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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밀양“과 한국의 기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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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송단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7건 조회 4,141회 작성일 07-11-04 19:51

본문

이 글은 주일 예배 설교지만 기독교 비판에 대한 대답입니다.
한번 같이 생각해 보지요.

영화 „밀양“과 한국의 기독교

마가복음 8:3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오늘은 원래 빌립보서 마지막 장에 대해 설교를 해야하는데 밀양이라는 영화 이야기를 주제로 설교를 하고자 합니다.

한국영화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배유진 자매님이 적극 추천하여서 이 영화를 한번 보았습니다. 한국교회의 한 면을 보고 싶었습니다.
이 영화는 칸느 영화제에서 명예로운 여우 주연상을 받았습니다. 나중에 알고보니 감독은 문화관광부를 역임한 이창동이라는 사람이었고 이청준의 벌레이야기를 각색했다고 합니다. 감독은 원래 기독교 비판을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인간과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에는 자신의 눈에 비친 한국교회, 혹은 기독교가 상당히 현실성있게 묘사되며 자신이 이해한 기독교의 허구를 날카롭게 지적하였습니다. 그는 기독교의 딜레마를 본 것입니다. 그리고 이 딜레마를 매우 극적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 그는 훌륭한 극작가이며, 기독교로부터 자신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요구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저는 이 설교를 통하여 대답을 하려고 합니다. 그의 질문은 대부분의 현대인이 교회에게 던지는 질문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입니다. 질문이 아니라 질책일 수 있으며, 강도높은 비판일 수도 있습니다. 이 비판에 합리적이고 솔직한 대답을 해 주어야 합니다.
제가 영화를 한번만 보고 평을 하는 것이니 만큼, 혹시 제가 잘못알고 있는 것이 있으면 지적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줄거리를 소개하면서 해설을 하고자 합니다.

젊은 여주인공 이신애는 남편이 교통사고로 죽자 아이를 데리고 남편의 고향 밀양에 내려와서 피아노 학원을 차리고 살아갑니다. 그만큼 남편을 사랑했던 것입니다. 자동차 수리센타를 운영하고 있는 총찬이라는 사람이 그녀에게 첫눈에 반해서 그녀를 짝사랑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녀를 끊임없이 쫒아다니며, 빈정거림을 당하면서도 그녀를 헌신적으로 도와줍니다.

그러다가 피아노 학원 옆에 있는 어린이집 원장은 신애의 아들을 유괴하여 죽이게 됩니다. 그는 신애가 돈이 많은 줄 알고 그녀로부터 돈을 얻어내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사건은 신애를 매우 큰 고통과 절망으로 몰아넣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아들과 함께 이제는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차가 다니는 길바닥에 주저앉아 울 정도로 인생이 너무나도 허무하고 절망적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소개로 동내 교회에 나가게 되어 거기에서 하나님을 믿게되었습니다. 그녀의 인생은 하나님을 믿자 급변하게 되었습니다. 매우 행복해졌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상태를 스스로 연애하는 기분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노방 전도도 나가며 기쁘고 힘차게 살았습니다. 그녀의 모든 상처와 고통이 극복되었습니다. 상처의 자리에 기쁨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주기도문을 외우며 하나님의 용서를 배우니,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실천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아들을 죽이고 교도소에 갖혀있는 자신의 원수인 어린이집 원장을 찾아가서 예수님을 전하고 자신이 그를 용서를 했다고 말하고 싶었습니다.

그녀는 교도소로 가는 길에서 그 원장을 위해 꽃을 꺾었습니다. 원장을 만나서 대담중에 그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전해주러 왔다“고 했습니다. 자기 아들이 죽은 사건을 통해서 자신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고 새 생명을 얻었다고 증거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 원장은 자신도 믿음을 갖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에게 찾아와 주셔서 회개를 하도록 하시고 죄를 용서해 주셨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죄를 눈물로 회개하고 용서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는 기도로 눈을 뜨고 기도로 눈을 감는다고 했고, 신애를 위해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신애가 믿음을 갖게된 것도 그의 기도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교도소를 나온 신애는 길거리에서 쓰러졌습니다. 그녀의 인생은 완전히 끝장이 난 것 같았습니다. 왜 그녀는 원장의 태도에 그토록 충격을 받았을까요? 그가 구원을 갖게된 것을 기뻐해야하지 않았을까요? 이것이 그녀의 방문 목적이 아니었습니까?
그녀가 아들의 살인범을 용서해주려 했던 것은 그녀의 신앙생활이 절정기에 달한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숭고한 최고의 행위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이것은 아무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녀는 신앙생활의 꽃인 용서, 즉 원수사랑의 경지에 도달했던 것이었습니다.

남편을 잃고 하나있는 아들마져 잃어버렸을 때, 그녀는 자신이 의지하고 있었던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 이었습니다. 그녀는 쓰러져 죽기 직전에 하나님을 붙잡아 새 삶을 찾게 되어 이제 원수까지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살인자에게 자신의 용서를 직접 선포하고 싶었습니다. 여기에서 그녀는 자신의 존재의미를 찾은 것 같습니다. 즉 그의 구원이 목적이 아니라 자신이 목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 즉 용서는 바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자신의 독생자 예수를 죽였던 인간들에게 용서를 선포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도 하나님처럼 그 죄인에게 용서를 선포하고 싶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보다 하나님께서 한 발이 빨랐습니다. 그녀가 용서를 선포하기 전에 하나님이 먼저 용서한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그녀는 자신의 존재의미를 잃었습니다. 그녀는 앞으로도 존재의 의미를 잃었다고 생각할때마다 구토증을 느끼게 됩니다. 그녀는 이 허무감을 이기지 못해 길거리에서 쓰러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배신감을 느꼈습니다. 자신의 권리를 하나님께 빼앗긴 배신감입니다.

그 다음부터 신애는 힘을 내어 하나님께 복수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에 가서는, 기도를 하고 있는 사람들을 방해하고, 유행가 CD를 구입한 후, 야외집회에서 목사가 확성기로 열심히 기도를 하고 있는데 „거짓말이야“하는 노래를 더 크게 들려줍니다. 목사의 기도도 전부 거짓말이라는 것입니다.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사랑도 거짓말!“ 예 이것이 바로 극작가가 기독교에 대해서 하고 싶은 마음에 맺힌 말인것 같습니다. 인간의 사랑은 물론 하나님의 사랑도 거짓말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신애도 물론 자신의 믿음도, 사랑도 거짓말이라는 것을 절실히 깨달은 것입니다. 그렇게 마음에 충만했던 믿음이 이제는 물거품처럼 사라진 것입니다.

그녀는, 그 다음 순서로, 잘 알고 지내던 교회 장로를 유혹하여 성관계 직전까지 갑니다. 거기에서 장로의 믿음도 거짓말이라는 것이 드러납니다. 즉 모든 사람의 믿음은 위기의 순간에는 넘어질 수 있다는 한계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믿음의 본질은 자기 환각, 자기 기만, 즉 거짓말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유일한 의인은, 구박을 받으면서도 신애를 끝까지 사랑하고 보살펴주는 종찬이 밖에 없는 것입니다. 전혀 믿음이 없으면서도 신애를 따라서 교회도 나가고 교회 봉사도 하는 종찬, 비록 속물이지만 진심과 순정이 있는 남자, 여자의 치부를 다 보았으나 모든 것을 받아주는 그 남자.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대부분 위선자이고 그러한 남자가 의인이 아닐까요?

그런데 이 영화의 기독교 비판의 백미는 신애와 살인자와의 감옥에서 면회할 때의 대화에 있습니다.
용서를 해주려고 찾아 갔으나 이미 성자가 되어버린 그 죄수였습니다. 얼굴이 하나님의 은혜로 환하게 빛이 났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그는 기도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헌신된 자였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한국의 한 부류의 경건한 신자를 대표하고 있는 듯 합니다.
경건하고 헌신된자. 하나님께 용서를 받은 자!

그러나 신애는 본능적으로 그가 파렴치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가 너무나도 뻔뻔스럽게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도저히 용서 받을 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지만, 하나님이 용서를 해주셨다고 하니 그녀는 미쳐버린 것 이었습니다. 혼란의 극치에 빠져들어간 것입니다.

이것이 극작가가 구성한 기독교의 딜레마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분명히 용서를 하신 것 같습니다. 그가 회개를 하고 마음의 평안을 얻고 하나님을 경배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남을 위해 기도하는 의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는 신애에게 크게 죄책감을 갖지 않은 것입니다. 그녀의 유일한 아들을 죽이고, 그녀의 인생을 망쳐놓았는데도 말입니다. 마치 모든 것을 초월한 도사와 같았습니다. 최고의 경지에 도달한 수도사와 같았습니다. 이것이 신애를 미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속으로 이렇게 외쳤을 것입니다: „하나님, 어떻게 이러한 자를 용서를 해 주실 수가 있습니까? 그는 파렴치가 아닙니까? 나는 너무도 억울합니다. 죽은 내 아들도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당신의 공의는 도데체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그때부터 신애는 하나님께 도전하기 위해, 속된 말로 약을 올리기, 위해 여러가지 이상한 행동을 하게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을 쳐다보며 말을 던집니다 „난 너한테 안져!“ 손을 칼로 그어서 피가 낭자하게 흐르게 하고 하나님께 소리칩니다 „“이것 봐! 보여?

여러분, 신애, 혹은 극작가 이창동씨가 기독교에 대해 혹시 무엇을 오해한 것이 아닐까요?
하나님이 과연 그 살인자를 용서했을까요? 그 살인자는 성자가 되었을까요? 하나님의 용서란 무엇입니까?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이러한 기독교의 본질적인 문제들에 대해 한번 집어봐야 할 것입니다.

이창동의 비판은 근본적으로 한국 기독교가 종교화가 되어버린 것에 대한 비판입니다. 기독교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떠나 종교가 되었다는 말은 무엇입니까?
사람은 교회생활을 잘 함으로써, 신과의 관계를 잘 맺음으로써, 경건한 생활을 함으로써, 기도를 잘 함으로써, 신앙생활에 큰 기쁨을 누림으로써, 구원의 확신을 가짐으로써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종교생활을 잘 함으로써 올바른 신자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을 그렇지 않습니다. 기독교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입니다. 위에 열거한 신앙생활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빠져있습니다. 신애와 교회 장로님도 그러한 신앙생활이 전부인 줄 알았다가 위기의 순간에 그들의 신앙이 여지없이 무너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단지 하나의 신적인 초월적인 존재로만 여겨졌던 것입니다.

살인자의 신앙에도 예수 그리스도가 빠져있습니다.
거듭난 신자의 특징은 예수님과의 교제를 통하여 속사람이 자라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강건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전체가 예수님 자체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자체이시며, 예수님은 모든 사람에게 생명을 주시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 살인자는 한 생명을 이미 빼앗았고, 그로 인해 또 한 생명, 즉 죽인 애의 어머니에게 말할 수도 없는 큰 고통을 앉겨주었습니다. 진정한 회개란 이러한 고통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신앙인이란 이웃의 고통을 아파하는 자 입니다. 이웃을 위한 자입니다. 이웃을 위한 책임을 지려고하는 자입니다. 그는 신애를 위해서 책임을 져야 하는데, 그는 그러한 짐과 고통에서 빠져나와 신에게 귀의를 한 것입니다. 통회함이 없는 곳에 사죄가 선포된 경우입니다. 그런데 그런 신은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큰 문제입니다.
신자가 예수님처럼 남을 위해 십자가를 지기는 커녕, 남에게 해를 끼치고도 하나님께 도주를 하는 것, 이것은 성경에서 가르치는 기독교가 아닙니다.
회개란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일생동안 양심의 고통을 이겨나가는 것입니다. 고통을 잊어버리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잊는다는 것은 자기기만입니다. 이러한 긴 고통의 과정을 통하여 신자는 예수님께 가까이 가게되고, 이웃의 고통을 이해하게되고 진정으로 사랑하게 됩니다.

이러한 문제는 여 주인공 신애에게도 나타납니다. 남편과 외아들을 잃은 충격과 슬픔은 믿음이란 요술 방망이를 맞고 단번에 치유되는 것이 아닙니다. 일생동안 예수님과의 관계속에서 상처가 서서히 아물고 아픈 마음에 예수님의 사랑이 대신하게 되는 긴 과정이 필요로 합니다. 용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용서를 하라고 하셨다고 해서 우리가 용서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용서는 하나님이 하실 일이지 우리 인간이 할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우리를 하나님의 사역에 맏기는 것, 이것이 기독교의 본질입니다. 신애는 살인자를 용서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용서를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면에서 볼때 이 영화에서 나타난 한국 기독교는 매우 피상적인 종교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실제로는 그렇지 않는 교회가 많이 있을 것입니다.
소위 은혜로운 찬송가를 많이 부르고, 할렐루야를 외치고, 눈을 지긋이 감고 손을 들고 찬양을 한다고 해도, 큰 소리로 기도를 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마음에 임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이 되신 예수님과 구체적인 관계가 필요합니다.

성경에는 수 많은 예수님의 계명이 있습니다. 이것을 모두 지켜야하는 것입니다. 계명 자체가 예수님이기 때문에 한 계명도 뺄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계명을 지키고자 할때 비로서 십자가의 의미가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예수님의 계명을 싫어하는, 즉 예수님을 증오하는 우리의 죄인됨을 발견하게 되며, 진정한 회개가 시작되며, 이웃 사랑의 십자가를 지게되며, 예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웃은 커녕,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조차도 사랑할 수 없는 죄인임을 깨달아야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깨달음에 자신을 굴복시킬때 만이 그리스도가 우리 마음속에 들어옵니다.

이러한 것이 이루어지지 않는 교회는 „거짓말이야, 사랑도 거짓말!“라는 유행가가 진리의 말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거짓말이라는 말이 아니라 인간이 거짓말이라는 것입니다.
강단에서 외치는 사랑하라는 설교부터 거짓말입니다.
기도도 찬양도 거짓말 입니다 .
이것이 예수님은 없고, 예수님의 계명은 무시되고, 종교생활만 무성한 교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감독 이창동은 신자가 아닙니다.
신자가 아니면 하나님을 알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은사, 참생명, 참 사랑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을 비판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눈에 비추어진 한국 교회를 비판한 것입니다.
비신자가 교회를 거짓말이라고 비판을 한다면 하나님의 판단은 어떻겠습니까? 하나님은 이창동보다 훨씬 예리하고 정확하지 않겠습니까?

따라서 교회는 외부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민감해야 합니다. 교회를 비판했다고 해서 „안티“라는 낙인을 찍을 것이 아니라 자성의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예수님의 가르침이란 무엇입니까?
간단하게 말해서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입니다. 이 둘중에 하나라도 빠지면 신앙생활은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 사랑은 실제 생활에서 거룩함으로 나타납니다. 자신이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방해되는 요소를 모두 제거해야하며, 예수님 말씀과의 끊임없는 관계속에서 거룩함이 이루어지고 보전됩니다.

이웃사랑이란 설명할 필요가 없이 간단한 것입니다. 이웃의 고통을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자비하신 하나님을 믿는 신자가 이웃의 고통에 무심하다면, 이것은 이율배반적인 것입니다. 이웃이 궁핍하면 돈을 주어야하고 도움이 필요하면 도와주는 것입니다. 사회가 올바른 길로 나가도록 힘쓰는 것입니다.

성도님 여러분,
하나님은 종교생활을 원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열매없는 잎만 무성한 종교생활을 비판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예언자들을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진정한 경배자들을 원하십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경배하는 자들을 찾으십니다. 그들의 이웃 사랑이 삶 속에서 나타나는 자들을 찾으십니다.
아멘!
추천4

댓글목록

Battery님의 댓글

Battery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글쓰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막판에 스크롤의 압박이 좀 있었지만 거의 다 읽었습니다.
신앙을 가졌다는것과 종교를 가졌다는말은 비슷한 말인거 같으면서도, 내면에는 큰 차이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몇몇 성도들은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한다는것을 자신의 믿음의 척도로 생각할때, 아쉬울뿐입니다. 그 봉사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할거 같습니다. 결국, 우리가 우리스스로 파놓은 무의식적인 무덤에 빠지게 되는것을 인지하도록 노력해야되지않을까 생각해봅니다.

bestehen님의 댓글

bestehen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얼마전에 우연히 영화 "밀양"에 대해서 주변 분들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
위와 같은 딜레마에 참 많은 의구심을 가졌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어린이집 원장과 신애의 관계에서 과연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많은 생각들을 했었는데, 이렇게 좋은 글을 올려주시니 감사합니다.
요즘 참 많은 일들이 기독교와 관련해서 일어나네요. 문화평론과 진중권씨의 cbs에서의 비판도 굉장히 느끼는 바가 많았습니다. 이럴때 일수록 더 자숙하고 반성해야 할 거 같네요.

VecCHia님의 댓글의 댓글

VecCHia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예..요즘 기독교에관한 많은일들이일어나죠.. (한국)기독교가 오히려 "그들의 하나님"을 불완한존재라고 몸소 증명해보이는 느낌마저듭니다.

어느 "하나"의 종교가아닌 모든종교는(사회의 규범과 상식이 허용하는안에서) 인간에게 소중합니다.

가족사랑님의 댓글

가족사랑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정말 글쓰시느라 수고 수고 하셧어요
전 그 영화를 못봤는데 안봐도 될 정도로 자세히 정리를 하셨네요..
제대로 된 교인으로 살아가는것 쉬운일이 아닌것 같습니다 ..

비숑프리제님의 댓글

비숑프리제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아멘! 누구나 한번쯤 꼭 읽어봐야할 글같네요. 예수님 믿는 자로써,, 다시 한번 제 모습 돌이켜보게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혹시 목사님이신가요? 어디서 목회하시는지... ^^

송단님의 댓글의 댓글

송단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나이가 들어서 목사가 됐는데 받아주는 교회가 없어서 올봄에 하이델베르크에서 개척을 시작했습니다. 2-3 몇명을 위하여 설교해야하고 가끔은 한명의 신자도 안오는데, 가끔 허탈할 때가 있지요. 이번 설교는 좀 별나다는 핑계로 베리지기님의 감시망을 피해 이곳에 올려보았습니다. 많은 사람이 설교를 읽어주니 좀 위로가 됩니다.

계속 직장 찾아보시고 유경험자들에게 배우세요. 97년도까지 저도 현채로 삼성에서 10년간 일을 했습니다 . 많이 싸워서 제 자리를 찾았는데, 처음에 설움을 당했습니다. 우리가 각별히 노력해서 동포들에게 설움을 주지 않고, 되도록 도움을 주어야 하겠습니다. 상처를 많이 당하지만, 그래도 사랑하려고 애쓰는 것이 기독인의 본분인것 같습니다. 건승하시기를.

VERITE501님의 댓글

VERITE501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진정한 종교관을 가지고 진심어린 마음을 느낄수 있는 좋은글 입니다.
장문의 글을 읽으면서 다시한번 스스로를 성찰할 수 있는 좋은 시간
이었고 진심으로 감사의 뜻 전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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