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 한국의 정치계의 당사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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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아무로이름으로 검색 조회 3,685회 작성일 04-05-28 09:54본문
건물은 알게 모르게 사람살이를 규정한다. 한국 정치에서 정당 당사가 갖는 의미도 마찬가지다. 의정(議政)을 뒷받침하는 상당수의 의사결정이 당사에서 이뤄지기에 당사 크기, 위치와 사무실 배치 등이 정당의 위상, 리더십 형태를 반영한다.
이상하게도 정권들은 전셋집에서 흥했고, 화려한 내집에서 쇠락했다. 16년 집권을 누린 민주공화당도 시작은 미미했다. 군정(軍政)을 하면서 비밀리에 창당작업을 하고, 혁명주체 김종필씨가 의혹사건으로 창당자금을 마련하는 등 구설수가 많았지만 1963년 창당 때 당사 자체는 서울역 앞 작은 병원건물에 세들어 있었다. 그곳에서 공화당은 박정희 대통령을 탄생시켰다.
이후 시내 중심가 북창동 당사를 거쳐 공화당은 9년여 만에 세입자 생활을 청산하고 72년 유신 직전 자기 집을 마련했다. 5층짜리로 번듯한 건물(현 시립용산도서관)이었지만 문제는 위치였다. 당사는 남산식물원 아래 후암동에 조용히 숨어 있었던 것이다. 당시 당사무국 간부였던 조용직 전의원은 "그곳은 일반 시민들이 택시를 타지 않으면 쉽게 갈 수 없는 곳이었다. 정당 당사가 그런 곳에 있다니 말이 되는가. 당사가 국민들로부터 멀어져 10.26을 맞은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고 회고했다.
81년 창당하면서 5공의 민정당은 관훈동에 9층짜리 건물을 당사로 샀다. 노른자위에 널찍하게 자리잡은 이곳은 한국 정당 사상 가장 화려한 당사일 것이다. 90년 3당 합당이후 민자당은 여의도 전세당사에서 정권 재창출에 성공했다. 그런데 관훈동 빌딩을 팔면서 신한국당(옛 민자당)은 96년 여의도에 내집을 짓고 들어갔다. 번듯한 자체 당사에서 이회창 후보는 대선에 졌다.
반면 야당은 자금 문제로 혹은 여당의 방해로 당사 마련 때마다 쩔쩔매야 했다.
87년 대선을 앞두고 YS는 통일민주당을 만들면서 당사를 구하느라 무척 고생했다고 한다. 6.29선언이 있었지만 민정당 정권이 방해했다는 것이다. 당시 당료였던 김무성(한나라당)의원의 회고. "정권은 시내에서 50평 이상 전세를 얻으려는 세입자를 체크했어요. 야당이면 건물주에 압력을 넣으려 한 거지요. 그래서 우리는 아예 빚을 얻어 사기로 했어요. 무역회사 이름으로 중림동에 4층짜리 건물을 샀는데 보름동안 수리하면서 들킬까봐 쉬쉬 했습니다."
대선에서 패하고 총선에서 3등으로 전락한 YS는 당사를 팔고 마포 공덕동 로터리에 있는 건물로 들어간다. "쿵짝짝 쿵짝." 오후 6시만 되면 총재실엔 음악소리가 들렸다. 바로 위층엔 카바레가 있어 악사들이 손님 맞을 준비를 하느라 드럼과 기타를 연습하는 것이었다.
자존심이 세기로 유명한 YS에게 카바레 당사는 참으로 시련의 세월이었다. YS는 이곳에서 1년여를 버티다 90년 집권 민정당과 합친다. 공화당까지 끼어 3당 합당으로 탄생한 민자당은 여의도로 진출했다. 한국정치사에서 본격적인 여의도 시대가 개막된 것이다.
DJ(김대중)도 '당사의 추억'이 많다. DJ는 95년 국민회의를 만들면서 당사를 구하느라 여의도를 뒤졌다. 맘에 드는 건물이 나타났는데 건물주가 "정당은 사절"이라며 손사래를 쳤다. 드나드는 사람이 많고 툭하면 농성이 벌어져 시끄럽기 때문이었다. 동교동 측은 신분을 숨기고 무역업자 이름으로 계약했는데 건물주가 알고 입주를 막았다. 당원들은 기습적으로 가구를 들고 건물로 돌격했다. DJ는 이곳에서 드디어 대통령이 됐다.
공화당에서 민정당까지 여당 당사엔 일년에 한번 쓸까 말까한 당 총재실이 따로 마련돼 있었다. 청와대에서 집무하는 대통령을 위한 공간이었다. 당사 상층부에, 운동장(?)만한 총재실은 대통령이 정치를 장악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권위주의의 상징이었다. 이런 현상은 야당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세든 당사였을지라도 당 대표나 사무총장 등 간부의 사무실은 크기와 위치가 달랐다. 어느 야당 총재의 사무실엔 샤워실이 달려 있기도 했다. 모든 당료가 한 평면에서 활동하는 천막당사는 이런 점에서도 한국 정치의 변종이다.
한편 당사는 한국 현대사의 격동과 애환이 서려 있는 곳이기도 하다. 76년 5월 22일 오후 서울 관훈동 종로경찰서 옆 신민당사. 이철승 의원을 지지하는 비주류계 청년 수십명이 난입했다. 김영삼(YS) 총재가 이끄는 주류 측이 전당대회를 강행하려 하자 비주류가 실력행사에 들어간 것이다. 멍키스패너와 쇠파이프로 무장한 청년들이 집기를 때려부수는 사이 2층 총재실에 있던 YS는 황급히 탈출했다. 당사 뒤로는 슬레이트를 이어놓은 복국집 지붕이 붙어 있었다. 지붕을 걷는 도중 낡은 슬레이트가 깨져 YS의 발이 빠졌다. 부상을 입은 YS는 병원에 들려야 했다. 당시 신민당에 몸담았던 인사들은 "허름한 당사가 총재를 잡을 뻔했다"고 말한다.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독재가 벼랑끝으로 치닫던 79년 8월9일 아침. 폐업을 선언한 YH무역(가발 제조)의 여공 170여명이 당사로 몰려와 4층에서 농성을 시작했다. 열악한 노동환경에 대한 저항이었다.
YS는 "나와 의원 서른명이 지키니 경찰이 당사에는 절대로 못 들어온다"고 여공들을 안심시켰다. 그러나 11일 새벽 무술경관들이 들이닥쳐 울부짖는 여공들을 다 끌어냈다. 당사 뒷마당 쓰레기통 옆에서는 여공 김경숙의 시체가 발견됐다. YH사건은 유신 붕괴의 전주곡이었다. 농성장에 있었던 여공 최순영은 이번에 민노당 의원으로 당선됐다.
한국 정치의 곡절을 보여주는 상징이나 당사도 그 못지 않게 셋집, 번듯한 단독 당사, 백화점 건물, 카바레 발밑, 천막, 사이버 정당까지 곡절 많은 모습을 보여준다.
이상하게도 정권들은 전셋집에서 흥했고, 화려한 내집에서 쇠락했다. 16년 집권을 누린 민주공화당도 시작은 미미했다. 군정(軍政)을 하면서 비밀리에 창당작업을 하고, 혁명주체 김종필씨가 의혹사건으로 창당자금을 마련하는 등 구설수가 많았지만 1963년 창당 때 당사 자체는 서울역 앞 작은 병원건물에 세들어 있었다. 그곳에서 공화당은 박정희 대통령을 탄생시켰다.
이후 시내 중심가 북창동 당사를 거쳐 공화당은 9년여 만에 세입자 생활을 청산하고 72년 유신 직전 자기 집을 마련했다. 5층짜리로 번듯한 건물(현 시립용산도서관)이었지만 문제는 위치였다. 당사는 남산식물원 아래 후암동에 조용히 숨어 있었던 것이다. 당시 당사무국 간부였던 조용직 전의원은 "그곳은 일반 시민들이 택시를 타지 않으면 쉽게 갈 수 없는 곳이었다. 정당 당사가 그런 곳에 있다니 말이 되는가. 당사가 국민들로부터 멀어져 10.26을 맞은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고 회고했다.
81년 창당하면서 5공의 민정당은 관훈동에 9층짜리 건물을 당사로 샀다. 노른자위에 널찍하게 자리잡은 이곳은 한국 정당 사상 가장 화려한 당사일 것이다. 90년 3당 합당이후 민자당은 여의도 전세당사에서 정권 재창출에 성공했다. 그런데 관훈동 빌딩을 팔면서 신한국당(옛 민자당)은 96년 여의도에 내집을 짓고 들어갔다. 번듯한 자체 당사에서 이회창 후보는 대선에 졌다.
반면 야당은 자금 문제로 혹은 여당의 방해로 당사 마련 때마다 쩔쩔매야 했다.
87년 대선을 앞두고 YS는 통일민주당을 만들면서 당사를 구하느라 무척 고생했다고 한다. 6.29선언이 있었지만 민정당 정권이 방해했다는 것이다. 당시 당료였던 김무성(한나라당)의원의 회고. "정권은 시내에서 50평 이상 전세를 얻으려는 세입자를 체크했어요. 야당이면 건물주에 압력을 넣으려 한 거지요. 그래서 우리는 아예 빚을 얻어 사기로 했어요. 무역회사 이름으로 중림동에 4층짜리 건물을 샀는데 보름동안 수리하면서 들킬까봐 쉬쉬 했습니다."
대선에서 패하고 총선에서 3등으로 전락한 YS는 당사를 팔고 마포 공덕동 로터리에 있는 건물로 들어간다. "쿵짝짝 쿵짝." 오후 6시만 되면 총재실엔 음악소리가 들렸다. 바로 위층엔 카바레가 있어 악사들이 손님 맞을 준비를 하느라 드럼과 기타를 연습하는 것이었다.
자존심이 세기로 유명한 YS에게 카바레 당사는 참으로 시련의 세월이었다. YS는 이곳에서 1년여를 버티다 90년 집권 민정당과 합친다. 공화당까지 끼어 3당 합당으로 탄생한 민자당은 여의도로 진출했다. 한국정치사에서 본격적인 여의도 시대가 개막된 것이다.
DJ(김대중)도 '당사의 추억'이 많다. DJ는 95년 국민회의를 만들면서 당사를 구하느라 여의도를 뒤졌다. 맘에 드는 건물이 나타났는데 건물주가 "정당은 사절"이라며 손사래를 쳤다. 드나드는 사람이 많고 툭하면 농성이 벌어져 시끄럽기 때문이었다. 동교동 측은 신분을 숨기고 무역업자 이름으로 계약했는데 건물주가 알고 입주를 막았다. 당원들은 기습적으로 가구를 들고 건물로 돌격했다. DJ는 이곳에서 드디어 대통령이 됐다.
공화당에서 민정당까지 여당 당사엔 일년에 한번 쓸까 말까한 당 총재실이 따로 마련돼 있었다. 청와대에서 집무하는 대통령을 위한 공간이었다. 당사 상층부에, 운동장(?)만한 총재실은 대통령이 정치를 장악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권위주의의 상징이었다. 이런 현상은 야당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세든 당사였을지라도 당 대표나 사무총장 등 간부의 사무실은 크기와 위치가 달랐다. 어느 야당 총재의 사무실엔 샤워실이 달려 있기도 했다. 모든 당료가 한 평면에서 활동하는 천막당사는 이런 점에서도 한국 정치의 변종이다.
한편 당사는 한국 현대사의 격동과 애환이 서려 있는 곳이기도 하다. 76년 5월 22일 오후 서울 관훈동 종로경찰서 옆 신민당사. 이철승 의원을 지지하는 비주류계 청년 수십명이 난입했다. 김영삼(YS) 총재가 이끄는 주류 측이 전당대회를 강행하려 하자 비주류가 실력행사에 들어간 것이다. 멍키스패너와 쇠파이프로 무장한 청년들이 집기를 때려부수는 사이 2층 총재실에 있던 YS는 황급히 탈출했다. 당사 뒤로는 슬레이트를 이어놓은 복국집 지붕이 붙어 있었다. 지붕을 걷는 도중 낡은 슬레이트가 깨져 YS의 발이 빠졌다. 부상을 입은 YS는 병원에 들려야 했다. 당시 신민당에 몸담았던 인사들은 "허름한 당사가 총재를 잡을 뻔했다"고 말한다.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독재가 벼랑끝으로 치닫던 79년 8월9일 아침. 폐업을 선언한 YH무역(가발 제조)의 여공 170여명이 당사로 몰려와 4층에서 농성을 시작했다. 열악한 노동환경에 대한 저항이었다.
YS는 "나와 의원 서른명이 지키니 경찰이 당사에는 절대로 못 들어온다"고 여공들을 안심시켰다. 그러나 11일 새벽 무술경관들이 들이닥쳐 울부짖는 여공들을 다 끌어냈다. 당사 뒷마당 쓰레기통 옆에서는 여공 김경숙의 시체가 발견됐다. YH사건은 유신 붕괴의 전주곡이었다. 농성장에 있었던 여공 최순영은 이번에 민노당 의원으로 당선됐다.
한국 정치의 곡절을 보여주는 상징이나 당사도 그 못지 않게 셋집, 번듯한 단독 당사, 백화점 건물, 카바레 발밑, 천막, 사이버 정당까지 곡절 많은 모습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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