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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유럽의 문화투쟁 – 루터와 에라스무스의 논쟁

페이지 정보

작성자 송다니엘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13건 조회 1,378회 작성일 17-03-07 21:12

본문

16세기 유럽의 문화투쟁 – 루터와 에라스무스의 논쟁


민주주의와 계몽주의가 꽃을 피운 유럽에서 문화투쟁은 그간 눈에 잘 띄지는 않았지만, 이젠 표면화되어 살벌하게 진행된다. 유럽에서 극우가 커지는 것은 문화투쟁이 밖으로 드러난 현상이다. 독일에서 녹색정당과 AfD(독일애국대안당)은 정치적 차원에서 문화투쟁을 벌이겠다는 신념에서 나온 것이다. 독일에서 68문화혁명 이후 녹색정당은 Institution(의회, 정부, 학교, 킨더가르텐)을 통해 그들의 이념을 빠르게 확산해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에 반발하고 나온 것이 AfD이다. 초기에 보수적인 사람들이 이 대안당에 많이 가입했으나, 이들의 극우적 성향이 조금씩 드러나면서 멤버가 조금씩 바뀌는 것 같다 .

문화투쟁으로서는 유럽역사에서 가장 거세게 부딪혔고,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이 16세기의 루터와 에라스무스의 논쟁일 것이다. 이 논쟁을 통해 유럽의 지성인들이 둘로 확연하게 갈라졌다: 루터냐 에라스무스냐? 이것은 종교개혁의 핵심주제인 오직 은혜로(sola gratia)와 인본주의의 신념인 인간의 자유의지 사이의 충돌이다. 이 논쟁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후머니즘이 무엇인지 살펴본다.

1) 휴머니스트

이탈리아에서는 이미 14세기에 르네상스가 싹이 트고 후에 점차 알프스를 넘어와서 인문주의의 형태로 유럽의 지성인들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이들에게서 매우 중요한 것은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이다. 이전에는 하나님이 역사의 중심이었고 역사는 하나님이 이끌어 가신다고 믿었으나, 차차로 인간이 역사의 중심이 된다는 생각이 지배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역사 이해에서 신적인 개입을 배제했다 (transcendent ßà immanent). 신 중심의 세계에서 인간중심의 세계로 전향되었다. 17세기에 이러한 사상이 신학계에 들어오면서 18세기부터는 신학교의 강단을 지배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신학 사조를 자유주의 신학이라고 한다. 르네상스 시대의 대표적인 학자 미란돌라를 소개한다:

피코 미란돌라(1463-1494)는 „르네상스의 아들“로 불리며 그의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소고“는 르네상스 시대의 대표작 중의 하나이다. 이것은 당시의 분위기를 잘 표현한다.

„너는(아담) 모든 제한에서 벗어나서 너 자신의 자유의지를 따라 너의 성품을 스스로 빚어 나가라. 나(하나님)는 네가 서 있는 곳으로부터 모든 세상을 다 볼 수 있도록 너를 세상의 한복판에 세워놓았다. 네가 조각가처럼 너 자신을 네가 원하는 대로, 너 자신의 능력대로 형성할 수 있도록, 나는 너를 천상의 존재로도, 지상의 존재로도 짓지 않았다. 따라서 너는 짐승으로까지 타락할 수도 있고, 너의 의지에 따라, 위로는 신적인 존재로까지 거듭날 수가 있다“ (9쪽)
„피타고라스학파 사람은 범죄자들은 짐승의 모습으로, 심지어 식물의 모습으로 변한다고 생각한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마호메트도 신의 율법을 벗어나는 사람은 자업자득으로 짐승이 된다고 했다.
올바른 척도를 갖고 모든 것을 분별할 수 있는 철학자는 인간이 아니라 천상의 존재이다… 천상의 피조물(천사)이 아니라 더 고상한 신적인 존재로서 단지 인간의 육신이라는 껍질을 입고 있을 뿐이다(12-13쪽)“

· 자유의지를 매우 강조함.
· 성경 대신에 도덕철학. 성경의 내용을 자유롭게 변개함.
· 성경과 함께 고대철학자, 모슬렘 학자, 마호메트, 근동의 신화(오시리스), 그리스신화들을 인용함. 이 모든 것을 같은 선상에 놓고 이야기함.
· 사랑을 강조: 인본주의 이후 대다수의 신학자, 철학자들이 하나님 말씀 대신에 사랑을 내세운다.
· 내가 나를 스스로 창조한다: 인간은 창조적인 조각가와 같다. 그러나 고대, 중세에는 인간의 위치(ordo)가 정해져 있었다(모든 존재하는 것이 그의 위치가 정해져 있었음). 특히 중세에는 하나님 아래 인간, 인간 아래 동물. 이러한 순서는 바뀌지 않는다. 르네상스에 와서도 이 기본 틀은 변하지 않지만, 인간은 예외적으로 동물로까지도 타락할 수 있고, 하나님으로까지도 발전할 수 있다. 이렇게 인간을 결국 하나님의 위치까지 올려놓은 것이 피코의 혁명적인 전환이다.
· 인문주의에서 시작하여 헤겔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결국 하나님의 자리에 앉게 된다. 벌써 피코에게 이러한 경향을 뚜렷하게 볼 수 있다.

알프스 북쪽의 휴머니스트는 대부분 진지한 신자들이었다. 그들은 학자가 아니면 신부나 목사들이었으며, 인간의 존엄성에 눈을 뜬 사람이었다. 이들은 성경을 원어로, 즉 신약은 희랍어로 그리고 구약은 당시 거의 사어가 되었던 히브리어로 연구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이들 중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교회의 부패와 부조리에 대해서 싸우는 사람이 있었다. 이들은 교대 교부들, 고대 서적들의 연구를 통해 당시 교회의 여러 가지 가르침과 관습들이 고대교회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라 후대의 산물(교회의 조작)이라는 것을 밝혀서 교회를 비판했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그들을 경탄하기도 하고 배척하기도 했다.

2) 루터와 에라스무스의 논쟁 배경

루터가 국제무대에 등장했을 때에는 에라스무스의 명성은 최고조에 달했다. 그는 신학박사였으며 휴머니스트의 제후라고 불렸다. 계시록을 제외한 모든 성경을 주석했다. 루터는 에라스무스가 특히 고전어 연구에 크게 이바지했기 때문에(라틴어 그리스어에 탁월함) 그를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이전부터 그로부터 인본주의적 교만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에라스무스가 하나님의 일보다 인간의 일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라고 말한 바 있다. 또한 1524년 초 에라스무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에게 다음과 같이 충고했다:
„당신이 (종교 개혁에) 도움을 주기를 원치 않는다면, 우리의 비극에 관람객으로만 남아 있으시오. 당신이 우리의 대적과 합세를 하지 않기를 바라오. 특히 나를 비판하는 문서를 발행하지 마시오. 나도 당신에 대항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겠소“
논쟁의 배경은 매우 흥미롭다. 루터가 교황의 파문 위협장을 학생들 앞에서 불태워 버리자 교황은 그를 파문했다. 루터는 이에 대해 1520에 „assertio“(확고한 주장)라는 논문을 발표했는데(1521에 독일어판), 33항에서 그는 „타락 이후의 자유의지는 명목뿐이며, 이것은 대죄만 지을 수 있을 뿐“이다고 주장했다. 그는 „당시에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주제이며 모든 논쟁의 핵심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는 논쟁을 꺼리는 사람이었으므로 참았지만, 루터를 혼내주라는 가톨릭 지도자들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였고, 특히 그가 종교 개혁에 동조한다는 비난을 받았기 때문에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에라스무스는 자기를 비판하지 말라는 루터의 권고(1524년 초)를 무시하고, 루터에게 자중하라고 충고하는 논문 „자유의지에 대한 논문“을 출간했다(1524). 루터는 1525말에 „노예의지에 관하여“로 에라스무스에게 답변했다. 그는 단지 설교와 같은 기회를 통하여 에라스무스에게 간접적으로 답변하였으나, 아내 케테의 설득으로 본격적으로 답변을 써서 완성했다.
그는 서문에서 에라스무스가 종교 개혁의 핵심적인 문제를 찔렀음을 인정했다: „당신은 진실로 요점을 파악하고 있소. 지금까지 다른 사람은 교황주의 문제, 면죄부 판매, 연옥 등의 문제를 들고 나와 나에게 시시하고 의미 없는 비난을 일삼고 있소. 당신이야말로 유일하게 정곡을 찔렀소. 즉 황소의 뿔을 단단히 잡은 것이요“

누가 구원을 이루는가? 하나님만이 이루시는가? 아니면 약간이라도 고상한 인격이 기여하는가? 우리는 단지 무상으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만을 자랑할 것인가? 아니면 우리의 노력을 조금이라도 인정할 것인가? 우리가 계시만을 신뢰할 것인가, 아니면 조금이라도 건전한 이성을 신뢰할 것인가?

3) 에라스무스의 „자유의지론“

핵심: 인간의 의지는 약간이며(non nihil), 하나님의 은혜는 대부분이다(plurimum).
그의 자유의지의 정의: 자유의지는 인간의지의 능력으로서 인간이 자신을 구원으로 이끄는 것(은혜, 하나님, 그리스도 등)을 받아들이거나 거절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 자유의지에 대해 지나치게 깊이 토론하는 것은 이득이 없을뿐더러 해로울 수가 있다.
· 신자는 경건해지기 위해서는 열심히 더 유익한 일들을 좇아야 하고 모든 힘을 기울여서 죄를 벗어나야 한다. 이 과정에서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구해야 한다. 이 자비하심이 없으면 우리의 노력하고 애쓰는 의지는 의미가 없을 것이다. à 자연과 은총의 협력.
· 어거스틴과 루터가 주장한 대로,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선한 마음과 악한 마음을 주장하신다면, 그리고 이 일의 결과로 인해 우리를 상주시고 벌주신다면,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진리지만“, 이러한 파라독스를 세상 사람에게 굳이 강조해서 가르쳐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일의 결과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마음은 대부분 교양이 없고 육적이라서 범죄하기 쉽다. 그렇다면 누가 과연 자신의 삶을 개선하고자 노력할 것인가?
·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예정되어 있다면, 우리의 의지가 토기장이의 손에 있는 흙과 같다면,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나중에 심판하시겠는가?
· 그러므로 은혜가 대부분을 차지하지만, 자유의지도 약간의 의미는 있다.
· 그러므로 우리는 진실한 마음으로 (선을 위해) 노력할 수 있도록 격려를 받는다. 그리고 하나님의 의도를 의도적으로 거부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마땅히 벌을 내려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부당하게 벌을 주신다는 비판을 면하게 된다.


4) 루터의 „노예의지론“

핵심: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

A. 4가지 오직

solus Christus(오직 그리스도)
에라스무스는 인본주의자로서 인간의 존엄성을 살리려고 했다. 즉 인간은 비록 일그러지고 병이 들었지만, 그럼에도 선한 면이 조금은 있으므로, 이것을 잘 고양하면 선한 사람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사람은 그리스도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리스도는 (여러 의사 중에) 가장 좋은 의사이다. 성경도 여러 가지 좋은 약 중에서 가장 좋은 약이다.

루터: 인간은 병이 든 것이 아니라 죄로 말미암아 죽었다!(원죄) 세포 하나라도 살릴 수가 없다. 그에게는 부활만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그를 살리는 분은 오직 그리스도이다. 오직 그리스도의 의미는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오직 성경을 말한다.

sola gratia(오직 은혜로)
에라스무스: 인간의 내부에는 아직 불씨가 꺼지지 않고 있다. 이것이 자유의지다. 인간은 성(城)에 비유하자면, 성의 대부분이 적에 의해 점령을 당했지만, 가장 깊은 곳에는 아직 자유가 남아있다. 외부에서 강력한 지원군이 온다면, 이는 해방될 수 있다. 이 지원군이 하나님의 은혜이다.
루터: 무슨 소리! 바로 가장 깊은 곳(마음, 양심)이 이미 옛날에 적에게 강점되어 있소. 인간의 중심이 바로 사단의 노예가 되어 있소. 바로 이러한 이유로 인간의 의지는 속박되어 있소.

에라스무스: 인간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facere quod in se est).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가 부족한 것을 채워서 완성한다(당시 가톨릭의 가르침).
루터: 이러한 가르침은 „사단의 가르침“이다. 인간이 자신의 가장 깊은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것을 하게 되면, 그는 대죄(죽을죄)만 지을 뿐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은혜를 내리게 하시기 위해 무엇을 준비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만약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만하게 자신을 만든다면,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더이상 은혜가 아니다. 은혜와 공적은 물과 불이라서 결코 섞일 수 없다. 진실로 인간은 암흑, 토후 바보후(창1:2: 혼돈하고 공허하며)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은혜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sola fide(오직 믿음으로)
우리는 이 은혜를 무료로, 선물로 받기 때문에 „오직 믿음으로“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다.

sola scriptura(오직 성경)
에라스무스: 성경에는 어둡고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심지어 서로 모순되는 부분도 있다. 하나님과 인간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없고, 단지 주장이나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성경과 교부들의 해석, 성경과 전통, 성경과 교황의 가르침, 성경과 철학, 성경과 건전한 이성, 이 양자가 모두 필요하다.

루터: 성경은 명료하다! 단지 우리의 어두워진 눈이 이것을 보지 못할 뿐이다. 성령님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주시면, 우리는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멸망에 처해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다음에 하나님의 구원을 기쁘게 받아들인다. 그리고 우리는 분명하게 신앙고백을 할 수 있다. 성령님께서는 회의하는 이성과 같은 회의론자가 아니므로 그리스도인도 확신의 사람이다. 이 모든 것은 활짝 열린 성경이 선사한다. 그러므로 오직 성경이다.
루터는 이곳에서 성경은 다른 권위에 의존해서 해석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성경에 의해서 해석되어야 한다는 성경해석학적 원칙을 내세웠다. 좀 어두운(어려운) 부분은 밝은 부분으로부터 해석이 가능하다. 성경해석에 있어서 교황이나 전통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B. 노예의지

의미 규정: 루터가 말하는 자유의지는, 일반사람이나 철학자들이 사용하는 의미와는 다르다. 그리고 결정론과도 다르다. 결정론이란, 인간의 의지가 먼저 더 높은 존재나 어떠한 법칙에 의해 이미 결정되었다는 것이다. 즉 인간의 운명이 먼저 결정되어 그 결정에 따라서, 혹은 인과법칙에 따라 인간이 인형처럼 움직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루터는, 인간이 일상적인 삶에서 자신의 삶을 자신의 의지대로 꾸며나갈 수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살아야 한다. 그가 말하는 자유의지는 superiora(높은 것)에만 해당한다. 즉 인간의 의지로는 어쩔 수 없는 것, 다시 말해 우리의 구원 문제에 관한 것이다. Inferiora(낮은 것)에 대해서는 내가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다. 달리 표현하면, 세상에 대해서는(coram mundo) 자유의지가 있고, 하나님 앞에서는(coram Deo) 없다. 우리가 세상이 요구하는 것을 행할 수 있으므로 세상적 윤리가 있을 수 있다(두 지배설: zwei Reichelehre).

갈림길 앞에 선 헤라클레스 비유: 그리스 철학자들은 (에라스무스도 마찬가지) 갈림길 앞에 선 헤라클레스의 예를 들어 자유의지를 설명하는데, 이것은 전제가 잘못되었다. 갈림길에서 아름다운 두 여인이 나타나 각자 자기의 길로 오라고 그를 유혹했다. 한 여인은 호화스러운 삶과 욕망을 충족시키는 미래를 약속하고, 다른 여인은 큰 고생을 통한 영원한 명성을 얻는 삶을 약속했다. 그러나 이때의 헤라클레스 상태는, 욕망에 의해 지배당하지 않는 완전한 자유의 상태였다. 그는 아무런 욕망에 의해 이끌리지 않고, 자신이 무슨 일이든지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에 따르면, 헤라클레스와 같은 상태는 불가능하다. 인간은 물론 타락했기 때문에 불가능하기도 하지만, 타락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그가 피조물이기 때문에 불가능하다. 그의 피 한 방울도, 세포 하나도 하나님께서 창조하지 아니하신 것은 없다. 그러므로, 그는 본질적으로 단지 피조물로서 그에게 주어진 유한한 자유만을 소유할 수 있을 뿐이다. 즉, 그는 하나님에게 속하므로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만 자유로울 뿐이다(물고기가 물에서만 자유로운 것처럼). 만약 누가 인간이 완전한 선택의 자유가 있다고 한다면, 그는 자신이 피조물임을 부인하는 것이다. 그래서 분명한 것은, 절대적인 의미에서의 자유라는 말은,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께만 해당한다. 그러므로 „자유의지“라는 명예로운 말은, 전능, 전지, 영원성과 같이 하나님만을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전능하시다는 말은, 단지 그분이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분이 자신의 능력으로 세상의 모든 일에 활동하신다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는 게으르신 분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 가운데서 항상 일하시고 반응을 하시는 분이시다.
악한 자들도(바로나 가야바, 유다나 빌라도, 사단까지도) 하나님의 목적을 섬겨야 한다. 실상은 인간도 낮은 영역(inferiora: 우리가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는 것들)에서 계획하고 행하는 것들도 하나님의 지속적인 활동에 의해 조정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렇게 모든 것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하나님의 자유는 우리에게 무한한 위로를 준다: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 아니면,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손안에 나는 보호되어 있다. 우연이라는 말을 끔찍한 말이며, 나에게는 그러한 말은 없다.

인간의 의지는 말(馬)과 같다: „그러므로 인간의 의지는 … 말과 같다: 하나님께서 그 위에 앉으시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인간의 의지가 움직인다. … 사단이 그 위에 앉으면, 사단이 원하는 방향으로 인간의 의지는 가고자 한다. 그리고 인간은 자신이 기사를 선택할(자신이 하나님께 가야 할지, 아니면 사단에게 가야 할지를 결정할) 능력이 없고, 단지 기사들이 말을 소유하려고 싸울 뿐이다“
즉 인간은 자기 뜻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주인이 원하는 대로 달린다. 앞에서 인간은 피조물로서 단지 제한된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했는데, 그는 이 자유를 하나님과의 교제 안에서만 올바로 사용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뜻에 일치할 때만 자유를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죄인은 그 특징이 „하나님같이 되고자“(eritis sicut Deus) 하는 것, 즉 완전한 자유의지, 자율을 추구하는 데에 있다. 인간이 이러한 광적인 것을 추구한 결과 그는 타락했으며, 즉 하나님의 선한 지배권으로부터 떨어져나와 사단의 통제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므로 이제는 인간의 자유의지는 실제로 내용이 없는 껍데기일 뿐이며, 완전한 거짓말이요, 하나님 모독이라고까지 할 수 있다. 인간은 항상 누구의 지배권 안에 있으며 중립지역은 어디에 가도 없다.
요약하면, 인간은 하나님 편에서 본다면 선을 행하려고 원할 수도 없다(자신의 경험). 그는 자신이 죄인인지도 모르며 선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루터는 그의 갈라디아서 주석에서도 이와 비슷한 말을 한다:
„오늘날 인간의 자유의지를 신봉하며 ‚선한 의도’를 가르치는 거짓교사들이 바로 그런 사람과 같다. 그들은 자신의 능력으로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그러한 ‚행동’(Akt)을 강요하며, 이것이 이루어지면 그때에 하나님의 은혜를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데, 이것은 극악무도하게 교만한 생각이다“

C. 감추어진 하나님
(인간의 책임에 대한 대답)

루터가 인간의 노예의지를 주장하는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홀로 일하심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토기장이의 손에 있는 흙과 같다. 사단도 하나님의 손안에 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악의 근원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단을 끈에 묶어서, 그 끈을 잡고 계시며, 사단을 통해서도 일을 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이 죄를 짓도록 인도하시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죄를 미워하시고, 인간은 자신의 행위에 책임을 물으시기 때문이다. 인간이 자신의 행위에 책임을 진다는 것은 실제적인 현상이며, 인간은 심리적으로는 선택권이 있기 때문이다.

루터는 물론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인간의 책임 상호 간이 모순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 이율배반은 우리에게는 정지신호이다. 이 이율배반의 비밀을 캐고자 사변을 계속하는 사람은 그 사고가 장님이 될 것이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태양을 오랫동안 보는 효과와 같다. 사람이 실제로 살아가는 데에서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자유는 서로 상치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선택하신 것은, 우리가 시공의 세계에서는 강제로서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자유와 책임으로서 느껴진다.

숨겨진 하나님안에 이 비밀이 담겨있다. 하나님의 많은 부분이 우리에게는 감추어져 있다. 하나님께서 왜 죄와 죽음과 사단이 지배하시도록 허용하시고 인간들을 영원토록 벌을 내리시는 지는 이 숨겨진 하나님 안에 있는 비밀이다. 이 숨겨진 하나님에 대해서는 인간이 상관할 바가 아니다. à 루터는 이 지점에서 한 발짝만 앞으로 떼면 논리의 모순에 빠지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루터가 이 지점에서 예정론의 논의를 멈춘 것은 본받을 만할 일이다. 즉, 성경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예정을 가르치므로 우리는 이것을 침묵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모순 없이는 이론화할 수 없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하나님은 계시된(명확한)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 구원에 필요한 만큼만 계시하셨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밝고 명확하게 계시하셨다. 그런데 계시된 하나님은 영광에서가 아니라 십자가에서 계시되었으므로 다시 감추어진 하나님이 되신다. 그분은 높이고자 하시는 자를 낮추신다. 그리고 지옥을 통해서 하늘의 문으로 인도하신다(삼상 2:6 이하). 하나님은 반대(모순)를 통하여 일하신다.

정리:

에라스무스는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선하신 하나님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이 인본주의 신학의 출발점이다. 인간이 믿음(하나님의 도움)을 통해 더욱 선하게 되는 것이 중요하다. 자유의지를 사용하여 삶을 개선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성경 내용 자체보다는 성경에서 도덕적인 내용을 찾아내는 것이 더 중요했다. 실제로 에라스무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모범이요 좋은 선생이었다. 이러한 전통은 자유주의 신학의 뿌리가 되었으며, 칸트도 같은 맥락이다.
여기에 루터는 에라스무스에게 당신의 신학은 그리스도가 없는 인본주의적인 신학이라고 비판했다. 루터는 인본주의 신학에 대항해서 속죄 신학을 주장했다: 하나님은 죄에 분노하신다. 그분은 단지 그리스도 안에서만 의로우신(자비로운) 분이다.

토론 결과

이러한 루터의 답변은 에라스무스(인본주의)에게 철퇴를 휘두르는 것이었다. 그는 에라스무스의 의도인 인본주의와 신학의 결합을 추구한 것을 눈치챘다. 에라스무스는 이 답신을 받고 매우 상처를 받았다. 또한 그의 명예는 치명상을 받았다. 루터가 인간의 무능과 죄악을 폭로함으로써, 인본주의를 공격하고 인간을 다시 피조물의 자리에 되돌렸다. 그러나 인문주의자들 중에 아무도 감히 이 작품을 비판하지 못했다. 이로써 에라스무스의 시대는 지나고 한동안 종교 개혁이 유럽 무대의 주인으로 떠올랐다.
루터와 에라스무스간의 날카로운 대립은 휴머니즘 내부에서 깊은 분열을 가져왔다. 루터를 동조하던 많은 휴머니스트들이 다시 가톨릭으로 돌아갔다. 사명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휴머니스트들은 서서히 철학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지금까지 종교 개혁에 동조한 많은 학자들은 이제 루터와 그의 종교 개혁에 내적으로 거리감을 두게 되었다.
추천6

댓글목록

송다니엘님의 댓글

송다니엘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길어서 죄송합니다만,
올해가 루터해인만큼 독일에 행사도 많고,
독일 문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까 해서 올렷습니다.

  • 추천 6

somageist님의 댓글

somageist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Humanism을 한국어로 무어라 번역되어야 좋은 지 때때로 고민스럽습니다.
그냥 휴머니즘 아님 직역으로 인본주의, 인간주의.  Humanism 자체의 모호성도 있지만 한국어 번역상의 어감 때문에 벌써 선입견이 내재되는 문제를 피할 수가 없습니다.

또 샤르트르의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라는 명제를 보면 이때의 휴머니즘은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무신론적 입장에서 휴머니즘을 말합니다.

한국을 포함하는 동아시아적 철학전통에서는 무신론적 휴머니즘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근원이나 도를 중심에 두고 인간이 도에 합당한 길을 찾는 과정으로 보죠(불, 선). 원시유학(맹자.공자시대)에서도 천(하늘)에 대한 경외가 있었구요.
성리학으로 넘어와서는 이기론의 논쟁이 있었고, 심지어는 왕양명의 심학에 이르러서는 유불선이 하나로 모인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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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적인 측면에서 휴머니즘과 비슷한 개념은 홍익인간이 될 것 같아요.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한다라는 해석으로 표현한다면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는 프로타고라스의 개념에 윤리적 개념이 첨가된 느낌이겠지요. 휴머니즘과는 약간의 연관성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밀접하지는 않는 애매함이 있네요.

구한말 서구열강이 아시아를 침탈하는 과정에서 아시아의 지성인들은 동도서기를 주장했지요 동쪽, 그러니까 동양은 정신문명 도가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유가적 전통에서는 민본주의, 민심은 천심이다. 역성혁명론등이 대다수의 백성/시민을 중시하는 사상이 있는데 그 전통을 분석하자면 민주주의와 휴머니즘과 좀 연결고리를 만들 가능성은 조금 내재되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민본주의적 사고는 백성을 정치의 중심에 두고 경세제민(세상을 다스리고 국민을 편안하게 한다)의 정치철학으로 보아야 하기에 휴머니즘과는 별 연관성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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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본주의는 모든 판단의 근거의 근원이 인간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거기에 비해 동아시아 전통에서는 일자와의 합일, 도, 천(하늘)등으로 인간의 이성/판단이 근거가 아닙니다. 인본주의는 다시말하면 어린아이에게 핵탄두의 버튼을 갖게한다는 부정적인 의미도 가능합니다. 그래서 실존주의가 말하는 중심명제인 신이 없다면 우리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말이 주는 이미지는 무서운 것입니다.

독일비판철학 프랑크학파의 호르크하이머는 도구적 이성의 위험성에 대해 경고합니다. 현대사회의 문제점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목적과 목표가 있는 전통적 이성개념에서 멀어져서 이성이 단지 도구적 역할을 하게될때 발생하는 비극을 말하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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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다니엘님의 댓글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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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머니즘의 개념은 시대에 따라 변천되었으므로, 번역이 어려운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이것이 처음 등장했을 때에는 "인본주의"의 개념이 아니었고, 단지 "인문주의" 즉 "고전, 혹은 원전(성경 포함)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었습니다. 인간이 중심이라는 개념은 거의 없었으나, 인간의 존엄성에 눈을 뜨기 시작하면서 점점 발전하여 18세기 합리주의에 이르러 "인본주의", 즉 성경과 같은 계시가 아니라 인간 이성이 진리의 여부를 결정하는 인간중심주의로 바뀌었고, 그후 독일 관념론을 거쳐 무신론자 포이어바하에 와서 절정을 이루었다고 봅니다(인간이 자기 형상으로 신을 창조한다). 그 후에 나타난 실존주의(사르트르)도 이 맥락을 떠나지 않습니다. 오늘날에는 좀 다른 개념으로 사용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동양철학과는 비교하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소마님 고민을 이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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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본주의에 있어서 문제점은 [가치 판단의 결정을 누가 내리느냐]의 문제입니다.
사람을 위한 사상이라고 한다면은 허물이 적으나 각 개인이 가치 판단을 내리는 주체로서는 문제가 생깁니다.

모든 이들이 하나씩 자신만의 가치판단의 자를 가지고 결정권을 갖는다는 의미의 인본주의는 흥미로운 문제점을 양산합니다.

가치의 척도가 각 개인의 가치관이냐 아니면 외부적인 권위인가로 축약할 수도 있습니다. 여기에 모든 비밀이 숨어있습니다.

somageist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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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는 빨갱이 잡는 국가보안법이 있습니다.
거기에 비해 유럽에서는 나찌를 잡는 나찌법이 있습니다.
한국의 국가보안법이 국민을 옥쇄는 법이라면, 그 못지않는 법이 유럽의 저승사자 나찌법입니다.

이 나찌법에서부터 모든 유럽의 모순이 시작됩니다. 국가나 애국을 말하면 나찌주의자가 되어야하고, 외국인에 비우호적이면 나찌주의자로 낙인찍힙니다. 이 나찌법의 완성은 어찌보면 유럽의 이슬람화로서 정점을 찍고 있는 것이 아닌 가 하는 불안한 염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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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mageist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송다니엘님께 질문이 있는데요?
     
    유럽에서 극우가 커지는 것은 문화투쟁이 밖으로 드러난 현상이다 라는 구절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합니까?
    이 문장에서 시작해서 근대초 에라스무스와 루터의 논쟁으로 문화투쟁과 연결하시는 데요?

과거와 현재 문화투쟁, 극우 녹색당, 독일을 위한 대안당과 연결해서 생각하시는 견해는 어떤건지요. 전 앞 부분에 제 견해를 밝혔습니다.

송다니엘님의 댓글의 댓글

송다니엘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예배가 끝나니 좀 한가하군요.
독일의 68문화혁명을 잘 아실 것입니다. 다른 분들을 위해 모르시는 것으로 간주하고 설명을 하겠습니다. 파리의 여자 기숙사 사건, 프라하의 봄, 미국의 반전데모, 밥 딜란, 존 바에즈...등과도 연관되어 있습니다. 프랑크푸르트 학파(호르크하이머, 아도르노 등)가 중요한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했습니다.
68의 아들이 오늘의 녹색정당입니다. 이들의 이슈는 반 권위주의, 레세 페르(자유방임) , 반 자본주의, 성의 자유(성 평등뿐만 아니라, 완전한 성의 자유, 즉 아동들 조기 성교육, 혼음, 호모...), 반전주의, 무기감축, Multikulti(다문화 사회)....
이들은 이것을 공공기관을 통해 유포하려고 했으며(Marsch durch die Institutionen, 루디 두츠케), 드디어 오늘날 성공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교수의 권위는 실제로 상당히 떨어졌습니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이름을 부르는(아버지에게 철수야!) 가정이 많아졌습니다. 성은 자유화 되었습니다.

물론 긍정적인 측면도 있습니다. 독일인이 친절해지고 부드러워진 것, 외국인 대우가 좋아진 것 등은 분명히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독일인이 대체로 불성실해지고, 지저분하고, 무책임해지고... 학교 기숙사에만 가보아도 30-40년의 상황과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거짓말하는 독일인도 늘어났습니다(이것은 68과 직접적인 관계는 없습니다). 외국인에 대해 대우가 좋아진 것도 긍정적인 현상입니다.

이러한 경향에 반대하는 당이 CDU인데("multikulti hat gescheitert" 주장), 메르켈 등장 이후 계속 Mitte로 이동하여 불만을 품은 사람 중에 AfD로 이적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대안당은 바로 녹색정당의 적수입니다. 이렇게 해서 문화혁명이 정치적으로 이슈화 되어 나타난 것입니다. 대안당은 성문제, 모슬렘 문제, 문화적 문제(독일 문화의 Leitkultur 주장) 등에서 반계몽주의적 성향을 띄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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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mageist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유럽은 반나치법에 의해 돌아가는 비정상적 사회입니다. 홍길동이 서자로 태어나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격이 되어버리는 것이며, 벌거벗은 임금님을 보고 아무도 임금님이 벌거벗었다고  말할 수 없는 이상한 동네가 지금 유럽사회입니다.

68은 혁명인지 도덕적 타락인지 알 수 없는 묘한 현상이죠. 5.16은 혁명일까요, 쿠테타인가요?확실한 것은 2차대전 이후로 윤리와 가치가 전도되는 점진적인 타락의 흐름선상에 있다는 의심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반나치법의 최종수혜자가 유럽에로의 이슬람 민족이동의 흐름이라는 것입니다. 열매를 보면 나무를 안다고 했습니다.  범죄수사에서도 중요한 포인트는 누가 이익을 보는 가입니다. 아무리 쓰리쿠션으로 일을 도모한다하더라도 결론은 누가 이익을 보는 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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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다니엘님의 댓글

송다니엘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저는 지난번 쉬타인마이어 대통령 선거때 유명한 Dargqueen인 Olivia Jones가 여느 때처럼 매우 화려한 모습을 하고 투표인단으로 선출되어 의회에서 투표하는 것을 보고, 68이 여기까지 온 것을 생각하고 놀랬습니다.
킨더가르텐에 Kuschelecke(남녀 아이가 들어가서 희롱하는 곳, 물론 단순히 쉬기도 함)를 설치하는 곳이 생기고, 어머니 아버지라는 칭호를 없애고, Elter1, Elter2로 부르는 킨더가르텐도 생겼습니다. 저에게는 독일에 산다는 것이 좀 끔찍한 면도 있습니다.
큰 당들도유권자가 두려워서  68의 진행을 막지 못하므로 대안당이 생긴 것입니다. 물론 대안당은 이러한 보수적인 기치만 내건 것은 아닙니다. 저는 대안당을 싫어합니다. 이상한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지요.
언젠가 시간이 나면 68문화혁명에 대해 자세히 정리해서 올리겠습니다.

에라스무스와 루터의 논쟁은 유럽의 장래를 가르는 매우 중요한 문화투쟁이었습니다. 그 뒤에 데카르트에 와서  한 번 크게 뒤집어집니다.

저는 목사라서 문화투쟁에 예민한 편입니다.

somageist님의 댓글

somageist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최근들어 제가 생각하는 것은 데카르트 이후 서양사가 인간의 이성을 핵심이념으로 한 새로운 시대를 연 것이 아닌 가 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새로운 제 2의 바벨탑의 시도라는 관점으로 봅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생각함이라는 의심할 수 없는  인간의 근본적 바탕을 깔고 새로운 철학적 건축물을 재구성합니다. 생각한다는 것은 또 인간 이성을 말한다고 할 수 있지요. 생각은 생각주체와 대상을 필요로 합니다. 주객이 분리된 나. 대상을 앞에 둔 나가 근대철학의 시작점입니다.

이 데카르트의 명제에 현각의 스승인 숭산스님은 이렇게 말했죠.
생각하지 않을때는 나는 어디에 있는가?

전 여기에서 데카르트는 에고에 중심을 둔 가짜 나를 말한다면, 숭산이 말하는 지점은 로고스 안에 침잠해 있는 신적이성으로 구분할 수 있다고 봅니다. 

장자의 제물론에 보면 내가 나를 여의었다. 라는 대화가 나옵니다. 이 말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자기부정 정신과 통한다고 봅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여의고, 불교개념으로 본다면 무아를 알아 도에 이르러야 하는데, 현대이성철학은 없어져야 할 자아. 생각을 바탕으로 하는 이성에 뿌리를 내리는 새로운 시도가 제 2의 바벨탑을 세우는 위험한 불장난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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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이지롱님의 댓글

익명이지롱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에라스무스의 논리는 이해하기 쉬운데, 루터의 반론/논리는 납득이 잘 안 되네요.

아무튼간에 흥미롭고 유익한 글입니다.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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