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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과 원한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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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가아닌양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4건 조회 911회 작성일 17-06-23 23:24

본문

법과 원한감정

„Ressentiment: bei Fr. Nietzsche das Gefühl des ohnmächtigen Hasses des sozialen niedriger Stehenden gegen die Vornehmen und Mächtigen.
-Wörterbucht der philosophischen Begriffe, Meiner Verlag“

„함무라비 법전“의 원칙 „눈에는 눈 이에는 이“는 최초의 성문법이자 „복수“를 그 특징으로 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가지고 있는 법적 특징은 상대방에게 입은 피해, 혹은 상대방의 행위가 나에게 불러일으키는 분노를 등가적 교환으로 규범화 시키는 것이다. 복수란 매우 개인적인 분노에 대한 등가물을 필요로 하는 것에 비해, 법은 피해당사자가 규범이 정한 것 이상으로 상대방에게 분노할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우리는 „베니스의 상인“에 등장하는„살을 베더라도 피가 흘러서는 안된다“는 판결은 법이 가지고 있는 특징을 잘 보여준다. 모든 법은 과도함을 제어한다. 따라서 „함무라비 법전“이 성문법의 형태를 가진 한에서 그것은 „복수“를 의미하지 않는다. 

„복수“를 주제로 한 영화는 대체로 1대1의 복수를 보여주지 않는다. 그것은 물론 극적 효과를 위해서일 수도 있다. 하지만 복수는 손해를 입은 자의 심리적 크기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복수에 1대1 등가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영화 속 복수의 강도는 복수를 행하는 자의 심리적 고통을 드러낸다. 반면 법적 판결은 복수가 갖고 있는 심리적 강도를 규범화하여 사회의 불안 요소를 제거한다. 하지만 문제는 이 규범화가 심리적 분노를 모두 억압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법이 만들어내는 효과는 이 분노를 내면적인 것으로 변환시킨다는 것이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은 어떻게 분노가 심리적 죄책감의 드라마로 변환되는지를 잘 보여준다. 납치범에게 아이를 잃은 엄마는 납치범에게 할 수 있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법은 엄마에게 공간을 마련해주지 않는다. 따라서 엄마가 택할 수 있는 길은 종교적 용서이다. 하지만 납치범은 신과의 일대일 관계를 통해 엄마의 분노가 개입할 수 있는 공간을 완전히 소멸시킨다. 납치범에게 판결을 내리는 것은 법이고, 납치범을 용서하는 것은 신이다. 이 영화의 중반부부터 나타나는 „종교적 용서“라는 주제는 „법“의 복수의 공간을 소멸시킨 다음 시작된다. 그리고 처음부터 아이의 엄마가 범죄자에게 할 수 있는 일은 없었기 때문에 „용서“란 자기 내면의 심리적 드라마 이상이 될 수 없다. 물론 범죄자가 엄마에게 용서 받기를 원했다면 이 이야기는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범죄자는 스스로 신으로부터 용서를 받았다.     

니체는 „도덕의 계보“에 등장하는 원한감정은 근대 이후 대중으로서 소시민이 가지고 있는 집단적 분노를 이해하는데 좋은 개념이다. 하지만 이것은 복수와 구분된다. 우리는 오히려 원한감정을 복수의 좌절에 의해 나타나는 심리적 드라마로 해석할 필요가 있다. 니체는 귀족과 천민 사이에 존재하는 „뛰어난 자와 하등한자“라는 고대의 윤리적 구분이 어떻게 근대의 „선과 악“이라는 범주로 전환되는지를 유대민족의 예를 통해 설명한다. 이 때 원한감정은 „선과 악“의 범주 속에 살고 있지만, 자신의 심리 속에는 „하등한자“라는 의식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이 „악“에 대해 보여주는 분노이다. 이 집단에 속한 사람들인 니체의 비유 속에 무거운 짐을 진 낙타이고, 이 낙타들이 분노를 표출하는 대상은 자신에게 이 짐을 지게 한 주인이 아닌, 짐을 지지 않는 낙타, 혹은 짐을 지고 싶어하지 않는 낙타의 심리이다. 귀족이 열등한자들에 대해 분노하지 않고 자신의 몫을 빼앗은 자들에 대해 분노하는 것에 비해, 낙타는 함께 짐을 지지 않는 자들에 대해 분노한다. 여기서 우리가 이해해야 할 것은 „선과 악“이라는 소시민적 삶의 틀 속에 여전히 „우와 열“이라는 현실적 권력관계가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무엇이 악인지는 주인이 결정한다. 나는 주인의 결정 속에서만 낙타이다. 그리고 근대의 법과 윤리가 만들어낸 심리적 드라마에서 „우“는 감히 침범할 수 없는 „법과 사회적 규범“ 그 자체이다. 법과 규범을 침범하려고 하는 자는 악인이다.

같은 책에서 니체는 법이 어떻게 손해를 입은 자가 „손해를 입힌 자“에 대해 갖게 되는 분노를 규범화 시키는지를 설명한다. 니체는 „정의의 정신에 의해 정복당한 마지막 영토는 ‚반동적 감정‘의 영토“라고 쓰고 있다. 법은 규범을 통해 a라는 손해에 대한 A라는 등가물을 마련해준다. 강력한 권력을 갖고 있는 국가에게 a라는 범죄는 더 이상 큰 위협요소가 아니다. 더 큰 위협은 a에 대한 등가물이 존재하지 않고, 피해자들의 분노가 그대로 표출되어 버리는 것이다. 법은 범죄보다 질서의 부재를 더 위험한 것으로 판단한다. 따라서 법은 우리를 이중의 규범 속으로 끌어들인다. 1.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 2. 적법한 수준의 반응과 적법하지 않은 수준의 반응. 법은 우리에게 복수를 허용하지 않는다. 법의 이중적 규범을 통해 원한감정을 다시 해석한다면 근대 소시민의 원한 감정이 완성되는 최종 지점은 분노하지 않는 원한감정이다. 좋은 낙타는 자신의 짐을 지지 않는 다른 낙타에 대해 분노하지 않는다. 낙타는 그저 자신의 짐을 질 뿐이다. 낙타는 무질서의 영역을 혐오한다.

낙타는 이중의 모습을 한다. 1. 함께 짐을 지지 않는 낙타들에 대해 분노하는 자들 2. 묵묵히 질서의 영역에 머무는 자들. 겉으로 보기에 이 두가지는 다른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같다. 왜냐하면 법 질서 속을 살아가는 현대인의 분노는 더 이상 물리적 형태로 상대방을 향하지 않기 때문이다. 원함감정은 무기력한 분노를 의미한다. 그것은 혼돈을 만들어내지 않는 분노를 의미한다. 인터넷 세계에서는 이루어지는 언어적 분노가 아무리 커다란 강도를 갖고 있더라도, 그것은 아직 낙타의 분노이다. 우리는 그것을 독백으로 이해해야 한다. 낙타의 분노는 현실에 개입하지 않는 분노이다.

원한감정이 나타나려면 A. 우리에게 부가된 법과 질서가 무거운 것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무거우면 무거울 수록 B „그것은 꼭 필요한 것, 거부해서는 안되는 것“으로 인식된다. 그러나 C. 분노는 현실에 개입하지 않는다. 그리고 현실에 개입할 수 없음(c)이 A와 B의 연결고리를 만들어낸다. 현실에 개입할 가능성이 적으면 적을 수록 A와 B는 긴밀하게 연결된다. 한국 사회에서 군대와 군대를 거부하는 사람들에 대한 심리적 분노는 이러한 „원한감정“의 형태를 띠고 있다. 그리고 이 짐을 더욱 무거운 것으로 만드는 것은 이것이 모두에게 공평하게 부가되는 의무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이  낙타라는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거부할 수 없다.

최근 게시판을 통해 등장한 „병역 거부에 의한 망명 사례“는 이러한 원한감정을 극적으로 증폭시킬 수 있는 이야기 구조를 갖고 있다. 이 사례의 병역 거부자는 다른 사람들의 심판이나 이해가 아닌, 다른 국가에 자신의 행위에 대한 판결을 위임함으로써 우리의 심리적(용서 또는 이해냐  혹은 더 강력한 처벌에 대한 요구냐) 개입 마저 불가능하게 했다. 따라서 이것은 낙타들을 가장 곤혹스럽게 만드는 행위로 보인다. 그는 낙타들을 둘러싼 법 자체에서 탈출했다. 그리고 주인을 벗어난 낙타만큼이나 다른 낙타들을 분노하게 만드는 것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노가 낙타들이 탈출한 낙타들을 이해하는 낙타들보다 특별히 더 위험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둘 다 현실에 특별히 개입하지 않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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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익명이지롱님의 댓글

익명이지롱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제게는 유익한 글이었습니다. 잘 읽었어요.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복수를 규범화하는 것으로서의 법에 대한 기술이 특히 유익했습니다.

법은 정도를 넘어 폭주할 수 있는 사적 복수를 정량화 해 제어한다. 사적 갈등에서 발생할 수 있는 폭력에 고삐를 매고 정량화 해 규범화한 것이 법 체계. 이것이 주인-노예 도덕에서 주인의 위치를 차지. 노예들은 자신을 지배하는 법 규범에 똑같이 따르지 않는 다른 노예에게만 분노함.

"근대 소시민의 원한 감정이 완성되는 최종 지점은 분노하지 않는 원한감정이다. 좋은 낙타는 자신의 짐을 지지 않는 다른 낙타에 대해 분노하지 않는다. 낙타는 그저 자신의 짐을 질 뿐이다. 낙타는 무질서의 영역을 혐오한다."

가아닌양님은 국가 같은 거대한 권력 기구와 그 기구가 부여하는 질서에 거스르거나 혹은 거기서 벗어나는 것을 좋은 것 내지는 필요한 것으로 보면서 낙타들 중에서 그나마 분노라도 하는 낙타가 얌전한 낙타보다 미묘하게나마 더 좋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제 지난 글에 다신 댓글까지 고려했을 때.)

제가 보기에 가아닌양님의 생각은 국가 같은 권력 기구를 전복할 가능성을 발견하고 싶은 마음을 중심으로 회전하는 것 같습니다. (제가 오해하고 있는 거라면 알려주세요.  )

가아닌양님도 당연히 무조건적으로 법 체계나 국가 기구 같은 것을 분쇄해야 한다고만 생각하지는 않으시겠지만, 사회 전체를 지배하는 "하나의" 권력이 법 같은 질서를 부여하는 것은 약자들인 노예-낙타들로써는 환영할 수밖에 없는 일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덧붙여 놓고 싶습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길가에 앉아있다가 어느 순간 별 생각 없이 길 쪽으로 다리를 쭉 뻗었는데 하필 그 위치를 지나가던 사람이 내 다리에 걸려 넘어져 타박상을 입었습니다. 성질머리가 좀 험악한 사람이라 1억원을 내놓든지 한 쪽 팔을 잘라 내놓든지 하라고 으름장을 놓는데, 그 사람은 본인도 아주 강할 뿐더러 친구도 많고, 나는 약골인데다 친구도 없고 가족이라고는 늙은 부모 뿐이며 돈도 없다고 할 때, 1억원이나 한 쪽 팔을 5만원 정도로 일축해버리고 거기에 따를 것을 명하는 더 거대한 권력의 존재는 내 입장에서 구원자와 같은 것일 테니까요.

물론 노예적 정신은 이런 경제적/합리적 계산에 따르는 정신이라기 보다는 훨씬 직관적이고 감각적인 거겠지만요.

"인터넷 세계에서는 이루어지는 언어적 분노가 아무리 커다란 강도를 갖고 있더라도, 그것은 아직 낙타의 분노이다. 우리는 그것을 독백으로 이해해야 한다. 낙타의 분노는 현실에 개입하지 않는 분노이다."

이건 현실화 되지 않는 편이 더 좋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가아닌양님이 그게 현실화 돼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낙타의 분노에 대한 제 생각을 그냥 적어 보는 거예요.)

예를들어 이번 인천 아동 살인사건 가해자와 같은 구치소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의 글에는 사람들의 욕망의 형식이 잘 드러납니다. 이게 지어낸 얘긴지 진짜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진짜든 지어낸 얘기든 간에 이 글에서 드러나는 글쓴이의 욕망의 형식은 변함이 없습니다. 이 링크의 페이지 하단에 전문이 기재돼 있습니다: http://sports.chosun.com/news/ntype.htm?id=201706240100215730015324&servicedate=20170623

그 글의 전반적인 특징은 이거였습니다. 일단 가해자 김양의 비정상적인 특질들을 열심히 묘사합니다. 김양이 얼마나 끔찍하게 미친 인간이고 제정신이 아닌지를 열정적으로 묘사하다가, 처벌을 언급하는 대목에서는 빠짐없이 굉장히 이성적이고 정상적이었다고 말합니다. 제정신이었어야 무거운 처벌이 가능해 지니까 제정신이라고 주장하면서도, 김양이 얼마나 잔혹한지, 특히 얼마나 죄책감이 없는지를 얘기하는 대목에서는 정상 범주를 아득히 넘어서서 소름끼칠 정도로 비정상임을 강조하는 분열적인 자세가 나타납니다. 제가 인터넷 여기저기를 돌며 사람들의 반응을 살펴본 결과 전부는 결코 아니지만 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방식이 이 글에 드러난 바와 어슷비슷 합니다.

자신과 같은 규범, 같은 욕망의 형식을 공유하지 않는 자를 처벌하고 싶은 마음이 넘쳐 흐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김양은 때려죽여야 할 괴물이 마땅히 가져야 할 특성인 무서운 광기를 넉넉히 갖고 있지만 동시에 너무나 정상적인 사람이기도 해야만 하는 거죠. 물론 바로 이런 마음에 의해 사회의 질서가 유지되는 거겠지요.

김양의 경우 뿐만 아니라 다른 대다수의 강력범죄의 경우에도 비슷한 모습이 보이는데, 이런 식의 분노가 실천적으로 분출된다고 했을 때 이게 과연 주인-법 을 초극하고 어떤 새로운 자유를 빚어내는 그런 역할을 하는 것일 수 있을것 같지는 않습니다. 요컨대 낙타의 분노는 낙타의 분노일 뿐, 그게 실천돼봤자 사자의 분노로 바뀌지는 않는다고나 할까요.

군대 문제의 경우에도 비슷하게 보수적이라고 봅니다. 많은 사람들이 병역기피자를 잡아서 군대 보내고 싶어합니다. 어떤 사람은 병역거부자들을 모아서 지뢰제거를 시켰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여기에 동조하는 평범한 남성들은 굉장히 많을 겁니다. 박수까지 쳐 가면서 "맞아 맞아 평화주의자라서 총을 못 잡겠다면 평화를 위해 지뢰제거 시키면 되겠네 하하하하!" 하는 모습이 쉽게 상상이 되어요. 여기서 지뢰제거는 물론 위험한 일을 상징하지요. 내가 따르는 법에 따르지 않는 괘씸한 녀석이 골탕먹었으면 좋겠다는 식의 전형적인 낙타의 분노일텐데, 이 낙타의 분노는 주인의 질서를 더 튼튼하게 해 주는 보수적인 힘으로 기능하겠죠. 또 이런 보수적인 힘이 사회를 지탱하는 데 기여할 거고요.

  • 추천 1

가아닌양님의 댓글의 댓글

가아닌양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 국가질서의 전복 가능성을 발견하고 싶었던 것은 아닙니다^^. 다만 어떤 과격반응들이 국가의 법과 질서자체가 이미 위험한 상황에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는 생각은합니다. 예를 들면 군대 같은 것이요.사회 전체의 입장에서 본다면 소수의 병역기피자들이 발생하는 것(물론 숫자가 많아지면 좀 상황이 다르겠지요)은 위험한 징후가 아닌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런 병역기피자들에 대한 분노가 매우 극에 달했다면 이건 위험 징후입니다. 만약 병역문제는 잘 논의해서 새로운 합의점을 찾지 못하면 이러한 분노를 관리하기 어렵겠지요.
-과격한 분노가 현실화되지 않는 편이 좋다는 것에 동의합니다. 저도 그들의 분노가 유익한 방식으로 현실화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조금 다른 것은 저는 그 분노들이 고정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적절한 기회가 주어진다면 다른 방식으로 문제를 고민하거나 해결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2. 법과 질서는 평범한 시민들에게 최소한의 보호장치일 수 있다는 것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법을 시민들의 편에서 적극적으로 고민할 수 없다면, 법은 인간이 가진 좋은 삶에 대한 적극적인 고민들을  불가능하게 만들게도 하지요. 하지만 이 지점에 대해서는 '익명이지롱'님과 저 사이에 특별한 이견이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3. 개별적 사례들에 대해

3.1 살인 사건의 경우
저는 우선 댓글을 통해 지나친 반응을 하는 사람들을 중요하게 보지는 않습니다(아마 인터넷이라는 매체를 다루는 제 개인적 특성 때문에 그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보다는 그런 댓글들이 과격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어느 정도 유사한 감정을 갖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 더욱 중요할 것 같습니다. 과격한 반응 보다는 그러한 과격함에 대한 일정 정도 수긍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법에 대한 국민들의 감정을 더 많이 반영하겠지요.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술에 취해 범죄를 저지른 사람은, 맨 정신으로 범죄를 저지른사람을 더 나쁘게 봅니다. 자신을 방치했기 때문이지요.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미 술에 취했을 때부터 자신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방기했다고 생각합니다. 법이 결과들에 대한 책임이 아닌, 동기나 사전 배경들을주로 다루기 시작한 것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이 때로는 약자들의 삶을 보호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때로는 행위가 만들어낸 나쁜 결과, 혹은 행위 자체의 나쁨에 대한 책임을 질 사람이 존재하지않게 만들기도 합니다. 레미제라블에 등장하는 빵을 훔친 남자에 대한 무거운 처벌이 갖는 문제는 "행위 자체의 동기"를 고려하지 않았다기 보다는 "행위의 결과를 사회가 포용할 수 있는 정도"가 고려되지 않았다는 것에 문제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엽기적인 살인에 대해 그 사람이 "정신병인지 아닌지를" 고려해 판결을 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습니다. 법이 동기와 사전 배경들을 집중적으로 다루면 다룰 수록 사람들은 그 사람이 나쁜 사람인지 아닌지를 중점적으로 고민하게 되겠지요. 저는 법을 다루는 과정 자체가 사람들을 그렇게 과격하게 만드는 측면이 있다고 생각을 해봅니다. 그리고 언론과 영화같은 것을 통해서 그런 문제가 많이 다루어졌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법에 대한 불신이 어느 정도 있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어떤 행위가 돌이킬
 수 없는 나쁜 결과를 만들었다면 책임지는 개인이 있던가 사회가 있던가 해야겠지요. 아마 저는 그런 점에서 많은 사람들의 분노가 단순히 반이성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끔찍한 결과에 대해 "책임"을 묻는
 것은 어느 정도는 상식적인 반응이겠지요.

3.2 군대의 경우
익명이지롱님이 문제를 제기하는 부분에 동의합니다. 저는 그저 그런 과격한 반응들이 군대를 더 이상 이대로 방치하는 것이 사회 전체에 매우 좋지 않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징후 정도로 생각할 뿐입니다. 위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저는 인터넷에서 일어나는 과격한 댓글 자체를 크게 중요하지 생각하지 않아서 문제를 이런 방식으로 다루는 것일 수 있습니다.

  • 추천 1

친절한시선님의 댓글

친절한시선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아무리 분야 전문성을 갖고 계신다 해도 이런 글을 몇 십분만에 툭 던지듯 써 내지는 않으셨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생각을 나눈 다는 가치만으로 귀한 시간 나누시는 행위 자체가 벌써 내용의 절반입니다. 예전에 니체의 낙타 이야기를 읽었을 때 이런 생각이 들었었습니다. 서양 철학자들은 왜 이다지도 뻔한 이야기를 저렇게 어렵게 어렵게 돌려 말할까? 유행인가?

그런데 저 의문에 대해 또 이렇게 반문해 봅니다. "뭣이 뻔한디?" 그러면 "아니 그걸 꼭 말로 설명을 혀야뎌? 긍까 거시가 거시기하다는 거 아니여." 라고 밖에는 당장 대답하기가 곤란하더라구요.

철학이(이성이) 현실과 만나는 경계에 존재하는 공간. 유한한 삶이 갈구하는 궁극의 원형은 그 안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어렴풋한 추측. 겨우겨우 거기까는 닿았습니다. 이 추측이 제대로 짚은 것인지도 불분명하지만요.

가아닌양님의 댓글의 댓글

가아닌양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친절한시선님 오랫만에 반갑습니다^^. 뭔가 써야겠다고 생각하고 나서, 쓰다보면 읽을만한 것을 쓰기는 한 것인가 스스로 의문이 들 때가 많습니다. 철학자들의 이야기도 이것이 의미가 있기는 한 것인지 의문이 들 때가 많이 있습니다^^

아마 스스로 세상이 잘 이해가 안 가서 그걸 이해하다보니 말과 글이 복잡해지지 않나 추측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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