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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한국학] 한국학은 무엇인가?

페이지 정보

작성자 창오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2건 조회 2,487회 작성일 05-12-20 22:38

본문

한국학은 무엇인가?
현재 남아있는 역사적인 자료에 대한 분석과 해명으로서의 한국이 있을 수 있다. 이는 과거를 과거에 내재적인 원리에 따라 이해하려는 방식이다. 이 연구는 누군가 계속 하고 있다. 하지만 철학을 전공하는 나로서는 이 작업을 할 수가 없다.  능력이 딸리고, 자료도 많고 그렇다.

내가 생각하는 학국학은 이렇다.
학 일반이란 총체적인 현실적 관계 속에 있는 나에 대한 반성이다. 이 '나'는 현실 속에서 규정되어 있고, 이 현실은 과거와의 관계 속에서 규정되어 있다. 물론 여기서 나는 개별적이면서 또한 보편적인 나이다. 따라서 학이란 일정한 역사적 현재 속에 존립하는 현실적 관계 속에 있는 나에 대한 반성이다.
현실적 관계는 자본주의적 형이상학에 의해 포섭되어 있다. 돈이라는 추상적 가치로 모든 것을 환원해버리고, 위계질서를 형성하며, 이 질서 속에서 경쟁하여 돈의 양의 증가를 위해 노력케 하는 체계가 바로 오늘날의 현실적 관계이다. (짧게 줄인다. 이에 대해선 여러 말들이 있을 수 있다.)
이 자본주의 체계를 효과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은 정약용이나 공자나 주자의 이론이 아니라 오로지 헤겔, 맑스 등등의 소위 '서구적' 이론이다.
학이 역사적인 현실적 관계에 있는 나에 대한 반성이라 한다면, 나에 대한 반성은 오로지 '서구적' 이론에 의해서만 설명된다. 정약용의 이론이 자본주의적 물적 관계와 사회의 전체적 매개연관관계를 설명하는 데 무슨 효용이 있는가? 또는 춘향전이 자본주의 체계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얼마나 충실하게 그리고 있는가? 등등.

그렇다면 한국학은 왜 필요한가?
가정적으로 말한다면 다음과 같다.
1. 학은 오직 현실 속의 나에 대한 반성이다.
2. 현실은 서구적인 자본주의 체계이다.
3. 하지만 자본주의 체계는 인간을 말살하는 반인간적인 체계이고, 항상 폭력과 전쟁을 필연적으로 재생산하는 폭력 그 자체이다.
4.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방법은 오로지 자본주의 내에 있는 계기를 통해서만이 가능하다. 즉 예를 들어 공자의 이론을 가지고 이를 극복하자는 건 말도 안된다. 공자의 이론이 저 먼 역사의 특정한 현실 속에 있는 '누군가'의 반성이었다고 한다면 - 즉 나의 입장은 학은 철저히 역사 속에서 규정된다는 것이다 - 이 머나먼 반성이 자본주의 체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체계(이 말도 웃기지만 단순화시켜 말한다)를 구체적으로 구성할 수 있는 이론체계가 될 수 있는가? 한마디로 웃기는 얘기다. 그렇다면 자본주의 내재적인 비판이란 무엇인가? 맑스나 현대 철학 검토해보면 여럿 있다. 이 이론들도 나에 대한 반성의 일부이므로 이것 또한 <한국적인 것>이며 <한국학> 속에 포함된다고 생각한다.

5. 또는 자본주의 외재적인 방식이 있다. 즉 한국인으로서의 '나'는 정말로 자본주의 체계에 딱 들어맞게 살아가고 있는가? 또는 내가 이 체계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고 강요당할 때, 순순히 이에 따를 수 없는 또 다른 새로운 무언가가 있는가? 자본주의 체계가 현실 속에 깊이 뿌리 내렸지만, 이 체계와는 다른 원리가 항상 이 체계와 충돌과 갈등, 더더욱 대립으로까지 나아가는가?
여기서 자본주의의 <외재적인>, 자본주의의 원리와는 <완전히 새로운> 그 무언가가 있다면 난 이것이 좁은 의미의 <한국적인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맑스와 여러 이론을 통해서 설명해도 남는 어떤 <잉여>, <환원될 수 없는 것>, <유령같은 것>이 자본주의 체계와 끊임없이 갈등에 빠진다면 이것이 바로 <한국적인 것>이다.

따라서 한국학이란 이러한 넓은 의미의 혹은 좁은 의미의 <한국적인 것>에 대한 반성을 말한다. 즉 자본주의 체계라는 현실적 관계 속에 있는 나에 대한 반성이 학이라고 한다면, 그래서 서구적 철학에 의해 나에 대한 반성을 시도한다 해도 아직도 설명되지 않는, 그 무언가는 바로 좁은 의미의 <한국학적 반성>에 의해 설명되어야 한다. 여기서 바로 이 <한국적인 반성>의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이냐의 질문에 대한 답변과 반성이 바로 <한국학>이며, <한국철학>이라고 말하고 싶다.

나의 과제는 다음과 같이 설정한다.
나는 원래 국문학을 전공했고, 지금은 철학을 공부한다. 철학을 공부하는 이유는 현대의 자본주의 체계를 설명하는 가장 효율적인 이론은 바로 이 서양철학, 특히 독일철학이라 믿기 때문이다. 이것 또한 <한국학>에 속한다.

또한 한편으로는 지금까지 <한국적인 것>이라고 잘못 알려져 있는 것에 대한 해체작업이다. 무조건적으로 한국인에 의해 생산된 것이라면 <한국적인 것>이라는 생각은 해체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예를 들면 풍수지리와 관련해 이것은 한국적인 것이므로 현재에도 타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정말로 <한국적인 것>을 탐구하기 위해선 지금까지 이데올로기로 사용되었건, 알게모르게 믿고 있었던 한국적인 것을 과감히 해체, 비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작업이 선행되어야 비로소 우리는 좁은 의미의 <한국적인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서 다시 <나의 사랑>인 현대 소설과 고전 소설로 되돌아갈 것이다. 왜냐하면 이 소설들 속에서 <자본주의 체계 속에 환원되지 않는 잉여>가 존재한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현재 현대 소설은 거의 100퍼센트를 '서구적 이론'의 틀 속에서 해석된다. 또는 해석하려고 노력한다. 영화 이론도 거의 매 일반이다. 모두가 환원된다. 따라서 '서구적 이론' 또한 넓은 의미의 <한국적인 것>으로서 우리에게 가치가 있다.
하지만 나는 이에 대해 반대하고, <이 틀 속에 환원되지 않는 그 무엇>이 남아 있는가의 질문을 던지고 반성한다.
고전 소설의 연구의 목적은 <이 틀 속에 환원되지 않는 그 무엇>이 과연 이 고전 소설에서도 드러나 있는가의 문제를 다룬다.

이를 통해 한국학, 혹은 한국철학은 자본주의 체계를 설명하면서, 또한 위협하고, 겁주고, 극복하는 강력한 이론, 혹은 <나의 주관적인 망상?>이 될 것으로 믿는다.
넓게 보면 자본주의의 철학, 이에 대한 비판철학 및 잉여로서 남아있는 <한국적인 것> 모두가 한국학이고
후자가 좁은 의미의  <한국학>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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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서동철님의 댓글

서동철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우선 님의 [한국학]에 대한 참여에 기대 섞인 고마움의 말씀 드립니다. 특히 우리의 언어예술을 중심으로 하시겠다니 제 마음이 설레이기까지 하는군요.

단지 그 전에 주신 말씀에서 '자본주의'에 대한 어쩌면 지나친 강조를 엿보지 않나 저으기 두렵네요. 님의 논조는 이 '자본주의'를 축으로 돌고 있는 모습이니 말이죠. 그것도 예컨대 공구의 가르침까지 물리치시는 절대성을 부여하시는데, 제 생각엔 우리가 아무리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 하더라도 공구나 정약용의 가르침을 우리의 구체적 생활에 적용할 기회를 충분히 갖고 있다 여깁니다. 고전이 달리 고전이 아니기 때문이죠.

허나 이에 대한 님과의 말섞음이 이루어지려면 님이 염두에 두시는 '자본주의'에 대해 어느 정도 구체적인 모습을 보아야 할 듯합니다. 단지 이는 [한국학]의 맥락에는 어긋나는 주제이겠죠.
님 짬 나시면 한번 이 주제에 대해서도 몇 말씀 주실 수 있는지요?

어쨌든 님의 보여주시는 >함께 일하고자 하는 모습<에 고마움의 마음 다시 한번 전합니다.

아 참, 철학 공부 하신다는데, 어떤 철학(철학자)을 중심에 두시는지 살짝 귀뜀해 주시렵니까?

창오님의 댓글의 댓글

창오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저는 다만 공구나 정약용의 가르침은 일정한 역사적인 배경 하에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자본주의 체제의 '절대화'로 인해 이런 이론들이 몰락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또한 제가 강조했듯이 절대화된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살아남아있는 '잉여'를 찾는 작업도 중요하다고 봅니다.
방법에 있어 초역사적인, 역사 맥락을 떠난 정약용이나 공구의 가르침은 그 자체로 가치 있지만, 저는 제한을 두고 싶습니다. 어떤 점에서 가치가 있느냐면 자본주의 체제와의 관련성 속에서만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체제와의 관련성 속에서 저는 우리에게 아직도 현재적으로 살아있으면서 이 체제의 잉여로 남아있는 부분을 찾고 싶습니다. 그런 점에서 구체적 생활에 적용할 부분이 있겠지요. 하지만 역사적 맥락을 떠난 이론, 역사성을 배제한 이론을 우리의 현재적 현실에 적용할 수 있다는 것엔 회의적입니다. 그건 다만 역사성과 현재를 떠난 <과거적인 것>에 대한 탐구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니까 의견은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방법상의 문제이지요. 혹은 학의 출발의 문제의 차이인 듯 합니다.

뭘 공부하냐고 물으시면 '고백'을 해야 겠네요. 제가 밑에 답글 든 사람의 철학을 공부합니다. 그렇다고 선입견을 접어두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예술의 종언'이 결코 망언이 아님을 저는 또한 증명할 수 있습니다. 사실 잘못 해석된 종언이론이 많이 있지요. 다른 의미의 종언 이론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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