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피 카 소, 공산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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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서동철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3건 조회 2,557회 작성일 06-03-16 05:53본문
GUERNICA
탄생: 파리, 1937년 5월 1일 - 6월4일
크기: 세로 349,3cm 가로 776,6cm
마드리드
"스페인 전쟁은 민중에 반대하고 자유를 거부하는 반동의 싸움판이다. 예술가로서의 나의 전 생은 이러한 반동에 대항하고 예술의 죽음을 거부하는 싸움과 다를 바 없다. 내가 지금 작업하고 있는, Guernica라고 명명하는 이 그림에서, 그리고 나의 모든 새로운 작업들에서 스페인을 고통과 죽음의 바다로 침몰시키는 이러한 군대 계급에 대한 혐오를 나는 분명히 표현한다."
1940년 4월 3일 스페인 우파 꼴통 프랑코의 승리로 고향을 잃은 피카소는 프랑스 국적을 얻고자 했다. 허나 십년 이상 프랑스에 거주함에도 불구 이는 거절되었다. 그 결정적인 이유의 하나가 바로 프랑스 비밀 정보국 DST의 보고였다:
"이 소위 현대 화가"는 공산주의로 편향하기 전에 먼저 "무정부주의자"였다. "스페인 내전 당시에는 (공화주의) 정부에 큰 돈을 헌사했다." 그외 자신의 재산을 소련 정부에 유산으로 남기겠다는 말도 남겼다. "따라서 이 외국인은 시민권 획득을 위한 그 어떤 자격도 없다."
피카소가 무정부주의자라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킨 원인으로서는 한편으론 그가 1901년 한 무정부주의자와 함께 동거를 했으며, 또 다른 한편 피카소의 "위험성에 대한 증거"로 내세울 수 있는 것으로 그 당시 그의 예술적 작업이었다. 한 정보 요원이 보고를 들어본다:
피카소는 "외국인 병사들이 거지들을 땅바닥으로 차버리고" 부르주아 "가정의 엄마들에게" 적선을 거부하는 그림을 그렸다.
이러한 특이한 작품 평가들이 "피카소 기록"에 수록되어 있으며, 이 평들은 피카소가 스페인 내전 발발 후 그의 유명한 그림 Guernica를 세상에 내놓으며 실제 정치적인 활동을 벌린 때 나온 것들이다.
DST의 이러한 "인식"으로 인해 브라크의 피카소를 위한 변호도 그 효과를 보지 못했다. 그 당시 프랑스 관리들은 피카소가 프랑스 국적을 얻기위해 자격 미달이라는 데에 확신을 가졌기 때문이다.
후에 1944년 8월 파리의 해방 직후 그는 결국 프랑스 시민권을 얻었다. 묘하게도 피카소가 어떤 추가 신청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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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목로주점님의 댓글
목로주점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그래서 피카소가 공산주의자란 말씀입니까 아니라는 것입니까?
서동철님의 댓글의 댓글
서동철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기면 어떻고 아니면 어떻습니까?
위의 경우와 같이 이런 저런 '딱지 붙이기'가 우스꽝스럽지 않는가 하는 말씀이었지요.
the moon님의 댓글
the moon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img src="http://www.1st-art-gallery.com/artists/picasso/picasso_le_picador_small.jpg" width="180" height="200">
자신의 비할데없는 능수능란한 데생 솜씨와 노련한 기법과 재간 모두를 팽개쳐 버리고
농부나 어린아이처럼 작품을 연상케하는 ...단순하고 소박한 마음의 피카소 ~ 그림 ..하나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