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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나는 아무 것도 대답하지 못한다

페이지 정보

작성자 Tonioslust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2건 조회 3,326회 작성일 02-08-06 22:43

본문

독일문화원에서 집에 가기 위해서는 일단 건너편 남산 도서관에서 버스를 잡아타고 시청역에 내려야 한다. 나는 단 한번도 이 같은 행로에 변화를 주지 않았는데, 어느 날엔 가 문득 시청역까지 한번 걸어가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직장인이 유일하게 들을 수 있는 문화원 저녁 반 수업을 끝내고, 그날 만큼은 길을 건너지 않고 곧장 걸어내려 갔다. 그런데 어느 정도 걸어 가니, 주위가 환한 빛을 발하는 것이었다. 한쪽으로 치우쳐 있던 낮은 구멍가게며, 몇 개의 여관들을 지나치니, 이런 높은 것들 대신 길 왼편에 기다란 난간을 하나가 나타나더라. 이제 길은 답답함을 제쳐두고 뻥 뚫린 공간을 가져 다 주는 것이었다. 그 아래 저만치 낮은 곳에는 또 다른 마을이 자리잡고 있었다. 어둑한 여정 도중에 난데 없이 눈 앞으로 떨어진 그 밝은 광경이란, 알록달록 근사한 불빛들이 제법 밤 풍경을 꾸미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다 나는 난간의 오른 쪽 끝이 어느 곳인가를 알아차리고는 멈칫 하였다. 누군가 이 자리에 나와 함께 있다가, 정말 아름답지 않으냐고 내게 묻는다 라면…. 나는 무어라 대답할 수 있을까. 아마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얼버무렸을 것이다. 왜냐하면 누구나 아름답다는 것을 의심치 않은 이 멋드러진 광경을 자아내는 마을의 한 구석 어딘가에는 내가 알고 있는 누군가가 살고 있었고, 그가 살고 있는 곳은 1평 남짓한 자그마한 쪽 방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흑백 사진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가파른 계단으로 덮인 골목을 헤집고 다니는 것이 나의 일이었다. 새 천년이라는 미래적인 현재가 시간의 흐름을 같이 하고있는 요즈음에도 소위 달동네라고 불리 울만한 마을들이 서울 구석구석에 박혀져 있는 것이다. 결코 단정치 못한 집들. 그 키는 매우 작지만, 그것들이 한데 모여있는 모습을 보면 서울 저 높은 곳에 우뚝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대충 시멘트를 굵직하게 펴 바른 단 높은 계단들. 실로 그 동네의 몇몇 집들은 아직까지도 연탄을 달궈야만 겨울에 시린 손을 조금이나마 녹일 수 있었던 사람들이 살고 있는 것이다. 연탄 가득한 지게를 짊어지고 가는 이는 보지 못했지만, 연탄 집게로 연탄 하나를 찔러 넣는 할머니는 만난 적이 있었으니까.
그런 골목길에 대문을 두고 있는 집들을 하루에도 몇 번이고 찾아 다녔었다. 만났던 사람들 중에서는 다행이 그 집만은 자신의 몫으로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얼마 안 되는 생활비로 그 허름한 방구석에 하룻밤이라도 더 잠을 청하기 위해 월세를 지불하는 셋방살이 꾼들도 있었다. 그들 모두가 나를 반갑게 맞이하여 준 것은 아니다. 수고한다며 바카스 한 병을 억지로 제 목구멍에 넣어주는 이가 있는가 하면, 짜증스럽다며 등만 보여준 사람도 있었으니 말이다. 간혹 너무나도 병약하여 자신을 찾는 사람에게 첫인상조차 제대로 심어줄 수 없었던 이도 있었다. 그들은 스스로의 몸을 이끌고 현관문까지도 나올 수 없기에 문은 항상 열려있었는데, 그 대문의 생김새가 너무나도 초라하여 자물쇠따위는 처음부터 필요 없었을 것이라고 여겨질 정도였다.
나는 내 일이 하나도 즐겁지 않았다. 하루가 기쁘지 않았다. 평소에 자주 드나드는 좁은 길이 아닌, 보다 넓고 편안한 길을 걷고 싶은 욕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정방문 때마다 등 뒤에 흐르는 땀이 얄미웠다. 동료들은 <공동선>이라는 가치를 내세워 나를 위로하고 달래도 보았으나, 삶의 변화를 꾀하려는 나를 막을 순 없었다. 결국 나는 도망치고 말았다. 비가 오는 날엔 우산조차 받쳐 들 수 없을 만큼의 좁은 골목길 안에서, 비를 피하기 위해 힘껏 달려간 것처럼 말이다….
나의 바람은 실현되었고, 그리하여 변화된 자신을 맞이할 수 있었다. 그 무슨 노력의 대가였는지는 모르지만, 단번에 몇 층인지 알기 힘들만큼 높은 빌딩의 18층 그 어딘가에 나의 책상이 생긴 것이다. 달동네에서부터 달려온 나는 또 다시 그만큼 높은 곳에 올라오게 된 셈인 것이다. 그곳에서 창 밖을 내려다 보면 마주한 건물의 창문들로 어지럽다. 그것들은 태양의 빛을 받아 번쩍거리기만 할 뿐 그 구실을 다하고 있는지가 의문일 정도다. 그리하여 그것은 안을 드러내어주기 보다는 마냥 감추는 듯 보이는 것이다. 나의 진실은 보여주지 않고 가리는 모양새. 널따란 도로면에 자리잡고 있긴 하지만, 제가 지금 있는 이 곳은 두 다리 쭉 뻗을 만큼의 넉넉함은 없는 것 같다.
형편없는 삶이나마 이어가겠다고 바둥바둥 살던 그 골목길 주민들이 왜 그렇게 미웠는지. 나의 어리석음이 이제야 모습을 드러내나 보다. 실은 내가 사는 모습이 그렇게 역겨웠던 것이다. 쓸데없이 바둥댔던 이는 알고 보면 나 자신이었으니 말이다. 그리하여 끈끈한 인정이란 것은 자신을 떠나가도록 내버려두고, 각박하고 간악한 인간들 틈새에서 어쩔 수 없이 시간을 흘러보내게 된 것이다. 여유보다는 민첩함, 칭찬보다는 날카로운 비판을 존중하는 사회에 빠지게 된 것이다.

새삼 머리 속에 떠오르는구나. 단 한 칸 방이 이루고 있는 주소와 전화번호, 찾기 쉽도록 하기 위해 적어 두었던 약도 속 필체들, 또한 그 안에 적힌 구멍가게 이름들, 그리고 쪽방의 내부구조.
나는 잊을 수가 없다. 그리하여 그날 밤 누구나 감탄할 그 밤 속 불빛들에 대해서도 나는 과감히 아름답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이다. 어떻게 함부로 지껄일 수 있겠는가. 화려한 전광판과 달빛보다 달콤한 가로등 불빛 사이에 들어선 작은 건물의 수십 개 쪽 방 안의 인생이 결코 아름다운 것은 아닌데. 나는 보았었다. 하루 더 그곳에서 잠을 청하기 위해 꼬깃꼬깃해진 초록색 지폐 몇 장을 겨우 뒤 주머니에서 꺼내어 주인에게 내미는 모습을. 그것을 아름답다고 할 수 있겠는가. 당연시 되는 것은 이 세상에 그렇게 많지 않다. 한 번 더 의심 해보고, 답을 얻어내어야 하는 것이다. 만일 누군가 내게 묻는다면, 나는 아무 것도 말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확신하고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추천3

댓글목록

구르는돌님의 댓글

구르는돌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며칠 동안 어색한 칼럼 분위기 때문에 가려졌던 글을 다시 읽고 있습니다. 그런데 반푼수님 너무 애절한 시군요,,, 저 강처럼 저도 반푼수님의 마음을 알아드릴 수 있다면 약간의 위로라도 할텐데 안타깝습니다. 오늘은 님의 시를 읽고 잠시나마 강물이 되어 드리고 싶습니다. ^^

반푼수님의 댓글

반푼수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구르는돌님! 반갑습니다. 어설픈 글 읽어주시고 따뜻한 마음까지 보내주시는 님께 감사드립니다. 님의 글 "쪼코파이와 커피한잔"을  감명깊게 읽고 댓글을 썼었는데 제 기술 부족으로 날라가고 말았어요. 두고 두고 읽고 싶은 글입니다. 아름다운 추억속에  키피보다 달고 향기로운 님의 따스한 인간애가 흠뻑 배어있군요. 앞으로 좋은 글 많이 올려주세요.  편안하신 밤이 되시기 빕니다.  반푼수 드림.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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