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살 트라우마와의 마주침 /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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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펌돌이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4건 조회 2,838회 작성일 06-04-22 03:44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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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4/13/18:00 신촌 아트레온1관
9살 트라우마와의 마주침
가끔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나의 기억은 사실일까?"
난 어린시절을 떠올릴 때마다 좋은 기억, 그리운 기억만 떠오른다. 나의 어머니 아버지에 대한 기억 역시 마찬가지다. 애틋하고 따뜻하고 정겨운 기억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지 않나 싶다. 아니, 적어도 그런 척은 하는 것 같다. 어린시절을 아름답게 추억하는 것, 그것은 기억의 사실여부와 상관 없이 어른이 된 현재의 고통을 피하기 위한 의식적 · 무의식적 방어기제인 것 같다.
이 영화는 9살의 상처와 대면하는 스무살 남짓 한 여자의 이야기다.
그녀는 사우디에서 일한다고 믿는, 그러나 실재로는 존재하지 않는 아버지와 할머니 아래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그녀의 어린시절 기억엔 두 사람이 존재한다. 담임선생님과 미자언니.
담임선생님은 늘 인형선물로 존재를 확인하는(실은 속이는) 아버지의 빈 자리를 메우는 존재다. 아버지의 휴대용 카세트 플레이어에서 언제나 흘러나오던 산울림의 노래를 멋드러지게 부르는 자상한 아버지이기도 하고, 받아쓰기에서 늘 나머지공부를 해야 했던 그녀에게 '참 잘했어요' 도장을 꽝꽝, 찍어주던, 그녀를 평가하던 유일한 존재이기도 하다.
미자언니는 같은 반 친구이지만 나이는 한참 언니인 발달장애를 가진 동네 언니다. 언제나 인형을 업고 다니고 아무때나 오줌을 싸서 다른 친구들에게 놀림을 당하지만 그녀에게는 더없이 착한 혈육같은 존재. 어쩌면 그녀는 엄마의 빈 자리를 미자언니에게서 찾았는지도 모른다.
9살의 어느 날, 그녀에게 아버지 같던 선생님이 그녀에게 어머니 같던 미자언니를 강간하는 끔찍한 장면을 목격한다. 그러나 9살 그녀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그저 울기만 한다.
9살 이후 그녀는 성장이 멈춰 버렸다. 몸은 훌쩍 커버렸지만 마음은 여전히 9살 끔찍했던 그날로부터 꼼짝도 못하고 있다. 직장에서 남자상사가 은근슬쩍 엉덩이를 더듬어도, 그녀는 9살 그때처럼 여전히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
유일한 혈육이었던 할머니가 죽고, 그녀는 9살과의 이별을 시도한다. 존재하지 않는 아버지의 선물 인형들과 하도 들어서 테이프가 늘어날 지경이 됐을 산울림 노래가 담긴 휴대용 카세트 플레이어를 내다 버리며 9살 상처와 이젠 안녕을 고했을 때….
그때 9살의 그녀가 찾아온다. 아무 말도 안 했지만 9살 그녀는 스무살 그녀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넌 여전히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울기만 하잖아. 그러고도 나와 이별할 수 있을 것 같아?" 이어서 나이 든 모습의, 그러나 여전히 사람들로부터 놀림을 당하고 있는 미자언니도 찾아온다. 그녀는 9살 때와 똑같이 미자언니에게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
9살 자신과 만난 뒤, 미자언니를 또 그렇게 버려둔 뒤, 결심한 듯 그녀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하던 9살 그때와는 다르게 돌을 집어든다. 그러나, 그 돌은 엄한 곳으로 떨어진다. 아, 9살 끔찍한 상처와의 결별은 여전히 불가능한 일인가!
서울여성영화제 폐막제 때 관객상을 받은 작품이다. 나 역시 '참! 잘했어요'에 한 표를 던졌다.
한국영화아카데미 졸업작품이고 이것저것 지원도 많이 받아서 애니메이션 효과나 촬영기법에서 아마추어 냄새를 찾을 수 없는 깔끔한 작품이다. 감독이 심리학 전공자라더니만, 상처에 대한 미세한 관찰이 돋보이는 영화이기도 하다.
상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나는 자신 있게 '상처를 회피하지 말고 똑바로 대면해라'라고 이야기하곤 했다. 그러나 과연 상처와 똑바로 마주한다고 해서 그 상처는 극복될 수 있을까?
이 영화를 떠올리면 아직도 명치께가 찌릿찌릿 저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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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2
댓글목록
가이아님의 댓글
가이아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좋은 영화 소개 감사드립니다.
펌돌이님 힘내시구요~
더 많은 글 기대해도 되나요?emoticon_002
betrunkener Kobold님의 댓글
betrunkener Ko…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펌돌이님!
저도 좋은 영화소개 감사드려요.
우리 다 잊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거지요?emoticon_114
펌돌이님의 댓글
펌돌이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아~~ 너무하시네 정말... 추천 한 방 없이. emoticon_017
이 글은 여성주의 카페에서 알게 된 마법사님 글임다. 뭐 추천은 사실 중요치 않다는,, 크흠.
이 글을 읽다가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별 생각 없이 내뱉은 말들이 누군가의 트라우마를 건드렸을 거란..
아, 그리구요, 제가 아무리 날 뛰어도 사과주스님 빈 자리는 못 채웁니다..
betrunkener Kobold님의 댓글의 댓글
betrunkener Ko…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추천! 죄송.....
제가 이런 모임엔 한번도 참여 한 적이 없어서요.
이번일도 새내기라는 이유로 일단은 함구하기로 했지만
너무 너무 속상하고 화가납니다.
그리고 상처받으셨을 사과주스님이 걱정되고 벌써 그립습니다.emoticon_008emoticon_008emoticon_018emoticon_018emoticon_008emoticon_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