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동포 미디어 베를린리포트
커뮤니티 새아리 유학마당 독어마당
커뮤니티
자유투고
생활문답
벼룩시장
구인구직
행사알림
먹거리
비어가든
갤러리
유학마당
유학문답
교육소식
유학전후
유학FAQ
유학일기
독어마당
독어문답
독어강좌
독어유머
독어용례
독어얘기
기타
독일개관
파독50년
독일와인
나지라기
관광화보
현재접속
301명
[자유투고] 자유·토론게시판 - 타인에 대한 약간의 배려 말고는 자유롭게 글을 쓰시면 됩니다. 어떤 글이든지 태어난 그대로 귀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열린 마음>(타인의 흠결에 대해 관대하고 너그러움)으로 교감해 주세요. 문답, 매매, 숙소, 구인, 행사알림 등은 해당주제의 다른 게시판을 이용하세요. 이런 글은 게시판 사정에 따라 관용될 때도 있지만 또한 관리자의 재량으로 이동/삭제될 수도 있습니다. 펌글은 링크만 하시고 본인의 의견을 덧붙여 주세요.

음악 미학- J.S.BACH를 중심으로…

페이지 정보

작성자 XX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13건 조회 3,310회 작성일 08-05-10 22:23

본문

하우스알바로 썼던 글 중 일부분입니다. 음악 전공자나 미학에 관심 있는 분들이나 읽을만 할겁니다. 그 외의 분들껜 별 의미 없을 거에요.

사실 이 글은 진중권의 책 '미학 오딧세이'와 '현대미학 강의'를 읽고 거기에 대입한 것에 불과합니다. 글을 좀 더 매끄럽게 진행하기 위해 진중권 책의 내용을 좀 더 삽입했습니다. (결과적으로 글이 무지 길어졌네요)

아이디어는 간단합니다. 음악 미학에 관하여 글을 몇개 찾아봤지만 작곡자와 연주자 사이에 대한 이론을 찾지 못하여, 그 관계를 미학사에 대입해 봤습니다. 보통 음악미학에서, 가령 수용미학이라 하면 음악과 청중의 관계를 이야기 하더군요. 그러니까 예술가는 작곡자고, 연주자는 텍스트이고, 청중이 독자의 관계로 이루어지는 것이죠. 저는 이 관계에 관절을 하나 더 대입시켰습니다. 작곡자- 악보(텍스트) - 연주자(독자).. 뭐 대충 이런 겁니다.


어쨌든, 이곳에 내공 높으신 분들 많으니, 제 글을 조심스레 올려 봅니다. 혹시 제가 뭔가 오해한 부분이 있다면 가차없이 지적해 주시길...


바하 악보의 분석과 연주에 있어서 단 하나의 답안지가 존재할까?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Chaconne는 본래 스페인에서 구전되어 내려오던 춤곡이 사라방드와 파사칼리아의 영향을 받으며 악곡형식을 갖추게된 곡이다. 하지만 바하는 샤콘느를 춤을 추기 위한 곡으로 만들지는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가 작곡한 조곡(춤곡)들을 춤을 추기 위한 춤곡이 아닌 개별적 작품으로서 작곡했다. 이렇게 연주자가 하나의 곡을 잘 연주하기 위해선 그 곡 형식에 대한 이해와 작곡자가 살았던 시대의 ‘이해의 지평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

 

다시 얘기하자면, 바하를 잘 연주하기 위해선 바로크 시대의 세계관을 가지는 것이다. 그 시대엔 어떤 곳에서 연주회가 이루어졌으며, 어떤 청중을 위해 곡이 만들어졌으며, 당시 악기가 가진 표현의 가능성은 어떠했는지, 어쩌면 바로크 이후에 이루어진 모든 음악적 가능성을 지워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 것이 가능할까? 해석학에 따르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 시대의 선입관Vorurteil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선입관이란 우리 사회가 이제까지 쌓아왔고, 또 우리가 성장하면서 배워온 어떤 지적 전통, 세계관, 가치관 따위를 말한다.

 

그렇다면 바하곡에 대한 가장 정확한 해석I은 언제 존재할까? 바로크시대에 존재했을까?, 아니면 낭만시대? 혹은 녹음 기술이 발달하고 학적연구가 하나의 네트워크로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현대에 존재할까? 과연 바하 곡 분석에 대한 절대적인 하나의 답안지가 있을까?

현대 대부분의 음악가들은 일의적 본질을 찾기 위해 분투를 한다. ‘바하가 의미한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라는 답안지를 제출한다. 그렇게 하여 하나의 대세론이 이루어지면 다른 해석들은 자취를 감추게 된다. punktierte Note는 사라지고 연주 상엔 Doppelpunktierte Note만이 남는다. 유일한 객관적 진리에 대한 열망, 과연 그것이 바하가 바랬던 것이 맞을까?

해석학에선 유일한 객관적 해석이란 없다고 한다. 여러 시대의 다양한 해석 모두를 긍정한다. 해석하려는 자는 자신의 시대를 떠나지도 못하지만 과거 시대의 지평을 알아야만 텍스트를 이해할 수 있다. 과거와 현재의 지평 사이의 간극이 멀어질수록 원작은 낯설게 느껴지기 마련이고 해석자는 늘 새로운 대화를 시도해야 한다. 바로 이 간극이 만들어내는 다양한 결과를 긍정하는 것이다. 시대가 변하면서 이루어지는 새로운 대화들이 다양한 해석을 만들어내고, 그로서 원작이 갖는 의미가 풍부해지는 것. 작품의 의미는 시대마다 독자와의 새로운 대화를 통해 새롭게 탄생한다. 예술작품은 완제품이 아니다.

 

바로크 미학

음악이 아닌 조형예술에 있어서 바로크 미학의 특징은 고전주의와의 비교로 뚜렷해진다. 그렇기에 여기서 바로크라 함은 17세기 전체 회화가 아닌 고전주의와 대립되는 좁은의미로서의 루벤스풍의 바로크를 말한다. 미술사가 Heinrich Woelfflin 은 르네상스에서 바로크의 변화를 다섯 개의 개념쌍으로 정리했다.

1. 선적인 것에서 회화적인 것으로. 르네상스 회화는 선적이다. 대상의 뚜렷한 윤곽은 배경과 분명하게 구분해준다. 반면 바로크 회화에서 윤곽선은 희미하고 종종 흐르다 끊기곤 한다.

2. 평면에서 깊이로. 르네상스 회화에서 인물들은 거의 같은 깊이에 배치되어있기 때문에 평면적이다. 반면 바로크 회화에서 인물들은 공간의 깊이 속에 겹쳐있다.

3. 닫힌 형식에서 열린 형식으로. 르네상스 회화에서 대상들은 안정된 건축적 구조를 이루며 그림 안에서 완결되어있다. 닫힌 형식이다. 가령 삼각형 구도라면 그림 안에 그 삼각형의 꼭지점이 다 들어오는 완결성. 반면 바로크 회화에선 그 삼각형의 꼭지점이 종종 그림 밖으로 나가있다. 그림 속의 대상들이 지어내는 이야기는 바깥으로 연장된다. 열린 형식이다.

4. 다양성에서 단일성으로. 르네상스 회화 속 대상들은 뚜렷한 윤곽선을 갖기에 배경과 명확히 구별된다. 다양성. 반면에 바로크 회화에서 대상들에겐 뚜렷한 윤곽이 없으니 독립성을 갖지 못하고 전체 속에 녹아 들어간다. 단일성.

5. 명료성에서 불명료성으로. 르네상스 회화에서 그림의 각 부분들은 뚜렷한 형태를 갖고 있기에 모호함이 전혀 없다. 즉 명료성을 갖고 있다. 바로크 회화에서 대상의 부분은 어둠 속에 묻혀버리기도 한다. 구도, 빛, 색채가 형태를 분명히 나타내는데 사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바로크 회화는 불명료하다.

 

이러한 조형예술에 있어서의 고전주의와 바로크의 대립적 특징을 음악에서도 찾을 수 있을 거다. 음악사에서 고전주의는 바로크의 뒤를 이어 등장한다. 이것은 17세기에 바로크회화가 유럽을 휩쓸 때 프랑스에서 르네상스를 이상으로 삼는 고전주의가 등장한 것과 비교할 수 있다. 음악에서 이 두 시대적 특징을 담은 악곡형식의 대표로 클래식의 소나타와 바하의 푸가를 보자.

 

16세기 말 Venedig에서 발생한 소나타는 바로크시대를 거쳐 클래식 시대에 와서 엄격한 형식을 갖추게된다. Exposition - Durchfuehrung - Reprise - Coda로 이루어진 Sonatenhauptsatzform은 Exposition에서 다시 Hauptsatz(1. Thema) - Ueberleitung - Seitensatz - 2. Thema - Fortfuehrung - Schlussgruppe로 이루어진다. 이 각 부분들에도 조성의 구성이나 모티브 사용에 틀이 있다. 또한 Durchfuehrung에서는 Exposition에서 등장한 테마와 모티브들을 변형하여 사용한다.

 

푸가는 둑스에서 테마가 주어지고 코메스에서 테마가 다른 조성으로 등장할 때 Kontrasubjekt가 함께 진행된다. 여기서 Thema와 Kontrasubjekt는 서로 다른 리듬을 가진 독립적 성격이지만 동시에 진행되어 화성을 만들어낸다. 클래식에서 소타타 형식은 각각의 테마가 독립되어 연주되고 테마를 이루는 방식이나, 테마나 모티브를 이용하는 방식은 homophony의 특성을 갖는다. 다양성. 바로크의 푸가는 독립적 성격을 지닌 테마와 Kontrasubjekt는 겹쳐서 연주되어 화성을 이루는 polyphony다. 단일성. 이러한 단일성의 특성은 푸가가 아닌 다른 악곡 형식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다. 예를 들어 BWV995 Prelude(Fugato)에서처럼 처음 제시된 주제는 멜로디 안에 숨겨져있다. 그 멜로디 안의 주제는 주제로서 독자적으로 존재하며 동시에 멜로디 또한 독자적이다. 조금 다르지만 이러한 단일성의 특성을 샤콘느에서도 찾을 수 있다. 바하는 처음 네마디에서 주어진 베이스모델을 베이스로 계속 반복시키지 않고 멜로디 안에 숨겨버린다. 따라서 반복되는 음들은 불규칙적 리듬을 가지며 때로는 음의 높이도 변한다. 이로서 단순히 반복되어야 할 음들이 멜로디 안으로 스며들어 단일화 되어 화성을 이끈다.

 

단일성과 다양성외의 다른 특성을 찾을 수도 있다. BWV995 Gavotte1에서 5~9마디에 걸쳐 진행되는 Sequenz의 경우를 보면 일종의 Quintefall Sequenz이지만 첫 시작은 한음 상승하고, 셋째 넷째 움직임에선 C로 머물러있는 등 명확하지가 않다. BWV998에서의 푸가는 어떤가? 테마만 있을 뿐, Dux도 Comes도 Zwischenspiel도 없이 Durchfuehrung만 있을 뿐인데다가 상이한 리듬 모티브로 곡은 크게 두 개로 나뉘어진 Da capo Fuge 이다. 이정도면 푸가형식을 거의 벗어났다고 볼 수도 있다. 이러한 바하 곡의 특성을 Heinrich Woelfflin 가 뽑아놓은 다섯 개의 개념쌍에 맞춰 명확히 구분할 수는 없더라도 어렴풋이 연관짓는 게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클래식 시대가 바하에 비해 더욱 명료하고 단순한 형식을 추구했다는 것만 보더라도.

 

하지만 바하 시대의 음악이 갖는 특징은 악보 분석에서뿐만 아니라 악보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작곡자와 연주자의 관계에서도 강하게 드러난다. 예를 들어 연주자는 작곡자가 지시하지 않은 꾸밈음을 자유롭게 구사했고, 바하는 악보에 음표 외에는 지시어를 전혀 기입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punktierte Note는 기입된 리듬과 다르게 연주되곤 한다. 왜 그랬을까?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문제에 부닥친다. 음악에 있어서 텍스트란 무엇인가? 회화에 있어서 예술가가 정보를 담아둔 텍스트는 그림이다. 관객은 그림이란 텍스틀 읽어서 정보를 받는다. 하지만 음악에서는? 청중이 악보를 읽어 음악을 듣지 않는다. 작곡자가 악보에 담아둔 정보를 연주자가 읽고 연주하면 청중이 그 음악을 듣는다, 정보를 받는다. 그렇다면 이 관계에서 텍스트는 악보일까, 연주자일까, 악보와 연주자 모두일까? 바로크 음악 미학이 갖는 특수성은 이곳에 있다.

이 문제점을 샤콘느에서 구체화 해보자.

샤콘느가 본래 구전되어 내려오던 춤곡이 다른 악곡 형식의 영향을 받아 변화하였으므로, 단적으로 규정된 형식을 얘기할 수는 없지만,

1. 곡은 크게 Moll-Dur-Moll(Dur-Moll-Dur)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졌다.

2. 세 파트의 템포는 일정하다.

3. 사라방드의 영향을 받은 리듬.

4. Passacaglia로부터 영향 받은 변주모델 (ostinato-variation)

많은 연주자들은 ‘세 파트의 템포는 일정하다’라는 것을, 샤콘느는 세 파트 사이에 어떤 여유도 주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메트로노미쉬하게 연주해야 한다,로 오인해버리곤 한다. 이런 것은 작곡상의 규칙을 과장 적용하여 생기는 오류다. 그 다음 대표적 논란 중 하나가 스페인에서 전해 내려온 빠른 춤곡이기에 바하의 샤콘느 역시 춤곡 답게 연주해야 한다는 것이 하나의 주장이다. 또 하나는, 바하가 갑작스런 아내의 죽음을 애도하며 쓴 곡이기에 자연히 슬픔과 절망을 연주해야 한다는 것이다. Helga Thoene는 책 <Ciaconna Tanz oder Tombeau?>에서 Gematrie를 통하여 부인Maria Barbara Bach의 죽음의 의미가 담겨있음을 풀어낸다. 과연 바하의 샤콘느는 여전히 춤곡일까, 아니면 죽은 아내에 대한 애한을 담은 작품일까?

그리고 리듬의 문제. 곡 시작 부분 멜로디에서 주어진 리듬모티브의 punktierte Note를 Doppelpunktierte Note로 연주하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사라방드에서 영향을 받은 이 리듬 모티브는 141~144마디에서 베이스에 출현한다. 이것을 Doppelpunktierte Note로 연주할 수 있는가? 없다. punktierte Note를 Doppelpunktierte Note로 연주해야만 한다는 것이 바하시대의 규칙이라 한다면 이것은 딜레마에 빠지는 경우다. BWV995의 Prelude에 사용된 punktierte Note 역시 마찬가지다. 이 곡이 Franzoesische Ouvertuere형식을 갖췄다는 점에서 Doppelpunktierte Note로 연주해야 함이 더욱 설득력을 갖추지만, 만약 이 리듬의 규칙이 단순히 punktierte Note를 Doppelpunktierte Note로 연주해야 하는 것이다, 라고 한다면 문제가 생긴다. Prelude 바로 다음 곡인 Allemand에서의 punktierte Note 어떻게 연주할 것인가? 이 곡에서 16분 음표와 32분 음표는 명확히 다른 캐릭터를 가지고 있다. 이 차이를 지워버릴 것인가? 또 다음 곡인 Courante의 punktierte Note는 어떻게 할 것인가?  Prelude에서와 마찬가지로 Allemand 와Courante에서도 어김없이 이 규칙을 적용할 수 있을까? 없다. 그렇다면 이 딜레마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고전주의적 미학과 수용미학

 

르네상스 시대에서 예술은 이성적 작업이었다. ‘미’가 대상의 ‘객관적 속성’이라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0.618 : 0.382라는 비례를 아름다움으로 보았다. 이렇게 미는 객관적 속성으로서 인식 가능한 대상이라 생각했다. 감성은 이성을 정신을 현혹하고 진리를 왜곡한다고 매도되었다. 이 감성을 하나의 학문적 연구대상으로 끌어올린 사람이 독일의 철학자 Alexander G. Baumgarten(1714~1762)이다. 그는 감각이란 뜻의 그리스어 aesthetics를 본떠 ‘aesthetica'이란 이름을 붙였다. 그가 감성을 복권시킨 방법은 감성을 일종의 이성으로 간주하는 것이었다. 감성을 이성 아래 포섭한 것이다. 이렇게 데카르트 정신에서 탄생한 근대 미학은 하지만 고전주의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예술을 ’진리‘의 전달 매체로 보는 근대 ’진리 미학Wahrheitsasthetik‘은 여기서 비롯되어 헤겔에서 완성된다. 헤겔에게 있어서예술이란 진리가 감각적으로 나타난 것이었다. 이 고전주의적 예술관에 따르면, 진리는 예술 작품 속에 이미 완성된 형태로 존재한다. 그럼 수용자는 예술가가 작품에 담아놓은 진리를 원형 그대로 발굴해야 한다. 예술가가 품고 있던 원본은 수신자의 머릿속에 구성되는 상과 일치해야 한다. 이 고전주의 예술관에서 수용자는 작품을 주체적으로 해석할 권리가 없다.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관조자이다.

 

예술에서 독자가 능동적 역할을 한다는 게 수용미학이다. 사실 수용미학은, 예술 작품을 작가-텍스트-독자 라는 삼각형 놀이에 비유한 가다머Hans Georg Gadamer 와 텍스트는 오직 독자의 구체화 작업을 통해서만 작품으로 탄생한다고 말한 잉가르덴에서 나왔다. 수용미학은 예술이 완성된 진리를 전달하는 게 아니라 생생한 경험을 매개하는데 있다고 본다. 도식적 구조인 텍스트는 빈곳이 있고, 이 빈곳을 독자가 능동적으로 채운다는 것이다. 이저(W. Iser, 1926~)는 '내포된 독자 라는 걸 내세웠다. 텍스트의 구조 속에 독자의 자리가 이미 마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텍스트의 구체화는 독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독자는 이미 텍스트의 개념속에 들어있고, 텍스트 내용 자체도 독자에 따라 다르게 구체화된다. 텍스트의 불확정성은 독자에게 ’텍스트의 내용을 어떻게 구체화하느냐‘라는 자유를 준다..

 

Kommunikation

 

예술은 다른 매체로는 전달할 수 없는, 오직 예술로만 전달할 수 있는 정보의 소통과정이다. 보통 커뮤니케이션이란 약호와 해독의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발신자> 약호화(encode)> 전언> 해독(decode)> 수신자

이 모델은 미술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예술가> 창작과정> 작품> 지각과정> 수용자

그렇다면 이 모델은 음악에서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을까?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연주자의 위치는 예술가일까 수용자일까? 작곡자가 예술가임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창작과정이란 작곡이라는 Performance에 해당할 테고 악보는 작품이 될 것이다. 하지만 청중이 악보만 바라보며 음악을 들을 수는 없는 법이다. 음악에서 이 소통의 모델이 문제가 되는 것은 연주자라는 관절이 하나 더 있기 때문이다.

작곡자> 창작과정(encode)> 작품(악보)> 해독(decode)> 연주> 지각과정> 수용자

여기서 연주자의 해독과 연주라는 과정을 어떻게 바라보느냐가 문제다. 하나는 연주자를 매체에 묶어두는 것이다. 작곡자의 메시지를 청중에게 전달하는 매체라는 것이다. 또 하나는 작곡자와 함께 적극적 창작자의 위치에 올려두는 것이다.

 

먼저 연주자를 매체로 보는 첫 번째의 경우, 여기서 연주자란 작곡자의 의도를 파악하여 고스란히 청중에게 옮겨주는 것이다. 이것은 진리미학이라는 고전주의에 부합한다. 예술이란 진리를 전달하는 매체이다. 작곡자는 예술의 진리를 약호화하여 악보에 담아두고, 연주자는 악보를 해독하여 그 진리를 청중에게 들려주는 것이다. 여기서 청중은 당연히 그 진리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관조자다. 연주자에겐 악보를 능동적으로 해석하거나 자신의 예술적 진리(이상)을 담을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지지 않는다. 여기서 하나의 간단한 질문을 할 수 있다. 과연 작곡자의 의도(예술적 진리)를 연주자가 완벽하게 파악할 수 있으며, 수용자 또한 완벽하게 그것을 관조할 수 있을까? 여기서 ‘예’라고 대답하거나, ‘그것만이 연주자의 몫이다’라고 답한다면 당신은 고전주의자이다.

 

하지만 음악이 논리적 인식 으로 구성되진 것일까? 고전주의에서 미란 수치로 파악할 수 있는 객관적 속성이라 했다. 고전주의적 미학을 완성한 헤겔 역시 르네상스 시대의 조각을 예술의 정점으로 두었다. 르네상스의 조각이란 이념과 감각적 매체가 완전한 조화를 이룬 것이라 보았다. 그 이후의 낭만예술에선 정신이 물질매체를 압도하였고 그 대표 중 하나가 바로 음악이라 하였다. 음악은 논리적 인식이라기 보다는 직관에 의존한 작업이다. 악보란 작곡자의 의도를 완벽하게 담아낸 빈틈없는 텍스트가 아니다. 논리적 인식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작곡자는 직관을 악보에 약호화해 놓았고, 연주자는 그것을 읽고 작곡자의 예술적 의도를 역시 직관으로 해독해낸다. 크로체(Benedetto Croce, 1866~1952)에 따르면, 예술은 논리적 인식이 아닌 직관적 인식이다. 직관이란 위로는 개념과 아래로는 감각과 구별된다. 직관은 표상이다. 표상이란 더 이상 감각은 아니지만 아직 개념이 아닌 이미지다. 따라서 그것은 감각의 수준을 넘은 ‘정신적’,‘관념적’인 것이다. 이 직관은 객관화(표현expression)되었을 때 비로소 성립된다. 크로체가 얘기한 창작 과정의 4단계는 연주자의 작업과정에 정확히 일치한다. 1) 감각기관이 인상을 받아들이면 2) 예술가는 이것들을 미적으로 종합하여 표현을 만들어낸다. 3) 이때 즐거움(미적 쾌)이 뒤따른다. 4) 마지막으로 그는 이 표현을 물리적 현상(소리)으로 변환한다.

 

아무리 수많은 지시어가 쓰여진 현대음악 악보에도 작곡자의 음악적 직관이 완벽하게 서술되어진 것은 없다. 직관이 완벽하게 서술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여기서 우리는 수용주의 미학을 적용해 볼 수 있다. 연주자는 독자의 자리에 들어선다. 악보라는 도식적 텍스트엔 빈곳이 있고 연주자는 그곳을 능동적으로 채워나가는 것이다. 적건 크건, 모든 시대를 통틀어 악보에는 ‘내포된 독자’의 자리가 있기 마련이다. 이것이 연주자를 작곡자와 함께 적극적 창작자의 위치에 올려놓는 두 번째 경우이다. 수많은 악보들 속에서 우리는 ‘P'라는 동일한 지시어를 수없이 많이 찾을 수 있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그 악센트의 크기는 단 하나도 동일한 게 없다. 그렇다면 그 절대값은 어디에 있을까? 그 절대값이 작곡자의 머릿속에 있고 연주자는 그 하나의 정답을 찾아내 전달하는 것이라 보는 것이 고전주의라 했다. 수용주의는 불완전성의 텍스트를 독자, 즉 연주자가 구체화해나가는 것이라 했다. 그렇다면 단 하나의 절대값이라는 게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 아니면 수용주의에서처럼 연주자가 구체화해낸 수많은 결과의 여러 차이들이 모두 정답이 되는 것일까?

 

바하는 악보에 어떤 지시어도 쓰지 않았다. 연주자들은 바하가 적어준 꾸밈음 외에도 수 많은 꾸밈음을 자의적으로 선택하였고 바하가 적어준 꾸밈음의 길이를 다르게 연주하기도 했을 뿐만 아니라 때론 리듬을 바꾸어 연주하기도 했다. 과장해서 말하자면, 바하 시대엔 바하가 적어준 음표들이 그대로 연주되었던 적이 없었다.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를 얘기할 수 있다. 바하는 연주되어 나오는 음악의 결정체에 완전한 요구를 하지 않았다는 것. 또 하나는, 바하 시대의 연주자가 바하의 악보를 연주로 구체화하는 과정은 수용주의 미학의 범위를 넘어선다는 것이다.

 

Postmodernismus

<?xml:namespace prefix = v ns = "urn:schemas-microsoft-com:vml" /><?xml:namespace prefix = w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word" />

닳아 빠져나온 신발 도구의 안쪽 어두운 틈새로부터 노동을 하는 발걸음의 힘겨움이 굳어있다. 신발 도구의 옹골찬 무게 속에는, 거친 바람이 부는 가운데 한결같은 모양으로 계속해서 뻗어 있는 밭고랑 사이를 통과해 나아가는 느릿느릿한 걸음걸이의 끈질김이 차곡차곡 채워져있다. 가죽 표면에는 땅의 축축함과 풍족함이 어려있다. 해가 저물어감에 따라 들길의 정적감이 신발 밑창 아래로 밟혀 들어간다. 대지는 침묵하는 부름, 무르익은 곡식을 대지가 조용히 선사함 그리고 겨울들판의 황량한 휴경지에서의 대지의 설명할 수 없는 거절이 신발 도구 속에서 울리고 있다. 빵을 안전하게 확보하는 데에 대한 불평 없는 근심, 궁핍을 다시 넘어선 데에 대한 말없는 기쁨, 출산이 임박함에 따른 초조함 그리고 죽음의 위협 속에서의 전율이 이러한 신발 도구를 통해 스며들어 있다. 대지에 이러한 도구가 귀속해 있고 농촌 아낙네의 세계 안에 이 도구가 보호되어 있다.

Aus der dunklen Offnung des ausgetretenen Inwendigen des Schuhzeuges starrt die Muhsal der Arbeitsschritte. In der derbgediegenen Schwere des Schuhzeuges ist aufgestaut die Zahigkeit des langsamen Ganges durch die weithin gestreckten und immer gleichen Furchen des Ackers, uber dem ein rauher Wind steht. Auf dem Leder liegt das Feuchte und Satte des Bodens. Unter den Sohlen schiebt sich hin die Einsamkeit des Feldweges durch den sinkenden Abend. In dem Schuhzeug schwingt der verschwiegene Zuruf der Erde, ihr stilles Verschenken des reifenden Korns und ihr unerklartes Sichversagen in der oden Brache des winterlichen Feldes. Durch dieses Zeug zieht das klaglose Bangen um die Sicherheit des Brotes, die wortlose Freude des Wiederuberstehens der Not, das Beben in der Ankunft der Geburt und das Zittern in der Umdrohung des Todes. Zur Erde gehort dieses Zeug und in der Welt der Bauerin ist es behutet.󰡒[

 

이 글은 하이데거가 고흐의 그림 ‘구두’를 보고 쓴 것이다. 빈센트 반 고흐가 그린 한 짝의 구두는 밑창과 가죽으로 이루어진 단순한 사물이 아니다. 농민의 삶의 터전이 되는 대지를 열어준다erschliessen. 하이데거에 있어서 예술의 본질은 존재의 진리가 작품 속에 정립되는 데(Sich-ins-Werk-Setzen)있다. "Im Werk der Kunst hat sich die Wahrheit des Seienden ins Werk gesetzt." - Heidegger: Holzwege GA 5, S. 21

여기서 진리란 ‘aletheia', 즉 감추어진 곳을 드러낸다는 ’비은폐성‘을 뜻한다. 18C에 성립한 미학은 창작을 예술가 주체로 환원시키고, 예술의 진리를 재현의 진리로 규정하며, 작품을 한갓 향유의 대상으로 간주한다.
하지만 하이데거는 ’예술을 대하는 현존재(Dasein)의 근본 태도의 변화‘에 대해 얘기한다. 즉 예술을 ’미적 관조의 대상‘이 아니라 ’진리가 발생하는 방식‘으로 대하는 것이다. 근대미학의 기획은 ’미적 주체성‘의 확립에 있었다. 예술가의 주관은 모든 설명의 출발점이었고, 예술의 근원은 어디까지나 예술가의 머리에 있었다. 하지만 하이데거는 ’예술‘을 ’예술가‘와 ’예술작품‘의 공동 근원으로 삼는다. 이로서 예술은 예술가의 주관성의 표현이 아니다. 그렇다면 하이데거가 말하는 예술, 예술가와 예술작품의 공동 근원인 예술이란 무엇인가? 그는 말한다, “예술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작품에서 끄집어 내야하고, 작품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우리는 오로지 예술의 본질에서 경험할 수 있을 뿐이다”라고. 이렇게 작품과 예술 사이의 해석학적 순환을 통해 예술의 본질을 해명함으로써 예술가 미학이 아닌 작품미학의 성격을 가진다. 하이데거는 고흐의 그림에 대하여 쓴 글이 자신의 주관적 견해가 아니라고 한다. 고흐의 작품이 자신에게 들려주었다고 한다. “Dieses hat gesprochen." 작품 속에서 존재자의 진리가 발생Geschehen한다. 예술작품은 존재자의 진리가 작품 속에 정립되는 것 Sich-ins-Werk-setzen der Wahrheit des Seinenden이다.

 

이 하이데거의 이야기를 음악에 적용시킬 수 있을까? 다소 벅차긴 하지만, 두 가지 정도는 얘기할 수 있다. 예술작품은 우리에게 이제껏 보지 못했던 것(존재자의 존재)을 ‘보게 해준다'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가시화를 의미하는 게 아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지각할 수 있게끔 해주는 것이 예술이란 것이다. 그리고 예술작품의 진리는 예술가, 즉 작곡자의 머리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고전주의가 연주자를 작곡자에 귀속시켰다면, 하이데거에서 연주자는 작곡자의 속박에서부터 해방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연주자가 악보상에 기입된 것과 다르게 연주할 수 있는 자유를 획득한 것은 아니다. 또한 연주자에게 악보 안에서의 자유로움을 선사했는지도 불명확하다. 과연 하이데거는 고호의 그림에 대한 다른견해의 차이를 인정하는 것일까? 아니면 자신이 들은 것이 유일한 진리라고 하는 걸까? 하이데거는 고흐의 그림에 대하여 쓴 글이 자신의 주관적 견해가 아니라고 했다. 고흐의 작품이 자신에게 들려주었다고 한다. “Dieses hat gesprochen."

 

미술사학자 마이어 샤피로에 따르면 그림 속의 구두는 촌의 아낙네가 아니라 고흐 자신의 것이라고 한다. 사피로의 추정이 맞다면 그 구두는 농촌의 밭고랑이 아니라 대도시를 배회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하이데거가 들은 것은 무엇일까? 이 논쟁은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 )에 의해 정리된다.<die Wahrheit in der Malerei> 하이데거의 문장은 주관적 투사였으며, 샤피로는 하이데거의 논증을 완전히 잘못 이해했음을 밝힌다. 하이데거가 근대적 형이상학을 해체하려는 시도를 했다면, 샤피로는 거꾸로 ‘주체’라는 형이상학의 틀로 하이데거를 비판했던 것이다.

하이데거의 근대적 형이상학을 해체하려는 작업이 여전히 근대적인 것은 작품의 최종적 진리를 가졌다고 주장하는 점이다. 데리다는 누군가 그 진리를 독점할 수 있다는 생각에 반대한다.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풀어주고, 그것을 무한히 전개시키는 것이다. 고흐의 그림이 하이데거 앞에서 하나의 진리를 열어주었듯이, 또다른 이들에겐 또 다른 진리를 열어줄 수 있다.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은 구약의 창세설화에 대하여 얘기한다. 신은 말로 세상을 창조하셨다. “Gott sprach: Es werde Licht. Und es wurde Licht."(Genesis 1:3) 인간의 언어는 이름하는 언어Namenssprache이다. ”Gott, der Herr, formte aus dem Akkerboden alle Tiere des Feldes und alle Voegel des Himmels und fuehrte sie dem Menschen zu, um zu sehen, wie er sie benennen wuerde. Und wie der Mesch jedes lebendige Wesen benannte, so sollte es heissen." (Genesis 2:19) 신은 말함으로서 세상을 지으시고, 인간은 이름함으로서 신의 창조를 계속한다. 인간은 신이 창조하신 사물 속에서 ‘언어적 본질’을 발견하여 그것을 이름한다. 사물의 본질이 인간의 음성으로 고스란이 옮겨지는 이 번역은 인식이다. 하지만 논증적 인식이 아닌, 이름을 들으면 정신적 본질이 저절로 알려지는 직관적 인식이다. 이때는 주관과 객관이 없었다. 아담이 선악의 본질을 알려고 했기에 이 축복받은 언어정신은 타락한다. 언어는 전달수단으로 전락하고, 직관적 인식의 자리에 판단이 들어오고, 추상이 언어에 도입된다. 추상적 개념은 개별자의 고유명사를 지워버리는 참혹한 결과를 가져왔다. 하지만 벤야민은 이를 상실의 결정체로 보지 않았다. 그것은 상실이 아니라 그 언어가 현시되는 양상의 변화이기 때문이다. 타락 이후 근원적 언어는 직접 나타나지 않고 수많은 바벨의 언어 속에 제 흔적을 흩어놓는다. 때문에 하나의 사물을 가리키는 낱말을 다른 언어의 역어들과 함께 모아 놓으면, 그것들 사이에서 불현 듯 그 말의 근원적 의미가 떠오른다.

 

벤야민에게는 현전pr'esence에 대한 신학적 열망이 존재한다. 하지만 해체주의는 이런 현전의 불가능성을 확인하는 세속성에서 출발한다. 해체주의는 궁극적 진리를 인정하지 않고, 기표들의 놀이로 초월적 기의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작품에 대한 최종적이고 궁극적 해석은 존재하지 않는다.

 

J.S.Bach als Barock

 

"두 손으로 연주하는 계속저음은 음악의 가장 완벽한 기초이다. 왼손은 기보된 음표들을, 거기에 맞춰 오른손은 협화음․불협화음들을 연주한다. 여기에서 얻어지는 조화로운 소리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인간에게는 기쁜 마음을 갖도록 한다. 바로 이 점이 계속저음의 유일한 목적이다. 이렇게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고 마음을 신선하게 하는 힘을 부여하는 것은 모든 음악의 목적이다. 이 점이 무시될 때에 음악은 본질적 의미를 잃고 사탄의 외침이나 진부한 중얼거림이 될 뿐이다."

Der Generalbaß ist das vollkommenste Fundament der Music welcher mit beyden Handen gespielet wird dergestalt das die lincke Hand die vogeschriebenen Noten spielet die rechte aber Con- und Dissonantien darzu greift damit dieses eine wohklingende Harmonie gebe zur Ehre Gottes und zulassiger Ergotzung des Gemuths und soll wie aller Music, also auch des General Basses Finis und End Uhrsache anders nicht, als nur zu Gottes Ehre und Recreation des Gemuths seyn. Wo dieses nicht in Acht genommen wird da ists keine eigentliche Music sondern ein Teuflisches Geplerr und Geleyer. < J.S. Bach im Jahre 1738 >

 

바로크 시대엔 기보되지 않은 꾸밈음을 연주자가 자유롭게 연주하였으며, 기보된 꾸밈음의 길이도 변경되는 경우가 많았으며, punktierte Note는 기입된 리듬과 다르게 연주되곤 했다. 이것은 전통적인 즉흥연주와 통주저음의 성격이 강하게 남아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갈수록 실제 연주되는 소리와 기입된 악보의 간격은 더욱 커진다. 악보와 실제 소리의 간격이 커질수록 연주자에게 주어진 해석의 자유도 넓어지는 셈이다. 현대로 들어올수록 악보에 수 많은 지시어가 들어서고 연주자는 단순한 매체의 성격이 강해진다. 즉흥연주와 통주저음, 자유로운 꾸밈음은 고전주의를 거치며 자취를 감추었고, 음악적 지시어로도 부족해 언어로 상세히 서술하는 현대에서 연주자는 충실하게 작곡자의 의도를 읽어내어 청중에게 전달하는 입장이다. 다시 얘기해서 현대로 들어올수록 작곡자-악보-연주자의 관계는 고전주의적 성격이 강해지는 셈이다.

그와 비교하여 바로크 시대엔 셈여림 기호마저 기입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크 시대엔 셈여림을 포기한 것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쳄발로가 바로크를 대표하는 악기인 것은 다른 시대와의 차별적 특성으로서 존재했던 악기라는 의미인 것이지, 그 시대의 모든 악기가 쳄발로를 흉내낸 것은 아니었다.) 연주자들은 단 하나의 음만 적힌 악보를 보며 화성을 완성하여 연주하였고(통주저음), 악보에 기입되지 않은 셈여림을 스스로 결정지었으며, 꾸밈음은 자유자제로 사용할 수 있었다. 하나의 악보에서부터 얼마나 많은 경우의 연주가 발생할까?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똑같은 음의 배열로 연주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으리라. 여기서 바로크 음악과 데리다의 해체주의의 유사성을 발견한다. 무한히 전개되는 차이의 놀이.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게 있다. 바하가 통주저음과 관련하여 했던 이야기.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고 마음을 신선하게 하는 힘을 부여하는 것은 모든 음악의 목적이다.” 여기서 바하는 벤야민과 닮는다.

모든 더 높은 언어는 더 낮은 언어의 번역이다. 이 번역은 신의 말씀의 궁극적 명료함이 펼쳐질 때까지 계속되고, 신의 말씀은 이 언어운동의 통일성이다.

해체주의Dekonstruktivismus는 현전의 불가능성을 확인하는 세속성에서 출발한다. 해체주의는 궁극적 진리를 인정하지 않고, 기표들의 놀이로 초월적 기의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작품에 대한 최종적이고 궁극적 해석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벤야민에게는 현전pr'esence에 대한 신학적 열망이 존재한다. 바하의 음악이 궁극적으로 추구했던 것처럼, 끊임없이 전개되는 차이의 연속 위로 어렴풋이 진리가 드러난다. 음악의 진리는 작곡자의 머릿속에 있는 게 아니다. 최종적 진리는 완성되지 않는다. 바하가 중요시 여긴 것은, 연주자가 자신이 설계한 음악을 정확히 연주해내는 것이 아니었고, 신에 대한 사랑과 함께 연주자 자신의 마음을 신선하게 하는 것이었다.

 

punktierte Note는 Doppelpunktierte Note로 연주해야 맞는가, punktierte Note로 연주해야 하는가, 아니면 Triole로 연주해야 맞는가? 어리석은 질문이다.


 

추천2

댓글목록

hexis님의 댓글

hexis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안녕하세요. 이렇게 흥미롭고 좋은 글에 코멘트가 없다니요. 저는 비록 음악을 전문적으로 공부하고 있진 않지만 제가 코멘트를 남겨 보겠습니다.

1. 우선 이 글은 '바흐 악보의 해석이 다양할 수 있느냐?'는 흥미로운 문제제기를 담고 있어서, 독자의 관심을 충분히 유발시켜 주고 있습니다. 제가 제기하고 싶은 문제는 그러나 다음과 같습니다. '해석의 대상이 무엇인가?' 윗 글에서는 이 물음이 정확히 제기되고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바흐 악보의 해석이라고 할 때 '연주방식'과 '곡의 내용'이 일단 모두 적용될 수 있습니다. 님께서는 이 둘을 명확히 구분하지 못 하고 있는데, 이것은 치명적으로 보입니다. 님께서 이런 구분을 하고 있지 못 하기에 음악 악보의 해석에 대한 글에서 회화작품의 해석과의 비교를 시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바로 여기 있습니다. 그림의 언어는 음악의 언어와 달리 '묘사'와 '시각적 상징'을 통한 의미의 전달이 가능하다는데 있습니다. 하이데거는 고호의 작품에서 신발을 볼 수 있지만, 림스키 코르샤코프의 '왕벌의 비행'에서 '왕벌'을 볼 수는 없을 겁니다. 아무리 음악이 자연을 묘사하려고 하더라도 음악 언어의 특성상 그것은 단지 시도이고, 인상파와 같은 새로운 작곡스타일을 보여준다는 의의를 가질 뿐입니다. 따라서 회화의 해석에 대한 해석론을 음악의 해석에 적용시키는 것은 적절하지 못 한 것 같습니다. 만일 작곡자의 의도가 언어적으로 파악가능한 그러한 정신적 내용에 국한된다면 가능할 수도 있지만, 한 음악작품이 작곡자의 정신적 내용을 담고 있다고 보는 것은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위에서 언급했듯). 음악 언어의 특성상 그렇습니다 - 해석학에 다루는 해석의 대상은 텍스트나 회화 작품의 '내용'이며, 이 '내용'은 언어적으로 파악가능한 그런 내용이라는 점을 고려해야 할 것 같습니다.

2. 그렇다면 결국 '연주방식에 관한 해석'으로 국한되어져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바흐의 작품', 혹은 '바흐의 것과 같이 의도적으로 기호가 기입되어져 있지 않은 악보'에 다시 문제의식이 국한되어져야 할 것 같습니다. 요즘 클래식 음악의 연주의 주류를 이루는 것은 악보에 충실히 연주하는 주류라고 봅니다. 이는 프란츠 리스트로 상징되는 낭만주의식 악보해석에 대한 반동으로 생겨난 흐름으로 알고 있습니다. 악보에 충실히 연구하는 것을 미덕으로 알고 있는 현대에 우리는 바흐의 연주에 관련해서 다음의 현상에 주목해야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20세기에 글렌 굴드로 대표되는 신선한 바흐해석과 그 반대로 바흐가 사용했던 악기로 바흐의 시대식의 연주풍으로 바흐를 연주하는 해석방식이 공존했다는 것입니다. 이게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님께서 잘 보여주신 데로 바흐의 악보가 가지는 특수성 때문일 것 입니다.

3. 위 글에서 저는 님의 문제제기에 의문을 제기했고,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 보여주려고 했습니다.
덧붙혀, 저는 악보에 충실히 연주하는 경향이 단순한 유행에 그치지 않고 앞으로도 계속 주류로 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이유는 '클래식 음악의 정체성'과 연관됩니다. 소위 크로스 오버를 표방하는 음악이 일상에서 친숙해졌고, 뉴에이지 음악이 대중들의 귀를 더 즐겁게 해주는 시대에서 당연히 클래식 음악은 그 정체성의 위기에 빠지게 됩니다. 이런 시대에 지난 시대에 프란츠 리스트가 보여주었던 '곡의 자의적 해석과 감상주의, 써커스의 곡예를 방불케 하는 현란한 기교'가 다시 등장할리는 없어 보입니다. 그리고 이런 연주를 성격상 좋아하는 연주자라면 그냥 락 밴드나 재즈 밴드에 들어가면 되지요. 그러나 바흐의 음악은 님께서 지적해주신 데로 상대적으로 다양한 연주해석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5. 마지막으로 저는 '하나의 작품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과 ' 보다 좋은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을 구분하고 싶습니다.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이 맞다고 해서 '좋은 해석의 가능성'이 폐기되는 것은 아니니까요. 만일 다양한 해석을 모두다 '옳은 해석'으로 본다면 상당히 골치 아픈 문제들이 발생할 겁니다. 고흐의 신발그림에 대한 해석이라고 올라온 인터넷 상의 몇 백개의 네티즌들의 코멘트를 모두 맞다고 한다면 제 아무리 자끄 데리다라고 해도 좋아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여기까지 입니다. 제가 잘 못 본 것이 있거나 님의 글을 오해한 부분이 있다면 답장을 부탁드립니다. 그럼..

Lisamarie님의 댓글의 댓글

Lisamarie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hexis 님 좋은 아침 !

1번 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2번에 관해서는 " 요즘주류" 가 " 악보에 충실 " 이라고 표현 하셨는데 무슨 의미인지 정확히 이해가 안되는군요. 왜냐하면 바로크뿐 아니라 고전에 들어서 까지 많은 부분을  ( 예를 들어 협주곡의 카덴짜 부분 ) 많은 부분을 악보로 기록한게 아니라 연주가의 즉흥연주에 맡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작곡가와 연주가의 구분이 거의 없던 시기이기 떄문입니다요즘도 어떤 젊은 학생들은 시험등에서 갖은 장식음 (Ornamente) 이나 카덴짜가 자신의 즉흥작품이라고 주장하는 경우 한 번은 봤는데요.
 특히 바흐의 작품은 한가지 예를 들어보면 wohltemperiertes Klavier (한국어 사전엔 평균율 이라고 나와있군요 ) 는 한가지 악기가 아니라 클라브쌩, 하아프시코오드 , 쳄발로, 클라비코오드등 여러 악기를 위해서 작곡된거고 요즘 주류는 이 악기들의 특성을 고려하여 장식음등 모든 연주방법을 연구하는 것이 " 학구적" 이라고 하지요.
님이 말씀하신 악보에 충실이라는 것이 아마 이런 그 당시 시대적 정신과 악기, 당시의 연주법에 충실이라는 의미가 아닌가 싶습니다. ..^^

hexis님의 댓글의 댓글

hexis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요즘 날씨가 너무 좋아서 자연이 저를 부르는 군요^^

아 그럼 제가 말하고자 했던 '악보에 충실히 연주하는게 현대 연주의 흐름'이다라는 부분을 좀 더 얘기할께요.
-참고로 이 부분의 배경지식은 주로 쇤베륵의 '위대한 피아니스트'라는 책에 근거합니다.

우선은 님께서 '바로크 음악'을 예로 들면서 반론을 제시하셨는데요, 제 글을 보면 바흐를 포함한 바로크 시대의 음악은 그 악보표기법의 특성상 예외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19세기에 소위 낭만주의 운동이 유럽의 예술계와 학계에 큰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예술분야에서 낭만주의 운동 공통적으로 예술가에 절대적인 지위, 신적인 지위를 부여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천재'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진행된 이유도 이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음악 분야에서 이 예술가의 신적 권위를 가장 잘 보여준 사람 중 한 명이 바로 프란츠 리스트입니다. 리스트는 피아노의 기교 면에서 그 누구도 따라 올 수 없을 만한 수준에 올랐습니다. 리스트는 웬만한 피아노 곡들이 연주하기에 지루하다고 느꼈고, 많은 곡들을, 심지어 바흐의 악보와 달리 기호표기가 충실히 되어 있는 곡들 마저도 자시 멋대로 연주하기 시작합니다. 상식을 뛰어 넘는 기교와 피아노의 오케스트라와 같은 효과로 청중을 전율시키는 것, 이게 리스트가 추구한 것입니다. 문제는 리스트가 피아니스트로서의 자신의 위치를 넘어서 타인의 곡들의 내용을 제멋대로 해석하려고 했다는데 있습니다. 가령 리스트는 쇼팽의 녹턴(제가 기억하기로)이 어떤 특정한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마치 시를 낭송하듯이 각 St&uuml;ck에 해당하는 장면과 정서를 읊조렸습니다. 그러나 당시에 이런 리스트의 방식을 반대하던 피아니스트들도 당연히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은 슈만의 아내이자 위대한 피아니스트인 클라라 슈만입니다. 클라라 슈만은 리스트와 달리 연주시에 몸을 거의 흔들지 않았고, 자의적인 해석을 지양하는 연주방식을 고수했습니다.
20세기 초에 호로비츠로 대표되는 리스트 식의 낭만주의는 끝났다고 생각합니다.
쇤베륵은 현대 연주의 흐름은 리스트가 아닌 클라라 슈만의 방식을 이어가고 있다고 평합니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악보에 충실하라'라는 것을 연주자 자신의 그 어떤 주관적인 판단도 개입되어지면 안 된다는 식으로 이해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연주자 자신의 상상력과 악보 외적인 요소와 관련된 '이해'가 없다면 좋은 연주는 불가능 할 것입니다.
'악보에 충실히 연주하는 것이 현대 연주의 주류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라는 것의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작곡가가 의도적으로 기입한 악보의 기호들은 간과되어져서는 안 된다.(리스트가 했듯이)
이런 최소한의 전제를 받아들이는 것이 현대의 연주자들의 연주태도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답변이 되었는지 모르겠네요.

Lisamarie님의 댓글의 댓글

Lisamarie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저는 님이 바로크 음악까지 포함시키시는 줄 알고 쓴 댓글 입니다.^^

님이 읽으 신 그 책의 저자는 "쇤베륵" ( 설마 Arnold Schoenberg ?)  이 아니고
"숀베르크" ( Harold Schonberg ) 죠.

오타리라라 생각 합니다만 만약 한국서 이렇게 번역했다면 이건 좀...^^

hexis님의 댓글의 댓글

hexis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제가 5년 전에 읽은 책이라 작가의 이름이 가물가물 합니다^^
Arnold Schoenberg는 확실히 아니예요. Harlod Schonberg이 맞는 것 같기도 하구요 하하..

Lisamarie님의 댓글의 댓글

Lisamarie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가끔 베리에서 그런 어이없는 글을 읽어서 번역을 의심하는 버릇이 생겼나 봅니다. 유학일기의 글 읽으셨는지요.
바흐의 Johannes Passion 을 " 죤의 정열" 로 번역, 출판한 이가 있었다죠...

XX님의 댓글

XX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hexis님께.
먼저 답글 달아주신 것에 먼저 감사드리고요, 또한 제가 음악 전공자라 미학에 대한 지식이 매우 짧다는 것을 고백하며 이야기 시작해 봅니다.

1. 악보의 해석이란 일차적으론 곡의 내용일 것이고 그건 필연적으로 연주 방식에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는 것이죠. 예를 들어 샤콘느를 춤곡으로 해석하느냐, 추모곡으로 해석하느냐, 혹은 엄격한 중세 음악의 틀 안으로 가둘 것이냐에 따라 연주방식은 현저하게 달라집니다. 음악이야 말로 (연주)형식 안에 내용이 침전 된 대표적 예술이 아닐까 싶네요.

작품의 정신적 내용을 언어로 파악한 것을 다룬 게 해석학이다. 라는 것 앞에서 저는 찌그러질 수밖에 없네요. 제가 이걸 제대로 공부해보지 않았으니. 그래서 질문을 드려봅니다.
첫째, 회화에서, 예를 들어 풍경화나 정물화의 경우, 예술가의 정신적 내용은 얼마나 담겨있으며, 또 언어적으로 그것을 얼마 큼이나 옮겨 서술할 수 있을까요?
둘째, 회화에서는 그것이 가능하지만 음악에선 정말 전혀 불가능한 것일까요? 아니면 미학연구가 조형예술과 언어예술에 치중하면서 음악을 등한시한 건 혹시 아닐까요?

다음으론 별로 중요한 것 같지는 않은데, 왕벌을 예로 드셨으니, 왕벌을 시각적으로 묘사한 회화와 왕벌의 "비행"을 실감나게 묘사한 음악 중 어느게 더 자연을 잘 묘사했는가는 쉽게 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짧게 스칩니다.

2. 악보에 충실한 연주가 주류로 형성된 건 저는 조금 다른 시각으로 봅니다. 이미 본문에서 쓴 바와 같이, 기보의 발달역사를 보면 현대로 들어올 수록 악보에 충실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죠. 이건 어떤 연주 방식에서의 유행이라기 보단 저는 악보기입 형식의 발전/변화의 특수성에 더 큰 이유가 있다고 봅니다.

악보에 기입된 기호라는 것도 본글에서 말했듯이 절대값이란 없습니다. 대단히 상대적이죠. 전 이부분을 언급했었고, 동시대의 연주자들이 작곡자와 상의하여 악보의 일부분을 수정하는 일이 적지 않게 있다는 것도 염두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이 모든 건 클래식 음악이 지니고 있는 "악보에 대한 기본적 충실성"을 틀로 이뤄진다는 건 너무나도 당연할 겁니다. 그렇지 않다면 스스로 작곡하거나 재즈를 연주하거나 할 일이겠죠.

3. 바하연주의 다양성을 결론으로 내린 건 사실 바하의 작곡의도에 충실하자는 의미와도 상통합니다.

5. 4번이 없네요^^ 다양성에 대한 의견은 일치합니다. 끊임없이 전개되는 차이의 놀이. 차이의 놀이는 전개 되면서 그 자체 내에서 또 가치있는 것들을 생성/판단해 내고.. 뭐 그런 게 아닐까 싶네요^^;;;;

hexis님의 댓글의 댓글

hexis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제 코멘트에 대한 답변 잘 읽어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1. 제가 생각하는 '내용'과 님께서 생각하는 '내용'이 다른 것 같습니다. 제가 생각한 '내용'은 이미 해석학적 입니다. 즉 예술가가 자신의 작품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 입니다. 니체의 Also sprach Zarathustra를 예로 들면, 구체적인 이야기와 니체가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Uuml;bermensch, Wille zur Macht...)가 제가 의미한 내용에 해당되겠지요. 님의 글을 보면 음악형식인 '샤콘느'가 마치 곡의 내용이라는 오해를 불러 일으키게 하는데 글쎄요... '샤콘느'가 한 곡의 내용일까요? 만일 누군가 운명 교향곡을 쓰고 있는 베토벤에게 '당신은 지금 어떤 내용을 곡으로 만들고 있소?' 라는 질문에 '교향곡!'이라고 답한다면 뭔가 이상할 것 같군요. 음악의 형식과 내용의 구분이 좀 더 명확해져야 할 것 같습니다.

2. 한 회화작품에 예술가의 정신이 담겨질 수 있느냐?, 이 질문에 대해서는 굳이 제가 아니더라도 많은 분들이 '그렇다'고 답할 수 있을 거예요. 도상학Ikonographie라는 Kunstwissenschaft의 한 분야가 바로 이 문제를 다루고 있거든요. 도상학은 한 회화작품에 묘사된 대상이나 인물의 상징성을 다룹니다. 회화는 이렇게 음악과 달리 예술가가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상징'을 통해 시각화 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의미를 전달할 수 있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여기서 '왕벌의 비행'을 다시 예로 불러와 논의하자면, 음악이 '왕벌의 비행'을 다룰 때에는 비유적인 의미에서 '이 작품이 왕벌의 비행을 묘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만일 음악이 문자적인 의미에서 '왕벌의 비행'을 묘사한다면, '벌의 날개짓이 발생하는 진동수를 탐구하고 그것이 인간의 귀에 어떻게 들리는지 과학적으로 연구한 다음 그것을 거의 똑같이 재현'해내야 합니다. 그러나 음악은 이런 귀찮은 일들을 수행할 필요가 없죠^^
외부대상을 보다 사실적으로 재현해 내기 위해 기하학을 이용한 투시법을 르네상스 화가들이 개발시킨 것 처럼 자연의 소리를 더 사실적으로 재현해 내기 위해 과학적이고 수학적인 방법고안에 몰두 했다는 음악가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앞으로도 그렇겠지요.
제목이 없으면 사람들은 아무리 '묘사적인' 작품일지라도 다양한 이미지들을 떠올릴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게 음악언어의 한계이자 동시에 장점입니다.
음악언어를 열등한 것으로 보는 것과 전혀 무관합니다.

2.3 번의 내용에 대해서는 저도 동의합니다.

4. 제 개인적인 음악미학적인 견해를 밝히자면, 저는 음악이 우리에게 '쾌'를 불러 일으키는 이유가 '언어적, 시각적 인지방식에서의 해방'에 있다고 봅니다. 어떤 학자가 이미 이런 견해를 폈는지 잘 모릅니다. 아무튼 저는 음악이 인간지각의 80퍼센트 정도를 차지하는 시각적 정보의 의존도에서 우리를 '쉬게' 만들어 주기에, 또한 사회 속에서 타인과의 끊임 없는 언어적 정보교환 작업에서 우리를 '쉬게' 만들어 주기에, 음악은 우리에게 일종의 '해방적인 쾌감'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클래식 음악을 들을 때, 우리는 마치 언어와 상징의 세계를 훨훨 날아 벗어나 뭔가 더 직접적인 무언가와 교감한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진화생물학적인 측면에서도 한 번 연구해 볼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생존에 '시각적 정보'는 그 어떤 감각정보 보다도 중요했을 겁니다. 나무그늘 아래서 쉬고 있는데 숨어 있는 맹수를 알게 되는 과정을 한 번 상상해 보세요. 처음엔 소리를 통해 낌새를 알게 되었을지 몰라도 그것의 정체를 알게 되는 순간은 눈으로 직접 보는 순간이었을 거에요. 이런 고단한 생존투쟁의 나날에도 인간은 축제를 즐겼습니다. 그리고 그 축제의 중심에는 격한 리듬의 음악이 공통적으로 있었습니다. 인간이 놀이의 동물이라면 음악이 그 놀이에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한 번 해봅니다.
그러고 보니 토론 없는 축제는 본 적이 있지만, 음악 없는 축제는 본 적이 없네요.

저의 경우 얼마전에 글렌 굴드가 연주한 바흐의 파르티타를 듣고 있다가, 이유를 알 수 없는 우울함에 젖어 끙끙 앓아야 했습니다. 물론 기분이 나쁘지 않은 그런 우울함이지요. 이게 음악의 힘이 아닐까 합니다^^

XX님의 댓글의 댓글

XX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이제 님께서 언급하신 내용이란 게 무엇을 가리키는지 대충 이해했습니다. 여기에 대해 스치는 생각들은 많습니다만, 해석학을 제대로 공부해보지도 않은 제가 계속 토 다는 건 좀 뻘짓 같아 참고요^^;;
다만 형식에 내용이 침전된다는 얘기는 샤콘느, 소나타, 변주곡 따위의 악곡 형식이 곧 내용이란 뜻은 아닙니다. 화성분석 형식분석을 비롯해 논리적 인식의 소통이 아닌 직관적 소통일지라도 작곡자와 연주자 사이에서의 소통, 작곡자의 작곡 의도, 경우에 따라서 구체적 내용 등등이 궁극적으론 연주형식 속에, 좀 더 거창하게 말하자면 여럿 중 하나로 발생한 진리는 형식 속에 침전한다는 얘기였습니다.
이걸 단적인 하나의 예로 설명하자면, 샤콘느에 대하여 바하가 '나는 죽은 아내를 애도하는 마음으로, 사랑했던 아내와의 모든 시간을 담아내려 했다' 라고 답했다면 지금 연주되는 샤콘느는 확실히 좀 달라졌을 겁니다.

hexis님의 댓글의 댓글

hexis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예, 저도 작곡자가 어떤 곡에 대한 자신의 의도 및 느낌에 대한 발언이 곡의 연주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요소라는 점에 동의합니다. 구스타프 말러의 개인적인 가족사적 불행을 모르고 말러의 교향곡을 지휘한다면, 글쎄요...^^

시간이 되신다면 현대음악을 어떻게 일반인들이 이해해야 할지, 뭐 그런 테마로 글을 써주셨으면 합니다. 저도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고 또 취미로 작곡을 하고 있지만, 현대의 클래식 음악이 아직은 친근하게 와 닿지 않거든요.
'음악미학'의 입문서에 보면 음악은 우리에게 '쾌'를 불러 일으킨다는 내용을 쉽게 볼 수 있느데, 현대음악, 특히 불협화음으로 쓰여진 곡들 역시 이런 '쾌의 논리'로 설명이 가능한 건 가요? 아니면 우리가 음악을 너무 좁은 시각으로 보고 있는 걸까요?
혹시 평소에 이런 문제로 고민을 해보셨다면 시간이 허락하는 데로 글 한 편 올려주셨으면 해요.

그럼 감사합니다~

XX님의 댓글의 댓글

XX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아... 제가 현대음악을 좋아했으면 현대음악을 중심으로 연구를 했을 겁니다. 전 바하를 끔찍히 좋아하거든요^^

잘은 모르지만, 불협화음/무조곡 으로 대표되는 현대음악의 발전은 '쾌의 논리'와는 좀 다른 것 같습니다. 귀로 듣기 좋은 "쾌"라기 보다는 소위 '형식적 파괴'라는 작곡자의 창작 원리에서의 쾌가 아닐까 해요. 바하 이후 단순해졌던 화성 전개는 인상주의에서부터 전에 없던 새로운 화성진행에 가치를 두며 발전했습니다. 고전적으론 혐화음으로 돌아가려는 성질로서 불협화음을 사용했었는데, 이 틀을 깨뜨리는 방식으로 불협화음을 사용하다 보니, 불협화음과 협화음의 관계적 힘을 버리고 불협화음을 독자적 성격으로 개체화 시킨 결과라고 보여집니다.

이런 경우일 수록 대체로 작곡자의 작곡 의도를 언어를 통해 이해하는 게 제일 빠르지 않을까 싶어요.

오늘 답변들을 통해 많이 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XX님의 댓글의 댓글

XX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아 그리고,
음악이 우리에게 '쾌'를 불러 일으키는 이유가 '언어적, 시각적 인지방식에서의 해방'에 있다고 봅니다. 라는 말씀 정말 멋집니다!!

근데요,,, 악보 들이 파는 연주자들 머리통은 터져나간답니다 ㅋㅋ

hexis님의 댓글의 댓글

hexis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전 어차피 음악분야로 논문 쓸 일 없을 테니까, 관심이 있으시면 제 아이디어를 가져가셔도 됩니다 하하..
이런 견해가 기존에 있었는지 잘 모르겠어요. 암튼 요즘 음악미학은 뇌과학 같은 최신 과학적 지식도 잘 활용하더라구요. 음악분야에 저 보다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분들이 제 견해를 우선 검토하고 더 발전시킨다면 좋을 것 같군요.

아 그리고 연주자 분들이 한 곡을 연주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를 '해방시켜 주기' 위해서 스스로 '악보라는 시각의 감옥'에 갇혀야 하는 그런 분들이지요^^

암튼 감사합니다.

[자유투고] 자유·토론게시판 목록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137 XX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6467 06-01
136 XX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3311 05-31
135 XX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741 05-31
134 XX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4485 05-29
133 XX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777 05-28
132 XX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1757 05-27
131 XX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4859 05-25
130 XX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434 05-25
129 XX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4595 05-25
128 XX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802 05-25
127 XX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2998 05-18
126 XX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4592 05-17
125 XX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4187 05-16
124 XX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6368 05-16
123 XX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4406 05-15
122 XX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3563 05-14
열람중 XX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3311 05-10
120 XX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6746 05-10
119 XX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3325 05-09
118 XX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3669 05-07
게시물 검색
이용약관 | 운영진 | 주요게시판사용규칙 | 등업방법 | 개인정보취급방침 | 이메일무단수집거부 | 비밀번호분실/재발급 | 입금계좌/통보방법 | 관리자문의
독일 한글 미디어 베를린리포트 - 서로 나누고 돕는 유럽 코리안 온라인 커뮤니티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