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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 클라이스트: 인형극

페이지 정보

작성자 무딘연필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조회 3,499회 작성일 07-02-21 13:29

본문

클라이스트: 인형극
기억을 더듬어  2006/10/07 07:03

http://blog.naver.com/waffel/110009455875
 
인형극Über das Marionettentheater

 
1
1810년에 발표된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의 짤막한 글이다. 이 글에서 영감을 받은 현대 무용가인 그레고어 자이퍼르트는 이를 무대에 올리면서, 자신이 직접 인형의 역할을 맡았다.

<인형극>은 당시에 인정받지 못했던 극작가이자 소설가였던 클라이스트가 쓴 일종의 단편소설이다. 소설의 화자인 “나”가 M.이라는 도시에서 극단의 1급 무용수와 만나서 나누는 대화로 구성되어 있다. 허구적인 성격으로 보자면 소설이겠으나, 대화의 구조로 보자면 이는 자신을 허구적 대상과 이야기를 나누는 식으로 분열시켜 자신의 전언을 말하자면 언뜻 보기에 객관적인 양상으로 변화시킨 경우이다.  “나”와 무용수가 나누는 대화는 말하자면 독백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실제로 클라이스트는 대화를 사고를 형성하는데 가장 중요한 수단으로 보았다. 그는 말을 하면서 문제를 풀어갈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대화는 다소 일방적이다. 잘 풀리지 않는 문제를 제기하고 그것에 대한 해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인형극>에서는 무용수가 일방적으로 “나”에게 자신의 견해를 전달한다. 여기서 “나”가 맡은 역할은 매우 한정되어, 잠깐씩 도입과 경과를 위해 한마디씩 던지는 것이지만, 결정적인 전언은 항상 무용수에게 남겨져 있다. 이에 상응하듯이, “나”의 역할은 불행히도 말하는 차원이 아니라, 무용수가 전하는 말에 대한 신체적 반응으로 남아 있다. 비록 그가 반박을 한 차례 가하지만, 무용수는 그 반박을 뒤집을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인형극>은 무용수가 전하는 독특한 예술관이다. 클라이스트는 여기서 “나”와 무용수를 나누었지만, 이 두 사람은 클라이스트의 머리 속에서 자신이 가진 생각을 반박하고 좀더 묻고, 펼쳐내기 위해 필요하다. 독백은 허구적 분열을 통해 대화로 변한다. 그리고 이 대화의 소재는 <인형극>이며, 줄에 매달린 인형의 몸짓이 뛰어난 무용수의 몸짓보다 더 우아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라는 물음이다. 자이퍼르트는 이것을 글자 그대로 무용수에 대한 요청으로 받아들여 한 편의 무대를 만들어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인형극>에서 다루어지는 것은 이원론이다. 인형의 육체와는 달리 인간에게서는  영혼과 육체가 분열되어 있으며, 인형의 기계적 성격과는 달리 인간에게는 정신 세계 (윤리, 도덕, 이상…)가 더 있으며, 인형은 아무런 의도 없이 움직이지만, 인간은 그럴 수 없다. 표현이라는 개념에 들어서면, 상황은 더욱 복잡해진다. 인형의 움직임에 우아라는 고전적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면, 신체를 통한 인간의 표현은 우아에 도달할 수 있는가? 인간은 인형을 따라가면서 인간의 몸의 리듬에만 의지하여 춤을 출 수 있는가? 그럴 때에 소위 표현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가? 하는 물음이 들 수 있다.

클라이스트의 생각은 과격하기도 하고 급진적이기도 하다. 영혼과 정신세계가 없는 그저 몇 개의 관절로 이루어진 인형의 몸짓이 인간의 몸짓보다 더 우월하다는 것이다. <인형극>에서 무용수는 인형을 조종하는 사람의 의도와 상관없는 인형의 자율적인 움직임을 강조한다. 이렇게 되면 의도와 상관없는 신체의 다른 리듬에 철저하게 자신을 내맡기라는 요청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흔히 표현에 대해 사람들은 내면의 감정 세계를 밖으로 표출하는 것으로 이해하는데, 이것은 낭만주의적인 사고방식이다. 회화적인 자연 모방을 적어도 이념적으로 탈피하는 것이 가능해진 것은 음악이 자율적으로 발전하면서, 아무것도 모방하지 않는, 심지어 대본과 음악이 합쳐졌던 성악에서 기악으로 비중이 변화한 결과이기도 했다. 그러나 초기낭만주의자들은 이 도대체 어디에서도 토대를 세워낼 수 없는 음악을 접하면서, 감정을 매개와 목적으로 삼았다. 곧 음악은 감정을 글없이도 전달하며 이것이 듣는 사람의 감정에 그대로 울린다는 것이다. 낭만주의 미학은 이 점에서 보자면 일종의 영향미학이다.

반면 클라이스트는 이런 식의 감정 이입을 처음부터 배제하고 있다. 인간이 영원히 – 현대적 용어를 빌리자면– 지향성을 가지고 있는 한, 그는 결코 “우아”에로 이르지 못한다. 그가 말하는 “우아”는 동물에 대한 에피소드에서 볼 수 있듯이, “순진무구한 상태Naivit&auml;t”를 유지하는 것이지, 고전주의에서 강조되는 정연한 모습은 아니다. 클라이스트가 말하는 표현 개념은 그렇기에 “장식” 개념과 뚜렷이 구별된다. 그는 그가 말하는 “우아” 이상을 넘어서는 것을 장식으로 이해하는 듯 하다. 1900년대초라면 아돌프 로스가 장식(Ornament)는 범죄라고 공공연하게 선언하고 다니면서 당시 최고의 유행사조였던 유겐트슈틸을 공격하였던 것을, 이미 클라이스트는 거의 90년 전에 선취한 셈이다. 인형의 춤은 “장식”에서 벗어나 있기에, 무엇보다도 “순진무구한 상태”를 가로막는 어떤 것들이 그 상태에 대한 껍질로 남아 있지 않기에, “우아”하다는 것이다. 낭만주의에 대한 클라이스트의 생각은 이런 식으로 한편으로는 인간의 본원적인 욕구를 복원시켜야 한다는 점에서 일치하면서도 그 방법적인 면에서 전혀 다르다. 곧 그는 “표현”이라는 개념을 낭만주의적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그는 조금 과격하게 말하자면 “무표현적인 것의 표현”(아도르노)을 이념으로 삼는다.

클라이스트의 생각에서는 영혼과 육체, 감각과 정신이 합일된 행복한 인간상이란 없다. 그의 세계에서는 인형이 인간보다 더 “우아”한 몸짓을 보여주며, 동물들이 인간이 알지 못하는 초월적인 세계를 예감하며, 훈련받지 않은 곰이 인간보다 더 펜싱을 잘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물론 이것은 클라이스트의 주장일 뿐이다. 클라이스트는 이것이 이들이 가진 “순진무구함”의 상태에서 비롯한다고 보았다. 이렇게 보자면, 클라이스트 본인의 나이브함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인간의 이성이 가질 수 있는 파괴적 성격에 대한 깊은 통찰을 가지고 있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이성 대신에 “순진무구함”을 내세웠을 수도 있다. 그는 그 “순진무구한” 사람들이 세상에서 고통받는 것에 안타까워하면서 그들에게 잠깐 동안의 행복을 안겨주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세계의 흐름이란 그렇지 않고, 그들은 파멸에 치닫게 된다.

<인형극>에서 다루어지는 이 새로운 “우아”, 새로운 “표현”은 당연히 이념으로서 뿐 아니라 하나의 실험적 아이디어에도 자극을 줄 수 있었을 것이다. 인간에게서 영혼이나 정신을 뺀 다음 남는 것은 육체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무용은 육체로 모든 것을 보여주지, 줄거리나 언어적 전언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그것은 순전한 몸의 세계가 되어야 한다. 그렇기에 그러한 몸의 움직임으로 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탐색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이 인형의 몸짓을 모방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클라이스트가 들고 있는 예들에서 인형과 동물이 하나의 동일한 논거가 될 수 없는 것이, 무게 중심과 중력의 법칙을 따라 실과의 긴장 속에서 움직여지는 인형과는 달리 동물은 근육과 신경의 자발적인 움직임에 따르는 까닭이다. 인형은 실의 긴장이 풀어지면 중력의 법칙에 따라 바닥에 쓰러져 있지만, 동물은 죽지 않는 이상, 그렇지 않다. 인간의 몸은 더욱 복잡하다. 인간은 특정한 목적을 위해 자신의 몸을 훈련할 수도 있다. 군대와 발레의 발전과정은 몸에 대한 훈련의 과정이며, 신체에 대한 억압이기도 하다.

클라이스트의 전언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 인형의 춤을 흉내내려고 하는 것은, 자신이기를 포기해야 한다는 말과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클라이스트의 전언이 이념적이고 관념적인 요청이듯이, 인간의 몸으로 그것을 흉내내겠다고 하는 것 역시 하나의 요청(Postulat)을 내세우는 것일 뿐이다.

이것은 클라이스트가 <인형극>에서 전하는 전언의 일부이다. 이부에 가면 이 이야기는 형이상학으로 변하면서, 인간의 원죄에 대한 슬픔을 신학에서 빌어왔으면서도 더 이상 그에 의지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은 신학적 모티브의 세속화 현상이다. 클라이스트는 이를 이용하여, 인간이 “알게 되었다”는 기쁨 대신에 그를 통해 “순진무구한” 상황에서 멀어졌음을 말하는 자신의 주장에 대한 근거로 삼는다. 클라이스트는 여기서 창세기에서 추방 장면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 도대체 돌아갈 수 없는 천국을 말하면서, 대신에 세계를 돌아 혹시나 있을지 모를 뒷문을 찾아보는 것은 어떻겠느냐 제안한다. 이 부분에서 그는 황금시대나 유년기에 대한 향수를 자기의 이상향으로 말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그는 낭만주의자가 아니다. <인형극>의 이념은 뒤를 향하는 대신에 부단한 전진을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기술적인 진보를 의지하는 대신에, 끊임없는 자기 내면 속의 “순진무구한” 상황을 이성과의 긴장 속에서 반성하는 과정일 것이다. 이성은 더 이상 벗어낼 수 없는 인간의 자질인 까닭이다.

클라이스트는 <인형극>의 말미에서 자신의 미학적인 프로그램을 이렇게 쓴다: “반성이 어두워지고 약해지는 유기적 세계 속에서 우아가 더욱 빛을 발하고 떳떳하게 등장한다.” 흥미로운 주장이다. 그러나 반성이 어두워지는 곳을 향해, “순진무구한” 상황이 다시 열려진 사회에로 돌아가기 위해 전 세계를 떠돌아야 한다는 그의 주장이고 보면, 아마 이것은 그가 마지막 문장에서 말하는 대로 “세계사의 마지막 장”이 될 것이다.

아도르노는 원숭이를 보면서 원숭이의 눈길은 자신이 인간이 아닌 것에 대한 슬픔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표현적이라고 말했지만, 클라이스트는 자신이 인간인 것에 대해 무한히 괴로워한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성인이 된 이가 어린 아이로 되돌아갈 수도 없고, 이미 “지식의 열매”를 먹은 이가 그 전 상태로 돌아갈 수도 없다. 그는 그 긴장을 버텨내다 못해, 자신이 상상해낸 연극의 세계가 그것을 지탱하기에는 부족했는지, 다음 해에 자살하고 말았다.

2

클라이스트의 <인형극>을 로보트의 전통 속에 끼어넣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인형극>에서 인형이 인간의 육체보다 더 우아하게 움직인다고 찬양되는 까닭이다. 인간 우월주의에 대해 냉소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었다는 듯이 클라이스트는 대범하게도 그런 주장을 내세웠다. 클라이스트의 이런 주관적인 태도와 상관없이, 클라이스트가 고른 소재는 독특하다. 줄에 따라 움직이는 인형이 나온다. 무대 뒤에서 인형을 조종하는 사람의 재능은 <인형극>에서 거의 무시당하고 있다고 보아도 좋겠다. 인형의 자율적인 움직임이 마치 몽환세계 속에서처럼 나타난다.

그러나 클라이스트는 말하자면 호프만에서 나타나는 자동인형 같은 모티브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훗날 발터 벤야민이 <역사철학 테제>의 첫번째 테제에서 언급하는 체스 두는 인형의 모티브가 주는 환각이나 속임수도 클라이스트의 <인형극>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벤야민은 그 인형이 사실은 난장이가 숨어서 조종하고 있다고 폭로했는데, 이에 대한 여러 그림 자료들이 있으니, 그가 묘사하는 것이 근거없는 것은 아니었다.

클라이스트는 혼자서 움직이는 듯한 인형의 움직임을 말한 것은 우아함에 대한 그의 비꼬는 태도에서 비롯했다. 그러나 <인형극>이 말하자면 춤에 대한 하나의 강령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인형의 동작을 클라이스트가 “춤”이라고 부른 까닭이다.

“무게중심이 그려내는 선은 매우 단순하고, 또 많은 경우에 직선이라고 그는 말했다. 선이 굽은 경우에는 선이 굽게 되는 것에 대한 법칙이 최소한 제1의 또는 차선의 것이라 하더라도 가장 높은 등급의 질서를 따르는 듯 하다. 그리고 후자의 경우에 타원형이다. 움직임의 이러한 형태는 인체의 (관절로 인해) 뾰족한 부분들에게는 자연스러운 움직임이며, 인형 조종자에게는 그것을 그려내기 위해 대단한 기술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반면, 이 선은 다시 다른 쪽에서 보자면 매우 비밀스러운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선은 <무용수의 영혼의 길>외에 다름이 아닌 까닭이다. 그는 인형 조종자가 자신을 인형의 무게 중심에 옮겨놓는 것, 곧 다른 말로 하면 <춤추는>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발견될 수 있으리라는 가능성에 의구심을 품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이 말했던 정신의 마지막 부분 조차도 인형에서 제거될 수 있으며, 인형의 춤은 전적으로 기계적인 힘들의 영역 속으로 옮겨질 수 있으며, -내가 생각했던- 곡선을 이용하여 생겨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어떤 인형제작자이든간에 자신이 내세우는 요구에 따라 인형을 만들려고 한다면, 이 인형으로, 그 자신도 또 다른 어떤 능숙한 무용수도 도달할 수 없는 춤을 구현해내겠다고 말했다.”

클라이스트가 춤에 대해 말하는 대목은 대략 이 정도이다. “무용수의 영혼의 길”이라는 말은 클라이스트가 비록 무용에 대해 어떤 관심을 보였는지 알 수는 없어도, 매력적인 말일 수 있다. 클라이스트는 이 말과 “춤춘다”는 말을 일부러 강조했다. 클라이스트가 말하는 것은 무게중심의 동선이 이루는 모양이다. 클라이스트는 인형조종자가 인형과 한몸이 된다는 말을 손가락의 자의적인 움직임에서 찾는 대신에 인형조종자가 인형의 무게중심을 정확하게 파악해야 한다는 점에서 찾았다. 그것이 바로 “춤추는” 것이라고 말했다. 클라이스트에게 그것은 영혼의 궤적이기도 하다.

클라이스트는 여기서 다소 기계적인 움직임을 영혼과 관련지어 설명한다. 그는 영혼이 어떤 신호를 보내 몸이 움직인다고 말하는 대신에, 몸이 움직이는 것 속에서 영혼의 궤적을 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의도를 전제하는 대신에, 의도를 몸짓에서 읽어내려 한다. 클라이스트의 생각은 어떤 점에서는 유물론적이기도 하다. 그는 좀더 과격하게 나아가서, 인간의 주의와 노력을 투영하는 대신에, 그저 (무게중심이 그려내는 궤적에 따라) 자율적으로 움직일 수 있을 인형을 만들어내겠다는 야심도 표현한다. 여기서도 그는 표현의 의도 따위를 몸짓에서 배제하려 하며, 무게중심에 따르는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것이 말하자면 자신의 이상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무용수들에게 흥미로운 대목일 것이다.

클라이스트의 생각은 물론 간질 환자에게서 목격했던, 정신은 빠져 있으나 혼자서 움직이는 몸의 기형적인 현상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니다. 이는 유물론자들에게 당연히 정신과 상관없이 움직이는 몸을 주장할 때에 근거가 되었으나, 클라이스트가 말하는 “우아”와는 관련이 없다. 클라이스트가 말하는 것은 정신을 최대한 배제하는 것이기는 하다. 그러나 얼이 빠진 몸이 그려내는 것은 “우아”해야 한다. 클라이스트의 이러한 주장은 이상주의 철학에서 예술은 인간 영혼의 표현이라는 당시로서는 거의 틀에 박힌 이해에 대한 반발이다. 그렇기에 인간 영혼의 기품을 엿볼 수 있는 의미의 “우아”는 전혀 아니다. 그렇다고 신경의 발작으로 일어나는 기계적인 몸의 움직임은 “우아”가 아니다. 그것은 동물의 유연함에 대한 예와도 어긋나며, 무게중심이 그려내는 선의 움직임과도 다른 것이다. 그렇기에 클라이스트는 몽매주의에서 관심을 두었던, 잠에 들어 얼이 빠진 상태에서 점을 치는 식의 몸을 원한 것도 아니다.

클라이스트에게 춤은 영혼이 그려내는 궤적일 것이나, 그것은 보장되지 않는다. 클라이스트는 몸 뒤에 무엇이 숨겨져 있는지를 묻지는 않는다. 다만, 기술적으로 뛰어나게 제작된 인형에 대해 인형조종자의 개입이 줄어들면 줄어들수록, 더욱 좋은 “춤”이 나오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다.

인형조종자를 영혼이나 정신으로 보고, 인형을 육체로 본다면, 이 이원론적 사고 속에서 육체가 영혼/정신에 대한 우월을 차지하게 되고, 이것이 클라이스트가 인형의 춤을 예로 들게 된 근거일 수도 있겠다. 훗날 뷔히너에게서 이 인형의 모티브가 다시 나타나게 되지만, 뷔히너의 경우는 지나칠 정도로 신학화되어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곧 그는 세계는 무대라는 바로크적인 모티브를 빌어와서 인형을 운명의 조종에 따름에 대한 상징으로 묘사했다. 자기 뜻대로 하지 못하는 불운한 존재로서의 인간이라는 의미는, 클라이스트가 말하는 인형의 “우아한” 움직임과는 다르다. 뷔히너의 연극이 물론 발레와 무용에 대한 영감을 줄 수 있겠으나, 뷔히너는 춤에 대해 사변하지는 않는다. 클라이스트는 다르다.

그러나 현대 예술에서 점점 사라져 가는 표현은 이미 1930년대에 빛이 바래기 시작했으며, 이제 주관적 내면의 모방이라는 의미는 사라졌다. 클라이스트가 말하는 것이 예술에서 실현된 것이다. 그러한 후에 나타나는 몸의 세계에 “우아”를 부여하려면 아마도 몸자체의 움직임에 관심을 두어야 할 것이다. 그 뒤에 숨어 있을 영혼의 움직임을 상상해 내려고 애쓰는 대신에, 무엇을 표현하려고 의도했을까라고 묻는 대신에. 그저 움직임의 아름다움을 말해 보자는 것이다. 이것은 보는 사람의 몫이겠다. 무용수에게는 처음에 의도했던 것이 잊혀질 때까지 몸을 움직여야 한다는 말이 될 수도 있겠다. [이것은 내 사변이다.] 독일 이상주의 철학에서는 헤겔의 경우 이를 “외화”라고 불렀다. 내면에 빠져나가 객관화 과정을 거치는 것.

3
클라이스트는 하필이면 무용수를 이야기꾼으로 택했다. 당시 미학 체계에서 무용에 대해 거의 전무하던 시절에 그저 놀라운 사건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그가 무용수를 소재로 채택한 것에는 클라이스트 나름의 문제의식이 작용한 결과이다. 곧 다른 예술에서는 헤겔이 말하는 “외화”와 또는 훗날 현대 미학에서 자주 언급되는 자기 망각의 계기가 언급될 여지가 없었다. 주체를 비우는 과정은 불행히도 신학적으로 보자면 [그리스도의] 케노시스 과정으로 오해되면서, 정신이 빠진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겠으나, 자기 망각은 이를 넘어서서, 자기보다 더 큰 존재에 자기를 맡기는 것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몸에 대한 신뢰가 생기지 않던 시절이기도 했다. 데카르트 이후에 몸은 사악한 것, 기계적인 것으로 여겨져, 정신의 고귀함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플라톤적 신비주의가 다시 주도한 시기였다. 이 시기에 몸으로 모든 것을 다 표현하겠다는 의지를 보이는 무용은 그야말로 논외 밖의 영역이었을 터이다. 로보트와 기계인간이라는 소재에 관심을 두는 것보다 당시에 유행했던 음악 소설이나 훗날 유행하게 될 화가 소설에 비해 아직 예술가적 자의식이 덜했을 무용수를 등장시켰다는 것은 문학사에서 아주 잠깐 동안 있었던 에피소드이다. 심지어 헤겔이 말하는 “아름다운 예술”의 백과사전에서도 무용은 없었다. 이런 일은 없었으며, 그 뒤에도 없었다. 물론 호프만과 발자크의 소설에 무용수가 등장하지만, 페티시즘의 대상에 불과할 뿐이다. 클라이스트가 무용수에게 발언권을 준 것은 이 점에서 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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