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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참히 학살된 300,000의 목숨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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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오마이뉴스이름으로 검색 조회 4,886회 작성일 01-05-07 22:13

본문

무참히 학살된 300,000의 목숨들
보도연맹 '악마의 시대' 다시보다
MBC <이제는 말할수 있다> 이채훈팀장 제작후기

이채훈 기자 ych1013@dreamwiz.com

제1편 '보도연맹Ⅰ - 잊혀진 대학살'
(방송 : 4월 27일 금 저녁 9시 55분)
제2편 '보도연맹 Ⅱ - 산 자와 죽은 자
(방송 : 5월 4일 금 저녁 9시 55분)

"1949년 6월, 대한민국 정부는 '좌익인사'들을 전향시켜 국민보도연맹이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전쟁 초기, 30만 연맹원 대다수는 대한민국 군경에 의해 무참히 학살됐다. 하지만 지난 50년, 그들의 죽음을 아무도 이야기할 수 없었다."


1. 전설과 역사 사이에서

2001 <이제는 말할 수 있다>의 첫 편 '보도연맹Ⅰ - 잊혀진 대학살'은 이 자막으로 시작했다. 기억조차 힘든 50년 전, 조금만 더 세월이 지나면 아예 전설 속으로 사라져 버릴 것 같은 사건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소재였다.

잊혀진 과거를 무엇 때문에 파헤치냐는 질문을 피해 갈 수 없었다. 답변은 간단하다. 이 엄청난 학살사건은 과거의 일이 아니라 바로 지금 우리의 모습인 것이다. 가해자가 아무 반성 없이 부와 권력을 누려온 반면, 피해자들은 연좌제로 억눌리고 레드 콤플렉스로 가위눌린 채 50년을 살아왔다.

요즘 정치, 경제, 사회 등 모든 분야에서 위선과 기회주의가 판치는 것은 궁극적으로 보도연맹원 학살사건 같은 중대한 사건에 대해 진상규명이 안 되어 있기 때문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옳은 것은 옳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말하기를 주저해 왔기 때문이다.

보도연맹은 1949년 오제도, 선우종원 등 이른바 반공검사들이 주도하여 만든 단체로, 좌익인사들을 전향, 교화시켜 선량한 대한민국 국민으로 포섭한다는 취지였다.

당시는 제주4·3과 여순사건을 무력으로 진압한 이승만 정부가 국가보안법을 제정하고 무자비한 숙군 총살을 다그치는 등 좌익에 대한 뿌리뽑기 작업이 한창이었다. 미군 철수를 앞두고 38선에서는 이미 크고 작은 무력충돌이 일어나고 있었다. 위기감에 사로잡힌 이승만 정부는 최대의 정적 김구를 살해하고 반민특위를 무력으로 해산하는 등 권력 기반을 다지기에 여념이 없었다.

보도연맹은 이러한 시기에 창설됐다. 대한민국 절대지지, 북괴정권 절대반대, 공산주의 타도분쇄 등 강령에서 알 수 있듯, 보도연맹은 이른바 '좌익전력자'들을 묶어서 만든 반공의 행동부대였다. 그러나 '좌익'은 이미 대부분 처형됐거나 월북한 뒤였고 보도연맹에 가입한 사람들은 대부분 시골의 농민과 서울의 문화예술인이었다.

이승만 정부는 전쟁이 터지자 이들이 인민군에 동조, 협력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모두 검속하여 총살했다. 오제도, 선우종원의 증언에 따르면 6.25 직전의 가입자 수가 33만 5천명. 증언과 정황을 종합해 볼 때 이들 중 최소한 2/3에 해당하는 20만명이 학살됐으리라는 추론이다.


▲수직굴과 만나는 지점에서 유골을 수습하고 있는 MBC 제작팀
ⓒ 경산지역 양민학살 피학살자유족회


2. 살아서 말하라

기획 단계에서 이미 여러 가지 어려움이 예상됐다. 학살이 전국에 걸쳐서 일어났으니 취재 범위도 전국으로 잡아야 했다. 게다가 '보도연맹원 = 빨갱이'라는 등식이 지금까지도 살아 있기 때문에 피해 유족들조차 입 열기를 꺼려하는 분위기가 예상됐다. 가해자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모른다'로 일관하거나 인터뷰 자체를 기피할 게 뻔했다. 게다가 당시 군과 경찰의 명령 계통을 확인해 줄 수 있는 문서를 찾아내야 한다는 부담이 있었다.

단순하고 소박하게 피해 유족들의 증언에서 시작했다. 그들의 진술은 어릴 적에 어른한테서 들은 이야기라서 정확하지 않거나 감정적으로 과장된 측면이 있다는 문제점이 있지만 '의견'이 아니라 '사실'로 간주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들의 진술에 대한 '검증'은 우리 제작진의 몫이었다.

적지 않은 증언을 채록했다. 이천에서 후퇴하던 국군에게 아버지가 총살당한 이천재 씨, 충북 오창 창고학살 현장에서 수류탄을 맞고 살아 나온 김현중 씨, 함평 암탉굴에서 500여구의 학살 시체을 수습한 정필순 할머니, 특무대에 의해 경산 코발트 광산에 끌려갔다가 살아 나온 김종철 씨, 보도연맹 피해 사례를 혼자 발로 뛰며 수집한 청도의 박희춘 씨, 청도 곰티재에서 총을 쏘고 내려오는 경찰을 만났다는 박종화 씨, 대전형무소 학살 현장을 목격한 이규희 씨 등 수많은 분들이 증언을 해주었다.

연극동맹에 소속되어 활동했다는 이유로 보도연맹에 단체로 가입된 원로 연극인 고설봉 씨, 오제도 씨의 농간으로 본의 아니게 보도연맹에 가입된 시인 정지용의 아들 정구관 씨 등이 인터뷰에 기꺼이 응해주었고 제주백조일손묘 피해 유족 이도영 씨, 대구의 이광달 씨 등이 귀중한 사진 자료를 제공해 주었다.



▲수평갱도 100미터 지점에서 발견된 두개골과 대퇴부
ⓒ 경산지역 양민학살 피학살자유족회
3. 아직도 말할 수 없는 사람들

가해자 계통의 사람들은 가장 취재가 어려운 부분이었다. 보도연맹 창설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반공검사 오제도 씨는 <이제는 말할 수 있다>와 악연이 있어서 섭외가 어려울 게 예상됐다. 그는 '빨갱이들이 하는 프로그램에 들러리 설 수 없다'고 말한 장본인이다. 중요한 증언자인 만큼 예우를 갖춰서 특별강연을 의뢰하고 이야기를 유도해 볼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노환으로 지방의 별장에서 요양 중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강연회를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어느 지역이나 공통되게 나오는 증언은 김창룡이 이끌던 육군본부CIC(특무대)가 학살을 주도했다는 점이었다. 김창룡은 육본에 있던 시절 군부내 좌익숙청을 주도한 사람으로, 6.25가 터질 당시에는 육본정보4과, 즉 특무대의 책임자였다. 56년에 암살됐으므로 본인의 증언을 듣는 것은 불가능한 일. 주변 인물들의 증언을 종합하여 그의 행적을 그려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김종필. 전쟁 당시 육본정보2과에 소속되어 북한 관련 정보를 담당했던 그는 학살에 직접 관여하지는 않았지만 옆 부서인 정보4과(=특무대) 김창룡의 행적을 잘 알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작년 4월 제주 백조일손묘 유족인 이도영 씨와의 면담에서 "그거 다 김창룡이 한 짓"이라고 고성을 지른 게 녹음되어 있다. 아울러 5.16 주도세력이자 초대 중앙정보부장으로서 4.19 이후의 진상규명 노력을 좌절시킨 장본인이므로 이 부분에 대해서도 해야 할 말이 있다. 끝까지 인터뷰에 불응한다면 2부에서는 어쩔 수 없이 이 녹음을 활용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장도영. 5.16 당시 박정희의 상관으로 계엄사령관과 혁명최고회의 의장을 지낸 그는 한국전쟁 당시 김창룡의 직속상관인 육본 정보국장이었다. 미국 올란도에 거주하고 있는 그를 <이제는 말할 수 있다>팀의 한홍석 PD가 상세히 인터뷰했다. 본인은 모른다고 했다. 장도영의 발뺌은 역으로 김창룡이 공식 명령계통을 뛰어넘어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지시를 받고 직접 보고했다는 심증을 갖게 한다.

인터뷰에 응했지만 거짓말로 일관한 사람도 있었다. 보도연맹 창설자이자 전쟁 발발 직후 조병옥 내무장관 밑에서 정보수사과장을 지낸 선우종원 - 이 분은 서울대 총장을 지낸 선우중호의 아버지다 - 은 대전까지는 학살이 있었지만 자기가 근무했던 피난지 대구에서는 그러한 사실 자체가 없다고 주장했다.

뻔한 거짓말이지만 수사권이 없는 PD로서는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었다. 피난 수도 부산에서 경찰 교육훈련소장을 지낸 박병배 - 이분은 대전에서 4번 국회의원을 지냈다 - 는 지금 세상의 잣대로 당시 사건을 보면 안 된다고 오히려 취재진에게 호통을 쳤다. 한결같이 덧붙이는 말은 "그거 진상규명 어려울 거요"라는 한마디였다.

가해자 쪽에 섰던 사람들 중 고민 끝에 증언을 해준 사람도 있었다. 제주도 학살 집행 부대의 대대장이었던 김아무개 씨, 현장에서 총을 쏜 분대장 김아무개 씨, 대전형무소 특경대장 이아무개 씨, 그리고 청원의 경찰 김아무개 씨 등의 증언은 사건의 책임 계통을 밝히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됐다.

LA에 거주하는 김영목은 미군 CIC에 근무했던 분으로 전쟁 당시 김창룡과 한국 CIC의 활동에 대해 상세히 얘기해주었다. 여수의 배학래 씨는 김창룡 밑에서 특무대 과장을 지낸 분으로 당시 보도연맹원을 직접 체포, 고문, 학살했는데 놀랍게도 전 과정을 모두 소상히 얘기해주었다. 이러한 증언들이 담긴 150여권의 테입을 바탕으로 검사가 수사기록을 정리하듯 사건을 재구성해 나가야 했다.


4. 발굴 과정의 일화들

피해자와 목격자들의 증언이 '사실'임을 확인하는 작업이 필요했다. 경산 코발트광산에서는 특무대가 대구형무소 수감자와 경북지역 보도연맹원 등 3500명을 총살해서 깊이 100M의 수직갱에 떨어뜨렸으며 그 상태로 50년 동안 방치하고 있었다는 충격적인 증언이 나왔다. PD로서 이 사실을 알면서도 그냥 지나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발굴에는 여러 가지 기술적 어려움이 따랐다. 광산이 무너질 위험이 있으므로 안전장치를 하며 발굴해야 했다. 견적을 뽑아 보니 최소 2억이 넘는 예산이 필요했다. 게다가 발굴 기간도 최소 1년을 잡아야 한다는 전문가의 의견이었다. 유골 수습과 이장, 유전자 감식 등 후속조치들도 만만치 않았다. 결국 이번 방송에서는 콘크리트 벽으로 막아놓은 수평갱 입구를 뚫고 들어가는 선에서 만족하기로 했다.

연세대 법의학과 김종열 교수팀, 충북대 중원문화연구소 발굴팀, 광산 토목 전문가 권오목 씨, 경산시 공무원 등 모든 관계자들이 참여하는 발굴팀을 꾸렸다. 이들을 이끌며 발굴을 추진하는 과정이 이번 제작 기간에서 가장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인 부분이다. 발굴팀을 구성하여 준비작업에 착수한 지 한달여 만인 3월 11일, 다이너마이트로 콘크리트 벽을 깨고 들어가 수백구의 유골을 확인하는 데 성공했다.


▲법의학팀에 감식을 의뢰하기 위해 수습된 유골 일부
ⓒ 경산지역 양민학살 피학살자유족회
다이너마이트로 발파를 하고 동굴에 들어가니 섭씨 4도의 한기가 느껴졌다. 그러나 유골을 성공적으로 수습해서 나올 때는 등 뒤에 식은 땀이 뻘뻘 흐르는 게 느껴졌다. 발굴 기간 내내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억울한 원혼들은 결국 우리 제작진의 편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번 발굴은 MBC와 KBS뉴스에 보도되어 적지않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적지 않은 시청자들이 뉴스를 통해 '보도연맹 학살사건'이라는 게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고마운 일이다.


5. 6월 25일 예비검속 명령서 발견, 최초 전국 공개

전쟁이 터진 당일 오후 이승만 대통령의 주재로 국무회의가 열렸고 그 직후 "요시찰인을 모두 검거하고 형무소 경비를 강화하라"는 치안국장 명의의 명령서가 각 경찰서에 하달됐다. 이 문서에 따르면 보도연맹원의 검속과 학살이 전쟁 당일에 이미 계획되었다는 결론이다.

학계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이 문서를 제주도 현지 취재 중 어렵게 입수해서 전국 최초로 공개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문서를 작성, 하달한 장본인인 당시 치안국장 장석윤(98)이 뜻밖에 아직 살아있었다. 정길화 PD가 그에게 이 문서를 들이밀며 당시 정황을 물어 보았지만 기억이 안 난다고 했다. 그가 한 마디만 솔직한 얘기를 해줘도 뉴스가 될 수 있는 부분이었다. 특종 발굴에도 불구하고 아쉬움이 많이 남는 대목이다.


6. 악마의 시대는 갔는가?

"친일파가 해방 이후에 온존했다"는 역사책의 표현은 과연 맞는 것인가? 친일파들은 정부와 군경의 요직을 모두 차지했으므로 '온존했다' 는 표현 자체가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해방 후 민중의 친일파 숙청 요구로 정치적 입지가 좁았던 친일파, 특히 고등계 형사들은 살아남기 위해 강력하게 민중을 탄압했다.

일제 때도 이렇게 잔인하고 악랄하게, 무차별로 폭력을 휘두르며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아무나 죽여놓고 '빨갱이를 죽였다'고 말하면 모든 게 양해되는, 오히려 고속 출세의 밑천이 되는 시대였다.

대구에서 만난 이광달 씨는 그 시대를 가리켜 주저없이 '악마의 시대'라고 불렀다. 학살 책임자들의 대다수는 우리 사회의 지도자로 군림하며 살아왔다. 반면에 대다수의 국민들은 그들의 죄과에 대해 얘기조차 할 수 없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보도연맹원 학살과 같은 끔찍한 일을 목격하고 나면 말조심을 안 할 수가 없는 법이다. 그리고 이러한 침묵은 기득권 세력의 안녕을 위해 아주 편리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셈이다.


7. 전국 연결 생방송 한번 해야

보도연맹 사건은 전국에 피해자들이 있으므로 MBC 전국 계열사를 연결하는 특별생방송을 한번 해볼 만하겠다는 생각이다. 이러한 생방송으로 정부가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진상규명에 나설 수 있도록 유도하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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