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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모님 광해군(펌) 굿모님 노무현

페이지 정보

작성자 올빼미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조회 4,431회 작성일 10-08-16 10:59

본문

우리는 이순신을 신격화하고 원균을 죄악시 하는 우를 범한다.  역사속에 한인간으로써 삶을 제대로 반추하지 못하면 우리시대는 과거의 슬픈 역사를 다시 반복한다.   역사속에서 어떤 교훈을 얻어 다가오는 미래를 준비할것인가?  나를 버리고 역사속의 인물이 되어 결단의 순간에 서보자. 그의 한계를 인식하고 그를 느끼자 그 상황 그 처지에서 나는 무슨 결단을 내닐것인가?  그리고 우리는 비난에 앞서 그를 위로하자.  광해군은 당파싸움에 찌든 정부를 일신하고 자주적 외교로 부국을 꾀한 현군이었으나 부와 권력을 웅켜쥔 기득권자들에 의해 오명을 쓰고 죽어갔다.  그를 죽인댓가로 조선은 임진왜란보다 더 수모적인 병자호란을 격는다.   어떤 분들은 북한이 해폭탄을 보유하고 있다고도 한다. 핵폭탄이 없더라도 북한정예병력은 남한을 능가한다. 이런 시점에서 우리는 광해군처럼 노무현을 모욕적인 방법으로 보냈고 천안함 침몰을 계기로 위험한 전쟁연습 놀이를 하고 있다. 임진왜란보다 더 참담하게 청의 유린을 받았듯이 625보다도 더 처참한 동족상잔의 비극이 오지 않으리라 그 누가 장담하겠는가? 모든 전쟁과 싸움은 알량한 자존심의 경쟁에서 오지 않는가? 알량한 이데올로기의 자만과 자존심을 버리고 냉철한 이성으로 현실을 자각하고 열린 마음으로 북한을 한 국가로써 인정하자. 이것이 진정 남북간의 평화의 시발점이 될것이다.
열린마음과 인내로써 상대를 이해하고 서로의 장점을 인정해주는것은 비단 남북간의 문제뿐만이 아니라  야당과 여당 진보와 보수 좌익 보수 남녀노소의 편향된 시각을 좁히고 각개인간의 삶도 조화롭게 할것이다.  가장 가까운 내 아이 내 남편 내아내 부터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그들을 한 인격체로 인정해보자. 이것이 화목한 지구의 시발점이 되리라.

7년전에 쓴 이분은 김대중대통령을 지칭했지만 나는 노무현대통령이 마음에 다가 왔다.
http://www.hadream.com/zb40pl3/zboard.php?id=seoul&page=50&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198


굿모님 광해군                                작성자 산하  2003-2-15
나는 역사 속에서 광해군이라 불리워지는 사람이다. 조선 왕조 14대 임금 선조의 아들이요, 16대 임금 인조의 숙부이되 '祖'나 '宗'의 묘호를 얻지 못하고, 왕자때 이름 광해군으로서만 영원히 기억되는 불운한 왕이다. 폭군에 패륜아라는 오명을 쓴채 반정군에 의해 왕위에서 끌어내려졌기 때문이다.

나의 계모이자 아버지의 정실부인인 인목대비는 반정 후 폐위된 내 죄악을 조목조목 나열했다. 자잘한 것은 없는 것으로 넘기더라도 나의 죄악은 크게 세 가지였다.
  
폐모살제(廢母殺弟), 즉 나보다 아홉살 어리긴 하지만 엄연히 어머니뻘인 자기를 폐서인하고 자기 아버지를 죽였으며, 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인 패륜을 범했다는 것이고, 과도한 토목공사로 백성을 도탄에 빠뜨린 죄에, 결정적으로 명나라에 대한 사대의 예를 소홀히 하고 오랑캐 후금과 '밀통'하였다는 것이다.

폐모살제는 어쩔 수 없는 나의 허물이다. 당쟁의 와중에서 나는  나보다 아홉살 어린 어머니 인목대비를 폐위시켰고 그 아버지를 죽였다. 또 내가 지시한 일은 아니지만 아홉살 난 영창대군이 펄펄 끓는 방 안에서 쪄 죽임을 당했으니 실로 할 말이 있을 수 없도다. 그러나 이를 일컬어 패륜이라 할라치면 조선왕조 스물 일곱 임금 가운데 온전한 자가 누구랴. 내 후임자 인조만 해도 아들과 며느리 손자 셋까지 다 죽여 없앴는데.....  토목공사 건 역시 그렇다. 전란통에 궁궐도 관청도 모두 잿더미가 되어 버린 나라에서 국왕으로서 그렇게 못할 일이었을까.

 그랬다고 치고 넘어가자. 사실 가장 내가 왕위에서 쫓겨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세번째였다. "再造之恩(나라를 다시 만들어준 은혜)의 명나라를 배신하고 후금과 '밀통'하였다"는 것이다.

나는 임진왜란이 터진 직후 세자가 되었고 압록강 넘어 도망갈 궁리에 여념이 없던 아버지 선조를 대신하여 최전방을 누비면서 적군에 맞섰다. 그 전쟁의 막전과 막후를 어떤 조정의 신하보다도 더 상세히 알며, 우리를 '도우러 온' 명나라 군의 활약(?) 역시 그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아버지 선조는 북쪽을 감히 등지고 앉지도 않을만큼 명의 은혜에 감사했고 어떤 얼빠진 선비는 "중국인들은 우리 조선 인민의 아버지"라고까지 했다지만 그들은 결코 우리를 도와 주러 온 것이 아니었다. 자기네 땅에서 싸우기 싫었을 뿐이며 입술이 없어지면 이빨이 시리다는 그들 나름의 교훈을 따랐을 뿐이다. 그들은 벽제관 전투 이후에는 제대로 싸우지도 않았으며 실로 전투에는 무능하고 약탈에는 만능인 최악의 군대였다. 오죽하면 백성들이 왜군은 얼레빗이요 명군은 참빗이라고 했을까.

그들은 정작 우리 군대가 왜군을 공격하려들면 기를 쓰고 막았다. 한산도의 막강 수군은 임진년 이후 전투를 치르지 못했고 육지에서도 왜군을 공격했다는 이유로  유성룡 이원익 이하 고관들과 군 수뇌부가 명나라군의 일개장교 앞에 꿇어 엎드려 수모를 받은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역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는 기이한 주권의 양도”가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 말은 1950년 경인년, 이 땅에 온 美利堅(미국) 장수가 너희 나라 군대의 작전지휘권을 선사받고서 내뱉은 말이다마는......  

세월이 흘러 내가 왕위에 있던 1616년 여진족 누르하치가 후금을 세우고 왕을 칭했다. 나는 그를 잘 안다. 임진왜란 당시 우리에게 2만명의 구원병을 보내겠다고 거드름을 피우던 인물이다. 그 옛날 금나라 시절부터 "여진족이 1만이면 천하가 그를 감당할 수 없다"고 중국인들이 두려워해 마지않던 여진족이 드디어 통일 국가를 세운 것이다. 나는 직감했다. 저 무능하고 썩어빠진 명나라가 불길처럼 일어나는 신흥 후금의 철기병들을 감당할 수 없을 것임을.

 아니나다르랴, 1618년 후금의 누르하치는 명나라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우리가 임진년에 왜군한테 당한 것처럼 순식간에 만주지역을 상실해 버린 명나라는 우리에게 구원병을 청했다. '再造之恩'을 갚으라는 것이다. 너희 나라 왕이 압록강까지 쫓겨 왔을 때 그를 도와 나라를 회복한 것이 누구냐는 것이었다. "너희 나라의 자유를 위해 우리의 젊은이들이 피흘려 죽어간 것을 벌써 잊었느냐"는 것이었다. 후손들이여... 어디서 많이 들어본 소리같지 않느냐?   너희는 낙동강까지 쫓겨간 적이 있었다지.  

내 신하들, 그리고 재야의 말많은 선비들, 그리고 덩달아 백성들은 명나라에 대한 은혜를 뼈에 새기고들 있었다. "중국인들은 모두 우리 조선인들의 아버지"이며 "명나라의 은혜를 잊는 것은 짐승만도 못한 행위"라는 것이 나의 신민들의 상식이었으며 누가 여기에 딴지라도 걸 라치면 천하의 난신적자로 낙인찍히기 십상이었다. 임진왜란이 끝난지 20년 가까이 되었으되 그 숭명사대(崇明事大)의 벽은 굳건했고, 명나라 사신들이 와서 수만냥의 은을 긁어가도, 그들이 어떤 횡포를 부려도, 우리 신민들은 얌전했다. 내가 구원병 파견을 거절하고 있을 때 아마 철없는 유생들이나 머리 허연 권신들이나 이렇게 외치고 있었을 것이다.

 "하늘이여 우리 임금님의 마음을 돌려 명나라를 돕게 하옵소서."

후손들이여.. 너희들 역시 비슷한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덕수궁 앞 너른 터(너희들 말로 시청 앞 광장)에서 어느 야소교 목사가 외치는 소리가 저승까지 들렸느니..... 내 기억에 "부시 대통령의 마음을 돌려 미군 철수를 막게 하소서.."라고 했던가.  

나는 미칠 것 같았다.  7년 전란통에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고, 길바닥에 기어다니는 사람들이 풀을 씹어삼키다 푸른 물을 토하며 죽는 꼴을 지켜본 나였다.  그 참혹한 전쟁이 끝난지 20년도 채 안된 지금, ‘대의명분’과 ‘보은’을 위해 또 한 번의 전쟁에 휘말려야 한다는 말인가.  

"분노한 명나라가 우리를 버리면 어찌할 것이냐."  "후금이 지금보다 더 강성해지면 그때의 후환을 어찌 할 것이냐."  등등등등등 동서남북 당파를 막론하고 거의 모든 신하들이 나에게 구원병을 보내라고 아우성을 쳤다.  하다못해 나를 지지하여 왕위에 앉히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던 권신 이이첨마저 거기에 적극 찬동하고 나선 판이었으니 할 말이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외교적 해결책으로 명의 압력과 후금의 위협을 피하려고 기를 썼다.  뻔질나게 사신들을 명나라에 보내어 우리나라의 피폐함과 왜란의 상처를 이유로 군대를 일으킬 수 없음을 호소했고 심지어는 명나라에 “경솔하게 행동하지 말고 만전을 기하라”는 충고를 하려고까지 했다.  그러자 비변사에서는 난리가 났다.  “속국의 처지로 대국에 대해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은 말이 안된다”는 것이다.
아둔패기들이여, 사대에 눈 먼 장님들이여.  나쁜 피는 물려받기도 쉬운 법이려니, 너희들 대에도 그런 인간들은 있더구나.   갈라진 너희 나라의 반쪽과 명나라같은 대국 미국 사이를 ‘중재’해 보려는 이들에게 ‘건방지고 철없다’는 욕설을 내뱉는 자를 보았다.  이제는 혀를 차려해도 찰 혀가 없느니....

우여곡절 끝에 1만여 명의 명나라 구원병이 편성되었다.  1만명 하니 별 것 아닌 것 같으냐?   그것은 조선 전체의 장정들을 쥐어짠 병력이었다.  평안도 3천5백, 전라도 2천5백, 황해도, 충청도 각 2천 등 전국 각지의 생때같은 장정들이 압록강변 평안도 창성으로 모여들었다.  나는 이들이 “이미 패할 것을 알고 있었다” (광해군일기)  창을 제대로 쥘 줄도 모르는 어린 양 같은 군대를 피에 굶주린 철기 앞에 내몰면서 어찌 임금으로서의 자책이 없었겠느냐. 그 애꿎은 희생도 희생이려니와 그것이 빌미가 되어 임진왜란 이상가는 참화가 덮칠지 모르는 나라의 임금으로서 베개를 높이하고 잠을 이루었겠느냐.

구원군 도원수 강홍립을 불러 나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명나라군 장수들의 명령을 그대로 따르지 말고 신중하게 처신하여 오직 패하지 않는 전투가 되도록 하라.”  이 말을 두고도 피끓는 유생들은 “대의명분에 어긋나는 망발”이라고 펄펄 뛰었겠으나 나는 한 발 더 나아가 후금에까지 비밀리에 손을 댔다.  정확한 진상은 나만이 알고 있고 너희들 대에까지도 설이 분분한 이야기지만, 나는 후금과 통하고 있었다.  누대의 원수, 우리나라 북변을 승냥이처럼 위협하던 적국 후금과 나는 ‘밀통’할 수 밖에 없었다.    그 결과는 무엇이었냐고?  

명나라의 10만 대군이 전멸했던 사르허 전투에서 우리 군대는 후금군의 철기병에 완전히 포위되었다.  죽음을 각오한 시점에서 후금군이 먼저 우리에게 사신을 보내 항복을 권했다.  그들은 우리의 처지를 이해하고 있었다.  물론 그 이해는 내가 시킨 것이었다만.

강홍립의 항복이 알려지자, 조정은 벌집 쑤신 듯했다.  강홍립의 가족을 잡아 처벌하라는 상소가 빗발쳤고 또 한 번 군을 일으켜 후금을 치자는 주장도 목소리를 높였다.  “까짓거 전쟁 한 번 합시다”라고 너희 대의 국회의원이란 자도 기염을 토했다지.  나는 피를 토할 지경이었다.  입으로 전쟁을 하는 무리들, 그 입에 내둘려 마침내 전쟁이라도 터지면 누구보다도 압록강변으로, 지리산으로, 너희들 시대라면 미국으로 비행기 타고 도망갈 놈들이 아닌가.  저 놈들의 식솔들 중 군대에서 칼 잡고 있는 놈이 몇이나 된단 말인가.  너희 대나 나의 때에나 군대란 어둠의 자식들의 집단이었느니.....    

  
대의명분에 불타오르는 신하들은 후금 진영에 붙들린 강홍립이 비밀리에 보내온 밀서를 접수하는 것조차 “적과의 밀통”이라고 시비를 걸었다.  그들에게 강홍립은 적과 내통한 쳐죽일 놈이었고 그를 은근히 옹호하는 나는 제 구실을 못하는 군주였다.  마침내 나는 폭발했다.

“중원의 형세가 참으로 위태로우니 안으로는 자강을 꾀하고 밖으로는 고삐를 죄어 한결같이 하여야만 나라를 보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인심을 보면 안으로는 일을 분변치 못하면서 밖으로는 큰소리만 친다. 신하들이 하는 소리를 들으면 전부 압록강에 나아가 결전해야 한다는 것인데.... 참으로 가상하기는 하다. 그렇다면 무사들이 서쪽 변방 (후금과의 국경)을 죽을 곳으로 여겨 부임하지 않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는가?  생각이 한참 미치지 못하고 나오느니 헛소리 뿐이로다........... 우리나라 사람은 허풍으로 나라를 망칠 것이다.”
(광해군 13년 6월6일 광해군일기 중)

나의 생각은 점차 신하들에게 전달되어 갔다.  그러나 그들은 나의 충정을 이해하는 대신 내 발밑을 파기 시작했다.  폐모살제라는 빌미로 이미 패륜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쓴데다 “재조지은”을 잊은 배은망덕한 임금이라는 빌미가 덧붙여졌고, 이이첨 등 내 측신들인 대북파의 극에 달한 부패와 탐학은 그 빌미를 명분으로 축적해 주었다.   “서인이 이를 갈고, 남인이 비웃는” 정치고립 상황은 내 말년 내내 지속되었고 마침내 운명의 날, 1623년 3월 12일 내 조카 능양군을 내세운 반정군이 창덕궁을 들이쳤고 나의 경호대장인 훈련대장은 엎드려 그들을 맞았다.  나는 다시 왕자 때 이름 “광해군”으로 돌아왔다.  

그 이후 조선 후기 내내 나의 이름은 폭군과 혼군과 어두운 임금의 대명사였다.   각종 기록에서 폭군이라 함은 나보다 열배는 더 포악했던 연산이 아니라, 나를 일컬음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아버지를 대신하여 전선을 누비며 백성들을 묶어세웠던 왕세자 광해군의 활약, 완강하기 이를데없는 벼슬아치들과 기득권 상인들의 발악 섞인 반대를 무릅쓰고 경기도 일대에 대동법을 실시했던 나의 개혁 정책, 어떻게든 전쟁을 피하고 우리의 살길을 찾아보고자 노력했던 나의 외교적 노력은 역사의 쓰레기통 속으로 사라져 갔다.  

귀양갈 때, 나를 수행한 병졸들은 안방과 아랫목을 차지하고 나는 건넌방에서 재웠다.  심지어 계집종까지도 늙은 것,, 운운하며 욕을 보였고 아내는 목숨을 끊었고 아들은 땅굴을 파고 도망가다가 잡혀 죽었다.  며느리는 그 망을 보아 주다가 나무에서 떨어져 죽었다.  처참한 인생이여.........  

그러나 나는 일 점 후회는 없다. 나는 최선을 다하였으므로.  한 나라의 왕으로서 내가 책임진 억조창생의 안위를 위하여 사력을 다해 신하들과 싸웠고 명나라를 구슬렀고 후금의 철기병을 달랬다.  그래서 불구대천의 적과 ‘밀통’하기도 했고 그것이 “天理를 멸하고 인륜을 끊어 위로 명나라에 죄를 지었고 아래로 만백성에게 원한을 맺히게” 하였을지는 모르나 나는 그것이 조선의 평화와 재건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노력이었음을 믿는다.   어제.... 너희들의 首長 이라 할 대통령이라는 이를 지켜보면서 나는 깜짝 놀랐느니......   그 표정은 반정군에 의해 끌려나와 인목대비 앞에 꿇어 엎드렸던 순간의 나의 표정이었다.   말할 수 없는 답답함과 까닭 모를 후회, 그리고 나의 일은 끝났다는 담담함까지 어찌 그리도 똑같단 말이냐.   후손들이여 이제 너희에게 남은 일은 무엇일까.  

나를 단죄한 이들은 집권하자마자 사람을 보내 평안감사와 의주부윤을 죽였다.  그들은 나의 대 후금 “햇볕 정책”을 최전방에서 실행하던 충실한 관리들이었다.  그들이 죽었을 때 우리나라에 피신해 있던 명나라 장수 모문룡이 쾌재를 불렀다고 하니,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것이다.  바로 그 4년 뒤, 후금은 조선을 공격했고(정묘호란) 또 그 9년 뒤엔 13만 대군을 이끈 청 태종의 친정(병자호란)으로 내 후임자 인조는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이마를 짓찧어 이마가 피범벅이 되는 굴욕을 맛보고 말았다.   거기에 국토는 또 한 번 피와 살의 진장밭이 되었고...........

전쟁이라는 포성같은 단어가 그다지 멀지 않게 된 후손들이여, 깊이 생각하라.  과거의 은원과 대의명분을 가지고 오늘의 득실에 무게를 다는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권할 일이 아닐진대, 나라와 나라 사이의 일에서야 더 말해 무엇하랴.   물론 피할 수 없는 전쟁도 있다. 하지만 그 전쟁이 대체 누구를 위해 벌어지는 것이며, 그 전쟁이 어디에서 벌어지는 것인가는 반드시 생각하라.   그 질문에 명확한 대답을 한 연후에 전쟁을 이야기하라.  

나의 무덤은 경기도 남양주군의 어느 교회묘지 위에 나동그라져 있다.  내 형 임해군의 묘도 지척에 있어 그 후손들의 제사를 받지만 나는 그럴 후손도 없어 수백년 동안 제삿밥 얻어먹은 적조차 없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나는 내 할 일을 했던 것 뿐일지니.   역사와 너희 백성들의 평가가 어찌 이뤄지든 나는 당시의 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한 것이었을지니..... 그러나 그 최선을 다한노력이 무위로 돌아가는 것을 막지 못한 것조차 나의 책임이었을지니.....    나는 그렇게 담담히 돌아눕는다.  나의 잠을 깨운 시끄러운 소음에 대해 이렇게 한 마디 넋두리를 남기고.......


이상... 저승에서 광해군의 코멘트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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