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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표적 - 성탄절 설교…

페이지 정보

작성자 송단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9건 조회 4,222회 작성일 07-12-23 19:15

본문

성탄절이라 성탄절 설교를 실었습니다.
기독교에 관심이 없는 분이라도 흥미로 읽어 주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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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절 2:12

그리스도의 표적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성탄절때 마다 성탄절의 메시지를 접하면서 느끼는 것은 오늘의 한국 기독교가 성서의 기독교와 다르다는 것입니다. 누가는 오늘의 본문을 통하여 이 사실을 우리에게 고발합니다. 우리는 성서의 기독교로 돌아가야 합니다. 성서의 기독교, 성경에서 가르치는 예수님은 과연 어떤 분인지,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떠한 모습으로 다가 오시는지 한번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한국교회가 잃어버린 복음을 다시 찾아야 합니다. 교회에서 쫒겨나버린 예수님을 다시 모셔 들여와야 합니다. 오늘 누가복음 2장 말씀을 통해서 기독교에 대한 우리들의 생각이 많이 바뀌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표적, 교회의 표적이 과연 무엇인가를 찾이내야 합니다.

 

본문 1-5까지 보겠습니다:

 

이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이 호적은 구레뇨수리아 총독 되었을 때에 첫번 한 것이라.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요셉다윗의 집 족속인 고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그 정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되었더라

 

지금 누가복음의 저자 누가는, 예수님이 어떠한 역사적인 정황에서 탄생했는가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태고적으로부터 출생이 예고된 모든 인류의 메시아( 3:15),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시면서 좀더 구체화되고, 그들이 타락하여 멸망하면서부터 더욱 가시화된 메시아의 탄생이 어떻게 이루어지게 되었는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메시아가 아무데서나가 아니고 바로 베들레헴에 탄생되시며, 어린 새싹처럼 오신다는 구약성경의 예언이 어떻게 이루어지게 되었는가 입니다.

 

그런데 이 누가복음은 형식적으로는 누구를 위해 쓰여졌습니까? 1 3절에 나오는 대로 로마의 높은 관리로 추정되는 데오빌로입니다. 그런데 그에게 뿐만이 아니라 당시에 이 글을 읽는 사람에게는 금방 눈에 드러나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당시의 전세계의 황제요, 구원자의 칭호를 갖고 있던 아구스도와 또 다른 왕이요 또 다른 구원자이신 예수님이 명확하게 비교가 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누가는 전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혹은 지배하게 될 두 왕, 혹은 두 두원자, 아우구스투스와 예수님을 극명하게 대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의 구원자 아우구스투스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었는지 알기 위해서는 구글이나 네이버에서 한번 검색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당시에 문명이 지배하고 있는 곳은 전부 정복하여 역사상 처음으로 지구상에 세계평화를 가져왔습니다. 따라서 당시를 Pax Romana(로마의 평화)의 시대라고 합니다. 그는 황제이며 군사권도 장악하고 또한 대제사장 이었습니다. (Pontifex Maximus. 이 칭호는 현제 교황이 사용).

 

법전의 발달, 대규모의 건축등 문화와 문명이 꽃을 이루었습니다. 오늘날까지 유명한 로마의 시인Vergilius (버질), Horatius, Ovidius는 당시의 시인입니다. 특히 버질은 많은 시를 통해 황제를 신이요 구원자로 찬양하였습니다.

 

이러한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호적하라고 했습니다.

아우구스투스와 같은 위대한 사람이 한번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렸습니다. 그랬더니 수천만명의 사람들이(아구스도의 인구조사 결과 6000만명) 작은 톱니가 되어 서로 맞물려서 돌아갔습니다. 이러한 역사의 수레바퀴는 아무도 저항할 수가 없습니다. 저항은 곧 죽음을 의미합니다. 저항이 있는 곳에서는 곳곳에 배치되어 있던 로마의 군단 Legion이 번개처럼 달려옵니다. 모든 사람이 그의 영을 따라 호적을 했습니다.

 

예수님, 하나님의 아들의 운명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보통사람보다도 더욱 가혹한 운명을 타고 태어나셨습니다. 부모님은 나사렛에서 고향 베들레헴까지 산길, 사막길을 포함하여 170Km나 되는 먼길을 걸어서, 혹은 나귀를 타고 가야만 했습니다.

 

호적이란 인두세 징수를 위한 인구조사였습니다. 모든 사람은 등록이 되어야 했었고, 머리당 세금을 냈어야 했습니다. 또한 재산세를 내야했습니다. 요셉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땅이 베들레헴에 있었으므로 과세를 위한 재산의 등록을 위해 고향 베들레헴으로 갔어야만 했습니다.

 

호적의 결과 세금 액수가 유다는 매년 600 달란트, 갈릴리와 베레아를 합해서 200 달란트가 책정되었다고 합니다. 이 금액을 환산하면 당시 6명 가족에게는 성인 90일분의 노동의 댓가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헤롯왕에게도 적지 않은 세금을 물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착취를 당했는지 짐작이 갑니다. 그들의 로마인과 세리에 대한 원망과 증오가 얼마나 컸는지 이해가 갑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복음서에서, 예수님께 향한 세금은 문제로 인한 질문, 세금때문에 자주 일어났던 폭동, 그리고 66년에 일어난 폭동으로 인해 70년에 이스라엘이 완전히 멸망해버린 반란도 우리가 대강이나마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로마인의 착취와 수탈에 대한 항거였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구세주요 왕이신 예수님은, 부모님이 역사의 작은 톱니바퀴처럼 굴러가다가, 출산일이 다 되었는데, 방이 너무 비좁아서 방에서도 태어나지 못하시고, 양들이 거처하는 마굿간과 같은 우리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나마 눕힐 곳이 마땅치 않아서 막 태어난 아기 예수를 구유에 눕혔습니다. 기독교가 해방신학과 얼마나 대조적입니까? 억누르는 지배계급에 항거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것이 아니라, 억누름을 당하면서도 구속의 역사를 이루어 나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구유에 누우신 아기 예수님은 기독교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 하나님이 아기로 태어나셨다. 하나님이 마굿간에 태어나셔서 구유에 누이셨다. 이 모든 것은 역사적인 사실이면서도 우리에게 상징적으로 가르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요 1:11에 한마디로 요약되어 있습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세상은 자신의 땅이었습니다. 자기 땅에 왔으나 아무도 그를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9:58은 이러한 관점에서 본 그의 지상의 삶을 나타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53:2에서는 이러한 예수님의 삶을 잘 나타냅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여러분, 위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예수님의 지상에서의 삶은 출생부터 죽음에 이르기 까지 낮은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또한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의 성격입니다. 즉 메시야 왕국, 예수님이 우리를 초청하신 하나님 나라는 낮은 자들만 들어가는 곳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 자신이 낮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낮다는 의미는 겸손하고 온유하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 만큼 겸손하고 온유하시며 참을성이 많은 존재가 있습니까?

우리가 평소에 얼마나 많은 죄를 짓고 삽니까? 우리는 얼마나 교만합니까? 우리는 얼마나 자주 하나님께 반항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우리의 이러한 모든 생각과 행실은 사람에게는 드러나지 않지만, 하나님께는 드러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진정한 의미에서는 우리는 한사람도 단 하루를 품을 수가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상대방의 생각을 모두 읽을 수 있다면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일생동안 변함없이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이 사실을 우리는 예수님이 지고 가신 십자가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 분의 3년간의 삶에서 알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구유에서도 알 수가 있습니다.

구유는 비천함의 상징입니다.

아구스도의 왕좌에는 Vergilius와 같은 천재적인 시인, 아첨하는 자, 권력자들이나 접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비천한 구유는 누구에게나 열려있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비천해도 구유에서 태어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비천한 자도 자기보다 더 비천해지신 예수님께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비천한 구유는 겸손하신 메시아의 상징일 뿐만이 아니라, 진짜로 비천한 인간의 상징임을 알아야 합니다. 구유는 바로 인간이 누워야 할 자리임을 알아야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스로를 속이고 속고 살고 있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비천하고 흉악한 죄인인가를 시인을 하려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성경이 가르치지 않아도 심층심리학이 밝혀줍니다. 인간은 자력으로 구원을 하기에는 전혀 소망이 없습니다. 자신이 비천함을 깨닫고, 이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럴때 구유에 누우신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에 들어오며 성탄절의 의미가 새로와지기 시작합니다.

 

구유에 누우신 하나님은 진실로 아무에게나 열려있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 성령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구유로 향해 열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천사는 양지기에게 구유에 누우신 예수님이 새로 탄생한 메시야의 표적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 표적이라는 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메시야 탄생의 표적, 메시야의 표적, 하나님 나라의 표적, 교회의 표적, 신자의 표적은 이 구유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한국교회는 끊임없이 구유를 벗어나려고 하고 있습니다. 좀더 힘과 권력이 있는 것, 좀더 호화로운 것, 명망이 있는 곳을 향해 달려갑니다. 이것이 이번 17대 대통령 선거에 잘 드러났습니다.

 

정작 세례요한처럼 지도자의 부도덕을 꾸짖음으로 순교할 생각은 하지 않고, 부도덕한 대통령 후보를, 그것도 신성한 교회의 강단에서, 더구나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에, 선거법까지 어겨가면서 지지 발언을 했습니다.

이것은 많은 교회지도자들이 일제시대에 민족의 고난과 동질성 회복에 참여하지 않고 신사참배를 하면서 오히려 권력에 아부한 사건과 본질적으로는 다를 바가 없다고 봅니다 .

 

그러니 교회에 어떻게 생명이 있을 수 있으며, 진정한 평화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교회에서 진리와 생명을 부르짖는다면 그것은 위선이 아니겠습니까?

 

진정한 평화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구유에서만 있습니다. 어떠한 인간도 구유에 놓인 하나님 만큼 비천해질 수가 없습니다. 구유는 지배하지 않으며, 꾸짖지 않으며, 정죄하지 않으며 단지 초대를 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스스로가 단지 우리의 비천함을 인정하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악됨과 헐벗음과 위선을 알고 계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님 앞에서 그러한 것들을 숨길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우리를 치료하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무 꺼리낌 없이 그분에게 올 수가 있게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용기를 주시기 위해서 인간의 모습으로 구유에서 탄생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를 구원하신 그리스도의 표적입니다.

 

우리 모두가 성탄절을 통해 이 구유의 표적앞에서 자신의 허몰을 깨닫고 낮아짐으로 진정한 평화, 기쁨, 자유를 누리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평화와 기쁨은 예수님이 다시 오실때 완성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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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Fonny님의 댓글

Fonny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안녕하세요, 목사님. 좋은 말씀에 감사드립니다. 관심을 갖고 흥미있게 집중해서 읽었습니다. 어떤 교회에선 말이죠, "하나님이 우리들의 죄를 다 용서했다"고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왜 자꾸 "넌 죄인이라는 걸 잊지 마" 하는지 이해가 안 갑니다.
목사님, 성탄 설교에 따스하고 포근하고 신기한 그런 요소가 더 가미되면, 설교를 들은 청중들이 눈감고 빙긋이 웃음지을 수 있는 하느님 말씀으로 들려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이솝우화에 해와 바람중 누가 세냐하는 이야기 아시죠? 나그네의 외투를 벗게하는 것은 따사로운 햇볕이었잖아요. 목사님들 설교가 따사로운 햇살처럼 성도들 마음에 들려주었으면 합니다. 그러면 알아서 외투를 벗지 않을까요.

성탄의 의미를 새길 수 있어서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이 설교를 읽는 모든 분이 하느님이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 놀랍고 감사하고 기뻐하는 성탄 전야가 되길 바라며...

VecCHia님의 댓글

VecCHia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하나님이 우리들의 죄를 다 용서했다"는 교회의 "당근"이구요,
"넌 죄인이라는 걸 잊지 마" 는 교회의"채찍"입니다.

  • 추천 1

꺽쇠님의 댓글

꺽쇠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참과 거짓을 바로보고 바로 말하는 게 참 설교라는 생각을 합니다.
옛날에 예언가들은 죽음을 각오하면서 과감하게 외쳤지요.
나단이 다윗왕 앞에서 그랬고, 세례요한도 헤롯왕 앞에서 과감하게 외쳤는 데 지금은 그러한 설교가 메말라가고 있습니다.
사람마다 생각하는 게 다르겠으나, “이것이 이번 17대 대통령 선거에 잘 드러났습니다.“ 하는 내용이 성탄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 하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겠지요?
“따사로운 햇볕” 같은 낱말만 골라서 하는 설교라면 “선교”가 아니라 불의에 침묵하는 “선전”이 되겠지요.

훌륭한 설교를 읽고 뜨거운 격려를 보냅니다.
모든 설교가들이 그러한 설교를 한다면 침묵하던 교회는 다시 살아나겠지요.
누가 뭐라 해도 예언가정신으로 이끄시는 훌륭한 목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송단님의 댓글의 댓글

송단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질문이 너무 심오한 것 같아 대답이 어렵군요.
조금 differenziert하게 해 주시면 대답이 쉬울 것입니다.
일단 가장 일반적인 대답은:

성경은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계시의 책이고, 설교는 이 계시를 쉽게 풀이하여 하나님의 뜻을 전하려는 시도입니다. 즉 모든 인간에게 하나님의 뜻을 풀어서 전하려는 노력이지요.

그런데 한국에서는 중세때와 마찬가지로 설교가 도구화(instrumentalisiert)되는 경향이 강해서 순수한 설교가 선포되는 경우가 적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나날이 타락되고, 반 기독교인들은 늘어나고...

이러한 점을 감안해서 사심이 없는 설교를 한번 올려보았습니다.
질문은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우리교회는 교인이 어차피 3-4명 밖에 없으니 대답할 시간은 있습니다.

송단님의 댓글의 댓글

송단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저는 하이델베르크에서 살고 있습니다. 신앙에 관심이 있으면 관광차 놀러오세요. 설교도 들을 겸. 하루밤 정도는 무료숙식이 가능하고요. 마음씨 좋은 제 아내가 맛있는 밥도 해드립니다.
카페: http://cafe.daum.net/HeidelbergChurch

팬교주님의 댓글

팬교주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종교에 대해서 코멘트를 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를 잘 알고 있습니다만, 저도 한국적이지는 않더라도 기독교인의 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므로 부담없이 여쭤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 하나님이 아기로 태어나셨다. 하나님이 마굿간에 태어나셔서 구유에 누이셨다. 이 모든 것은 역사적인 사실이면서도.." 라고 쓰셨는데요...

기독교인의 입장에서라면 충분히 긍정을 할 수 있는 표현입니다만, 이것을 감히 '역사적인 사실'이라고 할 수가 있을까요?  역사적인 사실은, '예수가 태어났다'로 끝나는 것이지, '하나님이 태어나셨다'로 표현하기가 어려울 듯 합니다.  즉, 예수=하나님이라는 등식은 개신교에서만 인정되는 등식이지, 인류에게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역사적 사실'이 아닙니다.

불교를 사랑하기도 하는 입장에서 표현하자면, 예수 탄생 수백년 이전에 이미 부처께서 중생을 구원하기 위해 세상에 왔다는 것을 '역사적 사실'이라고 표현한다면, 개신교 신자들은 반발하지 않겠습니까?  즉, 부처가 탄생하였다라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지만, 거기에 종교적으로 자신들만이 동의할 수 있는 내용을 포함해서 '역사적 사실'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공연한 반발을 부르는 것일 수도 있다는 노파심입니다.

좋은 뜻으로 올리신 설교라고 믿습니다.  그렇지만 앞으로는, 설교가 아닌, 개신교에 대한 설명과 훌륭한 견해들을 자투에서 뵙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이 희망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우리 베리 회원들은 조금 있다가 부처님의 '설법'을 또 베리에서 봐야 합니다.

송단님의 댓글의 댓글

송단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이곳은 설교를 올리는 곳이 아닌 곳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단지 성탄절이 되어서 예외를 만든 것 뿐이지요.
또한 이번 설교는 기독교가 가르치는 근본정신을 포함하고 있어서 한번 올려 보았습니다.
만약 설교가 일반 도덕성에 위배되고 잘못된 정보 선동을 포함한다면 (폭력의 합리화...)  공공장소에서 이야기 되는 것을 금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기독교의 근본 교리입니다. 이것 빼고는 기독교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듯 합니다. 무슨 말을 해도 이것이 근본에 있습니다. 그래야 희생과 자신을 초월한 사랑이 이야기될 수 가 있습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몸소 보이신 것이지요.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을.

이것이 귀하에게 너무 종교적으로 들렷다면 사과를 드립니다. 앞으로 조금 조심을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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