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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분한 사랑 이야기

페이지 정보

작성자 나댜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3건 조회 3,779회 작성일 06-12-03 23:44

본문

사랑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반드시 풀고야 말겠다고 어는 젊은 날 술에 쩔어 중얼거렸었다. 물론 여기서 사랑이란 연애감정을 수반한 사랑을 얘기한다. 아마 이 때가 폭발할 것만 같이 감정이 끓어 넘쳤던 첫 사랑의 실패 이후였을 거다. 그래서 두 번째 사랑은 아무런 감정을 느낄 수 없는 여인과 사랑을 이루어보겠다 했었다.

사랑을 이야기할 때, 보수적인 교육환경에서 자라난 이들은 플라토닉러브를 얘기하곤 한다. 육욕을 경시하고 정신적 사랑만을 추구하는 것.
고대 그리스에선 다양한 사물과 변화무쌍한 현상 속에서 변하지 않는 근본적인 것을 찾으려했고, 피타고라스는 그것이 눈에 보이는 물질이 아닌 추상적인 것(수)이라고 했다. 고대 그리스 미술에 사물의 우연적이고 개별적 특성을 사상하고 불변적이고 일반적인 특징만을 추상한 기하학적 양식이 발달한 것도 그렇게 이해할 수 있다.
플라톤은 레테의 강으로 이데아의 세계와 감각의 세계를 완전히 분리했고, 이데아의 그림자(복사, 가상)에 불과한 이 세계의 모습을 감각적으로 복사(눈속임, 복제, 가상)한 예술을 천하게 여겼었다.

플라톤과 플라토닉러브가 실은 관계없다는 것이 현재 지론이지만, 서양역사의 암흑기로 이야기되곤 하는 중세에 육욕을 경시하고 정신적인 것만을 추구하는 플라토닉러브로 플라톤이 해석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플라톤은 감각의 세계가 아닌 이데아의 세계를 추구했으니까.

하지만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사랑이 성(SEX)를 거부할 수 있을까? 일단 내가 어린 아이도 아닌, 남자도 아닌, 매력적인 여인을 만났을 때 사랑을 하고자하는 욕망이 생긴다는 것, 바로 이성애자라는 것이 이미 성(sex)에서 출발되었음을 얘기한다. 헌데 그렇게 시작해서는 곧바로 성(SEX)을 거부한다는 것은 사랑의 역설이 아니겠는가? 또 그렇다 하여 정신적, 정서적 교감은 내팽긴 채 육체의 교미가 던져주는 짜릿한 쾌감만을 좇는 모습은 대단히 동물적이어 보인다.

사랑은 정신과 육신을 다 포함한 혹은 그 중간의 어디쯤에 위치한 것인지도 모른다. 여기서 나는 ‘직관’이란 개념을 떠올린다. 직관이 바로 정신과 감각 사이에 위치한 것이다. 어떤 조각가는 원하는 형상을 돌을 깨서 만드는 게 아니라 돌 속에 숨어 들어있는 형상을 이끌어낸다고 얘기한다. 돌 속에 숨어있는 형상을 보는 것과 같은 예술가적 능력을 직관이라고 한다.
우리 여기서 사랑을 이 직관과 예술로 연결을 시켜보자. 물론 엄청난 무리가 있다. 억지라 해도 난 할말이 없다. 하지만 해보자. 왜? 나 오늘 무지 심심하거든;;

어떤 학자들은 보통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지는 데에는 단 몇 초 걸리지 않는다고 한다. 무의식 속에서라도 그 사랑의 번개는 이미 강타하여 수습하기 힘든 화재가 발생했다는 얘기다. 동공은 확대되고 혈색이 돌며 사고는 긍정적이 되며... 물론 인류학자들은 이런 모든 변화의 특징들을 성과 관련하여 설명한다. 다른 영장류들과의 공통점을 뽑아내고 하여 그 모든 것을 종족번식의 본능으로 설명한다. 책을 읽으면서 고개를 끄덕이며 ‘아하~’하는 감탄을 터뜨리곤 하지만 책을 다 읽고 사랑에 빠져보면 그 모든 이론은 휴지조각 되어있다. ‘목숨까지 걸 이 아름다운 사랑이 뭐 어쩌구 저쩌구라?’

그 매력적인 목소리 때문만도 아니고, 그 매력적인 눈동자나 입술 혹은 몸의 움직임 때문도 아니다. 어느 누구도 보지 못하는 그 영혼의 울림에 젖어들었다고 밖엔 설명이 안 되는 것이다. 수학과 도형과 같은 논리적 관념적 영역도 아니며 목소리나 생김새만을 얘기하는 감각적인 것만도 아니다. 그렇다고 감각적 세계를 부정할 수도 없다.
사랑은 감각의 세계를 통하여 영혼의 직관이 지어내는 아름다운 울림이다, 인간이 직관을 통해 이루는 생의 예술활동이다. (크~ 워매.. 여기 소주 한 병 주소.)


중세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플로티노스는 이데아와 감각의 세계를 단절된 두 세계가 아닌 서서히 번져가는 빛의 유출로 연결한다.
태초에 선이자 미 그 자체인 일자가 있었고 그곳에서 빛이 흘러나와 정신(nous)이 된다. 이 정신이란 우리의 정신이 아닌 플라톤의 이데아 같은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다시 빛이 흘러나와 영혼(psyche)이 되는데 이 또한 우리의 영혼이 아니라 거대한 세계령 같은 거다. 영혼은 정신세계(누스)를 본따 우리가 보는 자연(physis)을 만들어낸다. 영혼은 이 자연 속에 들어가 식물이 되고 동물이 되고 인간이 된다.
감각적 자연에 묶인 우리의 영혼은 물질의 껍질을 벗어버리고 근원적 일자로 돌아가기를 열망한다. 어둠 속에서 우리를 밝은 곳으로 이끄는 게 바로 에로스, 아름다움에 대한 갈망이다. 자연 속엔 희미하게나마 일자의 빛이 비치고 그래서 자연은 아름답다. 에로스의 충동에 따라 우리의 영혼은 감각적 세계의 아름다움에서 점점 더 높은 정신세계의 아름다움을 보는 데로 올라간다.
고대 미학은 아름다움은 수적 비례로 이루어져있다고 믿었지만, 플로티노스는 미는 균제(부분들 사이의 수적 관계)가 아닌 질적 성질이라 한다. 빛과 같이 비례나 균제 따위의 부분을 갖지 않는 것 말이다.(빛의 상징주의) 따라서 예술가는 창작을 눈에 보이는 대상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가의 영혼이 정신세계 속의 영혼을 보고 그것에 따라 창작한다. 원래 정신세계에 있었던 것을 예술가의 영혼이 직관한 것이다.
플라톤이 예술을 이데아-감각의 세계 다음으로 놓았다면 플로티노스는 예술을 감각세계와 일자(이데아?) 사이에 놓았다.

플로티노스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중세의 기독교와 플라톤주의가 융합되는 데엔 플로티노스의 신플라톤주의가 역할을 한다. ‘일자.정신.영혼’은 ‘성부. 성자. 성령’... ‘일자의 빛’은 ‘신의 빛’... ‘영혼의 정화’는 ‘영혼의 구원’으로......


플라토닉러브라는 정신적 사랑을 추구하는 이들도 결국에는 질투와 시기와 사소한 일들도 감정싸움을 하고는 괴로워한다, 육신을 담은 시공간 안에서의 발생된 사건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또 괴로워한다. 사랑은 도대체 무엇인가?
플라톤은 예술이 가상을 포기해야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이 가상을 통해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다고 한다.
아무래도 난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고개가 끄덕여지지만, 어쨌든 개인의 지난한 사랑의 역사도 이 사이에서의 싸움일지도 모른다. 현실의 세계와 그 밖의 세계, 육체(감각)의 세계와 정신의 세계, 그 사이에서의 무엇들.




연애를 하다보면 결국 우리가 최초에 던졌던 ‘사랑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불변의 진리, 단하나의 진리가 정말 존재하느냐의 질문임을 깨닫는다. 게다가 나이가 들어 결혼을 생각하기 시작하면, 부모님이 관계에 개입하기도 하고, 상대의 집안과 내 집안이 비교되기도 하며, 상대방의 현실적 능력을 고려하기도 하고... 결혼이 사회제도 안으로 들어감을 뜻하듯이 모든 것은 실제적 삶과 사회적 관계로 연결되는 유물론이 된다.

맑스의 유물론이 ‘존재하는 것은 물질밖에 없다’ 내지는 ‘물질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 같은 주장은 아니다. 모든 개념이나 지식의 근거이면서 기준이 되는 것은 대상의 물질성이며, 그에 기초할 때만 지식은 객관성을 가질 수 있다, 즉 물질적 대상에 근거하여 지속적으로 스스로를 고쳐가는 지식만이 진리가 될 자격이 있는 거다. 이런 뜻에서 물질이 바로 진리의 기준이다.
그리고 어떤 대상의 판단은 판단하는 사람의 상황과 맥락에 따라서 결정된다는 것이다. 이제껏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던 나의 사소한 행동이나 습관이 어느 날 갑자기 사랑하는 이의 가슴을 아프게 하기도 하지 않은가. 이는 모든 대상이 단 하나의 의미나 측면을 갖는 게 아니라 매우 다양한 측면을 갖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대상을 하나의 개념으로 고정하거나 하나의 개념을 하나의 의미 속에 가둘 순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리는 오직 하나다’라는 말이 대상은 오직 하나의 의미나 개념을 갖는다, 라는 뜻이라면 틀린 것이다. 대상은 끊임없는 변화 속에서 풍부하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랑이란 것도 하나의 진리, 일의적 본질로 규정하고 가둘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관계와 실천 속에서 늘 새롭게 파생되는 문제를 통해 깨달아 나가는 지난한 과정이지 않을까? 특히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는 삶에 오르면...... (더 이상 얘기할 입장이 안 된다.)



벤야민의 언어에 대한 이야기다. (*이 부분은 책 ‘현대미학 강의’[진중권]를 그대로 옮겼습니다)
성서에 따르면 신은 ‘말’로 세상을 창조하셨다.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창세기 1:3) 그래서 그때만 해도 자연은 제 몸 안에 언어적 본질을 구현하고 있었고 소리 없는 자연도 그 언어적 본질에 힘입어 인간과 소통을 할 수가 있었다. ‘언어’는 인간만의 전유물이 아니었고 모든 사물이 언어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인간의 언어는 특별한 지위를 갖는다.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바가 곧 그 이름이라” (창세기 2:19) 이렇게 인간의 이름은 이름하는 언어Namensprache 이다. 신은 말함으로서 세상을 지으시고 인간은 이름함으로써 신의 창조를 계속한다. 신이 창조하신 사물 속에서 ‘언어적 본질’을 발견하여 그것을 ‘이름’한다. 소리 없는 사물의 ‘언어적 본질’을 인간의 음성으로 ‘번역’한다.

이 번역은 '인식’이다. 하지만 논증적 인식이 아니다. 이름을 들으면 그 사물의 정신적 본질이 저절로 알려지는 그런 직관적 인식이다. 대상적 인식도 아니다. 그때 인간은 아직 주체가 아니었고 자연은 아직 객체가 아니었다. 자연이 대상으로 정립되는 것은 인간과 자연을 묶어주던 근원적 언어의 끈이 풀어진 이후의 일이다. 아담의 언어에서 ‘명명된 것’(주어)과 ‘인식된 것’(술어)은 직접적으로 일치하기에, 그 인식은 주어와 술어로 나누어지지 않는다. 이름하기의 인식은 선술어적 인식이다.

신이 인간을 자연의 주인으로 드높였을 때, 이는 결코 제멋대로 자연을 소비하라는 뜻이 아니었다. 신이 사물 속에 담아놓은 언어를 보존하는 관리자가 되라는 뜻이었다.

창조를 마치신 후 신은 제 작품을 평가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창세기 1:4) 뱀은 아담에게 바로 이 능력, 즉 좋고 나쁨을 ‘판단’하는 신적 인식을 약속했다. 결과는?
축복받은 언어정신의 타락은 세 가지 결과를 낳았다. 먼저 언어가 한갓 자의적 기호로, 한갓 전달 수단으로 전락한다.
둘째, 사물에 관한 직관적 인식 대신 판단의 마술이 발생한다.
셋째, ‘추상’이란 것이 언어에 도입된다. 그 결과는 참담했다. 추상적 개념은 개별자들의 고유명사를 사정없이 지워버린다.

‘아담의 언어’의 타락은 판단을 위해 고유명사를 지우고, 개별자들을 획일적인 개념의 감옥에 집어넣었다. 개별자들의 고유성은 무시되고, 인간이 추상적 판단에 의존할수록 개별자의 고유성을 보는 ‘직관’의 능력도 사라진다. 이제 인간은 개념으로 사물을 보고 타락한 언어는 사물의 정신적 본질, 그것의 언어적 본질을 부정한다. 과거에 자연은 목소리가 없어도 인간과 소통할 수 있었지만, 자신의 언어적 본질을 부정당한 자연은 글자 그대로 침묵하게 된다.

역사는 타락으로부터 시작되었지만 이를 ‘상실’이란 결정태로 볼 필요는 없다. 어떤 면에서 그것은 진정한 언어의 상실이 아니라 그 언어가 현시되는 양상의 변화이기 때문이다. 타락 이후 근원적 언어는 직접 나타나지 않고 수많은 바벨의 언어들 속에 제 흔적을 흩어놓는다. 때문에 하나의 사물을 가리키는 낱말을 다른 언어의 역어들과 함께 모아놓으면, 그것들 사이에서 불현듯 그 말의 근원적 의미가 떠오른다.

벤야민은 타락 이후에도 아담의 언어의 흔적이 남아있다고 한다. 가령 ‘조각의 언어, 회화의 언어, 시의 언어’에 말이다.



소위 포스트 모더니즘의 해체주의가 벤야민의 사상과 구별되는 부분이, 벤야민은 현전에 대한 신학적 열망(모든 사고가 추구하는 궁극적 진리를 은밀하게 담고 있는 진리의 언어에 대한 열망)이 존재한다면 해체주의는 이런 현전의 불가능성을 확인하는 세속성에서 출발한다는 점이다. 해체주의는 ‘궁극적 진리’를 인정하지 않고, 기표들의 놀이로 초월적 기의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오직 기표들의 놀이, 그것들의 차이, 연기, 산포의 유희뿐이리라.


글의 초반에 사랑을 직관의 자리에 억지로 끼워 맞춰놨으니 벤야민과 해체주의 이야기에 사랑을 대입시키는 억지도 어렵진 않을 거다. 그 길고 지난한 개인의 사랑 역사 속에 흩어져있는 사랑의 다양한 모습과 의미들이 얼기설기 모여 어렴풋이 사랑의 근원적 의미가 떠오르는가, 아니면 오직 차이의 놀이들만이 산재하는가? 당신의 사랑은 어떤 모습인가?











*참고 서적: 미학오디세이/현대미학 강의 (진중권), 철학의 모험(이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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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Blackmarket님의 댓글

Blackmarket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저기 나댜님 저 학교가기 3분 전인데 길어서 다 못 읽었습니다..

그래도 나댜님이 요즘 사랑을 하고싶다는 사실 하나만은 알겠습니다.

365happy님의 댓글의 댓글

365happy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갈수록 Blackmarket 의 댓글이 매력적입니다. emoticon_113
역시 때묻지 않은 청년은 다른 것은 고스라니 다 걸러 내고 알맹이만 봅니다. emoticon_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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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전을 배울때 늘 지적받던 일이 생각납니다.
emoticon_049 지금 뭐하는 겁니까?
emoticon_050 음, 지금은 어떻게 해야는 건지 생각하고 있었어요 ...
emoticon_049 그냥가세요!! 생각하지 말고!!

감각으로 해내어야 할 때 조차 내 머리는 뭔가를 잔뜩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차가 가다가 속도가 늦어진다든지 멈추는 것이다.

사랑도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대로 해서 되는 것 없고, 처음이 끝과 같지 않고 ... 늘 그렇게 움직이는 것이다.
어떤 변화에도 능동적 적응이 가능한 사랑만이 끝까지 남을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Blackmarket님의 댓글의 댓글

Blackmarket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매력적이라..솔직하게 적었습니다만...

운전할때 그냥 생각하지말고 가라! 라니..

그러다 사고나기 쉽상일것 같은데..

실상은 그렇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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