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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조용했던 우리 이웃의 실상

페이지 정보

작성자 그루자머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8건 조회 2,617회 작성일 19-05-25 00:27

본문

초인종이 울렸을 때, 우리는 모처럼 해가 쨍하고 날이 좋았기 때문에 가까운 뒤스부르크에 나들이나 다녀올까 하고 채비를 하던 중이었다. 인터폰을 들었다가 놓은 남편이 말했다. “오늘 금요일이죠? 그럼, 그거네!” 그거?? 인터폰에 응답이 없는 걸로 봐서 이웃의 택배를 대신 맡아달라거나 우편물을 정리하라고 가끔 울리는 아파트 중앙 현관의 벨소리인 줄 알았던 모양이다. “아닌데. 이건 우리집 초인종 소리예요. 문 앞에 누가 와 있나 한번 봐요.” 그제서야 현관문을 열어 본다. 그리고 누군가와 몇 마디 나누는 것 같더니 이내 조용하다. 세수하고 나와 얼굴에 로션을 바르려다 말고 현관 밖으로 나가 보니 옆집 할머니가 남편의 손을 이끌고 당신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려고 하고 있었다. 나는 할머니가 언어와 약간의 시각 장애를 가지고 계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상황을, 단순히 출입문을 못 찾아 옆집 벨을 잘못 누르신 걸로만 알았다.

남편에게 현관문을 열어 두고 왔으니 가보라고 한 후 할머니를 부축하여 집 안으로 들어갔다. 할머니는 거실에 들어서자 마자 남편(으로 짐작되는 이)의 이름을 애타게 불렀다. 그런데 할아버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 집안에서는 어떤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내 손을 이끌고 한 손으로 벽을 더듬으며 아주 천천히 발걸음을 떼시던 할머니가 조금씩 울먹이기 시작하셨다. 마침내 안방 입구에 도착하자 할머니는 손가락으로 침대 쪽을 가리키며 입을 가리고 울부짖으셨다. 싱글 침대 두 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는데, 거기엔 아무도 없었다. 그제서야 불길한 예감이 머리를 스쳤다. 심장이 요동쳤다. 할머니는 방의 입구에 서 계시고, 혼자서 방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섰다. 굳이 안쪽으로 더 들어가지 않아도 침대와 침대 사이에 누워 계시는 할아버지를 바로 발견할 수 있었다. 가슴이 철렁했다. 순간 머릿속에는 두 가지 생각이 스쳤다. 어서 구급대원을 불러야 한다는 것과 할아버지를 일으켜 드리기 전에 골절상을 입으셨는지 확인해야 한다는 것. 할아버지는 다행히 의식이 있으셨지만, 침대 사이 좁은 공간에 끼어 계셔서 몸을 움직이지 못하셨다. 할머니가 큰 소리로 우시며 계속 할아버지의 이름을 부르셨다. 나도 소리를 질러 남편을 불렀다. 무서운 순간이었다.

남편이 방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리고 우리는 양쪽에서 침대를 움직여 공간을 확보했다. 비로소 할아버지가 몸을 움직이셨지만, 근육이 경직된 듯 꼼짝 못하셨다. 오른쪽 발이 붕대로 감겨 있는 걸로 보아, 거동이 불편하신 상태에서 몸이 침대 사이의 공간으로 미끄러져 내려가고, 움직일 힘이 없어 그대로 누워 계셨던 것 같았다. 남편이 침대 사이로 들어가 쩔쩔매면서 할아버지의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고 할아버지를 뒤에서 안은 채로 침대 위로 벌렁 누웠다. 그제서야 나는 뒤셀도르프에 사는 동생에게 전화해서 구급차를 불러 달라고 도움을 요청했다.

전화를 끊자마자 할머니가 간절하게 어딘가에 전화를 해달라고 하셨다. “예. 걱정 마세요. 제 친구가 구급차를 불렀어요.” 했더니, 울면서 고개를 가로 저으시더니 내 손을 잡아 이끄신다. 현관 문 앞에 다다르자 긴급 전화번호가 적힌 카드가 붙어 있었다. 할머니가 빨리 그곳에 전화하라고 손짓을 하신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른 채 무작정 전화를 걸었다. 그리곤 두서 없이 나오는 대로 말했다. “내 이웃 남자가 쓰러졌습니다. 여기 주소는 뒤셀도르프 ooo입니다. 한 부인이 당신에게 전화하기를 바라십니다. 도와주세요.” 그러자 남자는 “쓰러진 사람이 할머니입니까, 할아버지입니까??” 하고 묻는다. 그 뉘앙스로 보아 단순히 간병인이나 위급 상황에서 도움을 주는 사람 같진 않았다. “할아버지예요. 그가 침대 사이에 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러자 상태가 어떠냐는 둥 더 이상 내 짧은 독어로 알아듣기 불가능한 말들을 속사포처럼 쏘아댔다. “나는 독일어를 잘하지 못해요. 천천히 말해주세요.” 그랬더니, 독일어 하는 다른 이웃은 없냔다. 야, 이 답답한 양반아! 사람이 쓰러져서 급히 당신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고!! “여기 다른 사람은 없습니다. 할아버지가 아파요. 할머니가 당신을 찾습니다.” 그랬더니, 뭔가 결심을 한 듯 알겠다며 반시간 뒤에 오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할머니가 어눌한 말과 손짓으로 그와 통화를 했냐고 물으신다. “예. 통화했어요. 그가 온대요. 걱정 마시고, 여기에 좀 앉으세요.” 몸을 부축하여 거실 소파에 앉혀 드리고 물을 따라 드렸더니, 너무 놀라서 가슴이 진정이 안 되시는 듯 내 손을 쥐고 계속 울기만 하신다. 혈압을 재 달라고 하셔서 혈압 체크를 해드리고, 안방에 가보니 할아버지는 그 사이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계셨다. 다시 할머니께 돌아와, “할아버지는 괜찮아요. 걱정 마세요. 다 괜찮아질 거예요.” 했더니, 고개를 끄덕이신다. 그리곤 내 손바닥을 펼쳐 거기에 글을 쓰셨다. 본인이 올해 79세라고... 전화해서 오고 있는 남자는 손자란다. 그제서야 긴급통화 연락처를 확인하니, 이름과 함께 손자라고 적혀 있었다.

손자는 약속한 30분이 지나도록 오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괜찮으신지 방을 들여다 보니, 깨어 계셨다. 할머니가 어디에 계신지 물으셨다. “할머니는 괜찮아요. 소파에 앉아 계세요.” 그랬더니, 당신 곁으로 데리고 와달라신다. 할머니를 모시고 들어오니, 할아버지가 침대 사이로 들어오라고 손짓을 하신다. 침대에 걸터앉게 해드렸더니, 두 분이 손을 맞잡고 흐느끼신다. 그리고 할머니에게 누군가에게 연락을 했느냐고 수화를 물으시는 듯. 할머니는 손자에게 연락했다고 하셨을 게다. 그랬더니, 왜 그랬냐고 거긴 연락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냐며 성화를 하시는 듯하다. 다시 할머니를 모시고 거실로 나오자, 장식장 서랍에서 손자의 사진을 꺼내어 보여주시며, 이 아이가 오고 있는 거란다...하신다. 고이 간직하고 계시던 손자의 결혼식 청첩장도 보여주셨다. 남편이 곁에 있는 동안 듣기론, 아들이 둘이 있었는데, 모두 사고로 죽었다고 하셨단다.

그렇게 손자를 기다리는 한 시간 가까운 시간 동안 할머니와 함께 창가에 앉아 집안 구석구석을 둘러 보았다. 오늘따라 날도 좋아 창으로 쏟아지는 햇살은 이다지도 따사로운데, 집안에 활기라곤 전혀 없고 사람에게서 나오는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단지 내 이웃이 단출한 노부부라서 그토록 조용한 줄로만 알았다. 복도에서 딱 한 번 마주쳤을 뿐인 꼬장꼬장해 보이는 할아버지와 조금 몸이 불편한 할머니가 오손도손 사시는 줄 알았다. 앞이 잘 안 보이시는 할머니는 여기저기 부딪치고 찢긴 상처 투성이에 옷에는 세탁을 해도 지지 않았을 피 얼룩이 져 있었고, 할아버지를 눕혀 드린 침대와 이불, 베개에도 혈흔이 있었다. 주방에는 할아버지가 그런 할머니를 위해 요리하고 미처 치우시지 못한 설거지 거리가 잔뜩 쌓여 있었다. 아마도 오늘은 더 이상 이 주방에 들어오시지 못하리라. 설거지를 해 놓으려고 수세미를 찾는데, 손자로 보이는 덩치 큰 젊은이가 들어왔다.

그는 우리가 연락을 했냐며, 짧게 고맙다고 말한 뒤 곧장 할머니에게 가서 왔노라고 인사를 했다. 붙들고 우시려는 할머니를 잠시 떼어 놓더니 할아버지를 뵈러 안방으로 들어간다. 남편과 나는 할머니께 그만 가봐야겠다고 인사를 드린 뒤에 할아버지께도 인사를 드리려고 안방으로 갔다. 입구에 서서 보니, 손자가 (언어 장애가 없으신) 할아버지와도 수화로 뭔가를 강하게 어필하고 있다. 잘은 모르겠지만, 그 분위기가 꼭 핀잔을 하는 것 같았다. 그래, 그는 아마도 일과 중에 이렇게 긴급연락을 받고 달려오는 일이 다반사였으리라. 그래도 그는 할아버지께 조금 더 살갑고 다정했어야 했다. 우리가 그만 가보겠다고 했을 때 그는 등을 돌리지 않은 채 고개만 돌려 가볍게 인사를 했다. 현관문을 닫고 우리 방으로 돌아오자 그제서야 수화가 아닌 음성 대화가 들려왔다. 뭔지 모를 이유로 여전히 강하게 항의하는 듯한 일방적인 언성.

늦어진 외출. 돌아오자마자 할아버지가 궁금해서 문을 두드리고 초인종도 눌러 봤지만, 결국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낮에 손자가 모셔간 모양이다. 그랬다면, 안심이다.

우리가 때때로 싸우고, 울고, 웃고 할 때마다 늘 조용하던 벽 너머…열린 창문으로 햇살이 한껏 들어와도 어둡고 쓸쓸했던 그 공간과 두 노인의 얼굴이 못내 눈앞에 어른거린다.
추천18

댓글목록

신태평님의 댓글

신태평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분위기 하며 묘사력이 마치 눈 앞에 보이는듯! 필력도 훌륭하시고 이웃 할머니 할아버지의 외로움과 적막함이 너무 잘 전달되네요.  좋은 글 고맙습니다

그루자머님의 댓글의 댓글

그루자머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긴 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외국에 산다고 했을 때 서운해 하시던 부모님의 마음, 그리고 이곳에서 살게 될 경우 노후에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지 한번 떠올려 볼 계기도 되었어요. 가족이 곁에 있는 것이 가장 큰 노후 복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jongwon님의 댓글

jongwon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짧고 좋은 단편 글을 읽은 듯해요. 다행히 집에 계셔서 도움을 줄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옆집의 자세한 집안 사정은 모르겠지만, 두 노부부가 외로이 서로에게 기대면서 살아가는것이 안쓰럽네요.

그루자머님의 댓글의 댓글

그루자머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예, 맞아요. 여운이 길게 남아 한 이틀 쓸쓸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날 쓰러지신 할아버지를 침대에 모시고 전화로 손자를 호출하고 나니, 할머니께서 청소기를 좀 돌려 달라고 부탁을 하시더라고요. 그 와중에 그런 걸 챙기시는 걸 보고 놀랐습니다. 이곳의 가족간 정서가 한국과는 조금 다르다는 생각도 새삼 들었어요...

yxcvbnm님의 댓글

yxcvbnm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글을 너무 잘 쓰셨어요.
단막극을 본 듯한 느낌이예요.
저도 동네에서 몇 년 동안 오고갈때 어디 사는 지는 몰라도 서로 인사하고 지내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더 이상 거리에서 안 보이면 왠지 걱정되고 마음이 아프기도 하고 그러내요.

그루자머님의 댓글의 댓글

그루자머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예, 그러셨군요. 여행으로 올 때는 몰랐으나 짧은 기간 동안 살면서 느낀 게, 우리나라와 비교해 볼 때 거리에서 유난히 고령의 노인들이 많이 눈에 띈다는 거였어요. 어디에서 사나 마찬가지겠지만, 오래 살더라도 가족과 더불어 살면서 관심과 보살핌을 받고, 죽는 날까지 외롭지 않고 건강하게 살다 갈 수 있다면 그보다 행복한 삶이 없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공감해주셔서 고맙습니다.

som4tang님의 댓글

som4tang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묘사력이 너무 좋으시네요. 받은 감동을 뭐라고 표현을 해야할지.. 언어도 다르고, 이 땅에 와서 산다고는 하지만, 성큼 이들의 삶에 들어가지는 못하는 것 같아 어떨 때는 늘 문 밖에 있는 사람 같은데, 옆 집 문 안의 모습을 우리의 눈으로 보는 것 같았고, 또 그 눈도 따뜻함이 느껴지는 것 같았어요~. 좋은 글을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

그루자머님의 댓글의 댓글

그루자머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따뜻한 공감과 칭찬의 말씀 고맙습니다.

언젠가, 독일 사람들이 겉으로는 무뚝뚝해도 막상 친해지고 나면 과감하게 선을 넘는다는 얘기를 누군가에게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제가 친구로 사귀었던 독일인 여자만 해도 그랬어요. 때때로 '이 사람이 나에게 뭔가를 바라는 것이 있어 이러나' 괜한 경계심이 들 정도로 호의적이다 못해 부담스러운 관심과 친절을 보이더라고요. 지나고 보니, 시작할 때 상대가 마음을 열어주기를 바랐던 만큼 순수하게 제 마음을 개방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분명 좋은 이웃이 되실 겁니다.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되실 거고요. 그 안에서 늘 행복하시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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