캬! 하지 않을 말은 하지 않다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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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규형이름으로 검색 조회 5,940회 작성일 01-09-06 06:31본문
캬! 하지 않을 말은 하지 않다니… 이규형
조선일보를 보게 된 건 내 의사에 상관없이 내가 정자(精子)였던 시절에 이미 정해져 있었던 것 같다. 할아버지, 아버지가 조선일보를 보고 어머니 역시 매일 조선일보를 본 집안이다. 어렸을 땐 참 재미없는 신문이었다. 부모님이 이른 아침에 신문에 골몰해 있는 모습이 이해가 안됐다. 교과서보다 더 작고 빽빽한 글씨. 징그럽게 많은 한자. 사진이라 해 봤자 재미없는 흑백.
그런 신문을 내가 매일 보게 된 계기는 이렇다. 사춘기 때 난 호기심이 하늘처럼 뻗치는 소년이라 동네 ‘불량 악동 그룹’의 형들과 어울려 놀았다. 여긴 학교에선 맛 볼 수 없는 재미가 너무 그윽했다. 교복을 입은 채 담배를 뽁뽁 뿜으며 자기 혼자 40:1로 싸우다가 손가락을 다친 무용담을 펼치는 형들. 재미는 있었지만 실은 좋아하진 않았다. 우선 책이라곤 ‘꿀단지(!)‘같은 것 밖에 읽지 않아서 아주 무식하고 야구 방망이를 야구하는 데 쓰지 않고 다른 용도(?)에만 써서 무서웠기 때문.
어느 날 다른 동네 애들이랑 패싸움이 붙었는데 그 중 한 형이 가장 꼬맹이었던 날보고 외쳤다. “규형이 넌 빨리 집에 갓! XX얏!” 그 와중에도 나를 챙겨준 그에 대한 존경심이 일었다. 그 후 1년간 급속하게 그와 가까워지면서, 그보다 나이 많은 동네 선배, 양아치들까지도 모르는 게 있으면 다 그에게 묻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세상 돌아가는 것, 직장 얻는 문제부터 동시 개봉극장은 어디 가면 재미있는지…. 모든 것을 술술술술 답하는 그가 너무 부러웠다. 살벌하게 노느라 정신없는 그에게 어떻게 저런 재주가 있는지?
그 비결은 방학 어느 날 공터에서 풀렸다. 아침 햇살을 받으며 풀밭에 앉아 조간신문을 보고 있는 그의 모습. 그건 우리 집에도 매일 배달되던 조선일보였다. 공부라곤 전혀 안하는 그 형이 어떻게 저 한자투성이 신문을 읽는단 말인가? 물어보니 초등학생 때 그의 아버지가 말씀하셨단다. 학교는 안 가도 좋지만 신문은 읽어라. 그러면서 한자 공부를 억지로 시켰다는 것. 동네 다른 형들에겐 없는 박식함, 현명함, 그리고 정의감. 그건 결국 바로 신문 덕분이었다는 거다. 하필 그가 보는 신문이 조선일보였고 그날 이 후 나 역시 집의 조선일보를 매일 보는 소년이 되었다.
이제 30년이 지난 지금 난 조선일보에 ‘일본대중문화산책‘을 연재하고 있는데 내가 생각해도 이상한 게 하나 있다. 난 워낙 스포츠신문에 맞는 연재 작가로 깃발을 날렸던 탓에 종합 일간지 기자들은 내 글솜씨를 별 볼 일 없이 생각하는 듯 연재부탁을 한 적이 없는데, 유독 이 신문만 칼럼을 부탁할까. 어느 날 조선일보가 대중문화 칼럼을 연재하자고 했을 때 내 머릿속에서 번쩍 전구불이 켜졌다. ‘할 말은 하는 신문’. 캬! 조선일보가 역시 다른 신문들이 못 하는 말을 나에게 하는구나.
조선일보 문화부의 제안을 받고 나 역시 기뻤던 것은 내가 조선일보 문화기사의 애독자였기 때문이다. 일본에 10년 살면서 신문구독료가 한달 4천엔(4만원)이라 많은 신문을 못 읽는 금전적 사정도 있고, 또 이 신문이 각별히 재미있기도 해서다. 자연히 조선일보 문화부 기자들과 친해졌고 이 신문의 각별한 재미가 뭔지를 확실히 알았다. 기자들 중 뭔가에 미친 매니아들(일본말로는 오따꾸라 부르는)이 많다는 사실, 예를 들면 내 글 담당인 김명환씨 같은 경우는 총에 관한 한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아는 기자다.
도쿄 우리 집에 원고 독촉하느라 급하게 전화 거는 와중에도 내가 최근 총기사건에 관한 얘기를 꺼내면 한 시간이 짧다 하고 설명, 답변을 해가며 국제 전화비를 써댄다. 가만 보니 이런 식으로 조선일보 문화부엔 심한 중독증에 걸린 비디오 매니아, 애니메이션-만화 매니아, 일본음악 매니아, 음식 매니아, 자동차 및 명품매니아들이 줄줄이 진을 치고 있는 거였다. 기자가 안되었으면 비디오가게나 레코드점, 만화방을 해도 행복하게 잘 살 사람들이 매일 영화, 가요, 만화, 음식 이야기를 해대니 이것이 각별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 마니아들의 기사는 정보전달의 차원을 넘어 전문적 분석과 진짜로 좋아 미치겠다는 감정이 자연스레 녹아있고 그것이 독자에게 전달된다.
요즘 ‘안티 조선‘하는 이야기들이 나오지만 난 그냥 무감각하다. 직업상, 개인 취향상 난 어떤 신문의 정치면에도 관심이 없다. 내가 조선일보를 보는 이유는 단 하나 문화기사의 발군(拔群) 때문이다.
한가지, 조선일보에 대한 불만을 한 마디 하고 싶다. 난 연재작가도 됐고 해서 솔직히 조선일보에 기대가 컸었다. 아, 이젠 내가 책을 내면 문화부에서 내 책 얘기 팍팍 써 주겠구나 하는 기대. 헌데 웃기는 건 연재 이후 지난 1년간 단 한 줄의 서평도 써 준 일이 없다. 하도 열 받아서 담당에게 불만을 토로했다. 옛날에 내가 부탁을 안할 때엔 큼직하게 잘도 써주더니 정작 문화부란에 연재하고 나선 왜 본 체도 안 하는거요? 그 친구 웃으면서 답하는 말. “친한 거랑 기사가 되는 거랑은 틀리잖아요?” 분발하라는 얘기다! “하지 않을 말은 하지 않는 신문! ” 열 받지만 눈치 안보는 조선일보가 그래서 좋다.
(이규형 /영화감독)
<약 력>
▲1957년 서울 출생. ▲한양대 연극영화과 졸업. ▲자작소설 ‘블루 스케치’로 영화감독 데뷔. ▲영화 ‘청춘스케치’ 히트시킴. ‘어른들은 몰라요’ 등 책을 써 베스트셀러작가가 됨. 지난 10년간 일본에 머물며 일본 대중문화를 특유의 감각으로 파헤치며 일본문화 관련 저서 19종을 써냄. ▲2000년 1월부터 한-일 대중문화 교류를 내건 인터넷 기업 ‘서울도쿄’ 공동대표.
펌 http://www.chosun.com/w21data/html/news/200109/200109010025.html
유유자적: 정말 유치하다! [09/06-06:32]
규형아: 정신차려라 [09/07-09:32]
조선일보를 보게 된 건 내 의사에 상관없이 내가 정자(精子)였던 시절에 이미 정해져 있었던 것 같다. 할아버지, 아버지가 조선일보를 보고 어머니 역시 매일 조선일보를 본 집안이다. 어렸을 땐 참 재미없는 신문이었다. 부모님이 이른 아침에 신문에 골몰해 있는 모습이 이해가 안됐다. 교과서보다 더 작고 빽빽한 글씨. 징그럽게 많은 한자. 사진이라 해 봤자 재미없는 흑백.
그런 신문을 내가 매일 보게 된 계기는 이렇다. 사춘기 때 난 호기심이 하늘처럼 뻗치는 소년이라 동네 ‘불량 악동 그룹’의 형들과 어울려 놀았다. 여긴 학교에선 맛 볼 수 없는 재미가 너무 그윽했다. 교복을 입은 채 담배를 뽁뽁 뿜으며 자기 혼자 40:1로 싸우다가 손가락을 다친 무용담을 펼치는 형들. 재미는 있었지만 실은 좋아하진 않았다. 우선 책이라곤 ‘꿀단지(!)‘같은 것 밖에 읽지 않아서 아주 무식하고 야구 방망이를 야구하는 데 쓰지 않고 다른 용도(?)에만 써서 무서웠기 때문.
어느 날 다른 동네 애들이랑 패싸움이 붙었는데 그 중 한 형이 가장 꼬맹이었던 날보고 외쳤다. “규형이 넌 빨리 집에 갓! XX얏!” 그 와중에도 나를 챙겨준 그에 대한 존경심이 일었다. 그 후 1년간 급속하게 그와 가까워지면서, 그보다 나이 많은 동네 선배, 양아치들까지도 모르는 게 있으면 다 그에게 묻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세상 돌아가는 것, 직장 얻는 문제부터 동시 개봉극장은 어디 가면 재미있는지…. 모든 것을 술술술술 답하는 그가 너무 부러웠다. 살벌하게 노느라 정신없는 그에게 어떻게 저런 재주가 있는지?
그 비결은 방학 어느 날 공터에서 풀렸다. 아침 햇살을 받으며 풀밭에 앉아 조간신문을 보고 있는 그의 모습. 그건 우리 집에도 매일 배달되던 조선일보였다. 공부라곤 전혀 안하는 그 형이 어떻게 저 한자투성이 신문을 읽는단 말인가? 물어보니 초등학생 때 그의 아버지가 말씀하셨단다. 학교는 안 가도 좋지만 신문은 읽어라. 그러면서 한자 공부를 억지로 시켰다는 것. 동네 다른 형들에겐 없는 박식함, 현명함, 그리고 정의감. 그건 결국 바로 신문 덕분이었다는 거다. 하필 그가 보는 신문이 조선일보였고 그날 이 후 나 역시 집의 조선일보를 매일 보는 소년이 되었다.
이제 30년이 지난 지금 난 조선일보에 ‘일본대중문화산책‘을 연재하고 있는데 내가 생각해도 이상한 게 하나 있다. 난 워낙 스포츠신문에 맞는 연재 작가로 깃발을 날렸던 탓에 종합 일간지 기자들은 내 글솜씨를 별 볼 일 없이 생각하는 듯 연재부탁을 한 적이 없는데, 유독 이 신문만 칼럼을 부탁할까. 어느 날 조선일보가 대중문화 칼럼을 연재하자고 했을 때 내 머릿속에서 번쩍 전구불이 켜졌다. ‘할 말은 하는 신문’. 캬! 조선일보가 역시 다른 신문들이 못 하는 말을 나에게 하는구나.
조선일보 문화부의 제안을 받고 나 역시 기뻤던 것은 내가 조선일보 문화기사의 애독자였기 때문이다. 일본에 10년 살면서 신문구독료가 한달 4천엔(4만원)이라 많은 신문을 못 읽는 금전적 사정도 있고, 또 이 신문이 각별히 재미있기도 해서다. 자연히 조선일보 문화부 기자들과 친해졌고 이 신문의 각별한 재미가 뭔지를 확실히 알았다. 기자들 중 뭔가에 미친 매니아들(일본말로는 오따꾸라 부르는)이 많다는 사실, 예를 들면 내 글 담당인 김명환씨 같은 경우는 총에 관한 한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아는 기자다.
도쿄 우리 집에 원고 독촉하느라 급하게 전화 거는 와중에도 내가 최근 총기사건에 관한 얘기를 꺼내면 한 시간이 짧다 하고 설명, 답변을 해가며 국제 전화비를 써댄다. 가만 보니 이런 식으로 조선일보 문화부엔 심한 중독증에 걸린 비디오 매니아, 애니메이션-만화 매니아, 일본음악 매니아, 음식 매니아, 자동차 및 명품매니아들이 줄줄이 진을 치고 있는 거였다. 기자가 안되었으면 비디오가게나 레코드점, 만화방을 해도 행복하게 잘 살 사람들이 매일 영화, 가요, 만화, 음식 이야기를 해대니 이것이 각별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 마니아들의 기사는 정보전달의 차원을 넘어 전문적 분석과 진짜로 좋아 미치겠다는 감정이 자연스레 녹아있고 그것이 독자에게 전달된다.
요즘 ‘안티 조선‘하는 이야기들이 나오지만 난 그냥 무감각하다. 직업상, 개인 취향상 난 어떤 신문의 정치면에도 관심이 없다. 내가 조선일보를 보는 이유는 단 하나 문화기사의 발군(拔群) 때문이다.
한가지, 조선일보에 대한 불만을 한 마디 하고 싶다. 난 연재작가도 됐고 해서 솔직히 조선일보에 기대가 컸었다. 아, 이젠 내가 책을 내면 문화부에서 내 책 얘기 팍팍 써 주겠구나 하는 기대. 헌데 웃기는 건 연재 이후 지난 1년간 단 한 줄의 서평도 써 준 일이 없다. 하도 열 받아서 담당에게 불만을 토로했다. 옛날에 내가 부탁을 안할 때엔 큼직하게 잘도 써주더니 정작 문화부란에 연재하고 나선 왜 본 체도 안 하는거요? 그 친구 웃으면서 답하는 말. “친한 거랑 기사가 되는 거랑은 틀리잖아요?” 분발하라는 얘기다! “하지 않을 말은 하지 않는 신문! ” 열 받지만 눈치 안보는 조선일보가 그래서 좋다.
(이규형 /영화감독)
<약 력>
▲1957년 서울 출생. ▲한양대 연극영화과 졸업. ▲자작소설 ‘블루 스케치’로 영화감독 데뷔. ▲영화 ‘청춘스케치’ 히트시킴. ‘어른들은 몰라요’ 등 책을 써 베스트셀러작가가 됨. 지난 10년간 일본에 머물며 일본 대중문화를 특유의 감각으로 파헤치며 일본문화 관련 저서 19종을 써냄. ▲2000년 1월부터 한-일 대중문화 교류를 내건 인터넷 기업 ‘서울도쿄’ 공동대표.
펌 http://www.chosun.com/w21data/html/news/200109/200109010025.html
유유자적: 정말 유치하다! [09/06-06:32]
규형아: 정신차려라 [09/07-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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