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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이치방크에 남아있는 고종의 50만 마르크<잊혀진 나라 13년>다큐

페이지 정보

작성자 winterkid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20건 조회 4,474회 작성일 12-01-31 04:01

본문

 
 
베를린 외교문서보관소에서 발견된 서류,,,,고종이 도이치방크에 독립비자금 100만마르크를 몇 차례에 걸쳐 입금했다는 문서가 발견되었다 
을사협약 1907년 이후 이를 알게된 이토오히로부미에게 반절은 뺏기고 나머지 50만 마르크가 이상이 현재까지 남아있다고 합니다
현재 250억정도의 금액이 도이치방크에 예금이 되어있지만 그걸 도이치방크가 인정도 하고 있는데 되돌려 줄 수 없다고 합니다
이게 옳은 건가요???
법적으로 지급받는 것은 불가능 한걸까요?
도이치방크에서 그돈을 한국에 돌려주길 원합니다
그 돈이 고종이 꿈꾸었던 나라의 건설을 위한 제단이라도 설립되어 옳은 일에 쓰여지길 바래봅니다
추천7

댓글목록

한겨레님의 댓글

한겨레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정말 귀중한 자료입니다.  도이치 방크가 돌려줄 수 없다는 250억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동안의 잘못된 역사 교육으로 말미암아  "나라를 말아먹은 망국의 황제 "쯤으로 알고 있었던 광무황제(고종)의 새로운 면모를 알 수 있는 자료이니, 많은 분들이 열람하시기를 적극 추천합니다.  특히 저와 함께 광무황제에 대한 다른 시각을 토론하셨던  베리의 <친절한 시선님>, 꼭 이 자료를 보시길 정중하게 권합니다.
광무황제께서 상해 임시정부의 자금과 만주 독립군의 자금을 비밀리에 조달해 주셨다는 역사적 사실이 이제서야 비로소 수면 위로 떠오르네요.  눈물이 납니다.  당시 광무황제의 절박했던 상황과 비통했던 심경을 생각하면......
자료 소개해 주신 Winterkid 님, 감사합니다.

  • 추천 4

친절한시선님의 댓글

친절한시선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무능하고 썩어빠진 귀족들이 백성의 목숨을 담보 삼아  권력놀음에 빠졌을 때 어떤 참극이 일어나는지 늘 각성하고 싶습니다. 삶의 한가운데에서 21세기를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아야 하는 저로서는 더더욱 그러합니다. 그래서, 부패한 대한민국의 시작점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고종에게 한가로이 나눠 줄 연민의 정은 없습니다. 그 때 다른 탐관오리들도 많았는데 왜 하필 고종이냐 하면, 그가 왕이었기 때문입니다.

조선의 독립을 위해 투쟁한 훨씬 더 구체적이고 직접적이고 열열하고 절절했던 史實들이 많은데,  앞뒤가 뚜렷하지 않은 고종의 이야기야 제게는 그저 가십거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차라리, 윤봉길 이후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독립군 그리고 국민당 장개석과의 관계에 대해 차분히 공부하는 것이 상황파악하는데 훨씬 더 도움이 될 것입니다. 임정을 도운 것이 대한제국의 황제가 아닌 중국의 권력이었다 해서 행여 열등의식 같은 것을 가질 필요 없는 것은 물론입니다. 그것은, 임정이 아쉬운 마음에 애걸한 것이 아니라, 윤봉길의사의 거사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가치를 확실하게 깨달은 장개석의 자발적 지원이었기 때문입니다.

한가지, 한겨레님이 고종을 대하는 감정이 어떠신가에 대해서는 무어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대신, 그 시절에 대한 토론을 원하시면, 시간 나는대로 응해 드리겠습니다.

한겨레님의 댓글

한겨레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광무황제(고종)에게 한가로이 나눠 줄 연민의 정은 없습니다." 라고 하시는  친시님의 단언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인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물론 그러한 친시님의 역사관에 대하여 시비를 가릴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인간의 오랜 역사가 그래 왔듯이 역사의 이해는 모든 사람들이 합의된 결론을 내릴 수가 없기 때문이지요.  특히 역사의 인물을 평가한다는 건 그 합치가 더욱 어렵지요.  객관적이냐, 주관적이냐, 긍정적으로 보느냐, 부정적으로 보느냐 하는 시각의 차이에 따라 결론은 180도로 다르게 마련이지요. 여기서 중요한 점은 그 어느 것도 정답이 될 수 없고 마찬가지로 어느 것도 오답이 아니란 것입니다.  인간이란 본디 선과 악, 능(能)과 무능의 양면성을 지닌 존재이기 때문이지요.  오죽하면 이미 20세기 초에 옥스퍼드의 역사학자 E.H카아 교수는 “ 역사란 방대한 사료의 자루 속에서 역사가가 골라내는 극히 적은 부분이다.“라고 단언했겠습니까 ?  지금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데 한국의 어느 신학자는 에리히 프롬의 철학을 논하는 어느 책에선가 “성경은 이스라엘 역사 흐름 가운데 승리한 사람들이 기록한 것”이라고 한 말이 생각납니다.  역사라는 것이 승리자의 기록이라는 건  오늘날  이미 보편적인 상식이 됀 것으로 보입니다.
일반적으로,  광무황제는 안으로는 아버지 흥선대원군과 명성왕후의 권력싸움 틈바구니에서 의지가 박약했고,  밖으로는 서구열강 세력에 몰려 속수무책으로 굴욕적인 문호개방을 한 무능한 황제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은  그의 40여 년 통치기록인 <고종실록>을 일제 조선사편찬위가 편찬했다는 사실에서 유추할 수 있는 바와 같이 의도적으로 조작 왜곡된 <집단의식>입니다.

 신라에 뿌리를 둔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하면서 의도적으로 백제멸망의 원인을 의자왕의 환락과 사치라고  암시한 기술태도가 그러하고,  조선의 정인지와 김종서가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를 편찬하면서 고려 왕조 멸망의 원인을 공민왕의 혼정과 요승 신돈의 농간, 그리고 공양왕의 무능으로 그린 것들도 “역사는 승리자의 기록이다”라는 말을 잘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저는 백암 선생의 <조선독립운동 지 혈사>와 단재선생의 여러 논문들을 읽으면서, 그리고 당시 대한제국의 개화정책을 도왔던 독일과 미국 출신의 외교 고문들과 선교사들의 보고문건들과 조선 여행기들을 통하여, 그리고 당시 자결한 선비들의 상소문 또는 절명시들을 통하여,  고종황제가 무능한 전근대적 군주가 아니라, 근대국가의 이상을 갖고 개혁을 하려고 노력한 개명군주였다고 확신합니다.
서세동침의 세계사적 격랑 가운데 청나라의 압박과 일제의 위협 가운데에서도, 실학자 박규수의 제자들을 중신으로 자신의 세력을 구축해서 개화를 시도해려고 했던 고종황제를 재조명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0년 이상 고종의 경연관으로 봉직한 박규수는 연암 박지원의 후손이며, 다산 정약용의 방계 제자이지만  다산 실학의 정수를 물려받은 대학자였기에, 다산의 <한철학>에서 <대한제국>이라는 국호가 탄생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확실히 일본의 감시가 심해지고 압력도 심해지는 을미개혁 이후에 고종황제가 시행할 수 있었던 개혁은 그 한계가 있었지만, 그 한계를 빌미로 하여 고종황제가 품고 있었던 근대화의 이상과 민국의 이념이 폄하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우리나라의 역사학자들이 일제식민사학에 의해 조작된 광무황제에 대한 <오도된 집단의식>을 바로 잡아야 할 책무가 있다고 강조합니다.  당시의 국내외 자료들을 좀 더 성의있게 발굴하고 연구하기를 한국의 역사학자들에게 권고합니다.

  • 추천 1

친절한시선님의 댓글

친절한시선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그냥 하고 싶은 말씀 하셔도 될 것 같은데 굳이 저를 불러 내신 것은, 제가 오도된 집단의식에 물든 대표적 젊은이(!강조!)라 여기시기 때문인거죠? 정녕 아니시라면, 왜 얌전히 일 잘하고 있는 저를 여기다 불러 앉히셨나염?

이곳에서 펼치고 싶은 뜻이 있으시다면, 저를 신경쓰지 마시고 마음껏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만... 이곳엔 저 뿐만 아니라 많은 대화꾼들이 있습니다.

한겨레님의 댓글의 댓글

한겨레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친시님 !  많이 불쾌하셨습니까 ?  오도된 집단의식에 물든 사람으로 싸잡힌 것 같아서요.... ?  그런 거 아닙니다.  저는 언젠가 친시님이 제게 하신 말씀,  "후천개벽 이야기를 하게 된다면...." 하는 귀절이 떠 올라서, 역시 대화가 통할 수 있는 분이구나 생각했을 뿐입니다.  윗글에서 짧게 밝혔듯이 전 친시님의 역사인식이 틀렸다고 하는 것도 아니고,  시비를 가리자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그동안 모르고 있었던 광무황제의 다른 면이 있다는 점을 알려 드리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런 제 의도가 불쾌하셨다면 정중하게 사과 드리고,  다시는 친시님께 주제넘은 말 하지 않으렵니다.

  • 추천 1

친절한시선님의 댓글의 댓글

친절한시선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제가 그런 것 처럼, 한겨레님도 별다른 감정적 동요가 없으시리라 생각하여 유불쾌 부분은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너무 광범위한 범위에서 말씀을 하셔서 조목조목 다 대응하기는 어렵고, 고종의 대한제국에 대한 내용만 한가지 여쭙겠습니다. 아래의 리드엘님이 올리신 질문과 결국은 비슷합니다. 당시에 조선을 강탈하려는 일제가 고종의 바로 곁에서 두 눈 시뻘겋게 뜨고 지켜보고 있었는데, 어떻게 조선의 왕이 스스로를 황제로 칭하며 공공연하게 '대한제국'을 건국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한'이라는 이름에 담긴 철학이 무엇이건 간에, 조선이 제대로 된 근대국가로 거듭나 대일본 저항력을 갖추는 것을 순순하게 방관하고 있지는 않았을 것인데 말입니다. 한겨레님의 생각을 꼭 한 번 들어 보고 싶습니다만...

리드엘님의 댓글

리드엘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저는 개인적으로 황제라는 칭호가 고종황제에게 어울리지는가 의심 됩니다.
한겨레님께서 생각하시는 고종황제, 대한제국의 황제 자리는 누가 만들어준 것인라
생각하는지요?

물론 역사는 여러가지 관계에 얽혀 쓰여집니다. 그러기에 궁금합니다.
바람이 훨훨 부는 평야에 위태롭게 타고 있는 촛불과도 같은 조선을 왜
대한제국이라 불렀으며, 고종은 왜 황위를 선택한 것일까요?

Jivan님의 댓글

Jivan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도이치방크가 이 돈을 돌려주지 않는게 타당한 건지, 법적으로 과연 올바른 건지, 한국 정부와 법전문가분들이 이에 관심을 갖고 어떤 노력들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집니다.
감사합니다. winterkid 님.

한겨레님의 댓글

한겨레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친시님 ! 그리고 리드엘님 ! 2월의 첫날 아침입니다. 날씨가 이제야 겨울날씨답게 매섭습니다. 건강을 꼭 챙기시기 바랍니다. 
두 분께서 하신 질문의 답은 이미 윗글에서 답이 제시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덧붙이자면, 광무황제의 대한제국 선포는 3백 여 년 묵은 청나라와의 종속관계에서 벗어나고,
일본의 침략 위협에 대항하기 위한 약한 자의 처절한 몸부림이었지요.
이를 두고 후세의 사람들이 “힘도 없는 주제에 뻘 짓 했네...“하고  말한다면, 
그야말로 , 이름 뿐인 <허장성세의 황제국>이 되는 것이고,
“바람 앞의 촛불과도 같은 총체적 국난 앞에서도 미리 좌절하지 않고 최후의 순간까지 최선을 다 했다” 라고 본다면,  <대한제국><광무황제>의 호칭에 의미가 부여되는 것이지요. 
환언하자면, 카아 교수가 언명한 바와 같이 “역사의 푸대자루 속에서 역사가가  무엇을 꺼내어 기록하느냐에 따라 역사가 형상화된다는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대한제국과 광무황제를 논하고자 한다면,  일제가 의도적으로 폄하 왜곡하여 편찬한  <고종실록>을 근거로 하는 지식들을 잠시 제쳐두고,  조선 인조 재위부터 순종 재위까지 기록되어 있는 <승정원 일기> 가운데,  고종 재위 시의 일기들을 읽고나서 논하시기를 권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토론 자체가 무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요즈음은 세상이 좋아져서 인터넷을 통해 필요한 자료들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고종 재위 시의 일기는 한글과 한문의 혼용으로 쓰여져 있어서 어지간한 한문 실력으로도 번역 없이 읽을 수가 있습니다. 
당시 소용돌이 치는 정세(대한제국을 둘러싼 청,일, 러, 영, 미,독의 각축과 견제) 가운데 광무황제와 신하들이 무엇을 고민하고 의논했는지, 황제가 외국의 외교관들에게 무엇을 부탁했는 지 등을 상세하게 알 수 있습니다.
제 결론은,  광무황제는 결코 무능하고 썩은 전근대적 군주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이걸 인정해야 비로소 대한제국과 광무황제의 의미를 후세가 만들어 주는 작업이 될 것입니다. 
역사란,  후세가 선조들의 업적을 의미화하는 작업이기 때문입니다. 
의미있는 토론에 응해 주시고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리드엘님의 댓글

리드엘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한계레님, 추가적인 설명 감사합니다.
정말로, 올 겨울 본격적인 한파가 왔습니다. 손도 시렵고,, 발도 시렵고.....

역시 역사란 때론 정말로 흥미롭습니다. 저는 고종이 무능하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저는 최대한 중립적인 요소들만 가지고, 생각해봤습니다.
몇 가지의 과정과 결과들로 말이죠.

고종은 역대 왕 중에서, 왕의 "자리" 그리고 황제의 "자리"가 무엇인지 뼈져리게 느낀
사람 중에 한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왕"이 되기 위한 왕족으로 태어나지 않은 한 소년은
즉위 후 조대비의 수렴첨정 아래서 성년이 되어갑니다.

친정도 잠시, 아버지인 흥성대원군의 섭정이 시작되죠. 이쯤 되면 정말 "왕"이란 자리가 만만치
않구나 란 것을 누구나 깨달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 사이에, 서양의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대통령이 통치하는 미국, 프랑스, 황제들의 러시아 제국, 독일제국, 세계 열강들에 의해 조선이 얼마나 자그마한 나라인지도 알게되겠죠. 바로 국운이 위태롭다는 것을요.

황제위, 순전히 고종의 뜻이었을까요? 고종은 또다시 왕으로써 고된 시련을 겪게 됩니다.
순식간에 세계 열강들의 중심에 휩싸이게 된 조선. 그 어떤 열강국가들 중에서 진심으로
조선, 대한제국을 생각한 국가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저 서로를 견제하기 위한 도구였을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대한제국, 이를 바라보는 광무황제는 무슨 생각을 해야만 했을까요?

이러한 중립적인 과정과 결과들로 바라볼 때, 저는 생각해봅니다.
왕으로써, 황제로써 쉽지 않은 이 순례자의 길을 잘 걸었다고 말이죠.
그가 황제로써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은 본인 스스로 알았을 것이기에,
윗 글에 황제위가 어울리지 않다고 썼습니다.

친절한시선님의 댓글

친절한시선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승정원일기를 읽어 보았습니다. 고종은 김홍집, 이완용, 조병호같은 자들에 둘러싸여서 나라가일본 손에 넘어가고 있는지도 모르고 조선의 오랜 폐단 근절합네, 나라를 부강하게 합네 하며 경장을 선포하는 장면이 생생히 기록되어 있군요. 이미 허수아비가 된 흥선대원군이 일본 꼭둑각시가 되어 있음에도  모든 서무는 대원군에게 질정받으라 명하고, 일본 공사 대조규개와 도승지 김명규를 입시시켜 개화 방안을 논의 했군요.  조병호와 항렬이 같은 조병갑의 가렴주구에 더이상 견딜 수 없어  죽창들고 봉기한 농민들을 비적으로 몰아 처벌하고 일본군과 함께 자국민을 도륙한 자들이 칭송 됩니다. 이준용·대원군 대 고종·민비 세력의 권력 싸움을 아시고 계신지 모르겠습니다. 갑신정변을 겪고도 냉험한 제국주의 속내를 철저히 파악하려 하지 않고 왜놈들이 공공연하게 조선땅에 자기 집을 짓고 전선을 설치하며 온 나라가 왜놈 판이 되고 있는 와중에도 그들은 한줌도 안될 알량한 권력을 놓고 옥신각신이었습니다. 엘리트 계급의 무지몽매함을 대신해 직접 나서서 풍전등화인 나라를 도와 백성의 안위를 도모하자는 민중의 거룩한 모임도 권력쟁탈에 이용해 먹는 그들을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업신여기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겠습니다.

한겨레님께서는 승정원일기 몇년도 몇월 몇일의 기록을 읽고 고종의 유능함과 진정성을 발견하시는지요?

팬교주님의 댓글의 댓글

팬교주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친시님, 뭐 하나 여쭤봐도 될지요?

한겨레님이 링크해주신 내용을 보신 건가요?  인터넷 글의 속성을 너무나 잘 아실 터이니, 주제에 맞는 토론을 거론하는 것이 실례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친시님은 나름 고종에 대한 공부를 하셨으리라고 봅니다.  그리고 그에 따른 관념이나 판단을 가지고 계시겠죠.  그것이 옳다, 틀리다를 말할 수는 없습니다.  친시님의 고종에 대한 성취를 제가 모르니까요.

그러나, 한겨레님이 쓰신 이 글은, 고종에 대해 사람들이 어떤 평가가 있으리라는 것을 예측한 상태에서, 새로운 관점이 가능할 것이라는 근거로 보여드리는 것이라고 봅니다.  따라서, 친시님이 답하셔야 할 내용은, 한겨레님의 글과 링크를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이 친시님의 고종에 대한 기존 관념을 수정할 만한 근거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는 식의 답글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한겨레님은 이 글로써, 주제를 '특정'하셨습니다.  그에 대한 평가를 하는 것이 글쓴이의 의도에 부합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아주 간략하게 여쭙자면,

이 글과 링크된 내용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보셨나요?  보셨다면 그 내용들에 대해서, 어떻게 반론한다, 또는 어떻게 생각한다를 적어주시면 제게 큰 공부가 되겠습니다.

* 가끔, 이명박의 실정에 대해 어느 분이 글을 쓰면, 노무현에 대한 답글을 시도하는 내용을 봅니다.  이번 글과, 친시님의 답글은 그런 형태로 보입니다.  사람은 같은 사람, 고종에 대해서였지만, 친시님이 우선 언급하셔야 할 내용은, 이 글에 올라온 링크와 한겨레님의 제안이 우선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야, 저같은 사람도 더 배우죠.

  • 추천 2

친절한시선님의 댓글

친절한시선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팬교주님은 제가 시간을 잘 써야 한다는 것을 이해해 주시고 잠깐 기다리세요.
갑자기 나타나셔서 그런 기초적인 말씀을 하신 바람에 제가 뭘 잘못했나 싶었습니다. 동영상도 봤고, 승정원 일기도 고종부분을 읽었습니다. (너무 당연한 것 아닙니까.) 그리고 이명박 노무현은 뭡니까? 그거 나중에 한 번 더 설명해 주시길... (아! 그리고 저한테 묻어가려 하지 마시고 직접 공부좀 하세욧!)

한겨레님 대답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1. 일본이 바로 곁에 있었는데 고종은 어떻게 대한제국을 건국하고 스스로를 일본과 동급인 독립제국의 황제 자리에 스스로 오를 수 있었는가에 대한 답변을 듣고 싶습니다. 본인은 윗글에서 대답이 되었다 치자고 하시는데, 윗글의 무엇이 그 대답이 된다는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대한제국 성립과정에서 우리가 얼마나 자주성을 갖고 있었나를 판단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왜곡된 정보에 빠지지 말라는 경고한 사람이 한겨레님이라고 해서, 한겨레님의 정보엔 문제가 없다고 보장 할 수 없잖습니까. 

2. 승정원 일기를 읽어보지 않은 사람하고는 토론할 수 없다하셔서 승정원 일기 읽고 왔습니다.  승정원일기 어느 부분에 고종의 유능함과 진정성이 묻어나고 있습니까? 승정원 일기를 읽고 그 행간에 당시의 처참했던 상황들이 채워지면서 고종과 귀족들의 무력함이 더욱 또렷해지던데요.

윗 동영상의 결론은, 대한민국의 자존감을 대한제국에서 찾을 수 있어야 한다는데 있습니다. 아주 목소리 좋은 대표적인 성우가 감동적인 음악을 배경으로 깔고 낭낭히 일러 주었어요. 근데 그러자니 대한제국 건국자 고종이 매우 정당해야 하잖습니까? 민족적 동의도 없이 나랏돈을 펑펑 써가며 전차깔고 석조건물 짓고 서울에 신작로 내면, 그거 누구한테 득입니까? 빠리 만국회의에 가서 한국관을 열어 조선은 더이상 중국의 속국이 아닌 완전한 독립국임을 승냥이같은 제국주의자들 앞에서 착하게 웃으며 선언한다는 것이 당체.... 지금 전라도 젊은이들은 캐틀링 기관총에 싹쓸이 당했고, 국모가 살해 당했고, 경상도에서는 양반이고 쌍놈이고 들고 일어나 일본군들과 전쟁을 벌이고, 마을에서 의병이 한 사람이라도 발견 되면 그 마을 전체가 소멸되던 때에....

아무튼 그런 이야기는 차차하기로 하고, 먼저 위의 질문에 대해서 먼저 좀 대답을 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팬교주님의 댓글의 댓글

팬교주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자기는 나보고 묻어가지 말라면서.... 나한테는 이명박 노무현에 대해 묻다니.

제 얘기는요, 한겨레님이 링크로 이러이러해서, 고종, 괜찮지 않냐? 라고 띄웠으니까, 친시님은, 이러이러했다고 하는데, 저러저러하지 않았느냐?  라고 답하는 것이 토론이라는 겁니다.  지금 댓글처럼요.

아이디대로, 좀 친절해지시길.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나보고 선풍기 되라고 하시면 안됩니다.)

  • 추천 1

친절한시선님의 댓글의 댓글

친절한시선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아 그거야 이명박이랑 노무현 사이에 저를 끼워 넣으시니까 그런 것 아닙니까.
어르신 두 분 저한테 왜이러세요?

동영상 보라 해서 봤고, 승정원일기 읽으라 해서 읽었고, 공부시켜 달라 해서 공부시켜 줬는데, 제가 그 이상 어떻게 더 친절해집니까 선풍기 아저씨. (사실은 이거 완전 웃겨요 ㅋㅋㅋ 아~ 간디작살~ 선풍기 돼랏! ㅋㅋㅋㅋㅋㅋㅋㅋ.)

한겨레님의 댓글의 댓글

한겨레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친시님 ! 본디 저는 이것이 옳다 저것은 틀린 것이다 하는 식의 토론을 상당히 싫어합니다.  제가 표현력이 부족한 것인지 아니면, 설명을 잘 못한 것인지 하고 매우 당황하면서, 친시님의 댓글에 어떻게 답변을 해야 하나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펜 교주님께서 저를 위해 변명을 해 주시고, 그에 대해 친시님께서 제 답변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라고, 일축하시니 어쩔 수 없이 답변에 나서게 됐습니다.
우선은, 제가 보기에는 친시님께서는 흥선대원군의 10년 섭정 아래 있었던 10대의 임금 <이재면>과,  친정 23년 만에  대한제국을 선포한 <광무황제>를 동일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대원군의 섭정-민씨 척족과의 정권다툼-고종의 친정체재 확립-대한제국 선포로 이어지는 4단계의 다른 시대정신을 어떻게 하나로 묶어서 비판하고 단죄할 수 있습니까 ?  시대정신도 변하지만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도 또한 변합니다. 따라서 10대의 임금 이재면과 대한제국을 선포한  50대의 광무황제를 동일시 할 수는 없습니다.
광무황제는 대한제국을 선포한 직후부터 일본제국주의의 침탈 위협에 직면하여, 그 위협으로부터 국가를 지키는 첩경으로서 서구열강과 대등한 근대국가로 발돋음하기 위한 몸부림을 치게 됩니다.  조정의 편제를 개혁하여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고 여기에 젊은 실학자들을 비롯한 개화지식인들을 귀천의 구별 없이 등용합니다.당시 유림과 사대부들의 격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단행한 정치체제 개혁(조정관리들의  평균 연령 31세)만 보아도 광무황제의 개화를 향한 의지를 읽을 수 있습니다.
또한 독일인 외교고문인 묄렌도르프의 도움을 받아 독일헌법을 귀감으로 한 대한제국의 헌법인 <대한국 국제>를 제정 공포함으로써, 서구열강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는 국가를 이루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합니다.
친시님께서는,  “갑신정변을 겪고도 냉험한 제국주의 속내를 철저히 파악하려 하지 않고, 왜놈들이 공공연하게 조선땅에 자기 집을 짓고 전선을 설치하며 온 나라가 왜놈 판이 되고 있는 와중에도 그들은 한줌도 안될 알량한 권력을 놓고 옥신각신이었습니다.“ 라고 비난하셨는데,  아니요 !  당시 광무황제는 일본제국주의 속내를 너무나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일제의 침탈야욕에 대처할 힘이 없었을 뿐입니다. 이 부분에서 친시님께서는 분명 <동학농민혁명군의 역량>을 강조하시면서, 광무황제가 통수하는 조선관군이 일본군과 함께 동학혁명군을 살육했다 하고 분개하시며, 광무황제를 폄하하시는 것으로 보입니다.  일제의 침탈리 본격화 되기 이전의 동학농민혁명군 봉기 초기에 조정에서 보낸 안핵사 홍계훈은 고종의 밀지를 받고 동학농민군과 <전주화약>을 맺고,  농민군 점령지역에 대한 이른바 <집강소 자치>를 허용하는 한편, 농민혁명군의 서정개혁요구를 정책에 반영한 사람이 바로 대한제국의 광무황제였습니다.  우금치 전투와  장흥 전투에서 동학농민군을  살육한 장본인들은 일본군이었고, 그들은 정미 7조약에 의해 통감부가 갖고 있던 조선관군 지휘권을 악용하여 이른바  그 알량한 기득권을 빼앗길 것이 두려운 왜관찰사, 왜군수등으로 불리우는 친일 사대부 및 유생세력들의 협력을 받아 조선군을 전투에 동반했던 것이지,  광무황제는 결코 조선관군에게 출병을 명하지 않았습니다.
                                  (이상이 친시님의 1번 질문에 대한  답변입니다.)

승정원 일기를  읽고 오셨다고요 ?  그것도 고종 재위 44년의 일기를 꼼꼼히 읽고 오셨다고요 ?
솔직히 말씀드리면,  이 부분에서 저는 매우 실망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친시님을 우리 겨레의 고전에도 밝으시고, 역사의식도 남다르다고 믿기에 존경의 마음을 품어 왔습니다. 그런데 하룻 만에 44년 일기를 다 읽고 왔다고 하시니 실망할 밖에요 ?  훑어보고 왔다 하셨다면 모르지만.....
책을 읽는다 함은,  행간에 들어 있는 뜻까지 파악해 내는 정독을 말합니다.  요즈음 젊은이들이 흔히 말하는 휘리릭~ 하는 식의 훑어보기는 결코 책을 읽었다고 말 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자면, 일연스님이 편찬하신 <삼국유사>를  모두 읽는데  저는 삼 년의 세월이 걸렸습니다. 그걸 완전히 내것으로 이해하는 데  삼 년이  걸렸다는 이야깁니다.  제가 독일에 온 후에 한국에서 출판된 임승국 교수의 <한단고기>는  한국서점에 주문구입하여 독일에서 읽었는데,  한문 원본도 같이 등재되어 있어서 제게는 아주 좋았지만,  완전하게 읽어내는데 삼 년이 더 걸렸습니다.  무얼 그리 오래 걸리느냐구요.  삼국유사나 한단고기는 그 한문본을 한 글자 한 글자 필사하면서 읽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고 눈으로만 읽으면 심장으로 들어오지 않기 때문인데, 아마도 제가 유별난 구세대이기 때문인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웬만한 중요한 책은 모두 그렇게  한 문단씩 필사하며 읽습니다.

대한제국 선포를 전후한 1897년(광무 원년)의 승정원 일기들에는, 실로 광무황제와 대한제국 선포의 실무자들인 궁내부 대신 및 관료들의 귀중한 대화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대화들에 의하면, 대한제국은 이미 양반과 사대부들을 위한 국가가 아니었습니다.  귀천을 가리지 말고 인재를 발굴하여,  당시의 황립외국어학교에서 교육시켜,  유능한 자를 관직에 등용하라고 광무황제는 수도 없이 명합니다. 
  청국의 북양대신 이홍장이 청의 국익을 위해  고종에게 추천한 외교고문 묄렌도르프(독일인)가  이홍장의 기대에 반하여, 어떻게 고종의 심복이 되어 청과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독일을 비롯한 영국 ,러시아 등과의 외교관계를 주선하게 되는 지도 이 일기에 몇 년에 걸쳐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 대한제국을 도운 외교관둘과 선교사들과의 의미 깊은 대화들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광무 2년(1898년)  날자는 기억할 수 없지만, 갑신정변의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서재필이 망명지 미국으로부터 돌아와 황제를 알현하는 날의 승정원 일기를 읽으셨습니까 ? 
황제는 서재필의 역적의 죄를 사하여 주고 오히려 당시 쌀 천 석이 넘는 거금을 주어 <독립신문>을 창간하라고 명합니다.  우리나라 근대 시민사회 형성의 촉진제가 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독립신문>의 실질적 사주는 바로 광무황제였던 겁니다.  그후 독립협회의 창설 및 운영자금도 광무황제의 내탕금으로 충당됩니다. 

 같은 한 책을 읽어도 사람들은 그 독후감을 저마다 다 다르게 쓰게 마련이지만,  저는 광무황제의 확신에 찬 개화의지와  서구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겠다는 의지를 승정원일기에서 느끼는데,  친시님은  “고종과 귀족들의 무력함” 만을 느끼신 것 같습니다. 
아 ! 여기에 관점의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광무황제의 국가와 사회의 개화에 대한 의지를 읽었고,  친시님은 무능력을 읽었군요. 하지만 저는 그러한 광무황제의 무력함을 안타까워할지언정 미워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구요 ? 제가 그 때 그상황에 놓여 있었다면, 어떻게 할 수 있었나 ? 하는 물음을 제 스스로에게 던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친시님은 또  “민족적 동의도 없이 나랏돈을 펑펑 써가며 전차깔고 석조건물 짓고 서울에 신작로 내면, 그거 누구한테 득이 됩니까 ?“ 하셨는데,  이 말씀을 하시기 전에 당시 광무황제의 내탕금의 성격을 이해해야 합니다.  한 마디로 당시 황실의 내탕금이라 함은 황실의 사유재산입니다.  백성들에게서 거두워들인 조세로 형성된 자금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당시의 정서로서는 황제가 개인적인 일에 소비해도 누가 뭐라고 할 성격의 돈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그럼 이 내탕금은 어떤 방법으로 축적되었을까요?  이 역시 명성황후 생존시인 1873년 부터 1897년까지의 승정원 일기에 몇 차례 기록되어 있습니다.  기본적인 황실의 수입은 황실 소유의 농지에서 거두워들이는 조租 였지만,  18세기 말부터 도입된 서구문물의 영향으로 촉발된 금-은-동의 광산개발권이 가장 큰 수입원이었습니다.
명성황후가 함경도 은광채굴주(이름이 기억나지 않습니다)로부터 수만 냥의 은자를 내탕금으로 진상받고, 그 사례로 그에게 단천군수 직함을 하사했다는 기록을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납니다. 
아무튼 광무황제는 사사로이 쓸 수도 있는 내탕금을  개화를 위한  사회간접자본인  전기, 전차. 서울 도로확장공사 등에 투입한 것입니다.  저는 이 점도 높이 평가합니다. 
친시님의 질문에 답하다 보니,  글이 너무 길어졌습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자면,  대한제국과 광무황제의 실체를,
일제에 의해 조작되고 왜곡된 폄하의 너울을 벗겨내고 진실을 보자는 것입니다.

참고로 이 논쟁은 한국의 역사학계에서도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다고 하네요.  좀 더 구체적인 사료가 발굴되어야 한다나요. 허 참 !

  • 추천 4

팬교주님의 댓글의 댓글

팬교주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한겨레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쓰시는 글을 보며, 많이 배웠습니다.  제가 함부로, 허투루 글을 써대지 않았나 깊이 반성합니다.

한겨레님같은 어른이 많았으면, 우리나라가 더욱 좋은 나라가 되었을 것입니다.

  • 추천 3

한겨레님의 댓글의 댓글

한겨레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아 !  베리의 터주대감 격이신 펜교주님이시군요.  처음으로 인사를 드립니다.
그동안 베리에 올리신 많은 글들을  고맙다는 댓글도 없이 읽기만 했습니다.
본디 나대는 걸 싫어하는 내향적인 성격이어서....... 요즈음 들어 고희를 바라보는 인생의 언덕에 오르니,  요즘 젊은 분들이 알지 못하거나, 잘못 알고 있는 우리 겨레의 역사를 알려주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들어, 주제 넘은 글들을  베리에 올렸습니다만,  오히려 젊은 분들에게 불쾌감을 주는 것은 아닌지 ? 또는 활기를 꺾는 망령된 언사는 아닌지 저어되는 바가  많습니다.
제 글을 호의로 읽어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mucaoo님의 댓글의 댓글

mucaoo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한겨레님! 정말 멋지세요.
저는 독일에서 공부하고있는 유학생인데요
여기저기 베리의 가벼운 글들을 구경하다 우연찮게 들어왔는데
저로서는 일상적으로 자주 접하게 되는 내용은 아니었지만
마음으로 느껴지는 글이에요. 그리고 중요한 책을 읽으실때 필사를 하신다니!
그렇게 얻어진 깊이를 저로서는 상상하기도 힘드네요.
저도 앞으로 가볍지않게 살아야겠어요.
중요한 책들은 마음 깊이 세겨가면서 읽고 말이에요
그러다보면 저도 깊이있는 사람이 되어있겠지요?
좋은 교훈이 되었어요 감사합니다.

P.S.
그리고 이런 글들이 젊은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주지는 않을거에요.
어른들의 말씀에서 배울게 얼마나 많은데요.
항상 제가 얼마나 모자른지를 생각하면 "경거망동" 할수가 없어요 :)

제 부족한 표현력의 한계는 아직 여기까지인가 봅니다...ㅜㅠ
지금까지 너무 가볍게만 살았던거 같아요. 글은 써본지 너무 오래구요..
주제와는 벗어난 내용의 답글이었지만 한겨레님의 글들이 너무 감동이 되어서
적어보았어요 감사합니다!

친절한시선님의 댓글

친절한시선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http://db.itkc.or.kr/index.jsp?bizName=MS

이것이 제가 읽었다는 승정원일기입니다. 인터넷에 다 공개되어 있다는 힌트를 주신 덕에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제 질문에 대한 답변이라고 올려 주신 글들은 제가 취사선택해서 잘 읽어 보겠습니다. 좋은 정보를 발견했다 싶었을 때 저를 떠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동영상도 흥미롭게 잘 감상했습니다. 그럼 다음에도 저랑 같이 이야기 나누고 싶으실 땐 언제든지 불러 주십셔! 그 때에도 시간이 허락하는 한 제가 보일 수 있는 최선을 다 해 응해 드리겠습니다. (이번 처럼!)

지금 새벽 두시 사십분인데 퇴근해서 집에 들어 오니 벌써 새벽 한시가 넘었더군요. 와... 얼마나 추웠던지 손이 시려서 운전대를 붙잡지 못하겠더라고요. 손가락으로 걸어서 돌렸습니다. 씻고 정리하고 라면 하나 끓여 먹으면서 뭐 재밌는 것 없나~ 하고 둘러 보던 차에 한겨레님의 늘 반듯하고 정성스러운 글을 읽었습니다. 안녕히 주무시고, 혹시 제가 심기를 불편하게 해 드렸다면 그건 알아서 하십시오.^^. 저는 새벽 두시에 라면 끓여 먹은 것에 대한 속죄의 마음으로 조금 더 앉아서 소화를 시키고 잠자리에 들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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