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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연애와 말장난…

페이지 정보

작성자 유덕인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30건 조회 1,705회 작성일 04-09-05 05:02

본문

저는 동성연애논쟁에 개입하지않으려 했으나 동성연애에 대해 옳바른생각을 갖고계신 목사님께서 쓰신글이라고 생각되어 베리가족 여러분들 모두를 위해 퍼왔습니다.



http://blog.naver.com/ametje.do?Redirect=Log&logNo=40004753090



동성연애, 서동진, 말장난 | 책망학 자료실 2004/08/05 17:37

http://blog.naver.com/ametje/40004753090


한국에서 동성연애 담론을 본격적으로 제기한 사람은 '서동진'이다.

한국에서 초창기에(그리고 지금도) 동성연애가 커다란 호응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서동진이 제법 공부한 '지식인'(젊은 먹물)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머리가 빈 사람보다는 말발과 글발이 센(어느 정도 가다듬어진 논리를 소유한) 사람이 동성연애 옹호 담론을 '띄우는데' 훨씬 유리하다.

왜냐하면 별 것도 아닌 것에 아주 '거창한 의미와 함축'을 달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동성연애를 옹호하는 것은 최근의 '급진적 성이론'의 핵심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다원주의적 성윤리학이 미발달된 한국 사회에서 매우 진보적인 사고를 하는 것으로 착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냥 "동성연애는 비정상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보다는 아무래도 "성은 없다. 따라서 그에 적합한 가정하는 성의 보편적 진리, 어떤 보편적 정의도 없다. 성은 어떤 실재적 체험을, 어떤 실재적 과정을 성화·탈성화 시키는sexualize.desexualize 권력의 메카니즘이며, 다양한 전략들의 합산효과이다"(서동진, 『누가 성정치학을 두려워하랴』, 사회평론, p.35.)라고 말하는 것이 듣기도 좋고, 지적으로 흥분도 된다.

서동진의 글은 현란한 현학과 화려한 수사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므로 그럴듯해 보이게 동성연애를 치장하는데 굉장히 능숙하다. 그래서 사회학과 문화학에 관심 있는 청년들 중엔 서씨의 화려한 이론과 언어에 반해 '서동진 키드'가 된 애들이 많다.

계속 증식하는(계속되는 말장난으로 인한) 화려한 이론과 언어를 소비하는 것만큼 먹물들(지식 호사가豪奢家들)에게 즐거운 일은 없기 때문이다. 더더군다나 서씨의 주장들은 급진적이고 진보적인 성이론으로 불리니, 그런 '래디컬'한 걸 소비하면 얼마나 기분이 짜릿하겠는가? 아무 것도 아닌 주제에 대단한 존재가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된다.

동성연애자들은 '저항'이니 '혁명'이니 하는 말들을 많이 사용한다. 그래야 자기들의 주장에 힘을 실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저항과 혁명이라는 구호를 광고문구로 사용해서 동성연애에 대한 모든 반대는 편견일 뿐이라고 몰아가면서 동정적인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고, 개인의 성적 만족을 위한 어떤 방법도 도덕적으로 무관한 것으로 생각되도록 만들고 있다.

동성연애를 '소수인권 존중'(1950년에 만들어진 매타친 협회Mattachin Socity라는 동성연애자 운동 조직이 최초로 'minority', 다시 말해 '권리'라는 틀을 도입했다. 그러나 소수라고 해서 반드시 옳고 건전한 건 아니다. 그건 사기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마이너리티의 어지간한 허물에는 면죄부를 씌워준다), '경직된 정의에 대한 공격' 등과 연결시키는 모든 주장들에 우리는 저항해야 한다. 그것은 속임수이다.

죄는 굉장히 듣기 좋은 말들을 동원해 사람들을 속인다. 죄는 품위 있고, 가치 있고, 의미 있는 교양인의 어조로 그럴 듯한 논리를 동원한다(사탄이 광명의 천사로 변장하는 것과 같다).

동성연애를 옹호하는 것은 그 당대에 급진적인 개혁적 사고를 하는 것이 전혀 아니다. 아예 그런 것에 해당도 되지 않는다. 동성연애라는 브랜드는 해방과 자유, 탈주, 저항, 해체라는 말을 팔고 있는 것뿐이다. 기독교와 윤리를 등진 세상에서 어떤 인간들이 나오는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뿐이다.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신을 생각하는 청년들이 동성연애를 옹호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교회 안 다닐 특별한 이유가 없어서 그냥 교회 댕기는 청년들에게서 나타나는 당연한 광경이다. 이들은 동성연애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딱딱하고 무자비한 사람으로 몰고 간다.
이들의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세상이 변화하면 덩달아 같이 변하는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 이들은 反기독교의 영역에서 신앙을 추구하는 독특한(?) 존재들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진리(동성연애는 악하다)엔 예의를 안 갖추면서, 하나님의 진리를 벗어난 행위(동성연애)와 행위자(동성연애자)에겐 예의를 갖추는 독특한 존재들이다. 세속사회의 시대정신들(관용, 소수인권존중)과 조화를 이루는 현대적인 개념들로 기독교의 메시지를 개편하는 것이 이들의 목적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으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하면 요즘엔 불신앙도 거창한 명칭으로 분류되어(예를 들어 '좌파적 기독교') 마치 기독교의 일부인양 취급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기독교가 무슨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사회 친화적'(세상을 얻기 위해 세상과 타협하는)이 되길 바란다. 복음 '이외의' 것엔 신실한 신앙을 갖고 있고, 복음은 절대 안 믿는 이런 사람들의 기독교는 이미 성경이 제시하는 기독교가 아니다. 이들은 그저 교회가 현실감을 결여하고 있다는 막연한 불만을 품고, 기독교를 여러 학문에 용해하면서 자기가 보기에 그럴듯한 기독교를 하나 만들어 낼뿐이다.

이들은 세상과 충돌하지 않는다. 지켜야 할 믿음이라는 것이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참 기독교'와 '거짓 기독교'를 나누는데는 전혀 관심이 없다. 기독교 변증가인 오스 기니스의 말처럼 "'변질'되고 '축소'된 신앙은 이미 구축된 현 상태와 아무런 마찰을 빚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신앙에선 어떠한 종류의 싸움도 볼 수 없다. 지켜야 할 진리와 믿어야할 교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갖고 있는 믿음이라는 것은 자기를 위해 만든 믿음일 뿐이다.

그들이 교회를 나가는 이유는 성경이 제시하는 목적 때문이 아니라, 자기가 세운 목적대로 교회를 이끌기 위함일 뿐이다. 기독교와 교회를 기웃거리지만 그 목적은 자기의 만족을 위해서 살아가는 과정가운데 기독교 신앙이라는 것도 무언가 보탬이 될 수 있다고 생각에 그러는것 뿐이다. 이들에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갈망이 전혀 없다. 이런 삶(열매)을 통해서 우리는 그들의 믿음의 뿌리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님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들의 관심은 거의 대부분 '사회 변혁'에 몰려있다. 그들은 사회정의를 구현하는 만큼만 기독교를 기독교로 인정한다. 물론 기독교가 인간이 살아가는 현실에 깊은 관심을 갖고, 사회 정의 구현에 앞장서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사회적 관심이나 사회 참여가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대표'하지 않는다는 것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사회 참여는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의 여러 영역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

이들이 외치는 '사회변혁'이라는 말도 사실 알고 보면, 성경에 입각한 관점에서 흘러나온 것이 아니라, 마르크스주의의 '변혁적 사회 혁명론'의 일종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사회를 변혁시키는 일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니까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관심사인 사회변혁을 성경에서 발견해내서 자기가 원하는 개념으로 조작하고 주관적 사상을 세우는 것이다. 이들에게 있어 기독교의 교리는 하나님을 믿기 위한 수단으로써의 진리가 아니라, 수단적인 가치일 뿐이다.
추천5

댓글목록

나디아님의 댓글

나디아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동성애를 동성연애로 표기한 것 만으로 보아도 이 글을 쓴 분은 성애에 대한 기본 이해가 안되어 있던지, 아니면 동성애는 성애로 받아들이지않고 연애장난으로 여기는 듯 합니다.
생물학적 근거나 반론이 전혀없이 소수를 옹호하는 것에 대한 공격입니다. 소수가 항상 옳거나 건전한것 절대 아닙니다. 어느 집단도 천사는 없지요, 소수와 다수의 관계에서의 폭압적 관계, 그것에서 소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것입니다.
오늘 제 친구와 이야기를 해보았는데, 독일내에는 천주교가 보수적이어서 동성애를 인정하지 않고? 기독교는 개방적이어서 성애에 대하여 열려있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동성애자에 대한 편견이 없다고 하는데요, 가능하다면 그 친구에게 편지를 한통 받아보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 (독일 친구랍니다. 독일어가 되겠죠^^)

하일트님의 댓글

하일트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요새 나디아님과 동접되는 경우가 잦은듯;;)그리고 그 전제에 관해서는 일단 베리 자게판에서 오간 논쟁을 볼 때 기독교 신자분들 사이에서도 완전한 의견의 일치가 안된 것 같습니다.(<-구경하던 무신론자)

하일트님의 댓글

하일트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저 목사님이 동성애를 반대하는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의 진리에 어긋나는 일이라는 것이군요. 저 분 글이 설득력을 얻기 위해서는 일단 동성애가 하나님의 진리와 어긋난다는 전제부터가 입증되어야 합니다.

m&uuml;ssen님의 댓글

m&#038;uuml;ssen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나디아님 성애에 대하여 열려있다고 하는것이 어떤 것을 말하는 건지 구체적으로 설명부탁드립니다. 혼전순결에 대한 것도 열려있다고 말한 것은 아니겠죠? 독일의 현주소가 그런지 몰랐습니다. 우리나라를 예로 들어볼때, "천주교는 이단이다!" 라고 불리어질 정도로 사회에 개방적이라고 합니다. 어떤 성당 앞에는 부처님오신날에 "부처님오신날 경축" 이라고 성당대문에 내 걸었답니다. 이것 말고도 우리나라에서 제가 뉴스를 통해 보았을때 천주교는 다른 종교와 상당히 뭔가를 합니다. 그 쪽에서는 사회통합과 종교의 사회적측면의 ohne Grenze를 이야기하는것같은데..취지는 좋았지만...저의 개인적 견해로써는 지켜야할 선을 넘은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요..에구~ 이상한 길로빠졌네..쩝~

나디아님의 댓글

나디아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성애에 대한 이야기는 그 친구에게 직접 이야기를 듣도록 해보겠습니다.
한국내에 카톨릭과 기독교의 차이 때문에 저도 처음에 놀랐었습니다.
실제로 카톨릭이 얼마전에 페미니스트와 동성애자에 대하여 경고와 같은 표명을 했던적이 있을 정도로 카톨릭은 보수의 상징과 같고 기독교가 그와 반대로 개방적이라고 합니다. 어떤 논객이 한국 내 기독교는 문화적 특성이 더 강하다 라고(화내지 마세요) 했을 정도로.. 대한민국내 카톨릭과 기독교는 뭔가 다른것 같습니다.

Okdol님의 댓글

Okdol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어찌됐건 본인들 나름대로의 의견이시겠지만, 한가지만 수정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아서요. 기독교와 천주교가 분리된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 안에 개신교회(프로테스탄트)와 천주교회, 카톨릭이 나뉜 것입니다. 이 밖에도 기독교 안에는 동방정교회(그리이스, 시리아 정교회, 러시아 정교회 등등)도 포함되고요.
독일에서는 대체적으로 본질적 성향 때문에 카톨릭이 대체적으로 보수적인 입장인 것만은 확실합니다. 카톨릭 일부와 개신교의 상당 수의 교회들은 동성애를 인정하고 수용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의 동성애 논의는 아직 너무 초보, 즉 걸음마 단계인 것 같습니다. 위에 언급한 목사의 서동진 비판도 사실 내용에 대한 심도있는 비판에는 거리가 먼, 화려한 수사력에 대한 빈정거림이 다분한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동성애는 악이라는 것이 하느님의 진리라고 애초 못박고 있으니 이에 대한 제대로된 비판이나 논의가 진행될 수 있겠습니까?
자신이 신의 진리를 파악하고 있다는 듯한 교만함마져 느껴지네요. 신의 진리에 대한 사유화 -> 한마디로 이런 사람들 뵈는 게 없죠.  이러한 비판은 단지 저급한 비아냥거림과 그리 다를 바 없다고 사료됩니다. 그러니 목사들의 사회비판적 글들이 제대로 무게있게 논의되고 있지 못하지요. 성경만 보지 말고(사실 성경도 제대로 읽고 있지 않지만) 좀 사회과학 서적이나 교양서적 좀 읽으시지......

m&uuml;ssen님의 댓글

m&#038;uuml;ssen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옥돌님 여쭤볼께 있는데요. "무엇보다도 동성애는 악이라는 것이 하느님의 진리라고 애초 못박고 있으니 이에 대한 제대로된 비판이나 논의가 진행될 수 있겠습니까? " 이렇게 적으셨는데, 그럼 어떻게 써야올바르게 쓰는건가요. 개인적인 생각인데, 위의 글은 자기의 생각을 남에게 전달하여 자기 주장의 옳음을 알리려고 쓰신글같은데요. 이런 글에서는 동성애가 하나님의 진리에 악이든 또한, 그렇지 않든 자기의 주장을 펼칠수있는것 아닌가요?

나디아님의 댓글

나디아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muessen님, 옥돌님께의 질문에 제가 살짝 껴보아도 될지모르겠습니다만..
한 종교내에서의 도덕성(혹은 윤리)에 관한 문제는 그 종교안에 머물러야 하지, 그것을 일반 사회의 윤리와 도덕으로 동일시 하면 안된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종교적 시각(도덕성과 윤리성을 기점으로)으로 사회를 비판하게되면.. 저와같이 읽는 사람들이 황당해 집니다.
Okdol님, 지적 감사합니다.
질문을 하나 드리고싶은데요.. 먼 곳에 사는 친구가 '여호와의 증인'이 이단인지.. 그 종교가 어떻게 기독교와 다른지, 그들에 대해서 알 수 없는 거부감이 있는데 이러한 자신의 마음이 잘못된 것인지에 대해 저에게 질문해 왔는데.. 제가 아는게 별로 없어서요.. 옥돌님 뿐만 아니라 이문제에 대하여 대답해 주실 수 있는 분들 대답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realpine님의 댓글

realpine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 동성애에 대한 기독교의 입장에 관한 토론을 위한 제안 -

동성애에 대한 관심이 이렇게 지대할줄 몰랐읍니다. 그래서 제대로 된
토론을 하기 위해 정리를 나름 대로 해 보려고 합니다. 일단 모든
의견을 위 제목에 촛점을 맞추어 나가는 것이 생산적이라 생각됩니다.

1. 이 토론은 동성애를 보는 기독교적인 관점에 관한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외적인 관점을 가지고 기독교적인 관점을 논할
  필요가 없읍니다. 그래서 동성애가 타고나는 것인데 왜 동성애자
  가 기독교인이 못되느냐라던지 왜 교회는 그들을 교인으로 받아
  들이지 않는지 하는 논의는 할필요가 없읍니다.
  성경에서 동성애는 하지말고 교회에 그런이들을 용납하지 말하고
  했읍니다. 왜 불교에서는 고기를 안먹느냐 단백질이 사람몸에 중요
  한데 할수 없듯이 말입니다.

2. 신앙인이란 자신이 가진 절대적 가치를 믿고 그대로 살려고 하는
  이들입니다. 그래서 독일 교회와 신자들은 이런데 한국교회와 교인
  들은 저렇다 혹은 그반대의 경우에 대해서 논할 필요가 없읍니다.
  독일사회 또는 독일교회 혹은 한국사회 또는 한국교회에서의 동성
  애의 시각에 대한 논의를 할 필요도 없읍니다. 성경에 근거한 논의
  만 필요할 뿐입니다.

3. 다만 성경내에서의 시대에 따른 행위내지는 행동 규범의 변화에
  따른 현실은 동성애 문제와 별도로 논의가 할수있다고 생각합니
  다. 예를들어 신약성경에도 교회에서 여자들은 앞에 나서서 이야
  기 하지말라 라던지 머리에 수건을 쓰라던지 했는데 일반적으로
  현실 교회에서는 수건쓰고 예배드리는 여자분들 찾기도 힘들고
  또한 여자분들이 마이크 잡고 이야기 하는 경우가 보편화되어
  있지 않읍니까. 

4. 우리행위의 기준이 인간될수는 없읍니다. 인간들중에 훌륭한
  모범이 되는 경우는 있어도 말입니다. 신부들의 탈선 목사들의
  탈선은 일반 신자들의 탈선과 마찬가지이며 그것을 동성애자의
  기독교 포용문제와 연관지을 필요가 없읍니다.
5. 다시한번 신앙인은 믿음을 가진자 입니다. 이 믿음이란 그 믿음이
  깨지면 자연스레 믿음은 사라지는 것입니다. 많은이들이 하나님을
  믿고 그 믿음의 전통이 이어지는 것은 이 믿음 가운데서 사람들
  이 위로와 용기와 기쁨을 충분히 누릴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
  합니다.
  뉴톤이 중력을 법칙을 발견하고 물리학을 설명했으나
  아인스타인은 상대성 원리로서 중력의 법칙이 모든 물리원칙에
  적용되지 않거나 아니면 다른 법칙이 존재할 것이란걸 증명했
  읍니다. 우리는 증명되지 않는 사실에 대해서는 나름대로의
  믿음을 가집니다. 기독교에서의의 믿음은 동성애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것이 아니라는 말씀을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나디아님의 댓글

나디아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밑의 4399글은 기독교적 관점, 성경에 대한 글이나, 이번 글은 제목에서나 내용에서나 기독교적 관점에 머무르지만은 않습니다. 사회에서의 소수에 대한 문제도 다루었고, 비기독교인?(기독교를 등진?)들의 의식, 사고에대하여 직접적인 공격과 같은 표현이 있습니다.

또 한가지, 독일의 기독교 문화와 한국의 기독교 문화를 비교해 보는 것이 무가치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이것을 신앙과 믿음에 혼란을 가져올 의도로 받아들이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물론 님께서 3번에 잘 적어주셨습니다만..

Okdol님의 댓글

Okdol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리얼파인님, 독일의 교회에서도 우리는 배울 것이 많이 있습니다. 이들 교회들도 모두 성서가 말하는 바를 외면하고 있지 않습니다.

나디아님, 친구분이 여호와 증인에 대한 막역한 거부감을 갖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일 수 있습니다. 저도 예전에 그랬습니다. 한국의 기독교 뿐만 아니라 세계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이 여호와 증인에 대해서 많은 거부감을 갖고 있거나 이단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자신과 다른 교리를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 이단이라는 판단기준은 정하기 나름입니다.  여호와 증인들의 교리 속에서도 많은 긍정적인 부분이 있습니다. 가령, 집총거부를 통한 평화지향적 교리들이 그것입니다. 또한 이 땅에 하늘나라가 이루어진다고하는 점도 성서가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물론 여호와 증인들이 거부하는 헌혈과 수혈의 이유는 저도 납득하기 힘듭니다.  이처럼 모두가 잘못되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제가 만난 여호와 증인들은 일반 기독교인들과 어떤 면에서 자신들이 갖고 있는 지식들에 대해 상당히 절대적 가치를 부여한다는 점에서 유사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공통점은 성서에 나타난 부분적인 것들을 전체로 간주하는, 혹은 일반화하는 오류를 너무 쉽게 범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나무만 볼 줄 알지 숲을 볼 수없는 눈을 소유하게 한 것은 바로 교회 목사들이나 여호와 증인들의 천국회관의 지도자들입니다.
성서에 대해 알고 있는 대부분의 것들은 기독교인들이나 여호와 증인들이나 일치합니다만, 몇몇 교리상의 차이점들이 너무나 부각된 나머지 서로 너무 다르게 느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서로 배울 점이 있다고 저는 생각됩니다. 그리고 이 두 종파가 서로 인간적으로 대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나와 다르면 '적'이라는 흑백논리로 나아가서는 안된다는 것이죠. 나와 똑같이 인생을 고민하고 무엇이 나의 삶을 밝혀줄 진리인가를 찾는 구도자들이라는 점이 이 두 상이한 생각을 갖고 있는 종교인들이게 주지되어야 할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하는 것을 이해하시겠죠?  너무나 당연한 말 같지만, 여호와 증인들은 뿔이 몇 개 달린 사탄이나 마귀의 하수인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와 똑같이 늘 한계를 실감하며 살고 있는 인간일 따름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도 어떤 종교의 창시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단지 천국복음을 전했고, 하늘나라도래를 위한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삶으로 직접 보여주었습니다. 그의 삶은 모든 구약의 계명들과 지혜의 말씀의 절정이었고 요약이자 완성이었습니다.

그러나 알프레드 르와지란 학자가 적확하게 표현한 바 "예수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했는데 나타난 것은 교회였나?" 란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교회는 쉽게 권력과 결탁했고, 부와 결탁했다는 점을 우리는 서양 교회사를 통해 배웠고, 이것은 곧 어느 집단의 이익을 대변하는 잘못된 교리들을 마구 생성해내는 공장이 되었던 것입니다.
특별히 한국에 들어온 신학적 흐름은 지극히 왜곡된 부분이 많다고 사료됩니다. 미국의 부흥주의, 성장지상주의, 극도의 개인주의적 신앙이 상당수 멍청한 선교사들에 의해서 한국에 뿌리깊게 자리잡아 아직도 대부분의 교회의 영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를 대표하는 기업들의 모습들과 그리 다를 바 없게 된 것이 바로 이러한 이유에 근거한다고 보여집니다.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으며, 오로지 기독교 내에만 진리가 있다는 지극히 유아적 사고에 사로잡혀 있지요.  성숙한 종교세계에서 진리를 소유했다고 생각하는 것 만큼 우둔한 예는 없을 것입니다.

다음에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의 절대성에 대해서 좀 비판해 보겠습니다.

나디아님의 댓글

나디아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옥돌님의 글 재미있게 잘 읽고 있습니다. 밑에서 두 분, 옥돌님과 뮤센님의 토론이 너무 짧게 끝이나서 아쉬워하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짧다 못해 시작하다 말고 끝이난 느낌이었다고나 할까요. 이거 웬지 타인이 힘들여 축척한 지식을 훔치고싶어 안달이 난 느낌이네요^^
님의 다음 글 기대하고 있습니다.

나디아님의 댓글

나디아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아, 그 멀리 산다는 친구에게 베를린 리포트를 소개해 주었습니다. 이단에대해서 제가 친구에게 뭐라 주절거렸었는데 그것도 틀린것 같군요,  여호와 증인에 대해서 이 친구가 아마 님의 글을 직접 읽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Okdol님의 댓글

Okdol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리얼파인님의 마지막 번 문구, 즉 5번에 오면 뉴튼의 중력의 법칙으로 설명되지 않는 것을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의 발견의 예를 들어 믿지 못하는 것을 믿는 그 믿음을 언급하셨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논리적으로,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는 바를 단순히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어쩌면 고집이고 아집이며 억측일 수 있습니다. 믿음은 절대적인 것이 오로지 신의 영역이라고 믿는 것도 아닙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우리가 믿으려고 하는 바를 초지일관 주장함으로써 스스로 믿기는 것으로 만드는 최면도 아닙니다.
성서의 믿음이란 피스티스란 말은 경건과 관계됩니다. 여기서 경건주의라는 말도 나온 것입니다. 성서에서 말하는 믿음은 내가 직적 실천할 때 그 단어가 성립하는 것입니다. 머릿 속에서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가정을 강화하는 시스템으로서의 기제나 운동이 아닙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자연과학의 역사와 흡사하게 절대적인 것을 믿는 경향이 여지껏 지속되어 왔습니다. 자연과학에서의 상대성의 원칙이나 불확정성의 원리 등을 통해 이러한 믿음은 이미 해체되었습니다. 미시적 세계에서 절대란 것은 있을 수 없고, 단지 '확률'로서 존재한다는 것은 이미 주지의 사실입니다. 그럼 기독교도 원래 절대성이라는 것을 갖고 있었을까요?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은 제가 의문표를 붙이는 까닭을 이미 간파하셨으리라 봅니다.
성서는 이미 그 자체 내에서 절대적인 것을 벗어나고 있습니다. 성서는 하늘에서 떨어진 것도 아니요,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딤후 3,16)되었다고 했지만, 구약성서 기자들은 이것을 알 턱이 없습니다. 그리고 성서의 범위는 어디까지입니까?  딤후의 저자 사도 바울이 이것을 알고 기록했습니까? 정경은 4세기 말에 결정된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차치하고서라도 구약성서에는 이미 '하느님의 후회'에 대한 언급들이 지적되고 있습니다. "후회하신다?" 절대성을 대표하는 분이 후회할 일이?
절대, 완벽, 완전성이라는 말은 고대로부터 인간 정신 속에 면면이 이어져온 하나의 이데아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이 개념을 신에게 적용시키려고 했습니다. 유럽역사 속에서 그러나 이러한 신앙이 깨어지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1, 2차 세계 대전을 통해, 수백만명의 유대인 학살 사건은 더이상 이러한 신의 관념을 지속시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했습니다. 아우슈비츠 유대인 학살을 보며 하느님이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에 대해 기독교인들은 반성하고 자문하기 시작했고 심각한 회의에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모든 것을 능히 하실 수 있으신 전지전능의 하느님이 의도적으로 계획한 것이라고 누가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자연과학에서 절대적 법칙이라고 간주되었던 뉴튼적 세계관에 일대 변혁이 일어났듯이, 종교세계에서도 뼈아픈 세계사적 사건을 통해 이러한 하느님의 전지전능적 이데아는 점점 사라지기 시작했고, 오히려 하느님은 약한자들과 함께하고, 고통 가운데 거하는 분으로 생각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개념의 변화는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야 가능했습니다. 아마도 하느님이 '계신다면' 바로 고난받는 자들과 함께 하시고 그 고난을 이겨낼 희망을 주시고 용기를 주시는 분의 모습이 더 이 시대에 요청되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진리가 아니겠습니까? 또 성서에 이러한 하느님의 이미지를 해명해줄 구절이 없겠습니까? 무수히 많겠죠?
저는 그래서 하느님이 완전하다, 신의 완전성을 말할 때는 그것을 다른 개념으로 전환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게 하느님이 완전하다라는 의미는 바로 오래참고, 인내하며, 인색하지 않고 모든 것을 견뎌내고 모든 것을 신임하고 모든 것을 바라는 사랑 속에 성립(고린도 전서 13장)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완전성이라든가 절대성이라는 말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것 같은 요한일서의 저자는 그래서 복잡하고 추상적인 것들은 다 집어치우고 단지 "하느님은 사랑이시니...."라고 간명하게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이 사랑이라는 관계성을 통하지 않고, 하느님이라는 개념을 더이상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은 불변의 진리로 표현되었던 독존의 신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이미지입니다. 그래서 진리는 변하는데 그 특성이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말은 루드비히 포이에어바하라는 유물철학자의 입을 통해 간명하게 표출되었던 인간의 "투사로서의 신"의 그것과 상당히 연관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시대가 변하고 인간의 사고가 변하면서 이에 신에 대한 신념이나 관념도 변한다는 것입니다. 초월성 보다는 가까이 느낄 수 있는 신이 바로 진정한 신의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흔히 우리 기독교인들이 말하듯, 체험의 하느님의 모습은 그래서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분일 수 없습니다. 아니면 이 두개의 특성을 모두 갖고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사실 이 초월성을 결코 이념화할 수도 형체화할 수도 없으며 인간의 이성으로 간파할 수 없기에 아예 존재 그 자체에 의문을 제시하는 것도 사실 무리가 아니라 할 수 있겠지요. 다시 말해서, 초월성의 신은 생각치 않아도 우리의 신앙과는 무관하다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기독교인들은 초월적 이 신이 인간세계에 간혹 개입하시고 계신다는 '신화적 세계'에 아직도 머무르고 계신 것 같다고 생각됩니다.  아니면 사람들이나 동물들, 여타 사물들에 (어느정도의 법칙성을 띄고)깃들어 계시다는 범신론이나 보다 세련된 범재신론으로 신을 규정하고 계신 분도 있겠고요. 사실 여지껏 기독교인들이나 비기독교인들을 막론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의 존재양식을 '있다', '없다'라는 지극히 단순한 존재방식으로만 진술하려 했습니다. 로또개념 혹은 작업가설만으로서 신? 

제가 결국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곰곰히 조금만 생각해도 인간이 없으면 결국 신도 없다는 것이 성립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창조신앙과 정면 대치된 것 같지만, 사실 창조신앙과 상당부분 부합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있고 그에게 이성이 있기 때문에(데카르트의 코기토 표현과 비슷하지만) 창조라는 것도 있을 수 있고, 그 배후에 창조자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창조신앙도 단지 '신앙' 안에서만 '고백'될 수 있는 성질의 것입니다. 이 객관적 관점을 기독교인들이 지닐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제 얘기가 좀 빗나가고 있는 듯 합니다만 찬찬히 줄거리를 따라서 읽으시다보면 제 이야기를 조금은 수긍해주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 ^

Geduld님의 댓글

Geduld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Okdol님의 글 잘 읽었습니다. 님의 글을 읽으며 항상 많이 배웁니다. 다만, '인간이 없으면 신도 없다'는 명제가 창조신앙과 부합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좀더 설명을 자세히 해주셨으면 합니다.

realpine님의 댓글

realpine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옥돌님
긴글을 잘 읽어 보았읍니다.
저의 독해력으로 요약이 잘되지 않읍니다만 다음과 같이 요약 해도
되는지요.

1. 신은 전지전능하지 않다. 후회도 했기에...
2. 신은 존재한다면 어떻게 유대인 학살이 일어났겠는가
3. 성경도 따지고보면 인간이 쓰고 공인했다. 그래서 기독교또한
  많은 종교의 한 갈레일 뿐이다. 즉인간들이 만든것이다.
4. 기독교는 내용을 보면 다 착하게 살면 인간이 다 행복을 누리자는
  것이기에 다른종교와 별다른것이 없다 그래서 다른 종교를 같은
  위치에서 바라 보아야 한다. 속좁게 편협하게 그렇게 유일신을
  찾고 배타적인 성향을 버려야 한다.
5. 신이 인간을 창조한 것이 아니고 인간이 신을 만들었다.
  이렇게 요약이 되는 건가요.

저는 성경주석을 공부한적이 없읍니다. 단지 어릴때 부터 교회를 다녀서 성경내용을 좀 아는 편에 속하고 설교를 많이 듣다보니 가끔
주석도 아주 조금 압니다. 그리고 미국 목사님인데 Chuck Swindoll이란 분의 설교집을 읽으면서 신앙과 현대를 살아가는 저의 삶의 양식에 많은 토대가 되었읍니다.
나름대로 저의 믿음을 토대로 윗글에 대해 설명을 조금 드리자면

1. 저는 신을 인간이 알수있는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믿는
  저도 안믿는 사람들도 하나님을 알수가 없다라고 말입니다.
  단지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이해할수 있다는 것이지요. 흔히
  쓰는 비유로 바람이 안보여도 바람이 있다는것을 우리는 알지요
2. 유대인 학살또는 인간에게 일어나는 고통에 대해서는 저도 할말
  없읍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간의 고통을 외면 내지 방치 한다고
  생각지 않읍니다. 그리고 인간이 당하는 고통은 저의 경우에 가진
  것외의 욕심을 부리다가 스스로 고통을 초래하는 경우가 대부분입
  니다. 다만 이런고통이 없기를 있다면 극복하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때로는 고통속에서 죽기도 합니다. 신앙으로 잘무장
  한 이들은 이 고통 죽음의 고통까지도 이기곤 하지요. 많은 순교
  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사실 저는 제가 너무 초라합니
  다. 뭐 희생한건 없으면서 입말 살아서 조잘거리는 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
3. 성경의 역사에 대해 잘 아시는 분같은데 오히려 성경이 쓰여진
  원리 문법 등등의 과정을 보면 오히려 이것은 필연이라는 생각
  이 들더군요. 하도 오래전 읽은 글이라 다까 먹었읍니다. 하하하.
4. 많은 종교들이 선을 행하는 것을 주창합니다. 그것 까지는 좋읍니
  다만 기독교인에게 다른신도 있다고 인정하라는 것은 절대로 용납
  되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인생에서 부모님이 계신데 옆집 아저씨
  아줌마에게 엄마 아빠라 부르면 부모님이 노하고 슬퍼하실텐데
  전진전능하신 하나님이 계신데 다른신들도 있다라고 할수는 절대
  없는 것입니다.
5. 인간이 신을 만들었다라고 생각하시는 것은 본인의 자유입니다.
  저는 인간이 신을 만들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원리를
  깨닫고 자동차를 만들수는 있읍니다. 나무에 물을 줘야 하는 것
  압니다. 그러나 나무에 물을 주면 왜자라는가 하는 질문에는
  누구도 누구도 답할수가 없읍니다.
 
그리고 사랑의 실천에 있어서 교회가 문제가 많이 지적이 되곤합니다만 전세계에 기독교 만큼 자선, 인권, 빈곤퇴치에 많은 일을 하는
종교가 어디에 있읍니까.
서구열강들의 식민지정책과 기독교 전파는 엄연히 다른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서양과 기독교를 동일시 하시는데 이 점을 구분하셨으면 좋겠읍니다. 열강들의 패권주의는 기독교에서 나온것이 아니라 기도교 정신의 결여에서 나온 것입니다.

Okdol님의 댓글

Okdol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리얼파인님 참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말한 의도를 잘 파악하지 못한 것 같아 좀 아쉽습니다. 간단하게 저도 님의 설명에 대해 재차 질문드리겠습니다:

1. 성서의 하느님은 너무나 다양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런 하느님을 일관되게 파악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그냥 다양하게 표출된 하느님을 그대로 받아들으시고 계십니까? 이것은 위의 김경재 교수의 글을 통해서도 어느정도 진술된 것 같군요.
2. 세계 속의 엄청난 고통과 기억하기도 싫은 끔찍한 사건들은 하느님과 관계가 없다거나 우리의 신앙과는 무관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면 언제까지  기독교인들이 잘 모르겠다라고만 일관하겠습니까?
3. 성서에 쓰여진 원리, 문법(?) 등등의 과정이 필연이라고 생각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4. 성서에서도 다른 신이 있음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신에 대한 신앙에 대한 경고(가령, 맘몬신)도 나타나 있습니다. 인정은 하되 그들을 신으로 섬기지 말라는 말이신 것 같은데, 거의 정신이상 수준의 사람들인 사탄숭배자들을 차치하고 어느 누가 다른 신을 섬기고자 하고 있는지...? 
5. 신을 인간이 만들었다는 표현보다는 신이란 개념은 인간에게만 인식될 수 있다는데 동의하실 수 있으신지요? 그렇다면 우리 인간이 없다면, 누가 신을 개념화하고 그 존재성을 생각하겠습니까?  지나가는 참새가? 아니면 옆집 강아지가요? 아니면 신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나무에 물을 주면 왜 자라는지는 학교다니실 때 생물시간에 어느정도 배운 것 아닌가요? 식물내에서의 물의 화학작용과 식물의 성장작용을 살펴보아도 전혀 설명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아니면 하느님이 알아서 자라게 한다고 고대 히브리인들 처럼 생각하시나요?

realpine님의 댓글

realpine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요즘 베리에서 글쓰다가 하루가 가는군요. 굳이 저한테 답장
안주셔도 됩니다. 저도 답장을 않쓰면 실례가 되것같아서
계속 답장을 드립니다.

제가 독해력이 딸려서 좀 이해가 힘들었읍니다.

1. 성서의 하느님은 너무나 다양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런 하느님을 일관되게 파악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그냥 다양하게 표출된 하느님을 그대로 받아들으시고 계십니까? 이것은 위의 김경재 교수의 글을 통해서도 어느정도 진술된 것 같군요.

-제가 이해한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리고 사랑이란 좋은거만
 주는것이 사랑이 아닙니다. 분노,용서, 정의, 시기를 하신다고 생각합니다. 흔히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 졌다고 하는데 동의합니다. 항상 해가 비치면 사막이됩니다. 애들 벌을 안주고 귀엽다고만
하면 애 버립니다. 그래서 저는 신앙인은 두가지의 의무가 잇다고생각 합니다. 하나는 자신에 대한 책임이면 또다른 하나는 공동체에 대한 책임입니다. 자신과 자신의 가족만 살피고 공동체를 외면한다면 공동체의 위기에서 오는 고통을 피할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제가 게으르면 저와 가족이 어려워지며 공동체의 건강-사회정의를 위한 기도와 참여, 구제활동등등-을 외면하면 국가가 위태하거나 사회가 불안해지고 궁극적으로 우리 개인의 삶또한 위태해진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그를 향한 우리의 모든정성을
보고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2. 세계 속의 엄청난 고통과 기억하기도 싫은 끔찍한 사건들은 하느님과 관계가 없다거나 우리의 신앙과는 무관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면 언제까지  기독교인들이 잘 모르겠다라고만 일관하겠습니까?

- 이 질문은 인류의 고통과 재앙의 책임이  하나님께 있거나 기독교인 들에게 있지 않느냐고 반문하시는 것이라면..
인류의 재앙과 고통은 제 믿음으로는 인간의 타락과 연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구체적으로 약자들이 무고히 괴로움을 당하고 사회정의가 무시되고 성적문란등등이 전쟁, 천재지변등으로 하나님의 분노의 메세지가 나타난다고 믿읍니다. 인간들은 그와중에서도 서로 탓하고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3. 성서에 쓰여진 원리, 문법(?) 등등의 과정이 필연이라고 생각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 이 문제는 성서의 필사본 발견부터 직접한번 연구를 해보심이 어떨지요. 저는 깊이있게 공부한것이 아니고 그과정을 담을 몇페이지를 읽었더랬는데 정말로 오묘하게 쓰여졌다는 생각이 들었읍니다.

4. 성서에서도 다른 신이 있음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신에 대한 신앙에 대한 경고(가령, 맘몬신)도 나타나 있습니다. 인정은 하되 그들을 신으로 섬기지 말라는 말이신 것 같은데, 거의 정신이상 수준의 사람들인 사탄숭배자들을 차치하고 어느 누가 다른 신을 섬기고자 하고 있는지...? 
-성경은 다른신이 있음을 인정하는것이 아니고 이방인들이 섬기는
우상들 존재를 묘사한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입이 있어도 말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도 못하는 우상에게까지 경배하는 사람들의 우매함을 깨우치려했읍니다. 현대생활에서 우리가 정의로 떠나 소위 빽을 너무 의지하려거나 젊은이가 이성만 너무 동경하거나 저 처럼 돈좀 많이
벌었으면 하는 생각에 깊이빠지는 것또한 우상이 될수도있읍니다.

5. 신을 인간이 만들었다는 표현보다는 신이란 개념은 인간에게만 인식될 수 있다는데 동의하실 수 있으신지요? 그렇다면 우리 인간이 없다면, 누가 신을 개념화하고 그 존재성을 생각하겠습니까?  지나가는 참새가? 아니면 옆집 강아지가요? 아니면 신 혼자 북치고 장구치고?
나무에 물을 주면 왜 자라는지는 학교다니실 때 생물시간에 어느정도 배운 것 아닌가요? 식물내에서의 물의 화학작용과 식물의 성장작용을 살펴보아도 전혀 설명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시는 것은 아니겠지요? 아니면 하느님이 알아서 자라게 한다고 고대 히브리인들 처럼 생각하시나요?
-인간과 천사 마귀만이 신을 알수있다는것은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저는 인간이 신을 창조했다는 말씀에 동의를 못한 것입니다.
그리고 과학은 왜라는 질문에 답을 할수가 없읍니다. 물을주면 화학작요을 설명할수있지만 왜 화학적용 so weiter weiter 하면 결론적인
왜에 대해서 답이 줄수없다는 이야기 입니다.
제가 처음엔 스트레스 풀려고 베리에 글을 썼는데 이제 두통이 약간
생기네요 하하하
그럼 좋은 한주 되세요.

Arirang님의 댓글

Arirang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realpine님...okdol님....

한 번도 교회에 간 적도 없거니와 무신론자도 아닌 제가 건방지지만 잠시 끼어 들어도 될까요?

두 분다 좋은 토론을 위한 헌신과 자제의 모습 좋아보입니다.

- 신은 존재한다.
- 신은 인간이 창조해낸 개념이다.

기찻길같은 완벽한 평행을 이루는 두 분을 보니 안타깝기만 하네요...조금의 예각이라도 허용한다면 과거로 가면 같은 지점에서 만나 화해할 수도 있겠고....조금의 둔각을 이룬다면 언젠가는 합일점을 찾겠는데 지금은 그래 보이지않네요.
이런 확고한 믿음하에 상대방과의 대화에서 볼 수 있는건 상대방을 인정하려들지않는다는거죠. 왜냐면, 나의 가설이 확실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기저에 굳게 깔려있기때문에 쉽게 그것을 포기하기 힘들어보입니다.

마치,

- 눈이 한 개 달린 사람들로만 구성된 사회.
- 눈이 세 개 달린 사람들로만 구성된 사회.

에서 살다온 사람처럼 말이죠.

수학적으로 봤을때,

절대적인 가치가 지구, 아니라 우주를 지배하던 시절에도 그런 것이 존재했겠죠(확실히는 모름).

- 직교좌표계에 살던 사람들.
- 원주좌표계에 살던 사람들.

- 직교좌표계의 주민들은 절대 토크의 개념을 이해할 수 없고.
- 원주좌표계의 주민들은 절대 포스의 개념을 이해할 수 없겠죠.

하지만, 지금은 그 둘의 상관관계가 밝혀졌고, 또한 거시운동과 미시운동사이의 상관관계도 해명이 되었습니다. 즉,
거시적으로 바라보던 질량들의 운동관계가 미시적인 원자, 전자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는게 밝혀졌습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있는 이 힘이라는게 전자역학에서 전류로 작용하는 것을 과연 어떻게 이해하고 서로를 받아들였을까요.
물론 이런 것들이 아인슈타인 같은 사람들에 의해서 깨지기 전까지 말입니다.

답은 한가지입니다.

지금 내가 사는 이 세상의 모든 법칙, 사유상의 불합리함을 오직 나의 관점으로만 바라 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관념이 아인슈타인과 프랑크등의 사유물리학자들에 의해 깨어지면서 우리는 상상할 수 없는 불확실성과 확률의 게임속에 내몰려있습니다. 이때 누가 더 우둔하고 더 명석했는가는 지금 아무도 말 못 합니다.

아직도 Axiom(대수학이나 위상수학등에 쓰이는 수학적이기 보단 개념적인...Realpine님이 말씀하신 것과 같은)이라고 불리우는 증명하기 힘든 법칙들을 우리는 믿고 살아가고있습니다.

열역학 1법칙의 질량보존의 법칙이나 에너지 보존법칙을 과연 어떻게 일일이 증명하고 살아가겠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일단 믿고 그에 준하는 다른 파생법칙을 양산해내면서 점차 그 증명을 유보하고 있으며, 또한 다른 가설들에 대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가장 간단한 명제는 주관은 주관이고 객관은 객관이라는 것입니다. 객관은 강요한다고 가능한게 절대 아닐 것입니다. 언제나 우리는 주관만 있을 뿐이며 이를 뒷받침할 증명은 자신 또는 나머지 추종세력들의 노력입니다. 이렇듯, 내 생각을 펼치는 것은 좋으나, 잊어서는 안될 사항이 절대 강요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 때로는 인간이 신이라는 개념을 창조했을 수도 있었을까...라는 명제도 심도깊게 생각해보시고.
- 때로는 신이 인간을 창조했을 수도 있었을까...라는 명제도 심도깊게 생각해보십시오.

- 절대 증명가능한 자연과학이 작금의 풍요로움을 가져왔다는 것을 부정도 하지 마시고.
- 절대 자연과학은 증명가능한 불변의 법칙이라는 것도 가끔은 버리시기를.

두 분 모두 방대한 지식...때론 경험에 의한 때론 타인의 사유물에 의해 간접적으로 체득한...으로 우리에겐 훌륭한 비교대상을 제공한다는 데에는 찬사를 보냅니다. 하지만, 생각의 판단은 모두 개인 각자에 달려있겠죠, 뜻대로 안된다고 억지부린다고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긴 힘들겠죠.

마지막으로,

Tensor나 Laplace....

선형수학에서 나오는 개념 중에 서로 그 상이나 디멘젼이 다른 시스템을 연결시켜주는 역할을 하는 Tensor.....이게 없으면 한 눈 달린 사람은 절대 3눈 달린 사람을 이해 못하겠죠.

마찬가지로, 주파수나 시간 등의 도메인으로 이루어진 복잡한 다원의 시스템을 연결해주는 역할을 하는 Laplace Transform....이게 없으면 역시 한 눈 달린 사람은 절대 3눈 달린 사람을 이해 못할겁니다.

이 외에도 자연과학에는 수없이 많은 연결고리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렇듯, 자연과학이 성장 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서로 상이한 개념의 경계를 넘나들기위해서 무수히 많은 이런 연결고리들을 만들기위한 노력들의 일환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 기저에 깔린 가장 큰 명제는 역시,

"일단 믿고 보자 ... 혹시 나의 세계와의 연결고리가 있을 지도 몰라"

우리 마음 속에 Tensor나 Laplace라는 영양소가 많이 부족한가 봅니다.

사족*

- 개...소...말....의 세계에 신이 존재하지않는다는 발상은 지극히 엘리트적인 발언이네요 (정말 사족^_^).

atjuly님의 댓글

atjuly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Okdol 님
님의 말씀 중 "특별히 한국에 들어온 신학적 흐름은 지극히 왜곡된 부분이 많다고 사료됩니다. 미국의 부흥주의, 성장지상주의, 극도의 개인주의적 신앙이 상당수 멍청한 선교사들에 의해서 한국에 뿌리깊게 자리잡아 아직도 대부분의 교회의 영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를 믿지않거나 교회에 대해 비판하는 것은 자유이나 목숨을 걸고 선교사로 파송되었던 분들에 대한 "멍청한" 이란 말씀은 이 공공게시판에서 시정해 주시지요.

Okdol님의 댓글

Okdol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atjuly님, 목숨을 걸고 온 선교사들도 있었다는 것을 제가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쓴 글을 제발 잘 파악해주세요. 한국에 온 선교사들 중 제대로 신학교육도 이수하지 않은 사람들이 많았고, 그저 동양세계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나 열정(부흥회 때 감동받아 남은 여운으로), 간혹 제국주의의 앞잡이(본인이 의도하지 않았더라도)로 온 이들도 많았습니다. 이들 대부분이 목숨을 걸고 선교사로 파송되었던 것은 아닙니다. 선교사들이 한국에 들어와서 저지른 못된 짓들도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그리고 우월의식을 갖고 조선인을 깨우치게해야할 대상인 야만인으로 대했던 행위들이나 궁궐같은 집을 짓고 살면서 가난한 민중들을 깔보았던 일들도 허다합니다.  선교사가 자신의 정원에 키우던 과일을 서리했다고 아이 이마에 "도둑놈"이라고 인두로 새긴 선교사도 있었습니다. 학교나 병원을 세우고 성서를 번역하는데 이바지한 선교사도 있었지만 이것도 사실 소수의 알려진 사실이고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전한 것은 당시 미국의 부흥사들의 말하고 다니던 제국주의 복음이었습니다. 상당한 선교사들이 실재로 멍청하고 것하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한국의 자세한 선교역사를 살펴보세요.  그리고 제가 말한 선교사들은 유럽에서 200여년 전에 들어와 순교했던 온 카톨릭 사제들이 아닙니다. 조선 구한말 한국이 외국의 문물을 한창 받아들이기 시작할 무렵 상당히 안정된 정황 속에 일본 눈치보며 들어왔던 선교사들을 의미합니다. 일본강점기때 이들 대부분은 선교활동을 수락받았고 대신 일본 식민지정책에 동조할 것을 다짐했던 사람들입니다.   
훨씬 이전에 중국에 들어왔던 마태오 릿치 선교사와 같은 사람들은 조선땅에 거의 없었습니다.

Okdol님의 댓글

Okdol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아리랑님, 논의를 단지 평행선을 긋고 있는 의미없는 것으로 바라보는 자세도 그리 담론의 개진에 있어서 바람직하지는 않다고 사려됩니다. 깃찻길의 평행의도는 기차가 가기위한 평형을 위한 목적을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고, 그것은 평행의 가치가 아니라 '평형'을 위한 기본적인 시스템입니다. 이말은 따라서 주관은 객관으로도 논증될수도 있고, 객관이 주관화될 수 있는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님은 불확정성의 원리를 이해하고 계실 것 같은데 제가 말씀드린 바를 이 원리와 연관시켜서 이해해주시는 것도 무리는 아닐 듯 싶습니다.
기찻길은 그 선로방향이 늘 바뀌며 나아가기도 하지만 결국 한 방향으로, 혹은 두 세방향으로 분리되기도 하는 "복잡화"과정을 겪게됩니다. 이것은 사회, 생물학적 진화의 단계와 매우 유사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변증법적 논리를 매우 애용하면서도 때로는 의도하는 편입니다. 제 글의 흐름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신 것 같아서 좀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님의 글을 읽어보면 저와 상이한 주장도 물론 있지만, 비슷한 것을 일괄하고 있는 것도 있습니다.

atjuly님의 댓글

atjuly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인터넷에서 한국의 선교역사를 아무리 찾아봐도 Okdol님께서 말씀하신 선교사들의 악행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도대체 어떤 공인된 사실적 자료에 근거하여 구한말 대부분의 선교사들을 모독하시는 말씀을 하시는지요?

Okdol님의 댓글

Okdol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게둘트님, 평소에 저는 님의 의견에 상당부분 동조하는 편입니다. 이번엔 님께서 제가 너무 성의없게 거론한 부분에 일침을 가해 주신 것 같아 부끄럽습니다.

"'인간이 없으면 신도 없다'는 명제가 창조신앙과 부합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좀더 설명을 자세히 해주셨으면 합니다." -> 해명을 시도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이성의 한계 속에 거론되는 신을 표현해보려고 했습니다. 이것과 창조신앙 사이의 부합성은 직접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간접적인 것입니다. 이미 파악하셨겠지만, 우선적으로 창조신앙과 창조사건은 분명히 구분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즉, 창조신앙은 말 그대로 창조에 대한 주관적 신념입니다. 이 신념체계는 이성, 혹은 인식의 한 영역이라는 점에 동의하실 줄로 봅니다. 창조라는 것은 무에서 유로 바뀌는 하나의 사건이라고 볼 수도 있고, 고대 히브리인들의 사고에서처럼 어떤 합의의 결과라는 시각에서 볼 수도 있습니다. 구약성서의 창조기사는 본래 그 자신들의 신앙의 정통성이나 그 기반을 도출해내고자 보다 오래된 메소포타미아(고대 근동지방)의 창조설화(아마도 수메르 지역이나 바벨론의 창조설화)를 끌어들여와 자신의 설화로 삼았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종교로 자리매김하고자하는 시점에 있어서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리고 이 종교는 점차 법제도를 인용하기 시작하고 윤리적 종교로 나아가기 시작합니다. 그 중간에 지속적으로 역사적 서사이야기들을 가미하면서 그 흐름의 틀을 잡았고요.
창조신앙은 그래서 어느 한 종교의 시작에서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실재 창조사건이 있었다손 치더라도 그것을 인간이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미 전술했다시피 그러한 것을 후대에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것만이 가능할 따름이지요.
인간이 없으면 신도 없다라는 말은 포이에어바하의 "인간은 종교의 시작이고, 인간이 종교의 마지막이다"이라는 말과 부합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신은 애초 원래 존재했던 것이 아닌 인간이 무엇인가를 신이라는 관념을 갖기 시작했을 때 비로소 나타나기 시작했고, 그 이전의 신은 인간 속에 신으로 파악되지 않는 단지 자연현상이나 어떤 두려움의 감정으로 밖에 나타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까 신께서 인간을 창조했다는 이 기본적인 창조신앙도 인간의 이성의 한계 내에서만 오로지 파지가능한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리고자하는 것은 창조사건이나 혹은 이를 신앙하는 창조신앙에서 인간의 이성을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을 주지시킴으로써 창조설화의 의미를 더욱 부각시키는데 있는 것입니다. 또한 이성개입을 원활하게 함으로써 창조신앙의 본래적 의의, 즉 인간의 불완전성과 신-인 '관계성'을 강화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스스로를 진정으로 알면 알수록 자신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를 깨닫게되지 않겠습니까. 

근대 이후 인간의 자기발견은 이러한 생각을 가속화시켰고, 그동안 교회를 통해 모든 권위를 독차지한 이 창조자 신은 더이상 사실로서의 창조자의 자리를 유지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맑시즘도 애초 이러한 인식의 기반 위에 출발했기 때문에 기독교에서는 적대시할 수 밖에 없을지도 모릅니다.

새벽 두시가 다 되어가기 때문에 두뇌회전이 급격히 떨어지는 것 같아서 이만 줄이겠습니다. 어느정도의 해명이 되었을지 모르겠습니다.

Okdol님의 댓글

Okdol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atjuly님, 저는 본래 구한말 들어온 이 선교사들을 모독하고자 쓴 것이 아닙니다. 글의 내용 중 일부분을 자꾸 극단적으로 몰고 가시는 것 같아 저로서는 답답할 따름입니다.  많은 선교사들을 통해 한국 땅에 분할식의 선교정책 등으로 교파가 수도없이 갈라졌고, 또 신학공부를 제대로 받지 않은 상당수 선교사들에 의해서 기독교의 기본적 복음내용이 여타 다른 있지도 않은 교회관행 강요(대표적으로 술, 담배 금지문제)때문에 상당히 왜곡되었다는 것을 말씀하고자 했습니다. 또 제가 간단히 언급하였듯이 1920년대에 심각해지기 시작한 서양선교사들의 비행과 추행, 인종차별 등등에 의해 야기된 일반인들(비신자들)과 심지어 한국교회 내부에서부터 서양선교사를 배격하자는 흐름때문에 교회와 일반인들마져 안타깝게도 이들이 친일화되어가는 양상을 띄게 되었다는 점도 사실은 지적하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내용들을 저는 인터넷을 통해서 어디서 본 이야기들을 전하는 것도 아니고, 제가 배우고 책(가령 보통 많이 읽는 '한국기독교의 역사'-기독교문사)에서 읽은 사실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더이상 세세한 부분을 제가 해명해야할 필요를 못 느끼겠습니다. 피곤하군요. 죄송합니다.

atjuly님의 댓글

atjuly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오해마세요. Okdol님을 극단적으로 몰고가는 것이 아니라 제가 몰랐던 부분에 스스로 놀라서 구체적인 근거자료를 찾아 공부하고 싶어 문의 드린것입니다.

Geduld님의 댓글

Geduld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Okdol님의 글 잘 읽었습니다. 제가 머리가 둔해서 이제서야 님의 뜻을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부끄러우셨다니요. 저는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님의 글을 읽으면서 정말 깊은 감탄과 존경심을 느껴왔던 사람입니다. 이번에도 창조신앙과 한국기독교선교사에 대해 학술적 가치가 높고 진보적 문제의식이 훌륭한 글을 쓰셔서 제게 많은 가르침을 주신 것에 대해 직접 찾아뵙고라도 깊은 감사의 인사를 올리고 싶은 마음입니다.

유덕인님의 댓글

유덕인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기독교신앙.. '믿음'문제에 개념도 못잡고계신 분들이많군요. 거기다 겸손까지 상실하고 지들끼리오바하는꼴이라니 쯧쯧.. 저는 realpine님의 식견과 인간미에 최고표를드립니다.

Okdol님의 댓글

Okdol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유덕인 님, 믿음, 혹은 신앙의 개념을 그럼 어떻게 설명하실 수 있겠습니까?  막무가내식의 믿음을 혹시 진정한 믿음으로 생각하고 계신지....  그리고 겸손은 무슨 겸손을 의미합니까?  그렇게 비아냥거리시거나 글만 퍼다 냅다 읽으라고 하시지 마시고, 유덕인 님께서 베리의 독자분들에게 설득력있게 내용적으로 설명해주시고, 논의해보세요. 기독교에도 변증론적 오랜 전통이 있지 않습니까?  제겐 유덕인 님의 이러한 글이 오히려 겸손의 가치를 떨어뜨린다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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