수상을 축하합니다.] 이런 식이지요. 편지를 읽어 보면 이 사람들이 제 책을 많이 읽지는 않았다는 느낌을 받게 되지요. 두 번째 문장은 조금 더 길어요. [당신이 파이프 담배를 피우는 사람으로서 요즘처럼 끽연자들에게 힘겨운 시절에도 여전히 파이프를 물고 텔레비전에 등장하실 용기를 보여 주신 데 대해 심심한 감사를 드립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변화라는 것이 그저 이런 종류의 것이라는 겁니다. 처음 얼마간은 좀 힘들었어요. 그래서 꾀를 냈지요. 저는 직업이 여럿이지 않습니까. 글쓰기를 당분간 옆으로 밀어 두고 첫해 동안은 테라코타만, 그러니까 조각일만 했습니다. 그러자 다시 주위가 잠잠해지더군요. 그래서 요즘엔 다시 글을 쓰고 있습니다.
  
김:이번 질문은 한국문학번역원에 있는 제 친구가 부탁한 겁니다. 한국에도 탁월한 재능을 지닌 작가들이 많습니다. 게다가 아직도 심심찮게 밀리언셀러가 나올 정도로 출판시장 또한 활력을 잃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에는 여전히 노벨상을 수상한 작가가 없습니다. 일본이나 중국과 비교해 보면 매우 안타까운 일입니다. 물론 노벨상이란 것이 국가에서 주도할 목표일 수는 없겠지요. 그러나 국가가 무언가를 투자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이를테면 문학 인프라를 구축한다는 의미에서 말입니다. 번역을 보다 적극적으로 지원한다던가, 번역작품을 해외에 알리기 위한 네트워크를 구축한다던가, 그런 일들을 돕는다는 뜻에서요. 한국문학이 세계에 알려지기 위해서는 우선 어떤 문학 인프라가 시급히 마련되어야 할까요?
  
그라스:제가 실제로 경험한 사례를 들어 이야기해 보지요. 저의 책의 번역과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저의 작품은 비교적 일찌감치 번역되기 시작했습니다. 『양철북』부터 시작되었으니까요. 그때부터 저는 오역이나 번역하지 않고 뛰어넘은 부분 등에 대한 불평을 자주 들었습니다. 물론 저도 화가 났지요. 그래서 저는 혼자 곰곰이 생각해 봤어요. <내 책을 출판한 독일 출판사들은 내 책이 번역되면 이득을 얻는데, 그들은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무엇을 했는가?>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넙치』 때부터―그러니까 70년대 중반이지요―제 책을 내는 출판사에게 그때까지는 전례가 없던 것을 강하게 요구했지요. 즉, 제 책이 완성될 때마다 출판사와 독점계약자가 여비를 부담하여 작가와 번역자들의 만남을 주선하도록 한 것입니다. 이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계약서에 서명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만남을 통해 예를 들면 『나의 세기』를 출판할 때는 한국측 번역자인 안삼환 교수를 만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모임은 작가와 번역자의 관계에 있어서만이 아니라, 번역자들 상호간의 관계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예를 들면 저는 한국 번역자와 중국 번역자 사이에 앉아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어떤 언어로 대화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두 번역자 사이에서는 끊임없이 의견이 교환되었습니다. 스칸디나비아 번역자들이나, 슬라브어나 로만어를 쓰는 번역자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였어요. 서로가 가지고 있던 번역상의 난점들을 상호비교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와 같은 일들은 매우 유용합니다. 반드시 해보시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독일에는 네덜란드와의 국경지대에 번역을 지원하는 기구가 있습니다. 그와 같은 기구는 꼭 필요하고, 아주 중요합니다. 자기 나라의 번역작품을 출판할 출판사가 독일에 있는지 없는지도 우선적으로 살펴 보아야 합니다. 예들 들면 저의 작품을 내는 슈타이들 출판사는 아이슬란드문학을 지속적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 할도르락스네스의 작품뿐만 아니라, 요즘의 젊은 아이슬란드작가들의 작품에 대한 번역도 점차 늘어나는 추세이고, 또 많은 독자를 확보하고 있습니다. 바겐바하 출판사처럼 좀더 작은 출판사는 예를 들면 이탈리아문학에 집중하고 있고, 한자 출판사는 폴란드문학에 중점을 두고 있지요. 한국문학을 독일에 소개하기 위해서는 내용상 한국에 유익하면서도 번역에 적합한 작품, 그러면서도 국경을 뛰어넘어 독자들의 관심을 끌 만한 작품이 있음을 인지하도록 출판사의 관심을 환기시키는 노력이 매우 중요합니다.
  
김:일례로 울리히 야니츠키가 실무책임을 맡고 있는 <베를린문학콜로키엄(LCB:Literarisches Colloquium Berlin)> 같은 기구도 한국 작가들에게 세계문학에 대한 안목을 넓히는 기회를 제공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요?
  
그라스:<베를린문학콜로키엄>은 전 세계 작가들의 교류를 돕고 이들을 널리 알리기 위해 매우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중요한 기구입니다.
  
김:중요한 한국작가를 세계에 알리는 데도 효과적인 통로가 되겠지요. 이제 제가 특별히 개인적인 관심을 갖고 있는 문제를 묻고 싶습니다. 저는 당신의 대표작 『양철북』에 대해 박사논문을 썼습니다. 저는 이 작품이야말로 20세기를 대표하는 <세기의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논문을 쓰면서 저는 이 작품이 지닌 엄청난 다의성 때문에 때로는 당황하고 때로는 경탄했습니다. 어떻게 문장 하나하나가 이렇게 수많은 의미를 지니고, 다채로운 빛깔을 띨 수 있을까 하고요. 해석의 가능성 또한 무궁무진합니다. 오죽하면 클라우스 바겐바하가 [해석에 적대적인 작품]이라는 평가를 내렸겠습니까.
  
그라스:엔첸스베르거는 이 소설이 출판됐을 때 [이제 독문학자들은 한 세기 내내 이 소설과 악전고투할 것이다]라고 예언했지요.
  
김:저는 이 소설에 우의(Allegorie)라는 개념으로 접근했습니다. 또한 많은 학자들이 나름의 개념으로 해석을 시도했지요. 예를 들면 엘리엇에게서 빌려 온 객관적 상호연관(objektive Korrelate)이라든가, 비유(Bild)라든가….
  
그라스:이 작품의 해석과 관련된 책만으로도 도서관 하나를 몽땅 채울 수 있을 겁니다….
  
김:『양철북』은 그 전체가 알레고리 소설이며, 바로 이점 때문에 이해하기가 대단히 난해하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독일문화나 20세기 독일역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독자에게는 대단히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오스카는 파괴적인 시대상황에 대한 알레고리이면서, 동시에 독일의 문화사 전체에 대한 알레고리이기도 하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그라스:『양철북』은 전통이란 측면에서 보면 유럽소설의 전통, 즉 악동소설의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악동소설의 주인공은 특수한 성격을 지니면서 늘 국외자적 입장에 선다는 점에서 항상 가공적인 인물(Kunstfigur)이었습니다. 돈 키호테가 그렇고, 그후엔 캔디드가 그렇습니다. 이러한 전통이 현대에 이르기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알프레드 되블린의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의 주인공 프란츠 비버코프라던가, 심지어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에 나오는 레오폴드 블룸도 제가 보기에는 악동적 인물입니다.
  
김:특수한 개성을 지닌 문제적 인물이라기보다는 작가가 의식적으로 만들어 낸 가공적인 인물이라는 의미에서 하시는 말씀인가요?
  
그라스:가공적인 인물로서도 그러하지만, 또한 화경(火鏡)과 같은 인물로서도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러한 인물 속에서 가능한 모든 것이 깨어지고 잘라지고 불타 버립니다. 현실의 인물들은 할 수 없는 일을 그런 국외자적 인물은 수행할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특성상 특정한 시대와 환경을 반영할 수 있습니다. 때론 오목거울로, 때론 볼록거울로, 깨어지고 산산이 부서진 채로 말입니다. 도처에 이러한 계기들이 숨어 있습니다. 이러한 계기들을 잡아내는 것은 가공적인 인물로서만 가능합니다. 가공적인 인물이라는 말은 늘 부정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터무니없는 일입니다. 문학은, 특히 악동소설은 그러한 인물들을 가지고, 그러한 인물들의 쌍을 가지고 작업합니다. 물론 산초 판사는 돈 키호테의 일부이지요. 혹은 악동소설의 아주 흥미로운 변형형태로서 플로베르의 후기소설을 예로 삼더라도 역시 두 인물이 짝을 이루지요. 저는 이것을 저의 마지막 서사소설 『광야』에서 폰티와 호프탈러라는 인물을 통해 시도해 보았습니다. 폰티는 자신을 완전히 폰타네와 동일시하는 철두철미 가공적인 인물이고, 호프탈러는 요아힘 셰틀리히의 소설 『탈호퍼』에서 따온 인물로 영원한 스파이입니다. 두 인물은 뗄래야 뗄 수 없는 하나의 쌍을 이룹니다. 돈 키호테와 산초 판사처럼 말입니다. 또 샤를 드 코스터의 『틸 울렌슈피겔』도 그렇습니다. 원래 고 프랑스어로 쓰여진 이 소설에서 이 플랑드르 출신의 작가는 플랑드르 독립운동이 한창이던 19세기 초 울렌슈피겔이라는 인물을 대 스페인전쟁의 무대에 끼워 넣는데, 울렌슈피겔의 곁에도 람 괴착이라는 인물이 있어, 이 둘 또한 불가분의 한 쌍을 이루게 됩니다. 대개 한쪽은 좀더 진지한 인물이고, 다른 쪽은 희극적이고 사실적인 인물입니다. 돈 키호테가 지녔던 이상주의적인 생각들을 산초 판사는 지극히 현실적으로 냉정하게 바라봅니다. 디드로의 『숙명론자 자크』도 주인­하인 관계에 대한 좋은 사례가 될 것입니다. 여기서도 주인이 보다 고상한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하인이 주인보다 더 현실적이고 영리하지요. 이것은 매우 재미있는 짝짓기입니다. 하지만 물론 『양철북』의 오스카 마체라트처럼 독립적인 악동인물들도 있습니다.
김:당신의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은 대부분 가공적인 인물이지요.
그라스:예들 들면 『개들의 시대』에 나오는 마테른과 암셀도 이러한 가공적인 인물쌍입니다.
  
김:그러나 예외적이긴 해도 당신의 작품에서는 사뭇 강한 진정성을 지닌 현실적인 인물들도 등장합니다. 예를 들면 『국부마취를 당하고』나 『달팽이의 일기』의 경우 말입니다. 특히 『국부마취를 당하고』는 제가 무척 좋아하는 소설입니다만, 독일에서는 의외로 혹평을 받았습니다. 특히 독일 비평계의 <교황>이라 불리며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마르셀 라이히 라니츠키로부터….
  
그라스:라니츠키의 <해악적 명성>을 한국에까지 전파하지는 맙시다.(웃음)
  
김:그러나 이 작품은 미국에서는 대단한 호평을 받았지요.
  
그라스:미국이란 말이 나온 김에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해드리지요. 『양철북』은 독일에서 1959년 가을에 출판되었습니다. 그후 몇 달이 채 지나지 않아서 저는 독일의 유명한 출판인이었던 쿠르트 볼프한테서 편지를 한 통 받았습니다. 쿠르트 볼프는 제1차 세계대전 전에 젊은 에른스트 로볼트와 함께 출판사를 하나 세웠고, 처음으로 카프카의 소설을 출판한 인물입니다. 그것도 제1차 세계대전 전에 말입니다! 1920년대에 그 출판사는 현대문학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작지만 유명한 출판사였습니다. 볼프는 1933년에 나치가 권력을 잡자 독일을 떠나 이탈리아와 프랑스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했지요. 제가 그의 편지를 받았던 때는 그가 미국의 랜덤 하우스 판테온 북스에서 활동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는 저를 만나고 싶어했습니다. 우리는 취리히에서 만났습니다. 한 스위스 호텔에서였지요. 저는 무척 흥분한 상태였습니다. 그 유명한 출판인을 만나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그가 저에게 말했습니다. [미국 독자들이 당신의 소설 『양철북』에 흥미를 느끼리라고 생각하십니까? 그 책을 번역·출판할까 고심중인데요.] 그래서 제가 말했지요. [『양철북』이 미국독자들의 흥미를 끌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소설의 무대는 변방입니다. 단치히라는 도시도 아니고, 그 도시의 교외가 주된 무대지요. 『양철북』은 완전히 이 작은 세계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대화는 사투리고, 언어는 일상 독일어로 쓰여 있습니다. 미국은 고사하고 바이에른에서라도 읽혀진다면 더없이 기쁘겠습니다.] 그러자 그가 말하더군요. [더 이상 말씀하실 필요 없습니다. 이미 당신에게 설득당했으니까요.] 그러고 나서 그는 굉장한 말을 했습니다. [모든 위대한 문학은 변방에서 나옵니다] 라고요. 이 말은 거칠지만 아주 중요한 인식을 담고 있습니다. 세계 어디에서나 읽히는 책을 쓰기 위해서 반드시 대도시나 거창한 사건이 필요하지는 않다는 인식, 모든 것은 어떤 곳에서도 온전히 반영될 수 있다는 인식 말입니다. 제가 만약 한국작가라면, 남한과 북한이 분단되어 있는 한국작가라면, 거기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은 무궁무진할 것입니다. 한국은 문학을 위해 운명적으로 예정된 나라입니다!
  
김:당신은 독일에서 수많은 혁신적인 제도와 관행을 만들어 냈습니다. 예를 들면 앞서 말씀하신 번역자 모임이라든가, 작가 노조라든가 하는 것이 모두 당신의 발의에 의해 생겨난 새로운 제도요 관행입니다. 기성의 것을 뒤집는 획기적 인식이라는 면에서 특별히 저의 관심을 끈 것은 당신이 또한 전통적인 작가상을 매우 급진적으로 전복시켰다는 점입니다. 당신은 이른바 <참여문학>이라는 개념에 대해 매우 회의적입니다. 이점에 대해서는 수많은 글과 연설에서 언급하셨지요. 그러면서도 독일현대사의 정치적 굽이마다 당신만큼 적극적으로 참여한 작가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라스:<참여문학>이라는 개념은 저를 화나게 합니다. 저에게 있어 <참여작가>라는 말은 <흰 백마>라는 말과 같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문학은 그 자체가 <참여적>입니다. 상아탑에 숨어 들어가 세상과 현실에 대해 더 이상 아무것도 알고자 하지 않는 작가조차도 나름대로 <참여(engagiert)>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방향이 다르긴 하지만 말입니다. 그런 작가도 부정을 통해 정치적으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문학이란, 그것이 어쨌든 쓸모가 있는 것이라면, 언제나 세계로의 향함 혹은 세계로부터의 등돌림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이든 참여하고 있는 것이지요. 작가라는 말 앞에 참여라는 말을 덧붙이는 것은 사족에 불과합니다. 그렇지만 제가 그것에 대해 말하는 것, 저의 문학관도 여러 복수의 견해 중 하나일 뿐입니다. 참여문학에 대한 저의 생각은 50년대 중반에 아주 젊은 작가로서 47그룹에 초대되어 겪은 체험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그후 저는 지속적으로 동료작가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 왔습니다. 사회를 초월하여 존재하는 것처럼 계시자 연하는 작가들의 과장된 몸짓, 저는 한 번도 이런 태도를 취한 적이 없고, 지금도 여전히 이러한 태도를 거부합니다. 저는 동료작가들과, 또한 저와 전혀 다른 의견을 가진 작가들, 예컨대 그동안 정치적으로 저와 거리가 멀어진 마르틴 발저 같은 작가와도 동료로서 잘 지내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동료애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유명해질 수 있는 행운과 업적을 가진 소수의 작가들뿐 아니라, 이들만큼 유명해지진 못했지만 전체 문단에 속하는 많은 작가들이 함께 어우러져 문학의 영역을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노벨상은 본질적으로 생산적이지 못합니다. 특정작가를 그가 지닌 의미 이상으로 너무도 강렬하게 부각시키니까요. 의미란 다른 많은 사안들로부터 자라나오는 것이지 애오라지 문학의 질로부터만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수십 년 동안 노벨상을 받지 못한 중요한 작가들의 명단을 한번 떠올려 보십시오.
  
김:<참여문학>과 관련하여 『달팽이의 일기』에 나오는 유명한 문장이 생각납니다. [시(문학)는 타협을 모르지만, 우리는 타협에 의해 살아간다.] 문학과 현실의 관계는 어떠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라스:정치적으로 보면 우리는 타협에 의해 살아갑니다. 여기서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결국 정신분열적인 상황 속에서 내(작가)가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한편에는 어떠한 타협도 용납하지 않는 예술적 작업이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 나는 우연히 작가라는 직업을 가진 한 시민으로서 참여합니다. 그러나 예술가보다 시민이 우선입니다. 저는 수십 년에 걸쳐 이것을 실천해 왔습니다. 어떤 사람이 시민으로서 참여한다면 그는 다양한 의견이 지배하는 민주사회에서는 여러 이해집단과 관련을 맺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부도 또한 대개 연정으로 구성되지요. 결국 타협이 이루어지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타협 덕분에 살아가는 셈이지요. 그에 반해 미학적, 예술적 결단은 민주주의 이전의 것입니다. 다수결에 따라 이루어지는 예술적 결정은 무미건조한 평균적 작품을 낳을 뿐이겠지요. 문학과 현실은 근본적으로 서로 대립하는 두 개의 세계입니다.
  
김:<시민으로서의 작가>라는 작가관 또한 당신이 창출해 낸 수많은 새로운 개념 유형 중 하나입니다. 이러한 작가관은 특히 작가를 <민족의 양심>이나 <진리의 고지자>로 보는 독일문학의 전통에서 보면 무척이나 독특한 것이지요.
  
그라스:이러한 작가관은 종전 직후 몇 년에 걸친 고민과 성찰 끝에 생겨난 것입니다. 어떻게 히틀러 같은 자가 권력을 잡을 수 있었을까? 무엇이 바이마르공화국을 붕괴시켰는가? 오늘날 우리는 역사학자와 정치학자들로부터 이 물음에 대한 이런저런 설명을 듣고 있습니다. 시민 세력과 독일민족주의 세력이 나치와 연정을 구성했다는 것, 파퓰리스트정당이 바이마르공화국에 반대했다는 것, 사회민주주의자들과 중도성향의 정당들이 공화국을 지켜 내기에는 너무나 허약했다는 등의 설명 말입니다. 이 모든 설명은 나름대로 정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치의 권력장악을 막지 못한 핵심적인 이유는 태생적으로 허약체질인 이 공화국을 지켜 내기 위해 몸을 던진 참여적인 시민들이 바이마르공화국에는 너무도 적었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이러한 역사적 경험에서 제 나름의 작가관에 이른 것입니다.
  
김:이제 좀 다른 질문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저는 독일문학을 공부하면서 많은 문학비평을 읽었는데요, 여기서 받은 인상은 독일의 문학비평이 문학적 계기에서 쓰여진 경우보다는 상당히 정치적 동기에서 행해지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특히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의 문예란은 치밀한 정치적 고려에서 전략적 비평을 하고 있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습니다. 여기엔 역사가 있지요. 프리드리히 지브르크에서 마르셀 라이히 라니츠키, 칼 하인츠 보러를 거쳐 프랑크 쉬르마허에 이르는 이른바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군단>이 현대 독일문학비평에 미친 영향을 상기해 보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이들이 독일의 평단을 지배한 결과 대단히 부정적인, 즉 권력 지향적이고 보수적인 비평이 풍미하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진정한 문학비평>은 어떠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라스:<진정한 문학비평>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저로서는 앵글로색슨 계열의 문학비평을 높이 평가하는 편입니다. 제 책에 대한 비평을 보면서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지요. 영미비평에서는 비평가들이 독자들에게 작품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데 스스로 훼방꾼이 되는 일은 없습니다. 이 책에서 어떤 사건이 일어나는가, 즉 우선 작품의 내용을 정확하게 정리해 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작가가 작품에서 의도한 것이 무엇인지를 살핍니다. 이에 반해 독일의 비평가들은 자신들이 작가에게 소망한 것이 무엇인지를 전면에 내세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고는 그것에 맞추어 만족한다거나, 대개는 실망스럽다는 평가를 내립니다. 작가가 비평가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다는 것이지요. 독일에서는 이차적인 것이 일차적인 것을 앞지르는 전통이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서는 그동안 이론들도 많이 나왔지요. 문학의 경우에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미술계에서도 마찬가지지요. 화가가 새로운 그림에서 무엇을 표현하고자 했는지는 더 이상 관심거리라 아닙니다. 전시자가 그것을 어떻게 배치하느냐가 오히려 관심을 끌지요. 전시자, 즉 이차적인 것이 전면에 부각되어 일차적인 것이 되고, 결국 전혀 이차적이지 않은 것이 되지요. 저는 이 문제와 관련하여 「일차적인 것의 시각에서 본 이차적인 것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논문을 쓴 적이 있습니다. 이런 식의 비평을 상당히 신랄하게 공격하는 글이었습니다. 독일비평계의 이러한 태도는 근본적으로 보면 독일낭만주의, 특히 프리드리히 슐레겔로까지 소급됩니다. 하지만 슐레겔이 했던 것은, 물론 그가 매우 재능 있는 작가이긴 했지만, 그저 그런 비평이 하나의 예술형식이 될 수 있다고 우겨대는 그 순간부터 웃음거리가 되어 버립니다.
  
김:오늘날 독일의 문학비평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러한 예술형식으로서의 비평이 아니라, 비평이 과장의 예술, 단순화의 예술이 되어 버렸다는 점입니다. 마르셀 라이히 라니츠키라는 특수한 <현상>을 본다면 이 점은 분명하지요.
  
그라스:라이히 라니츠키에 대해서는 덧붙일 말이 있습니다. 그가 책을 읽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편견이 워낙 강하여, 그 편견에 따라 써대는 것입니다. 본시 그런 글과는 논쟁을 벌일 수 없는 법입니다. 저도 할 수 없습니다. 당신이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을 언급하셨으니 생각납니다만, 『양철북』이 발표되었을 때 이 신문에는 귄터 블뢰커라는 비평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이 소설을 혹평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적어도 책은 읽었습니다. 그건 느낌으로 알 수 있지요. 그러나 그의 후임자들은 꼭 그렇다고 주장하기 힘들지요.
  
김:1995년 당신의 소설 『광야』가 출판되었을 때 『슈피겔』은 라이히 라니츠키가 이 소설을 찢는 장면으로 표지를 장식했습니다. 이러한 도발은 전례가 없을 뿐 아니라, 대단히 상스러운 것인데요.
  
그라스:아무튼 『광야』는 살아남았고, 라이히 라니츠키의 명성은 피폐해졌습니다. 라이히 라니츠키에 대해서는 한마디만 하겠습니다.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얘기입니다. 그가 저의 책에 대해서 뿐 아니라, 일반적으로 모든 책에 대해서 평한 것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그가 공산당원이었던 시절 이후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변함없이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추종자라는 것, 그러니까 매우 편협한 문학관에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그를 루카치의 아류라고 부릅니다. 그는 사회주의는 내던져 버렸지만, 이 편협한 문학관은 고수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루카치에게서 볼 수 있는 문학관입니다. 루카치를 따라야 높은 수준의 작품이 된다는 것이지요. 결국 그는 하나의 아류에 불과합니다.
  
김:한국의 문단을 보면 개인적으로 당혹감과 실망감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더 이상 사회적, 정치적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작품을 쓰는 작가들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도처에 사회적 <비참>이 널려 있는데도 말입니다.
  
그라스:그것은 전 세계적인 현상입니다. 독일의 경우도 비슷하지요.
  
김:그러나 한국처럼 극명하지는 않습니다. 한국의 최근 작품들을 보면 대부분 신변잡기적인 이야기, 자전적 소재 일색입니다. 시대사 전체의 맥락을 읽는 서사적 안목을 가진 작가를 찾아보기 어렵지요.
  
그라스:요즘 작가들은 스물다섯이나 서른쯤 되면 자신의 탯줄을 소재로 삼아 글을 쓰지요. 자신의 인생을 돌아볼 나이가 되면, 그리고 꼭 그러길 원한다면, 자전적인 이야기를 쓸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저는 자전적인 것을 쓰지 않습니다. 자전적인 이야기를 쓰고자 하는 사람은 아주 풍성한 삶을, 모순에 가득 찬 삶을 살았어야 합니다. 독일에서는 젊은 작가들이 너무 일찍 자기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그럼으로써 문학적 착시가 생겨나는 겁니다. 문학 작품이 반드시 자신의 이야기를 다룰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나>는 이미 책 속에 스며 있으니까요.
  
김:한국문단에서―또한 독일문단에서―관찰되는 이러한 현상, 즉 사적인 영역에의 집중과 정치와의 결별은 이 시대와, 그러니까 이른바 세계화의 시대와 어떤 연관성을 지닌다고 생각합니다. 한편에서는 세계화, 즉 전 세계적 차원에서 고도의 자본집중이 진행되고, 다른 한편에서는 정치에 대한 무관심이 확산되는 이러한 현실을 당신은 어떻게 보십니까?
  
그라스:이러한 현상에는 물론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한편으론 적어도 서구의 의식상태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소련이 붕괴한 이후로 19세기, 20세기의 이데올로기 중에서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만이 살아남았다는 사실입니다. 그후 자본주의는 자신을 절대화해 왔습니다. 세계화라는 것은 자본주의의 자기 절대화의 표현에 다름아닙니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이미 자본주의의 자기 파괴는 시작되었습니다. 아무런 의미도 분별도 없이 사물들이 합성되고, 노동이 파괴되는 과정을 자세히 살펴보면, 세계화란 비합리적인 것이고 그 근본에 있어서는 반자본주의적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 사이 일군의 자본주의 이론가들도 이 점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광적인 자기 파괴의 과정이고, 우리가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을 가지고만 있다면 그 자체로는 슬퍼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과정입니다. 공산주의는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살리지 못했습니다. 공산주의는 올바른 사회적 단초를 가지고 자본주의 체제와 진지하게 경쟁을 벌일 만한 경제형태를 발전시키는 데 실패했습니다. 이러한 경쟁관계가 여전히 존속되었다면, 자본주의도 생존을 위해 더욱 노력을 기울여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이것이 사라졌습니다. 자본주의는 이제 아무런 장애도, 아무런 제동장치도 없이 활개치고 있습니다. 여기서 생긴 결과가 무엇보다도 소위 세계화입니다. 이제 증권거래소에서 일어나는 일은 노동과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이것이 이 지구를 요란하게 뒤덮고 있는 잠재적인 가치들입니다. 이러한 가치들은 인간의 문제는 도외시하지요.
  
김:문학에서 나타나는 사적인 영역, 자전적인 영역에의 집중현상도 세계화라는 새로운 현실과의 연관 속에서 살펴야 하지 않을까요?
  
그라스:물론 그렇습니다. 그것은 이러한 현실에 대한 반응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퇴각이지요. 이 거대한 움직임에 더 이상 참여할 수 없다는 인식이 이러한 퇴각을 낳은 것입니다. 목가적인 것으로, 특수한 자아로, 자기 주술(呪術)로 퇴각하는 것―이것은 이 개관할 수 없는 거대형식이 낳은 부수적인 현상임에 틀림없습니다.
  
김:또한 시장지배가 압도적인 것이 되어 버린 현실과도 관계가 있겠지요.
  
그라스:아니 시장이란 것이 아직도 존재하고 있나요? 이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자본주의적인 의미에서 시장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경쟁관계가 점점 더 작동하지 않으니까요. 존재하는 것은 시장을 지배하는 몇몇 콘체른(Konzern)뿐입니다.
  
김:당신은 노벨상을 수상한 세계적인 작가이지만, 또한 독일을 대표하는 지식인으로서도 유명합니다. 이제 당신의 삶과 관련하여 몇 가지 묻고 싶습니다. 저는 당신이 지난 50년 동안 사회민주주의자로서 일관된 정치적 입장을 견지해 온 것에 대해 경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68혁명기에 <신좌파의 기수>였던 한스 마그누스 엔첸스베르거나 한때 <공산당원>이었던 마르틴 발저가 이제 착실한 보수주의자로 변신한 모습과 비교해 보면 당신의 정치적 일관성은 단연 돋보입니다. 볼프강 엠머리히 교수도 당신의 일관성에 대해 놀라움을 표명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제가 놀라움을 갖는 것은 당신의 이런 일관된 태도가 확신에서라기보다는 회의에서 나왔다는 점입니다.
  
그라스:또한 경험에서 나온 것이지요.
  
김:당신은 이데올로기와 이론에 대해 언제나 회의적인 입장을 보여 왔습니다. 이러한 회의는 다른 면에서 보면 매우 신중한 태도를 가능하게 한 것이기도 하지요. 이를테면 하나의 이데올로기에서 다른 이데올로기로의 급작스런 전향 같은 것을 막아 준 셈이지요.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회의의 정신이야말로 당신의 일관성을 지켜 준 원천이라고 생각되는데요.
  
그라스:이 이야기를 하려면 잠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저는 전쟁이 끝났을 때 열일곱 살이었어요. 저는 하나의 이데올로기, 즉 나치즘의 이데올로기 속에서 성장했지요. 이 모두가 일거에 무너졌습니다. 저는 아주 어린 나이에 새로운 방향을 찾아야 했습니다. 그래요, 이것이 제 경우는 그래도 비교적 쉬웠습니다. 예술가가 되려고 했으니까요. 저는 새로운 방향을 예술의 영역에서 찾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회적인 인식의 전환을 위해서는 충분치 못했습니다. 그후 50년대 초 뒤셀도르프 미술대학에 다니던 시절에 프랑스에서 사르트르와 카뮈 사이에 불붙은 논쟁이 저의 관심을 사로잡았습니다. 얼마 후에 저는 어느 한편의 입장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저는 일찌감치 카뮈의 입장을 택했습니다. 그것은 반이데올로기적 입장입니다. 그것은 특히 그의 짧은 에세이 『시지프의 신화』에서 아주 분명하게 표명된 입장입니다. 즉 최후의 목표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이러한 관점은 또다시 반이데올로기적인 것입니다. 시시포스가 굴리는 돌은 결코 산 위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 돌은 하나의 짐일 뿐만 아니라 인간에게 속하는 무언가라는 것, 돌이 정상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태도라는 것,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현실과 일치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지요. 간단한 예를 하나 들어 보지요. 우리 사회는 무언가 잘못되어 있고 개혁이 필요합니다. 많은 투쟁과 타협이 있은 후에 이러한 불의(不義)한 상황을 제거할 개혁이 있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은 오래 지속되지 못하지요. 사람들은 이 개혁 또한 새로운 불의를 낳는다는 것을 금방 알아챕니다. 예전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영역에서 말입니다. 이런 식으로 돌은 벌써 아래로 굴러 떨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 존재의 모습입니다. 카뮈는 오랜 세월 전해져 온 옛 신화를 기막히게 새롭게 해석해 냈습니다. 결론은 이렇습니다. [우리는 시시포스를 행복한 인간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저는 이 말에 동의합니다. 저는 저의 돌에 매우 만족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다른 것과 바꾸지 않겠습니다.
  
김:소설 『국부마취를 당하고』에서는 [견디기의 몸짓]이라는 말을 하셨는데요. 이것도 시시포스적 맥락에서 보아야 할까요.
  
그라스:『국부마취를 당하고』에서는 세네카적 태도가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스토아주의도 그와 유사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철학적 입장입니다. 『두산(頭産)』과 『독일인 멸종되다』에서 이러한 입장이 더욱 두드러지지요. 여기서 저는 부분적으로는 패러디로서 시시포스를 다루었습니다.
  
김:그라스 씨, 당신은 노벨상까지 수상한 작가이면서도, 자신을
<조각가>로 소개하기를 더 좋아하시는 것 같습니다. 게다가 당신은 또한 화가이고, 젊은 시절에는 심지어 재즈 음악가이기도 했습니다.
그라스:그래요. 뒤셀도르프 미대에 다닐 때 저는 작은 재즈 밴드를 조직하여 호구지책으로 삼은 적이 있습니다. 멤버는 셋이었는데, 저는 빨래판같이 생긴 타악기를 손가락으로 연주했습니다. 그것은 당시에 막 유럽에 전파된 미국의 딕시랜드 뮤직이었어요. 이 일을 저는 매우 좋아했지요.
  
김:게다가 당신은 빼어난 요리 솜씨로도 유명합니다. 하인리히 뵐은 작가들의 모임이 있을 때마다 [그라스가 요리하지 않으면 식사하지 않겠다]라는 농담을 즐겼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지요.
  
그라스:저는 요리하기를 좋아합니다. 여러 사람들이 아주 잘한다고 하더군요.
  
김:그러니까 당신은 작가면서, 조각가요, 화가요, 음악가요, 요리사이기도 합니다. 어떤 평자는 [예술적 재능의 다양성에 있어서 그라스와 필적할 인물을 찾으려면 적어도 200년은 거슬러 내려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물론 거기서 만나게 되는 것은 괴테겠지요. 도대체 이 많은 재주가 어디서 나온 것입니다?
  
그라스:요리에 관해 말하자면, 저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스스로 음식을 해먹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늘 즐겁게 이 일을 했습니다. 식사를 하는 것, 그러니까 그 최종적인 결과물뿐만 아니라, 물건을 구입하고 하는 그 준비 과정도 즐거웠지요. 저는 아주 어려서부터 적은 돈으로도 맛있는 요리를 해먹는 법을 배워야 했습니다.
  
김:요리뿐 아니라, 조각이라든가, 회화라든가….
  
그라스:이렇게 설명을 드리는 것이 좋겠어요. 제 어머니는 남자 형제가 셋 있었어요. 그들은 모두 아주 젊은 나이에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전사했습니다. 그 중 한 분은 작가가 되고 싶어했어요. 또 한 분은 화가와 무대장식가가, 마지막 한 분은 요리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지요. 저의 어머니는 외삼촌 세 분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하셨어요. 그래서인지 어느새 저는 이 살지 못한 삶을―그분들은 스물둘, 스물셋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제가 대신 살아야 한다는 느낌을 갖게 되었습니다. 1960년대에는 작은 단편집을 아르투르 크노프라는 가명으로 낸 적이 있습니다. 아르투르 크노프는 바로 작가가 되고 싶어했던 제 외삼촌의 이름입니다. 그런 식으로 저는 1차 세계대전 때 전사한 외삼촌이 사후에 작은 문학작품을 내도록 도와준 셈이지요.
  
김:정말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이제 독일 통일과 관련하여 몇 가지 묻고 싶습니다. 당신이 통일과정에서 보여 주신 선견지명은 실로 놀라운 것입니다. 당신이 통일공간에서 제기한 경고와 우려가 통일 이후 10년이 지난 오늘날 거의 모두 그대로 현실이 되어 버렸으니까요. 이제 통일의 행보를 막 시작한 한국인들에게 분명 하실 말씀이 있으시겠지요. 독일의 통일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합니까?
  
그라스:통일의 전제는 분단된 두 체제가 서로를 존중하며 대화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북한사람들이 지금과 같은 체제하에서 살고 있는 것이 그들 자신의 책임은 아닙니다. 남한 사람들이 오랫동안 미국의 비호를 받은 독재정권 아래서 살았던 것이 그들 자신의 책임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지요. 그 모두는 지난 세계대전의 결과였습니다. 서로 상대방과 접근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역사에 대해, 접근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그 숱한 지난 삶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독일인들이 소홀히 한 것은 바로 이 점입니다. 우리는 통합(Einigung)이 되기도 전에 통일(Einheit)되었습니다. 하지만 통합이 통일보다 선행되어야 합니다. 통일은 통합의 결과물이어야 합니다. 독일에서는 통합과정이 시작되기도 전에 속전속결로 통일이 문서화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머릿속에 가지고 있는 생각은 고려하지도 않았지요. 한 가지 예를 들어보지요. 서독헌법에는 중요한 조항이 있습니다. 헌법 146조가 그것인데요, 이 조항은 독일이 통일될 경우 동서독 국민들에게 새로운 헌법이 제출되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조항은 무시되었습니다. 오늘날까지도 마찬가지지요. 만약 이 조항이 지켜졌다면, 물론 그래도 논쟁과 대립이 없지는 않았겠지만, 동독사람들의 삶의 체험과 기대를 이 새로운 헌법에 반영시킬 기회가 주어졌을 겁니다. 그들은 이 기회를 전혀 갖지 못했습니다. 이런 것들이 소홀히 취급된 것입니다. 경제적인 문제들에 대해서는 아직 언급하지 않았지만, 경제 분야에서도 엄격하고 비인간적인 방식으로 금이 간 동독의 경제를 일격에 박살내 버렸고―이와 유사한 것이 북한에서도 시도될 것입니다―그 결과 동독사람들은 오늘날까지도 심각한 실업문제와 서독에 대한 열등감에 시달리는 형편이 되었습니다. 이 모두는 성급한 통일의 부정적인 결과들입니다. 우선 동독의 피폐해진 경제를 살리기 위해 투자부터 했어야 옳았습니다. 한 가지 역사적인 예를 들어보지요. 이른바 독일의 경제기적을 생각해 봅시다. 많은 사람들이 <라인강의 기적>을 루드비히 에어하르트 총리의 공적으로 돌리지만, 이는 아무튼 많은 사람들이 함께 노력한 결과입니다. 전후 통화개혁이 있고 나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에 분명해진 사실은 아직도 완전히 전시물자 생산체제에서 벗어나지 못한 폭스바겐이나 잘츠기터, 페바 같은 대기업들이 경쟁을 버텨 내지 못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루트비히 에어하르트는 즉시 이 기업들을 국유화시켰고, 국가보조금을 통해 회생시킨 다음에야 다시 사유화시켰습니다. 그러나 독일 통일의 경우에는 이런 조치가 전혀 취해지지 않았습니다.
김:시간 관계상 마지막 질문이 될 것 같은데요. 당신은 노벨상을 수상한 후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브르디외와 가진 한 텔레비전 대담에서 [오늘날 우리 사회를 특징짓는 것은, 아니 더 정확히 말해 기형화하는 것은 이상과 언어의 전면적인 부재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상과 언어가 사라진> 오늘의 현실에서 지식인의 역할은 어떠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라스:우리 유럽인들은 계몽의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젊은 사람들에게는 평등이나 박애, 정의와 같은 말들이 구닥다리로 들릴 것입니다. 연대라는 개념도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비교적 잘 작동하는 사회보장망을 유지하고 있습니다만, 그것도 점차 망가져 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전 세계적 차원에서 목도되는 현상입니다. 연대라는 이 개념, 저에게는 전혀 낡지 않은 것이 아니지만 젊은이들에게는 분명 낡은 느낌을 주는 이 개념이야말로 우리가 사회적으로 함께 살아가기 위한 전제입니다. 지식인의 역할을 문학의 영역과 관련지어 이야기해 보지요. 작가는 승자의 자리에 앉아서는 안 됩니다. 작가가 앉을 곳은 그때그때의 패자들, 전쟁의 패자만이 아니라 경제적 과정, 사회적 과정의 패자들이 앉아 있는 그곳입니다. 승자에겐 옹호자들, 지지자들이 넘치는 법입니다. 그러나 아무런 목소리도 내지 못하는 대중들이야말로 작가에겐 더욱 소중한 존재이지요.
  
김:피에르 부르디외는 당신과의 대화에서 세계화 시대인 오늘날 [신자유주의 정부들의 중요한 능력은 유토피아를 살해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라스:유토피아란 그 자체로는 아무런 가치도 없습니다. 세계화란 것도 하나의 유토피아에 불과합니다. 끔찍스런 유토피아지요. 우리는 여러 가지 형태의 끔찍스런 유토피아들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유토피아는 제게는 영예로운 칭호가 아닙니다. 지식인 또한 제게는 영예로운 호칭이 아니고요. 거짓 이데올로기에 유혹당한 지식인, 하나의 이데올로기에서 다른 이데올로기로 널뛰기를 하는 지식인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제가 매우 존경하고 높이 평가하는 빌리 브란트는 이런 맥락에서, 에른스트 블로흐의 말을 빌려, [구체적인 유토피아]라는 말을 즐겨 사용했습니다. 그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지요.
  
김:한국인들에게 마지막으로 하실 말씀이 있다면.
  
그라스:한국에서는 통일 이전에 통합과정이 상호존중의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 과정에서 다른 곳, 특히 독일에서 저질러진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김:대담에 응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이 대담은 2001년 7월 16일 북부 독일 뤼벡 시 근교의 작은 마을 벨렌도르프에 있는 귄터 그라스의 작업실에서 1시간 30분 동안 진행되었으며, 이중 일부가 2001년 8월 21일자 동아일보에 게재되었다.) ●
  



..................
귄터 그라스 1927년 폴란드 그단스크에서 태어나 1948년 뒤셀도르프 미술대학에서 조각 및 회화 공부를 했고, 1953년 베를린 미술대학에서 조각을 공부했다. 1955년 『악센트』에 시를 발표하며 문단에 나왔으며, 『양철북』 『개들의 시절』 『국부마취를 당하고』 『무당개구리의 울음』 『나의 세기』 등의 소설과 두 권의 시집, 여러 편의 희곡작품을 발표했다. <47그룹상><독일비평가협회문학상><바이에른문학상> 등을 수상한 바 있으며, 1999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김누리 1960년에 태어나 서울대 독어교육과와 동대학원 독문과를 졸업한 후, 독일 브레멘대학에서 「귄터 그라스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비유나 진정성이냐』 등이, 역서로 『황야의 이리』 등이 있으며, 현재 중앙대 독문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추천3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독일개관 목록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55 문화예술 자유로니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121 03-10
54 문화예술 자유로니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221 03-10
53 문화예술 자유로니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286 03-10
52 문화예술 자유로니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413 03-10
51 문화예술 신승성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이름으로 검색 3375 03-09
50 문화예술 brecht이름으로 검색 3077 03-09
49 문화예술 Urs Widmer이름으로 검색 2918 03-09
48 문화예술 heiner mueller이름으로 검색 3477 03-09
열람중 문화예술 퍼옴이름으로 검색 3925 03-09
46 문화예술 강유일 (퍼옴)이름으로 검색 3115 03-09
45 문화예술 고사라니이름으로 검색 2706 03-09
44 문화예술 퍼옴이름으로 검색 3536 03-09
43 문화예술 퍼옴이름으로 검색 3051 03-09
42 문화예술 고스라니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2495 03-09
41 문화예술 퍼옴이름으로 검색 2648 03-09
40 문화예술 퍼옴이름으로 검색 2632 03-09
39 문화예술 고스라니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2280 03-09
38 문화예술 이창주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2465 03-09
37 문화예술 라인킨트이름으로 검색 2436 03-09
36 문화예술 김인혜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1994 03-09
게시물 검색
이용약관 | 운영진 | 주요게시판사용규칙 | 등업방법 | 개인정보취급방침 | 이메일무단수집거부 | 비밀번호분실/재발급 | 입금계좌/통보방법 | 관리자문의
독일 한글 미디어 베를린리포트 - 서로 나누고 돕는 유럽 코리안 온라인 커뮤니티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