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동포 미디어 베를린리포트
커뮤니티 새아리 유학마당 독어마당
커뮤니티
자유투고
생활문답
벼룩시장
구인구직
행사알림
먹거리
비어가든
갤러리
유학마당
유학문답
교육소식
유학전후
유학FAQ
유학일기
독어마당
독어문답
독어강좌
독어유머
독어용례
독어얘기
기타
독일개관
파독50년
독일와인
나지라기
관광화보
현재접속
280명
[독일개관]독일에 관련된 유용한 정보를 이곳에 실어 주시기 바랍니다. 이 게시판은 독일관련 데이타베이스를 구축하기 위한 곳입니다. 그러니 1회용도의 글(구인,질문 등)은 정보의 가치가 없으므로 이곳에 올리시면 안됩니다.

철학 칸트 철학(7)-달이 과연 지구의 기후에 영향을 미치는가?

페이지 정보

작성자 서동철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15건 조회 3,152회 작성일 07-01-25 11:43

본문

칸트는 고희의 나이에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자 노력한 흔적을 보인다. 이에 그를 부추킨 장본인은 그 당시 괴팅겐에 살고 있던 철학자 리히텐베르그였다. 이 양반이 다음과 같은 묘한 말을 던진 게다:
달이 지구의 기후에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는다고 흔히들 말하나 달은 그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의 철학적 주저 순수이성비판 후반부에서도 엿볼 수 있듯 칸트는 상호 모순된 두 주장들을 다룸에 있어 한 쪽을 버리고 다른 한 쪽만을 내세우기 보다는 오히려 양쪽을 모두 선택해 서로를 화해시키고자 하는 욕심을 거의 천성적으로 부리는 모습을 선보인다. 이는 결국 얼핏 보기에 상호 모순된 두 주장들은 사실 좀 더 자세히 뜯어 살펴보면 각자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갖추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흑백논리에 젖어 있는 이들에게 꼭 보여주고 싶은 모습이다. 이제 그럼 그가 위의 모순적인 주장에 어떠한 솔로몬적 답을 주고자 했는지 살펴 본다.

그는 우선 이러한 영향력을 논함에 있어 문제시되어야 할 달의 속성에는 두 가지가 있음을 밝힌다: 빛과 인력. 단지 태양의 빛을 받아 반사할 뿐인 달빛은 허나 문제시 하기에 너무 약하다는 의견을 제시하며, 만약 영향이 있다면 달의 인력과 관계된 문제라는 주장을 편다. 이러한 인력으로 인한 공기층의 변화를 뜻하는 게다.
그럼 과연 이러한 가설은 설득력을 갖추는가?
하나, 영향이 없다
달의 인력으로 인한 일반 대기층의 공기에 대한 변화를 측정기로 재보니 이러한 영향을 뒷받침하기에는 너무나 미약하다는 실험 결과를 얘기한다. 변화가 있을 수는 있으나 날씨에 영향을 미칠 정도는 아니라는 소리다.
, 영향이 있다
달의 인력이 대기층의 위의 공기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음을 최소한 배제하지 못한다는 말을 한다. 증명은 되지 않았지만, 동시에 반증 또한 되지 않았으니 그 가능성마저 배제할 근거를 우리는 갖고 있지 않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이 경우 달의 인력이 지구의 날씨에 영향을 줄 수도 있다는 말이다.

칸트의 결론:
달은 지구의 기후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볼 수는 없으나 간접적인 영향력은 갖고 있다. 이 둘은 당연 모순이 아니다.

결국 위의 두 상호 대립된 주장들은 따지고 보면 대립된 주장들이 아니라는 칸트의 솔로몬적 판결이다. 덧붙여 보충하자면 날씨에 대한 영향을 말할 때 인력이 공기층에 대한 영향을 말함은 바람의 생성에 관계되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내세운다.

여하튼 이러한 칸트식 해결 방법은 그의 철학적 토대인 이분법에 근거하는 듯도 하다. 칸트 자신은 이를 종종 소위 '비판적 구분(kritische Unterscheidung)'이라 표현한다. 사물을 한편으론 현상으로서, 또 다른 한편으로 사물 그 자체로서 바라보는 이분법 말이다. 예컨대 의지의 자유라는 문제를 놓고 본다면, 의지를 현상을 바라본다면 - 즉 '보이는 행동'으로 - 자연법의 필연성에 묶여 자유롭지 않으나 의지를 물자체로 바라본다면 이러한 구속으로부터의 본질적 탈피를 의미하니 자유롭다 볼 수 있다는 해결책 말이다.
결국 칸트는 자신의 이분법적 사고 없이는 그때까지 의지의 자유라는 문제가 안고 있어야 했던 자체 모순을 풀 수 없었으리라 의기양양하다.

문제는 허나 나는 그와 더불어 덩달아 의기양양했으면 하는 바램에 멈추어 머뭇거리며 서 있는 모습을 보인다는 사실이다.
추천0

댓글목록

길벗님의 댓글

길벗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카오스 이론에서 초기값의 미세한 차이에 의해 결과가 완전히 달라지는 현상인 나비효과, 지구 한 쪽에서의 아주 미세한 변화가 그 반대편에서는 엄청난 변화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런 나비효과를 따지자면 또는 그와는 전혀 관계없이 달이 지구의 기후에 심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반사된 빛과 인력 뿐만아니라 달과 지구사이의 회전축과 지구 자전축과의 관계 등 큰 요소 외에 조수 간만의 차, 대기권의 변화, 전자장과 이온들의 변화 등 무시할 수 없는 작은 요소들도 많지요.

결론적으로 칸트의 결론은 지금의 과학적 팩트와는 다릅니다. 그 당시 과학적 지식기반의 부족이 그 원인이겠지요.

"사물을 한편으론 현상으로서, 또 다른 한편으로 사물 그 자체로서 바라보는 이분법 말이다."

현상으로서, 사물 그 자체로서 바라본다는 말중에 '바라본다'는 과학적 입장에서는 관찰내지는 측정으로서 환원할 수 있는데, 과학적 방법론으로 '현상으로서 바라본다' 는 받아들일 수 있지만 '사물 그 자체로서 바라본다' 는 어디서도 관찰 방법론을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서동철님의 댓글의 댓글

서동철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그렇지 않아도 제가 위에서 설정한 영향이 있다 없다의 구분에 무리가 있지 않느냐는 한 님의 비판을 듣고 난 후 지금 반성 중에 있습니다. 이러한 방식으로도 제가 자연과학을 직업으로 다루시는 분들께 배웁니다.

단지 이에 대한 반성이 아직 끝맺음을 보지 못했고, 나아가 이와 관련 위에 말씀드린 소위 '비판적 구분'이 과연 이에 걸맞는 모습인가에 대한 비판을 님과 함께 그 다른 님한테서도 들었습니다. 지금으로선 님들의 비판이 옳지 않나 하는 생각입니다만, 조금 더 생각을 모아볼까 합니다.
끄트머리에 주신 '관찰 방법론'에 준한 말씀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는 이유에서 입니다.

zwischen님의 댓글

zwischen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길벗 님과 서동철 님 사이의 꼬여 있는 문제제기와 답변을 좀 더 분명히 이해해 보고자 간단히 질문 드립니다. 길벗 님은 자연과학도 이셨습니까? 현대 자연과학이론 많이 소개 부탁 드립니다.

길벗 님은 칸트 당시 과학적 지식기반의 부족을 지적하시면서,
이성의 빛을 말했던 칸트에게 있어서 „현상“과 입자와 동시에 파동으로써 빛을 말하는 현대 과학에 있어서 „현상“을 같은 것으로 간주하시는지?
„사물 그 자체로서 바라본다“라는 말과 „관찰 방법론“을 왜 연결시키시는지? 님이 말씀하시는 „관찰“이란 무엇인지? 셀 수 없이 많은 실험 끝에 추론된 실험가설은 "관찰"인지 "직관"인지? 아니면 뭐 다른 것인지?
칸트가 말했던 „사물 자체“가 현대 과학에서 말하는 „원자를 넘어서 전자, 중성자, 양성자, 심지어 소립자“와 같은 것으로 간주될 수 있는지? 아니면 현대 과학에서는 „소립자“ 말고, 그와 다른 „사물 자체“를 언급하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서동철 님, 역시 관련 부분 대답을 듣고 싶습니다.

서동철 님은 칸트가 „사물 자체“를 인식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말씀하시는 건지?
혹시 „본질과 현상의 이분법“을 말씀하시려 했던 것은 아닌지? 궁금합니다.

서동철님의 댓글의 댓글

서동철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물자체'가 인식 대상은, 최소한 칸트에 머물면, 아니지요.
저는 바라봄의 차이를 말하고자 했고, 이 차이는 달리 말하자면, 우리가 Ding을  an sich로 보느냐  아니면 fuer uns로 보느냐의 차이가 아닐까 싶네요.

길벗님의 댓글

길벗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zwischen 님, 저는 자연과학과 공학쪽이고 그쪽으로 일을 하고 있습니다. 대화를 하다보면 논지의 초첨이 맞지 않아서 옆으로 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더라도 이런데서 부수효과(?)를 볼 수도 있으니 옆으로 샜다고 하더라도 그리 시간 낭비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요새는 무슨일이 한꺼번에 평행으로 돌아가다보니 시간이 부족하고 그래서 이런 댓글을 올리는데 사실 신중을 기하고 자료를 찾고 생각을 하고 올려야 하는데 그렇지 못합니다. 이점 미리 알아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런 관계로 제가 평소 생각하고 있던 소견을 올리겠습니다.

대개 과학의 이론을 얘기하거나 또한 과학적 관찰이나 팩트를 얘기할 때면 경험론을 바탕으로 귀납적 (Induktion) 방법을 사용합니다. 수학의 경우에는 대게 직관(Intuition)과 논리(Logik)로 이어나가고요.

빛이란 무엇인가를 설명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빛은 입자적 성질을 갖는 동시에 파동적 성질을 갖고 있다는 것으로 빛이란 무엇인가를 말합니다. 다른 한 편으론 가시광선을 빛이라고도 말하겠지요. 파동의 성질로 볼 때는 빛은 전자기파의 한 주파수대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호이겐스가 이런 파동설을 주장했고 맥스웰의 파동방정식으로 전자기파를 정리했는데 이로서 빛도 전자기파의 일종이라는 설을 내놓았습니다. 전자기파는 횡파, 즉, 전달방향과 에너지의 진동방향이 직각을 이루는 성질을 가졌지요. 종파는 음파로서 전달방향과 에너지의 진동방향이 같은 것입니다. 빛의 입자성은 빛의 공동복사 관측결과에서 에너지 양자가설을 독일의 이론 물리학자인 플랑크가 제안하면서 구체적이 되었고, 아인슈타인의 금속에 빛을 쬐면 전자과 방출하는 광전효과로 빛의 입자성을 설명했습니다.

이 모든 과학적 이론은 귀납적 방법을 사용한 것이지요. 측정되고 관찰한 팩트로 경험론에다가 현상으로서 가설을 제시하고 이 가설들을 모아 이론의 모델을 세워나간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모든 과학적 방법은 철학에서 말하는 한 부분집합 그러니까 경험론적 논리적 방법에 불과합니다. 물론 직관으로 이론을 제시하고 가설을 뽑아내고 거기서 팩트를 낳게 하는 연역적 (Deduktion) 방법도 사용을 합니다.

바라본다는 말은 과학적 입장에서는 관찰과 측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은 현상학적 방법을 떠날 수는 없습니다. 직관을 제외하고는 우리가 사물을 바라볼 때는 기껏해야 오감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보고 듣고 만지고 (이게 다 주파수에 관계된, 그러니까 진동을 다른 형태로 감각하는 것입니다), 과학적 방법에서는 에너지를 측정하는 방법 밖에는 없거든요. 이 에너지는 바로 물자체가 될 수 있으니 (아인슈타인의 그 유명한 E=mc2) 에너지를 측정한다고 하는 말이 바로 바라본다와 상통할 수가 있습니다. 사물에서 나오는 주파수를 측정하거나 또는 힘을 (전자기력, 중력, 큰 핵력, 작은 핵력) 측정한다고 하는 것도 다 이런 에너지를 가늠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다시 좀 종교적으로 설명을 하자면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이란 반야바라밀다심경의 명제가 정확히 과학에 적용이 되는 것이지요.

종교와 철학 그리고 과학..., 어쩌면 모두 한 길로 통하는 것은 아닌지....

zwischen님의 댓글의 댓글

zwischen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님의 말씀을 듣고 있노라니,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론이 떠 오르네요.

"종교와 철학 그리고 과학..., 어쩌면 모두 한 길로 통하는 것은 아닌지", 글쎄요?... 길벗 님이 계속 자연과학과 공학 이야기를 들려 주시면, 그에 대해서 곰곰히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서동철 님이 님의 문제제기 끄트머리에서 주저하시는 것처럼, 저 역시 아직은 수긍하기가 쉽지 않네요. 자칫 균형을 잃어 버리면, Technokratie 라고 오해를 받지 않을까 해서...

길벗님의 댓글의 댓글

길벗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님께서는 제글을 읽으면서 왜 모나드론이 떠 올랐을까요? 우주는 무수한 단자로 이루어져 있고 개개의 단자속에는 하나의 완전한 우주가 구현되어 있다는 그런 생각. 그것은 우주의 프랙탈 구조를 표현하고 있다는 것인데, 현대 물리학에서는 대칭우주의 개념이 서 있어서 이것도 불완전한 생각일 수 있습니다. 반물질, 반양자, 반전자,...

위에서 말한 한 길은 색즉시공 공즉시색, 즉, 물질은 에너지가 집적되어 정리된 것이고, 에너지는 물질의 정교한 구조가 풀어진 것이라는 말을 표현 한 것입니다. 그러니 색이 공이고 공이 색인셈이라는 말입니다. 반야심경이 과학적 데이타를 기초로 한 것은 아닐텐데 이런 불교의 경전에서 최근에서야 깨닫게 되는 과학적 사실을 강조한 것이죠.

과학이고 철학이고 인과의 원리에 이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주를 포함한 사람이라는 존재는 비논리적 세계와 비인과의 세계를 알지 못하며 그 근처도 갈 수가 없습니다. 한계성때문에 인과의 우주를 제외한 여집합인 더 큰 우주를 깨닫지 못하는 것이지요.

Technokratie는 그 좁은 방식 중에 하나일 뿐인데 그 오해를 받는다니요....



뭐 이렇게 동문서답으로 가도 부수효과는 역시 나타나는군요.

zwischen님의 댓글

zwischen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하, 재미있어요. 인문사회과학도인 저는 님 덕분에 앞으로 더욱 풍성한 사고를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이 듭니다.

우선 "동문서답으로 가도 부수효과"가 나타나는 것은 과학적 용어로 뭐라 말할 수 있어요? 제가 아는 용어 내에서 골라내 보면, 경제학 용어이긴 하지만 "시너지 효과"라 할 수 있는지?^^

"모두 한 길로 통하는 것은 아닌지" 하셔서 라이프니츠의 "창 없는 단자"가 떠 올랐고,
"에너지를 물자체"로 보셔서 데카르트의 기계적 세계관을 비판하려는 목적으로 -후에 에너지 보존법칙에 기여하게 되는-라이프니츠의 "에너지" 개념이 자연스레 연상됐답니다. 현대 물리학의 대칭우주 개념을 염두에 둔다면, 물론 한계가 있지만 말이죠.

저 역시 종교, 철학 그리고 과학 사이의 유사 관계성을 대놓고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서로 간의 앞 서거니 뒷 서거니 하면서 도움과 견제를 주고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단, "과학이고 철학이고 인과의 원리에 이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라는 생각이 자칫 균형을 잃어 거기에만 머물러 버린다면, "Technokratie"라는 하나의 좁은 방식으로 오해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현대 인문사회과학은 현대 물리학의 "대칭우주"개념을 포함해서 "비논리적 세계"와 "비인과의 세계" 혹은 "우연의 세계"가 품고 있는 합리성의 근처에 가려고 몸부림치기도 합니다. 신도 짐승도 기계도 아닌 인간이 가지고 있는 "상상력"과 "느낌"을 통해서 말이죠.

앞으로도 부수효과를 통해서 저의 앎이 더욱 풍성해지길 기대해 봅니다. 많이 소개해 주세요.

길벗님의 댓글

길벗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

화두1: 병속에 달걀을 집어 넣어라.

화두2: 병속에서 달걀이 닭이 되게 키운다.

화두3: 뱀이 자신의 꼬리를 먹어 들어간다면 어떻게 될까.


병속에 달걀을 집어 넣는 문제는 시간을 타고가는 인과의 세계를 벗어나면 풀리는 문제겠지요.

병속에서 달걀이 닭이 된다는 것은 게다가 논리의 세계를 벗어나는 거 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의 두 화두에 대해 우리는 이성에 바탕을 둔 논리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화두3에서는 자신의 입이 자신을 먹으면 어떻게 될까와 먹어 들어가다 보면 입이 입을 먹는 모순을 낳게 되겠지요.

우리의 시공간에서 어떻게 논리와 인과를 떠날 수 있겠습니까?

....

zwischen님의 댓글

zwischen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하하! 길벗 님은 참 논리적이시네요.
그런 분이 비논리적인 행위를 하실 때 참 매력적이기도 합니다.

특히 님이 예로 드신 화두 3은 다른 맥락에서 "수행모순들 performative Widersprueche"-회의주의자들이 회의적인 발언을 하자마자 걸려드는 모순들-과 연관지어 생각해 볼 수 있는데, 그런 모순 덕분에 우리는 회의적일 필요가 없습니다.

님은 유아독존 "하나의 이성"만을 전제하신 것은 아닌지?

경험적 사고/이성의 논리는 인과를 떠날 수 없지만,
도덕적, 예술적 사고/이성의 논리 역시 인과를 떠날 수 없지만, 동시에 인과를 떠날 수도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의지의 논리 혹은 결단의 논리는 인과를 떠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칸트의 "의지의 이율배반"문제를 언급했습니다.

자본주의적 현실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자본논리의 인과적인 법칙에서 벗어나기 거의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논리를 벗어나 누군가를 첫 눈에 반해 "있는 그대로의 존재 자체-공간-"로, "항상 새로움-시간-"으로 대할 수 있는 휴머니즘이나 예술의 논리도 가능하지 않을까요? "존재 자체"나 "항상 새로움"은 다른 것 혹은 이전 것과의 인과가 아닌 단절을 의미하니까요.

길벗님의 댓글

길벗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님도 논리적과 비논리적인 행위를 판단하시는 그 논리를 벗어나기 힘들죠. 이렇게 말하는 저도 나름대로의 논리를 떠나기는 불가능합니다.

처음에 언급한 현상, 관찰, 사물 그자체 에서 상당히 많이 벗어났죠. 게다가 Monadologie 에 Technokratie 로 이번에는 Perfomative Widersprueche 까지 나왔습니다. 님께서 말씀하신 유아독존 '하나의 이성'만을 전제한 것은 맞습니다. 그 하나가 '나(我)' 라는 것도요.

이럴 때는 튜어링 실험이 생각이 나는군요. 기계가 사람과 같을 수 있을까를 확인하고자 한는 실험이었는데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어느 한 사람이 기계와 사람을 번갈아가면서 대화를 하는 겁니다. 그 어느 한 사람이 기계인지 사람인지를 구분 못 할 때, 또는 기계를 사람이라고 판단 했을 때 사람에 대한 그 기계의 수준을 가늠하는 겁니다.

이를테면  이렇게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지금의 대화가 그렇다는 겁니다. zwischen 님이 길벗이라는 이름을 가진 기계와 대화를 하는 하는 것인지, 아니면 길벗이 zwischen 님이라는 이름을 가진 기계와 대화를 하는것인지 잘 구분이 안 간다는 것이죠. 그 당시 mathematische Logik 에 바탕을 둔 아주 원시적인 프로그램이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착각을 했었습니다. 지금과 같이 대화의 방법, 즉, 자기의 Knowledge Database 쪽으로 대화를 이끌거나 파생을 시키는 전략이었죠.

각설하고, 인과를 떠날 수도 있다고 생각할 때도 인과때문에 인과를 떠날 수가 없습니다. 인과는 시간을 전제로 합니다. 우리가 사는 시공간에서 아무리 빠져나가려 해도 그럴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뇌, Denkmaschine, 엄밀히 따지자면 한 전기 화학적인 생각하는 기계는 인과의 세계에만 적응할 수 있습니다.

칸트의 '선험' 이라는 개념이 인공지능에서도 쓰인다는 것은 혹시 아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뇌의 형성된 구조에 이미 vorprogrammieren 된 상태를 A priori 라고 합니다. 뇌의 구조가 생성된다면 필연적으로 이런 인과에 바탕을 둔 Vorprogramm 이 들어가 있는 상태이지요. 철학쪽에서 보면 우스울 수도 있지만 이공계쪽인, 특히 유아독존의 하나의 이성인 제가 볼 때는 이런 뇌구조 상태를 지닌 인간이라는 존재는 인과를 떠날 수가 없습니다.

zwischen님의 댓글

zwischen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길벗님,

저는 님의 말씀을 전면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정도에 지나칠 수 있는 가능성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제가 쓴 댓글에 님이 댓글을 다시는 것은, 아니면 달아야만 하시는 것은 인과적인 것일까요? 거꾸로 님이 쓴 댓글에 제가 댓글을 다는 것은, 아니면 달아야만 하는 것은 인과적인 것일까요? 그에 관해 많은 빈틈을 감수하면서, 다양한 해석가능성을 허용하면서 인과적으로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저의 경우, 왜 제가 이렇게 하고 있는지, 이렇게 해야만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착각과도 같은 인과의 사슬을 끊어버리기 위한 존재의 결단이 필요한 것 같기도 합니다.

길벗님의 댓글의 댓글

길벗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zwischen 님, 님의 글에 대한 댓글을 통해서 님께서 말씀하신 애초의 궁금한 문제에 촛점을 맞추리라고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래서 거기에 대해 조금더 깊은 댓글을 바랐었거든요. 대화의 초점에서 자꾸 멀어져 가면서도 이런 대화에서 님께서 도입하신 다른 개념과 생각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대화의 목적이 사고의 확대를 위한 것이라면, 일단, 저는 님을 통해 그 부수효과의 장점을 누리고 있습니다. 저는 무슨 조그마한 주제가 있으면 그에 관련된 환경을 확장하는 것보다는 어디 들어갈 때까지 들어가보자, 갈 곳이 없을 때까지 가보자 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는 편입니다.

토르바도르님의 댓글

토르바도르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먼저 등업에 힘써 주신 서동철님께 감사드립니다. ^^
무언가 처음 시작하는 발걸음은 설래임과 두려움을 함께 내딪게 됩니다.

최초 제가 서동철님께 질문드렸던, '달의 지구의 기추에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한 대답이 과연 비판적 구분에 의한 것인가?'에 대한 답변은 다른 예시를 보여주시면 이해가 쉬울 듯 합니다. 칸트와 직접 마주해본적이 없는 저로써는 '비판적 구분'이라는 것이 상당히 흥미가 있어서 부탁드립니다.
sich an과 fuer uns라는 것이 비판적 구분의 잣대라면 그것 또한 이해가 잘 가지 않습니다. 관념론에 대한 이해부족에서 오는 부덕함이겠지만, 물자체가 있다는 가정하에 물자체를 바라본다는 것이 sich an이라면 그것은 자기만족적인 매커니즘을 이해한다는 뜻입니까?

길벗님과 zwischen님의 글도 잘 읽고 있습니다.
길벗님은 역학적 관계의 법칙으로 '인과'를 말씀하시는 것 같구요. 자연과학적 방법으로 현상을 파악하려면 최소한 동력인인 '인과'와 질료인인 '어떤 것'이 필요하지만, 어떤 현상에서 그것이 항상, 그리고 사실상 많은 경우에 질료인이 1:1 방식으로 관계를 맺지 않기 때문에 인과에 집착하다 보면, '어떤 현상에 어떤 원인'라는 일반화의 함정에 빠질 수 있다는 걸 zwischen님께서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제가 이해한 것이 맞습니까?
엔지니어의 직관은 질료인을 선택하는데 있다고 생각하는 저로서는(전 엔니지니어는 아닙니다.) 어떤 현상을 바라볼 때 어떤 것을 질료인으로 선택할 것인가에 따라 해석의 다양성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서동철님의 댓글의 댓글

서동철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을 현상의 세계와 물자체의 세계로 나눔은 우리의 의식을 통해 경험 가능한 세계와 그렇지 않은 세계로 나누는 칸트 비판철학의 방법론적 핵심입니다. 양자 중 한쪽에 쏠리는, 즉 인간 인식의 근거를 경험에만 두려는 경험주의와 이를 무시하고 오로지 경험 저 너머에서 그 근거를 찾으려는 소위 합리적 독단주의의 편협함을 벗어나고자 한 철학적 시도였지요. ‘자유’라는 개념을 두고 말하자면 이를 자연의 인과율에 바탕을 두고 있는 현상의 세계적 언어로 말하기는 어불성설이지만 또 다른 한편 그렇다고 우리의 경험적 인식이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그 ‘있음’ 자체를 부정함 역시 합당하지 않다는 가르침입니다. 따라서 중요한 점은 양쪽 세계의 바라보는 모습들이 서로 다름을 정확히 알고 이에 걸맞게 우리 스스로와 세계에 대한 인식을 쌓아나감이라고 칸트는 말합니다.

달이 지구의 기후에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한 질문으로 돌아가자면, 이 질문 자체는 물론 자연적 현상에 관한 것입니다. 따라서, 길벗님이 올바르게 지적하셨듯, 이에 무슨 현상적과 물자체적 바라봄으로 나눌 여지가 있나 하는 정당한 반항이 솟구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염두에 두며 놓치고 싶지 않았던 점은, 위의 바라봄의 나눔과 연관시켜 말씀드리자면, 우리의(칸트 시대) 측정 수단이 미치지 못한다는 이유로 영향이 미칠 수 있다는 가능성마저 부정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위 본글에서 나누었듯 대기권 안에서는 측정 가능하나 그 수치가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결론을 비치는 반면, 대기권 밖에서의 모습은 측정할 수 없음에 영향이 있다는 주장에 반증을 할 힘이 우리에겐 없다는 말에 제 생각의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이게 비록 현상과 물자체적 시각의 나눔에 정확히 걸맞지는 않으나 – 물음 자체가 자연현상에 대한 것이니 – 이를 세부적으로 논증해 나가는 모습에서 얼추 비슷한 나눔의 모습을 엿보았다 여겼기에 이 어리석은 자 과감한 시도를 거침없이 보였던 듯 싶습니다.

독일개관 목록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163 문화예술 서동철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3198 03-23
162 철학 서동철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5149 03-21
161 문화예술 서동철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4681 03-19
160 철학 서동철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7953 03-12
159 철학 서동철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3003 03-08
158 철학 서동철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3677 03-03
157 문화예술 서동철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890 02-21
156 철학 서동철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830 02-20
155 철학 서동철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3560 02-19
154 철학 서동철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3068 02-15
153 철학 서동철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3485 02-09
152 철학 서동철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833 02-01
151 문화예술 서동철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3338 01-30
열람중 철학 서동철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3153 01-25
149 문화예술 서동철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3337 01-24
148 철학 서동철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4236 01-22
147 문화예술 서동철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917 01-17
146 철학 서동철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776 01-15
145 문화예술 서동철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889 01-13
144 철학 서동철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4786 01-12
게시물 검색
이용약관 | 운영진 | 주요게시판사용규칙 | 등업방법 | 개인정보취급방침 | 이메일무단수집거부 | 비밀번호분실/재발급 | 입금계좌/통보방법 | 관리자문의
독일 한글 미디어 베를린리포트 - 서로 나누고 돕는 유럽 코리안 온라인 커뮤니티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