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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칸트철학(10)-공간과 시간

페이지 정보

작성자 서동철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2건 조회 7,937회 작성일 07-03-12 15:51

본문

공간과 시간
칸트 인식론의 얼개를 딱 잘라 말하면 이렇다: 우리가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는 자연법칙을 인식함에는 두 가지 인식기능이 필수인 바, 물이 흐르는 모습을 단순히 받아들이는 기능이 그 하나요 이를 재료로 보편타당한 자연법칙에 대한 앎을 위한 체계적인 조직을 이루어내는 기능이 그 또 다른 하나다. 칸트는 후자를 우리의 ‘생각’이란 기능에, 그리고 전자를 ‘감성’ 내지는 ‘바라봄’이란 기능에 그 책임을 부여했다. 우리가 무엇을 인식한다 함은 그러니까 결국 이 두 기능들의 합작품을 만들어낸다는 말과 다를 바 없다. 달리 말하자면 ‘생각’이 빠지면 조직이 이루어지지 않고 ‘바라봄’이 빠지면 소재가 없는 셈이니 바로 이러한 뜻에서 칸트는 철학사에서 자주 인용되곤 하는 다음을 말을 던졌다: “바라봄 없는 생각함은 빈 것이요, 생각함없는 바라봄은 헤맬 뿐이다.

공간과 시간은 선험적 형식
공간과 시간은 바로 이 ‘바라봄’을 이루는 골격이다. 즉 인식의 소재를 담는 바탕 그릇인 셈이다; 없으면 아무 것도 담을 수 없다는 말이다. 칸트는 이러한 이유로 공간과 시간을 ‘바라봄의 형식’이라 명명했다. 그것도 경험 속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구체적인 바라봄을 가능하게 하기에 그 ‘형식’ 앞에 ‘선험적’이란 수식어를 붙였다. 경험보다 앞서가며 동시에 그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역할을 맡는다는 뜻이다. 덧붙여 경험을 통한 산물이 아님을 강조하는 뜻으로 ‘순수한 바라봄’이라고 규정짓는다.
그런데 우리는 그 그릇에 담는 내용물 없이 그릇 자체를 인식할 수는 없을까? 달리 말하자면, 우리가 물의 흐름을 바라본다고 할 때 이 바라봄을 가능하게 하는 골격으로서 공간과 시간을 전제해야 하니 이 두 ‘순수한 바라봄’의 있음을 ‘경험적 바라봄’의 전제로서 인식하는 모습과는 달리 물의 흐름이라는 경험적 바라봄의 대상 없이 직접적으로 공간과 시간의 있음을 인식할 수 없는가 말이다. 이게 가능하다면 우리가 물의 흐름을 그리듯 설명 내지는 서술할 수 있듯 공간과 시간을 좀 더 구체적으로 그리고 매개물 없이 직접 설명 내지는 서술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해서 던지는 질문이다.

근데 사실 이 질문은 던짐 자체에 머뭇거릴 수 밖에 없는 그런 질문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만약 칸트의 인식론을 따른다면 모든 인식은 ‘바라봄’과 ‘생각함’이 함께 어우러져 이루어내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자면 공간과 시간이라는 선험적 형식이 이 ‘바라봄’의 내용물이 결코 될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인식이 가능하다 상정한다면 이를 위해 최소한 ‘바라봄’을 가능케 하는 보다 더 높은 차원의 ‘바라봄’이 있음을 전제해야 한다. 과연 이러한 일종의 초선험적 ‘바라봄’이 가능할까? 칸트의 제자들이 ‘물자체’의 문제를 나름대로 해결해 보고자 자신들의 철학함에 도입한, 경험에 구속되어 있지 않다는 소위 ‘지적 바라봄’이 이에 걸맞는 기능을 갖고 있으리라 추측은 해 본다만 칸트가 왜 이에 대해 주저하는 태도를 보였는가는 충분히 이해될 수 있다 여긴다. 숲 속에 있으며 어찌 숲 전체를 한물에 그릴 수 없는 이치라 보인다.
결국 공간과 시간에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라는 뜻을 새겨둔다. 이의 있음에 대한 인식은 따라서 이 조건으로서 우리에게 가능하다. 예를 들어 우리가 사방팔방 투명한 유리공간에 둘러싸 서 있는 경우 그 유리 표면에 검은 선을 그었을 경우에야 비로소 그 공간 속에 서있음을 인식할 수 있듯이 말이다. 시간이 무엇이냐는 질문 역시 당황케 만든다. 아우구스티누스(354-430)가 말하듯 아무도 내게 시간이 뭐냐 묻지 않는다면 나는 그게 무엇인지 알지만 누군가 내게 묻는다면 나는 그게 무엇인지 모른다 하는 모습에 걸맞는 애매모호함이다. 축구공 등 물체의 움직임을 감지한 연후에야 비로소 시간에 대한, 즉 시간이 흘렀음을 알 수 있다는 우리 인식의 한계를 말함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이러한 움직임에서 시간이라는 개념이 창출된다기 보다는 오히려 거꾸러 시간이 있으니 이러한 움직임을 바라봄이 비로소 가능한 게다. 위 공간의 경우에 유리 표면이 있으니 비로소 선을 그을 수 있듯 말이다.

철학사적 단상
칸트는 자신의 소위 ‘선험적 감성론’에 상당한 자부심을 품었다. 자신의 감성론은 철학사적으로 볼 때 칸트 이전까지 유럽 대륙철학권에서 기세가 등등했던 라이프니쯔-볼프의 감성론을 뛰어넘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즉 이들은 감성론을 ‘불분명한 인식’으로 정의하며 생각함이라는 동일 스펙트럼 상의 연장으로 풀이했던 게다. 달리 말하자면 이들은 칸트 마냥 ‘바라봄’과 ‘생각함’의 구분을 명확히 긋지 않았다. 칸트는 이 경계 구분을 명확히 지음과 동시에 자신의 감성론을 통해 인간 인식의 한계 역시 명백히 구명했음에 자기 자부심의 근거를 두고 있다.
허나 이러한 공간의 개념이 오늘날 우리가 갖고 있는 공간 개념에 충분한 모습을 드러내느냐는 질문에는 자신있게 긍정을 하지 못한다. 20세기 이후 끊이지 않고 물리 내지는 우주학계의 도마 위에 오르는 블랙홀이라는 공간은 칸트의 공간개념으로는 접근이 어려우며 덧붙여 심리적 공간을 떠올리면 18세기와 20세기 사고의 차이를 엿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새로운 공간 개념들이 칸트 인식론의 체계를 보충할 수 있을지언정 무너뜨린다고는 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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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무딘연필님의 댓글

무딘연필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바라봄 없는 생각함은 빈 것이요, 생각함없는 바라봄은 헤맬 뿐이다.” :
여기에서 Anschauung이나 Begriff가 모두 능동적 동사로 옮겨져 있습니다. 바라봄과 생각함.
소재와 형식 - 물론 여기서 형식이라 함은 딱딱하여 움직이지 않는 틀이 아니라 스스로를 구성하는 부드러운, 커가는 성질을 지니는 것이겠습니다. 소재와 형식의 상관관계 속에서 소재없는 형식은 텅빈 것이며, 형식없는 소재는 무질서한 것이다라는 식의 내용을 말하는 것인데, 칸트는 여기서 "봄"에 해당하는 직관 개념을 글자 그대로 이해해서는 "blind"라는 메타퍼를 사용하지 않을까요? "본다" - "보지 못한다"의 길항관계가 여기서 생겨나는 셈인데요. 개념없이 봄은 눈이 먼 상태로 봄이라는 식의 역설이 생겨나는 것을 보자면, 칸트의 철학을 "철학"으로 읽는 대신에 하나의 "메타퍼의 구성 체계"로 읽는다고 해서 아주 오해하는 것만은 아니라고 봅니다. 물론 "개념"과 "공허"의 관계에 대해서는 조금 더 생각해 보아야 하겠지만요. 어쨌든 "봄"과 "헤맴"의 관계에 빠져 있는 역동적인 긴장성이 "Anschauung"과 "blind"라는 말 사이에서는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 제 짧은 생각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순전히 궁금함인데 "지적 직관"이라는 말에서 "지적intellektuell"이라는 말이 도대체 무엇일까요? 매우 난감한 말 중 하나로 여겨지는데요.

서동철님의 댓글의 댓글

서동철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우선 제 표기 상의 잘못을 말씀드립니다. 님도 주지하시다시피 위 본문에서 제가 파란글씨로 올린 문구는 칸트 글의 직역이 아닙니다. 이를 마치 직역인양 표기했음은 제 실수이지요. 그래 그 원문을 옮겨 놓음으로써 마음의 부담을 조금이나마 덜고자 합니다:
"Gedanken ohne Inhalt sind leer, Anschauungen ohne Begriffe sind blind."(B 75)

단지 이 문구에서 "blind"의 뜻을 저는 님과는 달리 이해하고자 합니다. 님은 이를 '보지 못한다'로 이해하시는데, 저는 오히려 칸트는 이를 통해 우리가 무엇인가를 인식함에 있어 결정적인 결함, 즉 개념들의 역할인 일종의 질서정립이 결여되어 있음을 말하고자 했다 여깁니다. Anschauung이라는 '봄'이 '보지 못한다' 하면 님 말씀하시듯 일면 "역동적인 긴장성"을 느낄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만, 제 생각엔 오히려, 최소한 번역함에 있어, 앞뒤 아구가 뒤틀린다는 두려움이 앞서는군요. 물론 이런 어려움을  님 스스로 감지하시고 있음을 님의 댓글에서 읽습니다.

제가 동명사의 모습으로 번역함을 선호하는 이유에는 가능하면 글을 읽는 이가 중간 매개체 없이 그 읽음을 그림으로 그릴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아울러 섞여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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