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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처럼 되리라 - 독일인 이해에 도움이 되는 설교…

페이지 정보

작성자 송단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10건 조회 3,295회 작성일 08-03-19 00:07

본문

부활절이 다가와서 교회선전도 할겸 염치불구하고 설교를 올립니다.
인내심을 갖고 잘 읽어보시면 독일 기독교의 몰락의 원인을 희미하게 나마 알 수 있습니다. 독일인 이해에도 도움이 됩니다.

2.3.08. 하이델베르크 한인개혁교회, 송다니엘.


너희가 하나님처럼 되리라

창 3:4-8
요절: 3: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인류 역사상 규모가 제일 크고, 잔인하고, 후세에까지 깊은 흔적을 남겼던 전쟁은 어느 전쟁이였을까요? 그것은 30년 전쟁(1618-1648)이었습니다.독일인의 40%가 전쟁과 전쟁이 몰고온 기근과 전염병으로 죽었습니다. 독일 전 인구의 40%! 우리가 지금 살고있는 하이델베르크는 당시 팔쯔 지방에 속했었는데 팔쯔에서는 98%의 인구가 죽었습니다. 단지 2%만이 살았다는 이야기 입니다. 이는 30년 전쟁의 화근중의 하나였던 프리드리히 5세가 팔쯔의 선제후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30년 전쟁이 종교싸움으로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구교와 신교의 싸움으로 30년 전쟁이 시작되어 나중에는 유럽 제후들의 패권다툼으로 진전되었습니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하기까지는 기독교가 하나였습니다. 한 하나님, 한 교회, 한 지도자(교황), 한 성경, 한 유럽… 모두가 하나였던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을 통해 세상이 둘로 갈라졌습니다. 절대적인 진리로 믿었던 카톨릭의 권위가 무너졌습니다. 신교가 생겼습니다. 그러면 하나님도 둘로 갈라졌을까요? 아니면 이 구교의 하나님과 신교의 하나님중에 어느 분이 진짜 하나님일까요? 이것은 당시 거의 100%가 신자였던 시대에서는 매우 심각한 질문이었습니다. 거의 모든 사람이 천국과 지옥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었을 때였습니다.

그런데 이 판단은 누가 해야하는 것입니까? 당연히 내가 해야지요. 그런데 내가 무엇을 근거로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가 있습니까? 만약 내가 판단을 잘못 한다면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닙니까?

30년 전쟁에 장교로 참전하여 이 참담한 비극과 종교의 모순을 체험한 한 젊은이가 이 질문에 대답을 내렸습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cogito ergo sum)
데카르트의 이 한마디는 인간의 의식을 중세에서 근대로 바꾼 혁명적인 말이었습니다. 그로 인해 근대 철학이 시작됩니다.

여러분은 왜 존재합니까? 여러분이 지금 존재하고 있는지 어떻게 알 수가 있습니까? 대답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생명을 주셨기 때문에 나는 존재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너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 혹은 딸이다“ 라고 말씀하셨으므로 나는 지금 내가 살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데카르트는 일단 모든 것을 의심해 보았습니다. 자신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도 의심을 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의심을 할 수 없었던 단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의심하고,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Cogito, 자신이 지금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은 의심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데카르트의 이러한 이야기는 너무도 당연한 것 같아서 우리가 논할 필요도 없는 것 같지만, 실상은 이 한 마디는 판도라의 상자와도 같은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시로 부터 출발하여 사고를 해오던 서양사람들이 드디어 자신이 „주체“가 되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진리를 결정하는 주체와 객체가 바뀐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생명을 주시고, 나를 믿음으로 인도하셔서 내가 하나님을 믿게 된 것이 아니라, 이제 내가 스스로의 판단에 의해서 하나님이 계신지 아닌지를 알게 된 것입니다. 인식의 순서가 하나님으로부터 나가 아니라 나로부터 하나님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존재여부는 나의 인식이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무신론의 길을 열어주는 것이 됩니다. 왜냐하면 나에게 하나님이 없다고 인식되면, 하나님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시조차도 그것이 과연 옳은지 그른지 인간의 개인의 판단에 맞겨지게 됩니다. 성서 비판의 길도 열리게 되었습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데카르트의 cogito(„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의 약칭)의 발견으로 인해 인간의 눈이 밝아져서 인간은 선과 악을 스스로 정의할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계시인 성경이 더 이상 필요가 없이 인간 스스로가 무엇이 선이며, 무엇이 악인지를 구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자기의식(Selbstbewusstsein)이 새로이 싹트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계명은 우리의 판단의 건너편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우리의 판단의 대상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는 우리는 우리의 개인적인 의견을 가질 수가 없고, 우리가 첨가하거나 덧붙일 수도 없는 것입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마 5:18)
진실로라는 말은 원문에는 „아멘“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기 전에 먼저 „아멘!“으로 맹세를 하셨습니다.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리라. 예수님의 삶은 율법을 100% 이루는 삶이었습니다.

하와는 하나님의 계명에 별로 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은 말 한 마디를 덧붙혔습니다. 이것이 사단에게는 하나의 분명한 싸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고 속입니다. 그 다음에 엄청난 약속을 합니다: „너희가 하나님처럼 되리라!“

너희가 하나님처럼 되리라! 이 말은 참으로 의미 심장한 말 입니다. 우리가 판단을 할 수 있게 되어 선과 악의 기준을 세울 수 있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즉 하나님을 떠나 새로운 율법을 세우고, 인간이 자신 스스로를 계발하여 하나님처럼 된다는 의미 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대단히 주의를 기울여야 되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와의 범죄로 인하여 사단의 약속이 실현되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인간은 하나님처럼 되었고, 또한 하나님처럼 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단의 약속이 독이 되어 우리의 핏속에 흐르고 있습니다.

데카르트이후 약 150년에 괴테에 의해 “너희가 하나님처럼 되리라!“ 라는 사단의 약속이 꽃을 피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계명을 떠나 자신을 계발해서 스스로가 하나님이 되었습니다.

사단(메피스토펠레스)은 파우스트를 바로 이 말로 유혹합니다:
„너희가 하나님처럼 되리라“ „eritis sicut deus  scientes bonum et malum“ (당시에 사용하던 라틴어 성경에는 하나님의 복수형 dii로 되어 있음) „선과 악을 알게되어 너희가 하나님처럼 되리라“

하나님처럼 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하면 됩니까? 매우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조금만 바꾸면 됩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바꾸는 것이 왜 그렇게 위험합니까?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판단한다는 것, 즉 자신이 스스로를 하나님 위에 세우는 행위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그대로 순종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대로 바꾸어 준종하여 실제로는 자신의 생각을 순종하는 행위입니다.

파우스트는 자신의 처지를 놓고 고민을 하던 터라 사단의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이제 파우스트는 죽을 때까지 하나님처럼 많은 것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사단이 그의 삶의 동반자가 되어서 그의 소원을 들어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댓가는 적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단이 파우스트를 하나님처럼 살게해주는 댓가로 그가 죽을 때 자신의 영혼을 사단에게 넘기는 것입니다. 즉 파우스트는 하나님처럼 되는 댓가로 자신의 영혼을 사단에게 파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파우스트의 삶은 그렇게 행복하지는 않았습니다. 결국 그가 죽게되어 사단이 그의 영혼을 차지하려고 하자 천사들이 나타나서 그의 영혼을 데려갔습니다. 파우스트는 결국 천국에 갔습니다. 이로써 괴테는 성경을 100% 왜곡했습니다.
결국 인간은 하나님의 율법을 떠나서도 „나름대로의 선과 아름다움과 예절“을 찾아 애쓰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파우스트의 하나의 메시지입니다.

인간의 마음에는 항상 „나름대로“라는 유혹이 있습니다. 이 나름대로라는 말은 자신이 „무엇이 선이며, 무엇이 악인가“를 결정한다는 의미입니다. 즉 구원의 길을 스스로 만든다는 이야기 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단이 여자를 유혹하는 핵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조금만 벗어나라, 그러면 네가 하나님같이 될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허영심을 자극하는 사단의 유혹입니다. 그리고 그는 계속해서 말합니다: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여러분, 독일사람들은 종교개혁부터 현재까지 500년 역사를 통하여 수많은 시련과 도전을 겪었습니다. 100%가 기독교인이던 사회에서 데카르트의 길을 선택한 사람, 파우스트의 길을 선택한 사람 등등이 대부분입니다. „당신은 거듭난 신자입니까?“ 라는 질문에 „예“라고 자신있게 대답을 할 수 있는 지금은 사람은 대략 1%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님 말씀을 나름대로 해석하지 않고 그대로 지키는 자들입니다.
기독교 역사가 매우 짧은 한국은 약 20%가 신교도입니다. 그들에게 똑같은 질문, „당신은 거듭난 신자입니까?“ 라고 질문한다면, 대부분은 그렇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중에 하나님의 계명을 있는 그대로 지키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요?

구약에 있어서 선지자들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하나님의 계명을 떠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계명을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그들은 타락한 이스라엘에게 끊임없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기를 촉구합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의 게으름을, 혹은 열심이 없음을 꾸짖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그들의 종교적 열심은 대단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모든 것을 하나님의 계명대로 행하지 않았습니다. 즉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되 온전히 지키지 아니하였습니다.

지금 한국교회에서 하나님의 계명을 두려움으로, 혹은 기쁨으로 준행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요? 사람의 계명보다 하나님의 계명을 우선적으로 하는 신자들은 얼마나 될까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킴으로 하나님 사랑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사람이 진정한 신자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의 계명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운 마음으로 받아들여서 실천할 때 비로서 신앙생활, 혹은 영적생활의 길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영적인 전쟁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럴때만이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그리고 자신이 누구인가를 올바로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럴때만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은혜, 부활의 능력을 몸으로 체험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계명을 벗어나 신앙생활을 하게될 때, 그는 하나님을 떠나 자력 구원의 길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면 이것이 자신이 하나님이 되는 길을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함으로서 올해 많은 영적인 열매가 맺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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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놀아보세님의 댓글

놀아보세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소위 "말씀"에 대해 수많은 해석이 있고, 수많은 교파가 있습니다. (한국의 셀 수 없는 교단을 봐도 알 수 있지요). 이 "설교"에 표현된 내용들은 "해석"입니까? 혹은 "말씀" 자체입니까?
오히려 말씀 자체와 신의 절대성을 강조한다고 한다면, 자신의 "해석"조차도 "의견"에 지나지 않다는 걸 고백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2. "설교"에서서 표현된 인간의 사고와 "말씀"의 철저한 분리 "의견"이 무력하기 짝이 없다 생각합니다. 소위 민주체제 내의 정치적 행위는 인간의 "사유"를 통한 결정에서 이루어집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선거제도이겠지요?
혹시 "설교"를 하신 분은 이 정치적 행위, 혹은 이 땅위에서의 거의 모든 행위를 "사유"가 아니라 "말씀"에서 (물론 자신의 주관적인 '해석'에 의지해서) 가져오십니까?
예를 들어 어떤 당을 지지할 것인지, 환경문제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가져올 것이며, 어떻게 행위할 것인지, 어떤 친구를 사귀어야 할지 등등의 모든 사회적/ 정치적 행위의 기준을 어디서 가져오십니까?

3.소위 "말씀"에서 가져온다 모든 행위의 규칙을 가져온다 해도, 이 말씀에 대한 주관적 해석과 말씀 자체가 일치할 것을 누구 보장합니까? 말하자면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해석에는 오류가능성이 전혀 없습니까? 그리고 누가 오류를 '오류'라고 규정짓고, 참을 '참'으로 규정짓으며, 그 권리는 어디서 옵니까? 더군다가 "계명"은 우리의 "판단" 너머에 있으니, 우리는 이 계명을 진술해서도 안되며, 진술될 수도 없으니 말이지요. 즉 이 계명은 말 그대로 하자면 표현되면 모두 오류가 되어 버릴 것입니다. 그리고 침묵해야 지요(이말은 결코 비트겐슈타인식의 "윤리"에 대한 침묵과는 전혀 상관없는 말입니다. 즉 알 수 없고, 표현될 수 없으니 그냥 '무'와 같은 것입니다).

4. 교회의 몰락의 의미를 알 수 없습니다. 몰락하지 않은 곳이 있다면 알려주시겠습니까? 혹시 한국, 혹은 미국을 들지는 않으시겠지요? 종교가 하나의 더러운 이익 정치 집단이 되어버린 나라를 거론하시긴 않겠지요? 혹은 교회의 '변화'라고 주장한다면 더 옳지 않을까요?

5. 인간의 사유능력과 말씀의 철저한 분리 자체는 "말씀"에 대한 사고 자체도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말씀에 대한 해석행위도 '논리학'의 틀 내에서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이해'의 형식입니다. 저의 말조차도, 그리고 "설교"라는 형태도 '논리학'의 틀 내에 있습니다. 이 논리학이란 것이 바로 인간의 사유의 형식이자 내용입니다.
사유능력과 "말씀"을 철저히 분리시키고, 대조시키는 행위는 자신의 설교 자체도 무의미하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인간으로서 더욱 솔직해지는 방법은 이 사유를 인정하면서, 이 사유의 틀 내에 머물 수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를 고백하는 것이지, 이 사유와 말씀 자체의 철저한 분리를 강조하면서 자신의 이론은 이 사유 바깥에 놓여 있다는 수행적 모순을 저지르는 게 아니라는 것이지요.

  • 추천 2

송단님의 댓글의 댓글

송단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가볍게 읽으시고 넘어가시지 않는군요.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시합니다. 진지한 질문이니 나름대로 대답을 해보겠습니다.

1. „인간의 사고, 사유능력과 "말씀"을 철저히 분리에 대해“
성경은 인간의 사고 능력을 경시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사고를 열어줍니다. 단지 사고의 전제를 제시할 뿐입니다. 이것은 계시 의존적 사고입니다. 성경에는 무수한 계시가 나와 있습니다. 단지 그 계시에 근거해서 사고를 하면, 진짜로 하나님을 닮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계시를 벗어나면 스스로 하나님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데카르트적 사고라고 제가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 스스로의 결단과 결정을 매우 존중합니다.

2. „어떤 당을 지지할 것인지, 환경문제에 대해서는“
성경은 본질적인 면만 이야기 하는 것이고 (하나님 사랑, 인간 사랑) 나머지는 자신의 양심과 양식에 맞깁니다. 각자 나름대로 결정을 할 자유가 있습니다. 본질적인 것과 비 본질적인 것을 나누고 있습니다.

3. „말씀에 대한 주관적 해석“
실상은 말씀에 대해 크게 해석할 것이 없습니다. 누구나 구원에 대한 것은 성경을 읽고 이해를 할수 있다는 것이 마틴 루터의 주장이고 저도 또한 그렇게 생각합니다. 교파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서로 약간씩 해석의 차이가 날 수 있지만, 그 차이가 근본 교리를 해치지 않는 한 큰 문제가 없습니다. 단지 한국의 교파 분열은 한국적 현상, 즉 권력투쟁에서 온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많이 타락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4. „교회의 몰락“
교회가 어느 사회집단에 들어가서 언젠가 부각이 되는 것은, 일반적으로 높은 도덕성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세력이 커지면서 교회의 본질과 도덕성을 잃으면서 본래의 모습을 잃게되는데 이것을 타락이라고 합니다.

5. '논리학'의 틀
성경의 내용에 대한 사유는 합리주의적인 „논리학의 틀“에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계시의 틀“내에서 이루어 집니다. 물론 계시 내에서는 논리와 합리가 당연히 동원되지만, 그것이 왕은 아닙니다.

대답이 불충분하리라고 생각되는데, 지면으로 대화를 하니 아쉽군요. 짧게 대답하는 것을 이해해 주십시요.

놀아보세님의 댓글의 댓글

놀아보세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자유투고 자리는 상호 토론할 수 있는 공간이지요. 상호 토론할 수 있다는 것은 기본적인 이성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합니다. 전 이 신뢰를 바탕으로 생각해 봤습니다.
개신교 안의 특정한 내용이 (말씀하셨듯이 해석이 필요치 않는 성경의 문장들이 있는지 모르겠으나 어떤 문장들을 교리의 핵심문장으로 '선택'할 때에는 반드시 '해석'이 전제되겠지요) 이성 자체를 부정하면서 이를 넘어서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에 대해선 침묵해야 마땅하다고 봅니다.
자신의 '짧은' 이성으로 해석된 종교의 내용을 절대적인 것인양 주장하는 것 또한 하나의 자기과신이 아닐까요? 일관된 신자라고 한다면, 이처럼 이성을 신앙과 대립시키는 입장을 지지한다면, 자신의 신앙 자체도 철저히 불확실한 것이며, 이 불확실성을 통해 자신의 겸손을 드러내는 게 더 마땅치 않나 생각해봅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신앙의 내용 자체도 '짧은 이성'을 통해 파악되는 것이라면 불확실한 것일테니 말이지요.

샬롬님의 댓글

샬롬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겸손하고 온전한 사람은 남을 무시하거나 멸시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온유함이 충만한 분이었습니다.
창녀를 만나도,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를 만나도,
그릇된 길에서 돌이키라고 하셨지, 결코 멸시하지 않았답니다.
심지어는 그런 자들의 발도 씻기셨고,
그런 자들을 위해 십자가까지 지셨습니다.

  • 추천 1

WindySmile님의 댓글

WindySmile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안녕하세요. 송단님.
저는 성경책을 사놓고 아직 읽지는 못하고 있는데요.
궁금한게 좀 있습니다. 간략하게라도 대답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1. 천국과 지옥의 개념에 대해 설명해주실 수 있으신지요?

2. 이슬람과 같은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은 지옥에 가나요?

3. 신약이라는건 예수님이 아니라 그의 제자들이나 그밖의 다른 사람에 의해 씌여졌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 역시 사람이니까 글을 쓰며 실수도 할수 있고 오해를 하기 쉽게 쓰여질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게다가 그 글들을 읽는 사람들조차 사람입니다. 전세계 모든
성경해석가들이 동의했다고 해서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들모두 사람이니까요.
그렇다면 무엇이 올바른 해석입니까.

4.저는 어렸을때 교회다니다 구약에 대한 설교를 듣고 실망하여 교회를 나왔습니다.
그러다 어느 크리스마스날 다른 사람손에 이끌려 교회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교회에서 연극을 했는데 이슬람과 불교인가 아무튼 다른 종교의 복장을 한 사람들를 사탄이라고
하며 저주를 내리고 번개를 내렸습니다.사람들은 좋다고 박수치고... 전 그때 쇼크를 받고 교회에 분노하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사랑의 종교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궁금합니다.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은 사랑하면 안됩니까.

5.독일에 와서 정말로 착하고 사랑이 넘치는 기독교인들을 만났습니다.
또 어느 카톨릭을 믿는 러시아아이와 영국에서 온 무슬림아이가 웃으며 대화하는 것을 보고
전 너무나 감동을 받았습니다. 두아이다 사랑으로 넘쳤었구요.
전 다시 교회에 관심이 생겨 혹시라도 내가 오해하고 있었던게 아닐까해서 성경책을 사게 된겁니다.
예수님조차도 사랑을 더 깊이 실천하기 위해 율법도 어기셨다고 하셨고
또 어떤 성경해설자는 예수님은 사람들을 율법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온것이다라고 합니다.
그러면 마지막 질문 하겠습니다. 사랑이 먼저입니까 율법이 먼저입니까.

송단님의 댓글의 댓글

송단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성경에 관심을 가진 분을 보니 반갑습니다.

질문 1,2에 대해서는, 분란이 일어날 수 있는 테마이니 일반인들이 사용하는 이 사이트에서 논의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봅니다.

3. 해석학의 문제
해석학의 문제는 매우 어려운 질문입니다. 기독교는 해석학의 오랜 전통이 있습니다. 문자적해석, 알레고리적 해석에서 출발하여, 해석자의 각 시대에 맞게 해석하는 법(Synthese mit jeweiliger Kultur), 헤겔의 변증법에 맞게 해석하는 법, 불트만의 실존적(하이데가) 해석, 구조주의적 해석…

제가 선호하는 해석학적 방법은 기술자 당시의 문화와 시대적 배경을 고려하며, 정확한 언어 분석을 하되 기본적으로는 성서 본문을 신뢰하는 이른바 유기적 영감설을 채택합니다. 즉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봅니다. 이 방법이 건전한 상식에 가장 부합하다고 봅니다.
대답이 너무 막연한 것 같으니, 제 카페(cafe.daum.net/HeidelbergChurch)에서 질문이 있을 때마다 질문을 해 주시면 대답을 해드리겠습니다

4. 사랑의 계명의 범위
불행하게도 한국교회에서는 아직도 니편, 내편을 가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종교의 자유가 있으며, 그렇지 않다손 치더라도 타종교인을 모욕하는 것은 신자의 태도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사랑의 계명에는 대상이 모든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이것을 분명하게 가르쳤지요. 당시의 유대인들도 하나님의 사랑의 계명은 유대인들에게만 적용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것을 교정시켜주신 것입니다.

5. 사랑이 먼저입니까 율법이 먼저입니까?
당연히 사랑이 먼저입니다. 제 카페에서 창세기 설교를 읽어보세요. 하나님의 죄인들에 대한 사랑은 우리가 상상을 초월합니다. 개인적으로는 „누구든지 하나님을 제대로 알기만 하면 신자가 된다“라고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너무나도 오해를 받고 있습니다. 율법은 단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진 약 1500년간의 임시적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율법이 지금은 무용지물이며 폐기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이 율법은 이제는 예수님의 가르침의 눈으로 다시 읽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사람이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되며 율법에서 해방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테마도 이해하기가 쉽지는 않으니 오랫동안 연구가 필요합니다.
먼저 요한복음을 읽어 보세요. 그리고 예수님과 사랑을 시작해보세요.

WindySmile님의 댓글의 댓글

WindySmile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우선 자세히 답변해주신데 대해 감사의 말씀드립니다.
하지만 질문 1,2에 대해 대답해주지 않으신건 많이 아쉽네요.
그런 분란이 일어날수 있는 테마일수록 드러내놓고 토론하는게 좋다고 생각하는데
숨기려고만 하면 이상하게 보이잖아요.
그렇다면 제가 생각하는 천국과 지옥의 개념이 완전히 틀린것인지 아닌지만
대답해주시길 바래요.

1,2  저는 천국이 우리가 죽은 다음에 가서 찬란한 햇빛받으며 날아다니고 행복하기만 하고
또 지옥은 불구덩이 속에서 영원히 고통받는 곳.. 어렸을적 생각하던 그런 유치한것은
아니라고 느껴집니다.
제가 생각하는 천국이란 세상을 아름답게,선하게 볼수있는 어떤 마음의 상태이고
지옥은 그렇게 볼수 없는 상태라고요.
21세기를 살고있는 우리에겐 시간의 개념, 즉 영원성이라는 것이 상당히 모호한 관념이라서요.

그리고 이것이 천국과 지옥이라면 이슬람을 믿든 무엇을 믿든 선한 세상을 본다는 것이 곧
천국에 간다라는 말이 되는것이고요.

지구의 어느 한편에는 '어디를 가든 여기보다는 나은' 사람들이 수두룩한데
이사람들이 단지 하느님을 모른다는 이유로 지옥에 가야한다면
전 이사람들과 또 착하디착한 무슬림들과 같이 지옥에 가는편이
더 나을거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3,송단님께서 대답해주신 그런 해석학적 방법중 어느하나도 그것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할수는 없는거군요.
그렇다면 올바른 해석이 무엇인가란 질문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거네요.


4.님께서 말씀해주신대로라면 제가 본 그 교회는 사이비겠군요.
 사이비가 아니라면 성경해석을 잘못한것이구요.

5.이 문제는 제가 성경을 많이 공부하지 않으면 알수 없는것같네요.
 송단님의 대답이 긍정적으로 들려서 성경책을 꼭 읽어보고 싶네 만드는군요.

송단님의 댓글의 댓글

송단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3. 저는 한국에서 불어, 불문학을 공부했는데 Text를 조심스럽게 읽으며 한자 한자 따지며, 혹은 음미하며 읽는 버릇이 있습니다. Text자체를 상당히 존중하지요.
성경도 그러한 자세를 가지고 읽고 있습니다. 한자도 버리지 않고 경외하는 마음으로 대합니다. 내용이 이상해서 화가 날때도 있지만, 다시 여러번 생각해보고, 또 설명서를 참조해보면 이해가 갈때가 많이 있습니다.

천국과 지옥을 논하기 전에 "예수님이 과연 누구신가"라는 질문을 품고 성경을 연구하시고 기도하시면 마음에 예수님께 대한 사랑이 싹틉니다. 아니 예수님이 자신을 사랑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샬롬님의 댓글

샬롬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저도 신학을 하고 있지만 지옥이야기는 참 거부감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옥이 없다는 주장도 많구요. 아들을 죽게까지 하면서 죄인인 인간을 사랑하신 하나님이 어떻게 지옥에 우리를 버려두겠는가? 하면서 말입니다. 저도 아직 두 가지 견해 모두 공감을 합니다. 지옥이 있다 혹은 없다. 아마 지옥이 없다면 한국교회 텅텅 비겠죠? 그러나 우리가 지옥에 가기 싫어서 교회에 다니거나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심장의 박동을 느낀 자라면 그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 지옥일 것입니다. 아치 불멸의 연인을 이별시키는 것과 같겠죠!

사실 저희 아버님도 교회 한번 안나가보고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러면 아버지가 지옥에 갔는가? 라고 누가 저에게 묻는다면 아마 귀싸데기 날려버릴 겁니다. 그래도 이런 첨예한 질문에 C. S. Lewis는 이런 답변을 했답니다.

"우리는 지옥에 대해 논의할 때 계속해서 우리의 원수들이나 친구들에게 내릴 수 있는 저주를 생각할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내릴지 모르는 저주를 생각해야 한다"구요. "우리 아내나 부모나 아들 혹은 이슬람에 대한 것이 아닌 바로 여러분과 저에 대한 것입니다" 라고 말입니다. 정말 맞는 말입니다. 혹시 나에게 그 저주가 임한다면 ... 일단 루이스는 지옥을 인정했구요, 그곳을 형벌(마태복음 25장), 파멸(마태복음 10장 28절), 바깥 어두움 등 박탈, 배제를 상징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건, 구지 지옥에 가보지 않더라도 지금 지옥에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는 죽음 후에 뭔가 특별한, 홀연히 어떤 변화가 있으리라고 생각하는데, 영원한 세계에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살아서 어떤 변화가 각 개인에게 일어나지 않으면 죽어서도 마찬가지 인거죠. 구지 하나님, 예수님 믿어야 합니다. 이런 말 하지 않겠습니다. 지금 지옥에 살고 있는 사람은 바로 태어날 때의 모습 그대로인 사람입니다. 자아가 그대로 살아있는 사람이죠! 자기에게 갇혀 있는 사람이고, 다른 사람은 절대 인정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자기의 만족을 영원히 누리는 사람은 자아의 노예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지옥이 준비되어 있다는 것은 자명하지 않을까요?

너무 부족합니다. 우리는 지옥에 대해 말하기 전에 갈보리에서 보이신 하나님의 사랑을 만분의 일도 모릅니다. 목사도 성도도 결코 모릅니다. 아마 만분의 십이라도 맛보았다면 세상이 이렇지 않을 것입니다. 지옥도 얘기해야겠지만 먼저 젖먹이를 잊는 부모가 있겠나요? 예 사람은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전에도 지금도 우리를 그 어떤 세상의 사랑 많은 존재보다 더 사랑하시는 그런 분입니다. 그분이 여러분을 초청하고 계십니다.

Fonny님의 댓글

Fonny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천국과 지옥이라... 그거 로마카톨릭이 면죄부 팔아먹으려고, 연옥 개념 첨가하여, 만든 개념 아닌가요? 희대의 사기극이죠. 죽음 이후를 말한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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