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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루터의 종교개혁

페이지 정보

작성자 자유로니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조회 2,616회 작성일 02-03-07 11:24

본문

작성일 : 1999/02/13  조회수 : 152

  ##########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

■ 1. 면죄부

중세기말 유럽은 여러 영주들이 결집하여 한 군주를 받들고 있는 정치체제였다. 군주들이 의회에서 황제를 결정하고 이 황제를 통해서 정치조직들은 하나로 단결한다. 황제와 군주들은 자기의 세력행사를 합법화시켜 주는 근거로 교황과 교회를 필요로 했고 교황과 교회는 자기들을 지켜 주는 힘으로 황제와 군주를 필요로 했다. 국민은 세속적 그리고 종교적 고위관리에게 복족해야만 했다.

수도사들은 교회를 떠나서 속세에 들어온 유일한 이들이었다. 그들은 교황의 교서를 만들어 로마밖에서 이를 실행하도록 감독했다. 그들은 종교재판이란 도구로 자기들의 임무를 무자비하게 수행했다.

중세기에 평민은 국가와 교회권력자들에 대한 두려움속에서 살았다. 그들은 하나님도 두려워했다. 왜냐하면 교회가 보여주는 하나님은 자비롭지 않으며 모든 죄를 죽은 후에 연옥불로써 심판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속죄를 위하여 면죄부를 살 수 있다. 자기의 죄에 대한 징계로부터 용서받는 한편 연옥에서 고통받는 죽은 영혼을 속죄할 수 있다는 것이다.

1957년 교황 율리우스 2세는 면제부효력을 선언함으로써 로마에 잇는 성베드로 대성당 신축을 위한 자금을 기대했다. 교황 레오 10세는 헌금액수에 따른 등급을 정했다.  귀족이면서 Magdeburg의 대주교인 Albrecht von Brandenburg는 독일에서의 면제부판매 전매특허를 받았다. 그는 대교구와 마인쯔 선제후국을 인수하기 위해 돈이 필요한 나머지 당시 Fugger가문으로부터 돈을 빌렸다.

대부분 수도사인 면죄부 설교사들은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면죄부를 판매했다. 푸거가문의 대리인이 항상 동행하면서 즉시 자기의 몫을 챙겼다.

■ 2.마르틴 루터

1483년 Eisleben에서 출생한 루터는 Erfurt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그는 대부분의 동시대인처럼 하늘의 영광이냐 징계의 불길이냐를 심판 받기 위해 언젠가는 심판자앞에 서게 되리라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1505년 그는 Erfurt에서 어거스틴 은자회의 수도사가 되었다. 1508년에 Wittenberg대학으로 옮겼고 거기서 1512년에 신학박사학위를 받고 성서학 교수로 임명되었다. 그래도 그는 불안했다." 내가 비록 승려로서 흠없는 삶을 산다 하더라도 나는 하나님앞에 죄인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용서하셨다는 사실은 믿을 수가 없다."

그래서 그는 화가 나서 하나님께 외쳤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정의와 분노로 계속 위협하심으로써, 복음을 통해서도 여전히 고통에 고통만을 더해 주시려고 합니다."

이런 그에게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로마서의 한구절은 복음중의 복음이었다. 그에게서 마침내 분노하시는 하나님의 상이 사라졌다.

■ 3.뷔텐베르크의 논제

루터는 신중히 행동했다. 그는 혼자서는 아무것도 이루어 낼 수 없다는 것과 앞서 처형당한 Johanes Hus처럼 실패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많은 세속의 고위관직자가 교회를 불신의 눈으로 보고 있다는 것을 루터는 알았다. 그는 자기의 의견을 95개조항으로 요약했다. 그를 통해 그는 교회의 비행을 비판하고 개선을 호소했다. 무엇보다도 면죄부판매의 폐지가 중심이 된다.

제 32조: "면죄부에 의하여 자신의 구원이 확실하다고 스스로 믿는 사람은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과 함께 저주를 받을 것이다."

제36조: "어떤 그리스도인이든 진심으로 자기 죄에 대해서 뉘우치고 회개하는 사람은 면죄부 없이 형벌과 죄책에서 완전한 사함을 받는다."

제 43조: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고 필요한 사람에게 꾸어 주는 것이 면죄부를 사는 것보다 선한 일이라는 것을 그리스도인에게 가르쳐야 한다."

루터는 이 논제를 인쇄하여 여러 주교와 군주들에게 보냈다. 며칠 후 1517년 10월 3`일 만성절 하루 앞서 자기의 논제를 Wittenberg성교회문에 게시했다. 그의 논제는 신속히 널리 퍼졌고 루터는 평민들이나 특별계층 모두에게서 인기를 얻었다.

당연히 관계당국은 루터를 주시하게 되었다. 면죄부 판매금은 중요한 수입원이었다. Albrecht von Brandenburg는 이 논제를 로마로 보냈다. 레오10세는 루터의 사상을 감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1518년 8월에 루터는 로마로 소환명령을 받았으나 그것을 거절하고 대신 Augsburg에서 추기경 Cajutan에게 심문을 받았다. 11월에 면죄부에 대한 가르침이 들어 있는 교황의 법이 나타났다.

루터는 교황의 무오설과 가르침의 권위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1520년까지 루터는 자기의 군주 Friedrich von Sachsen으로부터 보호를 받게 되었다.

1520년6월에 비로소 교황의 교서는 뷔텐베르트의 논제를 정죄했다. 이 교서는 루터가 논제를 취소할 것을 촉구했다. 루터는 이를 거부하여 이 교서를 불태워 버렸다.

1521년 1월 3일에 레오10세는 루터를 파문했다. 이제 황제는 루터를 체포하려고 Worms에 있는 의회로 그를 소환했다.

루터는 1521년 4월 17일 의회에 나와 황제와 영주들 앞에서 그의 논제와 그 동안 계속 나온 20개조항을 모두 취소하라는 요구를 거절했다. 4월 25일 황제는 루터에게 더 이상 보호해 줄 수 없다는 점을 알려주었다.

5월26일 황제는 Worms의 칙령을 통해 루터를 이단으로 발표했다. 누구든지 루터를 국가기관에 넘겨줘야 할 의무가 있게 되었다. 그런데 루터는 사라졌다. 보름스로부터 호송받아 돌아오던 중 루터는 납치되어 Wartburg로 은밀히 옮겨져 Friedrich von Sachsen영주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

■ 4.종교개혁

1522년 3월부터 루터는 Wittenberg에서 국가권력의 간섭을 받지 않은 채 다시금 공개적으로 설교했다. 같은 해에 신약성서번역이 나오고 그 신약성서는 빨리 퍼졌다.

1523년 첫 프로테스탄트교회가 생겼다. 진보적인 영주들은 국가가 카톨릭을 옹호하는 상황에서도 공공연하게 이 개신교교회를 허용했다. 초기의 영주들은 신학적인 확신에서라기 보다는 카톨릭교회를 벗어남으로써 자신들이 더 큰 세력을 가질 수 있다는 희망에서 신교쪽으로 바꾸었다.

루터는 일을 중단하지 않았다. 그는 저술을 계속하였고 1523년에는 압도적으로 신교를 지지하는 도시 뷔텐베르크에서 다시 강의를 하게 되었다. 루터는 수녀였던 Katharina von Bora와 1525년 결혼했다.

1529년 "소교리 문답서"를 낸지 얼마후에 "대교리 문답서"가 나왔고 1532년에 구약성서 전체가 독일어로 나왔다. 거기에는 성찬과 결혼 그리고 세례에 대한 예문과 찬송가가 들어 있었다. 루터는 계속 종교개혁을 주시하고 개혁의 목적에 위배되는 것을 비판했으며 오르겐과 상상들을 교회에서 제거할 것을 주장했으며 성인세례를 강도높게 부르짖었다.

종교개혁 도중에 루터는 1546년 2월 18일 Eisleben에서 Wittenberg의 논제를 발표한지 30년만에 죽었다.

카톨릭과 신교간에 싸움은 여전히 남아 있었고 종종 무기를 잡기도 했다. 카톨릭을 보호해 왔던 황제는 힘을 잃어버리고 급기야 1555년에는 보호자의 역할을 포기해 버렸다. "아우구스부르크 종교평화회의"에서 결정된 것은 영주가 자기 영토내의 종교를 결정한다는 것이었다. 종교에 대한 자발적인 결정은 그후 200년이 지나서야 보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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