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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 70세 생일 맞은 크리스타 볼프 인터뷰 (긴 글)

페이지 정보

작성자 고스라니이름으로 검색 조회 3,697회 작성일 02-03-09 12:43

본문

작성일 : 1999/08/29  조회수 : 119

■  70세 생일 맞은 크리스타 볼프 인터뷰


크리스타 볼프의 삶에서 문학과 정치는 서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독일어권 현대 작가의 그 누구보다도 그녀는 동시대의 시련을 겪었는데, 한때는 "전 독일의 작가"로 높이 칭송되었는가 하면 다시 "구 동독 작가"로 격하되고 있다. 동서독에서 이러한 가치평가의 뒤바뀜은 통일 독일에서 그녀의 작품 속에 그 흔적을 남겼다. 그녀가 99.3.18 70세 생일을 맞아 내놓는 산문집 "여기서, 어느 다른 곳에서(Hierzulande Anernorts)"(Luchterhand 출판사)는 지난 5년간 거칠었던 경험의 일종의 항해 일지와 같다. 크리스타 볼프는 차이트지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삶의 잠정적인 결산을 해보고자 한다.


디 차이트: 70세 생일을 맞으셨다니까 당신의 삶과 DDR(독일민주공화국. 구동독)의 역사를 평행하게 바라보면서 당신의 작품사에 한 틀을 만들어보고 싶은 유혹이 생긴다. DDR 역사에 있어 모든 전환점이 당신의 책을 통해 잘 나타난다. 당신 작품들이 DDR에 대한 공식적 해석 방식의 반대물을 형성한다고 할 수 있는가?


크리스타 볼프: 내 삶은 DDR 역사에 "평행"하게 진행된 것은 아니다. 그런 관점은 내게 늘 씌워지는 도식화를 촉진할 가능성도 있다. 내 삶과 작품의 전환과 단절들은 DDR 역사 전개와 점점 더 날카롭게 갈등하는데서 생겨났다. 정체성 없이 글쓰기는 불가능하다. 우리 시대에 있어 - 그건 당시 DDR에서만 그랬던 것은 아니다 - 그러한 정체성은 비판적 사유와 내면적 종속으로부터의 해방과 함께 형성된다. 내 생각에 동서독인들 간의 이해가 좀더 나아지려면 국가와 사회를 동일시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DDR는 40년 동안 불변했던 돌비석 같은 것이 아니다. DDR 역사 속에서 독특한 사회가 형성되었는데 여기서 나는 절대적인 적응에서 절대적인 반대 사이에 놓여진 많은 다양한 행동 양식을 관찰할 수 있었다.


디 차이트: 나치 시대에 성장한 당신의 제2의 정치적 사회화는 DDR와 긴밀한 관련이 있는 것 같다. 당신은 신실한 SED(독일통일사회당. 구 동독 공산당) 당원으로 경력을 시작했고 나중에 당 위계질서 상 SED 중앙위(ZK) 위원 후보로까지 올라갔다. 처음에 당신은 DDR 사회주의에 무제한적으로 동의했고 이 사회적 실험을 글쓰기를 통해 지원하고 추진하기를 원했던 것이 분명하다.


크리스타 볼프: "DDR 사회주의"란 처음엔 존재하지 않았다. 단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작들만이 있었다. 그리고 브레히트가 있었다. 또 고리키의 '어머니'로서 무대에서 내려다보면서 "사회주의는 합리적이야"라고 말하던 바이겔(연극배우, 브레히트의 부인-역주)이 있었다. 나치의 악행과 비합리주의의 충격이 끝난 후 그것은 내게 분명해 보였다. 나는 이 실험에 참여하길 원했다. 그리고 나는 내 작업을 통해 망명에서 돌아온 반파시즘 작가들과 친해질 수 있는 행운을 가졌다. 그들은 종전 후 독일에서 만날 수 있는 가장 인상적인 사람들에 속했다. 당신이 '위계질서'라고 이름 붙인 그 속에서 나의 '부상'과 전락은 복잡한 이야기이고 그건 언젠가 구체적으로 한번 이야기되어야 할 것 같다.  


디 차이트: 언젠가 당신이 환상에서 깨어나게 되는 시점이 있었던 것 같다. 이 단절은 아마 그 악명 높은 11차 중앙위 총회였는가? 1965년의 이 총회에서 예술가들이 금지와 처벌을 통해 당 노선으로 강제로 끌어들여지거나 퇴마 의식(Exorzismus) 같은 것이 행해졌는데.


크리스타 볼프: 그 단절은 1956년 20차 전당대회에서 흐루시초프가 스탈린과 베리야의 범죄에 대해 연설해 깊은 충격을 불러일으켰던 당시에 이미 나타났다. 그 후에 나를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이 이제 근본적인 개혁이 있어야 한다고 기대했다. 60년대초 책과 영화에서 당신은 우리가 이 개혁에 예술을 통해 동참해야 한다는 과제를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였는지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디 차이트: 흐루시초프의 폭로가 얼마나 갑작스러운 것이었는가? 당신은 그래도 이미 스탈린의 테러에 대해 알고 있었음이 틀림 없다고 생각하는데.


크리스타 볼프: 우리는 어느 정도는 예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극단적인 상태까지 믿지는 않았다. 게다가 우리가 냉전 시대에 살았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DDR의 지도층은 너무 지나친 폭로는 겨우 잡은 권력을 위태롭게 할 것이라는 불안감에 사로잡혀 살았다. 이러한 불안을 그들은 젊은 세대에게까지 넘겨주었다. 이로부터 내적으로 풀려나는 것이 우리의 해방 과정에 속했다. 그리고 "나뉘어진 하늘(Der geteile Himmel)"에서 중심적인 대화는 이 문제에 관련되어 있다. 이것이 이 책이 우선 당 내에서 매우 심한 비판을 받게 된 이유이다.  


디 차이트: 그렇지만 "크리스타 티에 대한 명상(Nachdenken ueber Christa T.)"이 당신이 진짜로 검열과 충돌하게 되는 첫 번째 책이 아닌가?


크리스타 볼프: 그건 여하튼 그에 대한 비판이 근본적이던 책이다. 내가 데카당한 주관주의적 인간상을 유포했다는 것이다. 끝없는 논쟁을 통해 나는 이건 피상적인 오해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고 내 스스로 비타협적 자세를 갖추도록 몰고 나갔다. 그건 작가로서 내 자아의식에 있어 중요한 진전이었다. 나는 '주관적 진정성(subjektive Autentizitaet)'라는 작업의 테제를 발전시켜 나갔다.


디 차이트: 평론가 Marcel Reich-Ranicki는 이 소설을 인상적으로 규정했다. "크리스타 티는 류마티즘으로 죽지만 그는 DDR에 고통받는다"라고. 이 찬사가 DDR에서는 당신의 책에 별 도움이 안되었을 텐데.


크리스타 볼프: 그 비평은 바로 '디 차이트'지에 크게 실렸다. 그래서 어차피 1년 이상이나 인쇄 허가를 받지 못하고 있던 그 책의 서점 발송이 다시 중단되었다. 나는 타협하기를 강요받았지만 응하지 않았다. 어처구니없는 과정들을 통해 책이 결국 출간되었는데 이걸 다 얘기하지는 않겠다. 4년간 재판은 찍히지 않았는데 서독에서는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나는 해외 판권을 얻었다. 당시 나는 이걸로 먹고살았다. 나중에 DDR에서도 이 책은 많은 발행 부수를 기록했다.


디 차이트: 당시는 체코슬로바키아에 바르샤바 동맹군이 진군해 오기 직전인 1968년이었다. 당신은 그 진군을 지시대로 환영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전인 1965년에 11차 중앙위에서 당신은 연단에 나가 예술과 문화를 정치논리에 따라 복속시키려는 당의 시도에 맞섰다. 그런 사람은 당신이 유일했다.


크리스타 볼프: 누군가 중앙위 총회에서 정치국의 정책에 대해 반대 의견을 낸 것은 전혀 없던 일이었다. 이 총회는 여러 예술가들의 생애에 깊은 전환점이 되었다. 그건 그때까지 당 지도부도 긍정하던 개혁에의 희망이 사라지는 것을 의미했다. 경제는 위기에 빠져있었고 청소년들이 봉기하기도 했는데 누군가 이에 대한 희생양이 되어야 했다. 그래서 당은 문화에서, 특히 작가와 영화감독에게서 희생양을 찾아냈다. 예술가들의 문제 제기는 믿어지지 않을 만한 비방과 의심과 모욕으로 방해되었다. 한 지역 당서기가 작가협회를 헝가리의 반혁명 중심인 페퇴피 클럽(Petoefi-Club)과 비교했을 때 나는 이에 대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여기 준비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각 쟁점마다 이야기해야 했다. 나는 매우 흥분해 있었고 계속 비난 소리 때문에 중단되었다. 나는 공격받은 동료들을 지키고 반문화 캠페인의 결과를 경고하려 했다. 물론 나는 아무 것도 막을 수 없었다. 책과 특히 많은 영화들이 금지되었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것은 기록에 남았다.


디 차이트: 우리 독자들이 모두 1967년 당신이 (중앙위원) 후보 자격을 잃었다는 사실을 알지는 못할 것이다.


크리스타 볼프: 당과 나 모두 그걸 원했다.


디 차이트: 그리고 그 후 DDR 소멸 때까지 국가보위국(Stasi)이 당신을 감시했다.


크리스타 볼프: 1969년부터이다. 서류 42권에 나와 내 남편에 대한 감시와 우리의 '부정적인' 정치적 발전에 대한 추측들이 기록되었다. 1969년 이후로 중단되지 않은 전화 도청 기록도 발견되었다. 나는 이 서류 더미를 현실과 비교하지만 나는 이것들이 역사의 믿을만한 원천이 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1976년, 즉 Wolf Biermann(동독 출신의 저항가요 작가 및 가수)의 추방과 이에 대항한 우리들의 항의가 일어난 이후, 은밀한 감시가 공공연하게 변화되었다. 나는 이걸 "무엇이 남았나(Was bleibt)"에서 서술했는데 이 책은 서구의 문화계를 분격시켰다.


디 차이트: 돌이켜보면 다음과 같은 틀이 나타난다. DDR 정치인들이 점점 나쁜 쪽으로 나아가고 자유를 제한하는 쪽으로 나아가는 때마다 당신은 비판적인 책을 써서 이에 반응했다. "나뉘어진 하늘"은 베를린 장벽 건설 이후 DDR에서의 삶을 테마로 삼았고, "크리스타 티에 대한 명상"은 11차 총회의 충격에 대한 대답이며, "유년기의 모범(Kindheitsmuster)"은 DDR가 자신을 반파시즘의 모범국가로 정형화시키는데 대한 반대이고, "아무 데도, 그 어느 곳에도(Kein Ort, Nirgends)"는 비어만의 추방 이후 고립된 당신의 위기를 표현한다. 당신이 DDR 정권과 자신을 동일시시킬 수 없게 될수록 당신은 열악한 현실과 대비해 명백히 사회주의적 유토피아를 변호한다. 이것이 당신 독자층에게서 당신을 도덕적이고 정치적으로 지도적인 인물, 즉 윤리적 권위(moralische Instanz)로 만들었다. 당신은 이 역할을 기꺼이 맡았는가?


크리스타 볼프: 내 책을 이러한 도식으로 끌어내리고 싶지 않다. 나는 정치 논문을 쓴 적이 없고 지금도 쓰지 않는다. 모든 산업사회에서 문학은 소외 과정과 인간이 단순한 기능 담당자나 소비자로 전락하는 데 대해 반대한다. 그렇지 않다면 내 책들이 서방 국가들에서도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은 전혀 이해될 수 없다. 국가사회주의가 독일 소시민 가족에 어떻게 뿌리 박고 있으며 어떻게 이에 영향을 미쳤는가를 주제로 삼은 "유년기의 모범"으로 나는 DDR 뿐 아니라 BRD(독일연방공화국, 구 서독)에서도 많은 독자 편지를 받았다. 정치와 역사에 있어 내 글쓰기에 항상 함께 영향을 주어온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나의 주된 작업은 내 이야기 방식을 찾는데 있었다. 그건 내게 다가오는 시대의 소재들에 적합한 나의 미학을 찾는 일이었다. 윤리적 권위? 좋다. 나는 이런 역할을 원했던 것은 아니고 이를 '즐기지'도 않았다. 반대로 그건 내가 그렇지 않아도 느끼고 있던 책임이라는 압박을 더욱 높였다. 그렇지만 DDR처럼 광장(Oeffentlichkeit)이 그렇게 제한된 사회에서 사람들은 공공기구 바깥에서 권위를 찾게 되는 것이다.


디 차이트: 1976년 이후 압력이 더욱 늘어났다. "아무 데도, 그 어느 곳에도"에서 당신은 예술가는 사회의 국외자이며 소위 정상인으로부터 낙인찍힌 것으로 서술함으로써 이런 압력에 반응했다. Guenderrode라는 인물 속에서 고립되고 주변부로 밀려난 고통스러운 여자로서의 당신이 보여진다.


크리스타 볼프: 나는 '고통스러운 여자'도 아니었고 고립되지도 않았었다. 나는 실망, 슬픔, 분노, 그리고 절망도 경험했지만 스스로 포기하는 것은 경험하지 못했다. 친구들과 동지들과 격려의 말들이 점점 많아졌고 오랫동안 유지되었다. 이런 것을 내가 Brigitte Reimann이나 Franz Fuehmann과 주고받은 서한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옛날 낭만주의자들을 연구하면서 그들이 어떻게 프랑스 혁명 이념이 좌절하는 것을 체험했고 이를 극복했는가라는 문제에 천착했다. 나의 한 책은 "그대 선구자여, 신발 속의 피..."로 시작된다. 나는 내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역사 속에서 모델을 찾았다. 내가 동서독에서의 군비 증강 때문에 크게 동요하는 상황에서 "카산드라(Kasandra)"를 쓰면서 우리 문명이 가진 파괴성의 뿌리를 찾기 위해 선사 시대에까지 거슬러 올라간 것도 이런 방식이었다.


디 차이트: 당신은 귄더로데가 등장하는 책을 통해서 DDR는 더 이상 '아무 데도' 아니라고 생각했다면 그곳을 떠날 생각은 하지 않았나?


크리스타 볼프: 그렇다. "아무 데도, 그 어느 곳에도"는 내가 지적, 정신적, 정치적 고향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거기에는 대안도 없었다. 그건 DDR 내에서뿐만 아니라 그야말로 "그 어느 곳에서도"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떠나지도 못했다. 그래도 우리는 70년대 말에 심각하게 떠날 것을 생각하기도 했다. 나는 남편과 시골길을 자동차로 달리면서 지도책을 무릎 위에 펴고 골똘히 생각하던 모습을 지금도 기억한다. 떠나야 하는가, 가야 한다면 어디로? 구체적인 결정은 내리지 못했는데 이는 가족의 문제를 포함해서 여러 이유 때문이었다. 나는 나를 신뢰하는 특정 사람들과 강한 결속 감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이 나라에서의 모순 때문에 내 글쓰기를 이끌어 나갈 수 잇다는 사실도 점점 더 깨닫게 됐다. 만일 갈등 때문에 글쓰기가 불가능해졌다면 우리는 떠나야만 했었을 것이다.


디 차이트: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후 10년간이나 당신은 압력을 견뎌냈는데 물론 점점 더 메클렌부르크의 피난처, 개인적 친구들이 있는 전원적인 대항 세계(Gegenwelt)로 물러났다. DDR와의 불화를 당신은 현지에서 경험했는데 점점 더 체제 내적 비판이라는 불안정하고 반은 밀려난 입장에서 이를 체험했다. 당신은 국가 권력의 충실한 반대자(die loyale Opposition)이었고 국가에서 벗어났지만 계관시인(Staatsdichterin)이었다. 당신의 태도는 개량주의적이고 교육적(reformistisch, didaktisch)이었다.  


크리스타 볼프: 내 태도는 계몽적(aufklaererisch)이었고, 말하기도 무섭지만, 아직도 그렇다. 당신의 명제와 주장 하나 하나를 받아들여서 거기에 여러 이야기를 덧붙여야 할 것 같기도 하다. 이런 명제들이 아직도 유지될 수 있을까? "여름극(Sommerstueck)"의 기본 정서는 전원적인 것일까? 계관시인? 그건 1989년부터 서독 언론들이 내게 붙여준 딱지다. 이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들에 비추어 볼 때 그런 딱지가 아직도 유지될 수 있는가? 동서독의 내 독자들은 나를 다르게 경험했다.


디 차이트: 체제의 개혁 가능성, 사회주의 이상향의 실현 가능성에 대한 당신의 믿음은 80년대 들어서도 지속됐는가?


크리스타 볼프: 80년대 들어 나는 "카산드라"에서 왜 트로이가 몰락했는지에 대해 말했는데 이는 그리스인의 침공 때문만은 아니고 무엇보다도 내적 모순 때문이었다. 나는 '믿음'에 대한 문제는 이를 통해 해결된다고 생각한다. 한편 이 책은 처음으로 Luchterhand 출판사에서 출판됐다. 그 당시는 서구에서 나를 '독일의 작가'라고 부르던 때이다. 그 동안 나는 "구 DDR 작가"이거나 "동독" 저술가로 강등되었다. "믿음"이 문제가 되니까 말인데, 나는 그 믿음에서 아주 멀리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많은 친구들처럼 1985년 이후에도 고르바초프에게 희망을 걸기를 오랫동안 주저했다.


디 차이트: 그렇지만 당신은 1989년 10월 DDR가 이미 분명히 붕괴하고 있을 때 한 인터뷰에서 독일 통일을 "위험한 헛소리"라고 말했고 "DDR 유지"를 주장했다. 이는 분열증(schizophren)이 아니었나? 대체 1989년 가을에 호네커의 DDR에서 지킬 것이 무엇이 있었단 말인가?


크리스타 볼프: 서독에서 이러한 오해를 해소하는 건 한마디로 불가능해 보인다. 우리는 "호네커의 DDR"를 수호할 생각이 아니었다! 지도층의 이런 사람들이나 이런 구조로는 어떠한 국가도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여러 상황에서 신중하게 행동하여 피를 흘리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기도 했다. 1989년 가을 시민운동가들 중에서는 아무도 서독과의 조속한 통일을 생각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오늘날 더이상 이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다. 잠시 동안 여러 길거리와 알렉산더 광장의 시위대에게는 흠잡을 데 없는 가능성이 비추는 것처럼 보였다. 이 때는 끓어오르는 몇 주였고 내가 회의적이기는 했으나 이를 함께 경험할 수 있었던 것은 행복한 일이었다. 독일 역사에서 언제 작가가 이런 경험을 하겠는가? 가장 아름다웠던 것은 깨어나서 자신으로 돌아온 사람들 얼굴이었다. 원탁에서 그들의 영리함이었다. 브레히트 작품의 파리 콤뮨과 같은 길거리의 장면들이었다. 사람이 사람다울 수 있는 한 사회에 소위 '서민들'이 어떻게 다가가고 있는 지였다. 그것은 Otl Aicher의 말대로 참민주주의 사회였다. 이는 절망적인 경제상황 때문에라도 하나의 환상이었다. 상황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인민과 국가가 소유했던 기업이나 많은 주택과 대지에는 새로운 주인이 나타났다. DDR 영토는 서구 상품시장이 되었다. 자의식이 얼굴에서 사라졌다. 베를린의 어느 집 벽에서 나는 다음과 같은 물음을 읽었다. "어디에 우리의 웃음이 머물러 있는가?" 원탁에서 작성된 통일 독일을 위한 헌법 초안 - 그 전문(前文) 작성에 나도 참여했고 그에 대해 바울 교회의 동서독 데모대가 토론했었다 -도 사라져 버렸다.


디 차이트: 1990년 전환(Wende) 이후 처음 나온 당신의 책은 "무엇이 남았는가"라는 소설이었다. 거기서 당신은 자신을 슈타지의 희생자로 묘사했다.


크리스타 볼프: 그러지 않았다. 나는 한 작가의 생에서 하루를 묘사했는데 이는 일부 내 삶의 특징을 가졌다. 하루와 슈타지가 규정하는 그 하루의 경과를 묘사했다. 나는 이 인물을 '희생자'로 보지 않는데 이 인물은 자신을 흥정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디 차이트: 당신 자신이 유발시킨 근본적인 문학 논쟁에서 당신의 작품 전체와 개인적 신뢰성이 의심을 받았다. 당신 세대와 구 동서독의 문학 전체를 대표하고 있는 당신 작품과 당신으로부터 사후에 정당성이 박탈되었다. 그 노트를 서랍에서 꺼내서 그 때 출판했던 것은 현명치 못한 처사가 아니었나?

크리스타 볼프: 많은 사람들은 좋은 의도로 그렇게 말을 하는데 그 말이 맞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 소설이 그 당시 출판된 것이 유감스럽다.


디 차이트: 당신은 이것을 피할 수도 있었다.


크리스타 볼프: 물론이다. 다른 한편 나는 서구에서 여론이 작용하는 방식을 그 외의 다른 어떤 방식으로도 그렇게 빨리, 철저하게 배울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나의 캠페인이 시작되면 어떻게 많은 사람들이 거리 두기와 객관화의 능력을 상실하게 되는지 말이다. 그렇지만 나의 소설이 우선적으로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정치에 대한 내 입장이 문제가 되고 있다는 것을 점점 이해하게 되고 이러한 연극에 참여한 많은 사람들의 심리를 들여다보게 되었을 때 그것은 내게 매우 어려운 시기였다. 이제 이 텍스트를 읽는다면 그 당시의 흥분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디 차이트: 이러한 충격에 이어 1993년 1월에는 베를리너 차이퉁이 당신이 1959년에서 1962년까지  슈타지의 IM(비공식 정보원)으로 일했고 당신은 이를 잊어버렸다고 폭로했다. 또한 당신이 소위 '가해자로서 당신의 서류'를 몇 개월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침묵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건 잘못된 일이었나?


크리스타 볼프: 사람이 피할 수 없는 실책도 있다. IM이라는 개념은 이제 그 말이 적용되는 사람에게 치명적으로 작용할 만큼 악마화되었다. 그래서 나는 수개월 동안 내가 예견할 수 있었던 새로운 풍파를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그리고 일어난 일은 지금 설명할 필요는 없다. 거리를 두고 물러나서 보는 것도 없고, 사실에 대한 어떠한 실질적인 보도도 없었고, 이 에피소드를 내 전체 개인사의 맥락에서 보려는 시도도 없었다. 아마도 이제 내가 천천히 꿰뚫어 볼 수 있게 된 이 서류들에 있어서의 조작에 대해 이야기할 때가 있을 것이다. 내가 이 서류들을 마침내 받게 되었을 때- 모든 기자가 나보다 먼저 그걸 받을 수 있었다- 나는 이를 구절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공개할 것을 결심했다. 그것은 내 독자들이 스스로 소위 나의 슈타지 연루 의혹에 대해 판단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기록에서 나는 망각의 문제에도 씨름하고 있는데- 물론 이는 내겐 유일한 일이다- 이 기록은 어디에서도 언급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반복해서 똑같은 방식으로 40년이나 되었고 이미 오래 전에 해명이 된 이 사실과 부딪혔다.  

디 차이트: 당신은 2개의 작품에서 당신을 공격하는 캠페인에 반응했다. "타부로 가는 길(Auf dem Weg nach Tabou)"은 일부는 산타모니카에서 씌여졌는데 여기서 당신은 자신을 독일에서 쫓겨난 유대인 이민자(이는 당신에게 다시 한번 악평을 가져왔다)와 비교했다. 또 "메데아. 목소리들(Medea. Stimmen)"이라는 장편에서는 메데아를 자신과 동일시했는데, 메데아는 무고를 당하고 명예가 더럽혀졌고 거짓말 때문에 역사적으로 악의 편으로 밀려난 여자이다.


크리스타 볼프: 잘못된 정보는 얼마나 오래 가는가! 부디 "타부로 가는 길"에서 나를 나치 독일로부터 이민자들과 비교한 부분을 보여달라. 그런 주제넘은 짓은 내게는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메데아가 지금 이 시기에 나타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나는 언제나 스스로의 갈등 상황으로부터 글을 끄집어 낸다. 그러나 나는 스스로를 완전히 한 인물과 동일시하지 않는다. 특정 수용자가 이 작품에서 엉터리로 그러한 동일화를 읽어냈을 뿐이다. 나는 글을 쓰기 위하여 가까움도 필요로 하지만 인물에 대한 거리감과 때론 낯설음도 필요로 한다.


디 차이트: 그러한 캠페인이 당신의 명성을 해쳤다고 여기는가?


크리스타 볼프: 그건 당신이 더 잘 알 것이다. 내 책을 읽는 사람들은 거의 동요하지 않는 것 같다. 오히려 내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다를 수도 있을 것이다.


디 차이트: DDR 몰락과 함께 당신 문학의 대상도 사라졌다는 느낌을 가지는가?


크리스타 볼프: 전혀 그렇지 않다. 특이하게도 독일 작가들은 이제 모두 어떠한 사회적 대안도 열리지 않는 상황에 처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마도 이를 통해 정신적 공백 상태가 생겨나고 이 공백이 야단법석이나 쇼 비즈니스나 우리 문화의 위기를 뿌리부터 진단하지 못하는 피상적 토론들을 통해서 채워질 것 같다. 유토피아의 종말, 역사의 종말, 계몽의 종말, '신념의 미학'의 종말 등이 선포되는데 이들은 이를 즐기고 있다. 이는 많은 사람들을 움추러들게 하지만 10년이 지나지도 않은 지금 이미 이 새로운 판단에 대한 불평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런 불평은 지식인층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이런 불평을 승화시켜낼 사회적으로 의미있는 지점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DDR에서 이 전체적인 순환을 이미 경험했던 우리는 아마도 이러한 일반적 분위기가 비합리주의와 자포자기로 떨어지지 않도록 다소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디 차이트: 어떻게 그런 일을 이루어내겠는가?


크리스타 볼프: 우리는 가능한 한 참되게 우리의 이야기를 서술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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