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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Gabriel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조회 2,617회 작성일 04-04-05 00:44

본문

-이 글은 작년 7월 박근혜와 문성근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중심으로 해서 쓰여진 글입니다.
지난 3월23일 그 주인공 중 한 사람인 박근혜 의원은 한나라당 임시 전당대회에서 새 대표로 선출됐습니다. 2위를 압도적 표차로 누르고 1965년 박순천 여사 이후 39년만에 주요 정당의 여성 대표가 되는 기록을 세웠다는군요.
같은 날 이 글의 또다른 주인공인 영화배우 문성근씨는 지난 대선 과정에서 희망돼지 저금통을 무상분배하고 지지서명을 받은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 항소심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습니다.(원심에서는 일부 무죄판결, 벌금형을 받았었습니다)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겠지만 제게는 박근혜와 문성근의 삶의 궤적이 참 다르다는 또 하나의 상징처럼 느껴집니다-

얼마전 우리나라에서 제 1회 이종(異種)격투기 공식챔피온 대회가 열렸다. 주최측의 예상을 깨고 몰려든 수천의 관중은 치열한 예선을 거쳐 팔각링에 오른 최정예 무술사들의 실전무술에 열광했다.

브라질 유술과 레슬링, 태권도, 킥복싱, 무에타이, 택견 등 서로 다른 종목의 최고수들이 펼치는 맞싸움의 현장은 치열하고 살벌했다. 고수들은 실전에 들어가면 자신의 '필살기' 하나로 승기를 잡는다고 하더니 과연 팔각의 링에서는 끊임없이 피가 튀었고 '꽃같은 주먹지르기와 빼어난 발차기(화권수퇴:花拳秀腿)'같은 품새 위주의 동작은 어디에도 없었다.

나는 그 광경을 보면서 10대 시절부터 지금까지 이소룡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시인이자 영화감독인 유하의 말을 떠올렸다. 그는 "이소룡이 창시한 절권도는 오직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만들어진 무술이라는 점에서 폄하되기도 했지만, 품새만을 강조하는 기존의 무술과 선을 그었다는 점에서 그것은 혁신이었다"고 말한다.

절권도는 품새라는 유일무이한 가치에 대해 도전, 결국 이를 파괴했다는 것이다. 절권도는 모든 동작이 절제되어져 있고 최소한의 동작으로 최대한의 파괴력을 얻도록 구성되었다고 한다. 주제넘게 정교한 무술이론이나 특정무술의 장단점을 말하자는 게 아니라 이종격투기에서 감지되던 엄청난 파괴력을 말하고자 함이다.

모든 무술의 최종 목적은 상대방을 제압하는데 있다. 이종격투기는 특히나 그렇다. 얼핏 단순해 보이지만 몸에 익어서 반사적으로 튀어 나오는 공격과 방어술 한 두가지로 상대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해야 한다. 스피드와 힘과 절묘한 타이밍에 의해 승패가 판가름난다.

그것은 곧 파괴력이 극대화되는 순간이다. 무용은 아름다운 동작을 위주로 하지만 무술은 파괴력을 위주로 한다는 말은 그래서 간결하지만 적확하다.
파괴력은 어떤 대상을 깨뜨리어 헐어 버리고 기능을 잃게 하는 힘이다. 무장해제시키는 힘이다.

이종격투기 현장에 몰린 수천명의 관중과 나중에 돈을 내고 케이블 TV를 통해 당시의 실황중계 방송을 시청하는 수많은 사람들은 극단적 파괴력의 실체를 직접 확인하면서 흥분과 함께 경외심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고 토로한다.

서로 다른 가치관과 취향을 가진 사람들과 '심리적 이종격투기'를 치러야 하는 우리네 일상에서 '파괴력'에 대한 호기심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대중적 파괴력: 품새와 필살기

그런 맥락에서 한나라당 박근혜 의원과 영화배우 문성근씨는 흥미로운 인물들이다. 그들이 가진 '대중적 파괴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두 사람이 가진 독특하고 엄청난 파괴력은 이미 여러 차례에 걸쳐 공개 검증이 끝난 상태다.

지난 6월 중순 한겨레 신문에서 차세대 여성 지도자의 경쟁력을 묻는 여론 조사를 실시했는데, 이 조사에서 박근혜는 여타의 여성 정치인과 3배 이상의 차이를 보이며 '여성 대통령 후보감'이라는 이미지가 강한 것으로 나타났다.

일반 국민들에게 '박근혜 브랜드'가 압도적 1위라는 것을 다시 증명한 것이다. 절반이 넘는 유권자가 10년쯤 뒤엔 우리나라에서도 여성대통령이 탄생할 것이라고 응답했다는 현실에서 박근혜의 정치적 위상은 예사롭지 않다.

전문가들의 해석은 이렇다. 현대 정치에선 정당 내부의 세력보다는 자신만의 고유한 목소리와 브랜드가 결정적인데 이런 점에서 박근혜는 나름의 고유한 브랜드를 만들어 내는 데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대선 패배 이후 당내 정치적 입지가 좁아졌는데도 대중적 평가가 이렇게 좋은 것은 박근혜라는 브랜드가 정치 시장에서 아직도 상당한 상품성이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는 것이다.

정부통령제로 개헌을 하여 선거를 치를 경우 그녀를 부통령 후보로 엮은 러닝메이트가 최강으로 지목된다는 조사결과가 나온 게 벌써 2년 전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박근혜는 우리나라 현역 정치인 가운데 최고 수준의 대중동원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97년 15대 대선 직전에 정치권에 들어와 처음으로 TV에서 이회창 후보 지지 연설을 했는데 폭발적인 반응으로 그녀의 연설이 재방송된 것을 시작으로, 며칠 후 경남 울산에서 열린 이회창 후보 연설 때는 그녀의 연설이 끝난 뒤 유세장이 울음바다가 되면서 이때부터 '박근혜 신드롬'이라는 말이 정치권에 떠돌기 시작했다.

어떤 곳에선 청충이 그녀의 얼굴을 한번 보려고 3시간씩이나 기다리기도 하고 또 어떤 곳에선 비가 내리는데도 그녀가 연단에 서자 그녀를 보기 위해 일제히 우산을 접기도 했다.

기자들의 말에 의하면 40대 이상의 사람들은 박근혜가 나타나면 마치 오랫동안 보지 못한 가족을 만나는 것처럼 말할 수 없이 반가워 한다고 한다. 두 손을 부여잡고 눈물부터 흘리는 유권자들도 심심치않게 발견된단다.

거대한 대중집회 현장에서도 자신의 곁에 있는 한 사람 한 사람과 눈을 맞추고 손을 잡아 주거나 어깨를 감싸안는 그녀의 행동에서는 직업 정치인의 상투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한 평론가의 분석처럼 대중을 몸짓으로 휘어 잡는 솜씨만을 놓고 보면 DJ나 YS에 버금가는 능력의 소유자라 할 만하다. 그만큼 박근혜의 파괴력은 생생하고 강력하다.

그렇다면 문성근의 파괴력은 또 어떤가.
그가 본격적으로 영화판에 뛰어든 90년대 초부터 한동안 '한국 영화에는 안성기와 문성근밖에 없느냐'라는 볼멘 소리가 터져 나올만큼 스타파워를 가지고 있는 배우가 문성근이다.

지금도 '한국의 영화관객들이 가장 좋아하는 남자 배우'를 뽑을 때마다 문성근의 이름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한 영화잡지는 매년 '충무로 파워 50'인을 선정해 발표하는데, 제작사나 투자배급사의 책임자가 아닌데도 3년 연속 10위 안에 오른 경우는 문성근이 유일하단다.

2001년 당시의 기록이니까 노사모 등 정치적 활동과 연관해서 의혹의 눈초리를 보낼 이유는 전혀 없다. 오래전부터 맡고 있는 스크린쿼터 문화연대 이사장으로서의 활발한 활동에다 영화계의 대소사와 정책적 대안을 쉼없이 고민하고 토론하며 영화계 발전을 모색한 결과다.

비단 영화에서 뿐 아니라 문성근은 방송진행자로서의 대중적 파괴력에 있어서도 독보적이고 탁월하다. 지난 대선 전까지 6년 넘게 진행한 '그것이 알고싶다'는 다큐멘타리 프로그램 진행에 있어서 '문성근류'가 생길만큼 진행자로서 보기 드물게 시청자들에게 신뢰와 호감을 주었다.

시청자들은 이구동성으로 그의 말에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받는다고 말한다. 문성근이 책상에 기대어 그의 독특한 말투로 전달하는 내용을 듣고 있자면 그 내용이 무엇이든 모조리 진실일 것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그 비결에 대해 문성근은 어떤 사안에 대해 이성적으로 정서적으로 자신의 판단이 있어야 한다는 태도때문일 것이라고 자평한 적이 있다.

지난 6월 중순 한나라당은 문성근이 KBS-TV '인물현대사' 다큐멘타리 프로그램 진행자로 내정된 사실에 대해 문성근의 편향성과 사회운동 경력을 문제삼아 진행자 내정을 철회할 것을 요구하였다.

프로그램의 성격 탓도 있겠지만, 노무현 후보나 이회창 후보를 지지하던 다른 연예인들의 방송 복귀는 전혀 문제삼지 않으면서 유독 문성근만 문제를 삼는 건 무슨 까닭일까.

아찔할 정도로 강력한 문성근의 대중적 흡인력에 대한 경계심때문일 것이다.
문성근은 연극보다 영화에 더 큰 매력을 느낀 이유로 '무서운 전파력'을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내가 보기엔 문성근이라는 인물이 '전파력' 그 자체다.

지난해 10월 인터넷에서 폭발적인 전염력을 발휘한 일명 '눈물의 비디오'를 혹시 기억하는가. 대선을 앞두고 노무현 후보의 지지도가 바닥을 치고 있을 당시 개혁국민정당 창당 발기인 대회에서 문성근이 눈물을 흘리며 노후보 지지를 호소했고 노후보 또한 이 연설을 들으며 눈물을 흘렸던 바로 그 비디오다.

수많은 사람들이 인터넷을 통해 그 장면을 보면서 때로는 감동으로 때로는 안타까움으로 눈시울을 붉혔고 그 감동과 안타까움은 '무서운 전파력'으로 이어졌다. 그 중심에 문성근이 있었다.

울산 유세 현장을 울음바다로 만들었다는 박근혜의 대중적 파괴력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 위력이다.
확실히 타인을 무장해제시키는 박근혜와 문성근의 힘은 강력하다.

그 위력이 메가톤급이라는 점에서는 별반 차이가 없지만 파괴력의 원천은 질적으로 전혀 달라 보인다. 박근혜의 파괴력이 '품새'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면 문성근의 파괴력은 '내용'쪽이다.

문성근이 '열정적 논리'로 사람의 마음을 뒤흔다면 박근혜는 '무서운 절제'를 통한 극단의 품새로 힘을 보여준다.

'특별한 아버지'

두 사람이 가지고 있는 서로 다른 파괴력의 원천은 대부분 각자의 성격과 가치관 등 개인적 특성과 맞닿아 있으며, 그 차이의 근원에는 그들이 '심리적으로 아버지를 어떻게 인식하고 수용하며 살아왔는가' 라는 명제가 자리잡고 있다.

박근혜와 문성근 사이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약간의 오해가 있을 수도 있겠다. 스포츠 신문처럼 남녀의 문제라면 일단 섹시하게 엮어 놓고 나서 생각해 보자는 것이 아닐까 하는 오해, 개혁주체세력과 홍위병간의 턱없는 組合처럼 어거지를 쓰자는 것이 아닐까 하는 오해.그 어느 쪽도 아니다.

간단한 공통점부터 따져보자. 우선 나이가 비슷하다. 박근혜가 52년생이고 문성근이 53년생으로 모두 50대 초반이다. 비슷한 시기에 같은 대학을 다녔다.

박근혜가 서강대 70학번 전자공학과 출신이고 문성근은 72학번 무역학과 출신이다. 그러니까 한 2년쯤은 같은 캠퍼스에서 얼굴을 마주치며 생활했을 것이다.

당시 박근혜는 문성근을 몰랐을 가능성이 높지만 문성근은 현직 대통령의 딸인 박근혜의 존재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찮아 보일 수도 있는 알고 모르고의 문제를 거론하는 건 나름의 이유가 있어서다.

문성근은 자신의 별명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대학 때 딱 한번 '나그네'라는 별명이 있었다고 대답한 적이 있다. 그가 1학년 때 유신이 선포되어서 '말 못하는 시대의 대학생'이 된 까닭에 구름에 달가듯이 술집을 전전하며 술을 마시고 돌아 다녔다는 것이다.

유일한 별명이 유신과 연관되어 있었던 대학생 문성근은 같은 캠퍼스에서 생활하는 박정희의 딸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리고 76년부터 박정희의 유신독재에 맞서다 험난한 감옥살이를 시작하는 아버지 문익환 목사를 보면서 당시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수행하던 박근혜 동문에 대한 심정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공통점은 박근혜와 문성근이 모두 특별한 아버지를 둔 유명인사라는 데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문익환 목사, 두 사람 모두 자식의 입장에서는 더 이상 비교대상이 없을만큼 '특별한 아버지'였을 것이다.

부모의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없겠지만, 나는 박근혜와 문성근이 그들의 '특별한 아버지'로부터 절대적 영향을 받았고 지금도 받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조금 과장해서, 그 영향력의 내용과 정도의 차이가 박근혜와 문성근이라는 사람의 색깔을 결정짓는 기준점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박근혜와 문성근의 '특별한 아버지'들이 자식들에게 깊은 영향을 준 시기는 대체로 17,8년쯤인 듯 하다.

그 이전부터 쭉 부모 자식 관계였지만, 결혼을 하면서 제 2의 인생이 시작된다고 말하는 것처럼 특정한 시점을 기준으로 부녀, 부자의 관계가 질적으로 달라졌다는 말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44세에 5.16혁명에 성공해 60대 초반에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대한민국 최고 통치권였다. 아홉 살의 나이에 청와대에 들어간 박근혜는 임기를 알 수 없는(?) 대통령의 딸로 18년을 살았다.

23-27세까지 5년간은 세상을 떠난 엄마를 대신해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문익환 목사는 59세에 유신독재 반대 투쟁으로 처음 구속된 이래 77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17년동안 모두 6번에 걸쳐 정확하게 11년간을 감옥에서 보냈다. 누군가의 말처럼 정치적 이유로 이렇게 여러번 구속되면서 장기 복역한 사람은 현대 국가 사상 거의 없었을 것이다.

거의 기네스북에 오를만한 기록이다. 20대 중반에 처음으로 아버지가 구속되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던 문성근은 이후 중년의 나이가 될 때까지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아버지의 징검다리 감옥살이를 지켜보며 살았다.

특별한 아버지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은 시기에 박근혜와 문성근의 물리적 나이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심리적 과제와 문제해결 방식은 나이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어린 나이에 소녀 가장이 되어 어른보다 더 훌륭하게 가족을 돌보는 아이가 있고, 서른이 넘어서도 가장역할을 겁내는 어린 아이같은 어른도 있지만 내면적으로 그들이 겪어야 할 심리적 압박이나 정서적 갈등은 물리적 나이에 따라 확실히 차이가 있다.

박근혜는 스스로 선택의 의미를 따져볼 능력이 없는 아홉 살 때부터 특별한 아버지의 강력한 영향권 아래에서 성장했고, 문성근은 자기 판단기준이 어느 정도 정립된 20대 중반부터 특별한 아버지에 대한 부담과 갈등으로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 차이는 크다. 그것은 그대로 박근혜와 문성근이 가지고 있는 파괴력 칼라의 차이로 이어진다. 박근혜와 문성근의 파괴력은 무엇이 어떻게 다른가.

박근혜 브랜드의 파워

먼저 박근혜에 대해서 살펴보자.
박근혜의 놀라운 '정치적 성장'은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들에게 경탄과 의혹의 느낌을 동시에 선사한다.

정치입문 4년여만에 그녀가 이룩한 탄탄한 정치적 기반은 한국 경제의 성장만큼이나 놀라운 성과라고 평가되기도 한다. 한 정치부 기자는 박근혜 이후 여성으로서 이렇게 짧은 시일안에 지도자의 반열에 드는 사람은 당분간 나타나기 힘들 것이라고 말한다.

박근혜가 마지막 여성 지도자일 가능성도 있다는 과장된 진단까지 덧붙인다. 과장이라고 했지만 이제는 여론조사에서 확고한 '여성 대통령 후보감'으로 자리매김 될 정도니 그녀의 정치적 위상이 독보적인 것만은 확실하다.

그녀가 현실적으로 무시못할 정치적 지분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벌써 오래전의 일이다. 이회창씨가 제왕적 총재라고 불리우던 시절에도 그녀는 이총재의 당운영 스타일에 대해서 '일방적, 독선적 행태'라는 쓴소리를 쏟아냈다.

한나라당이 박정희 전대통령의 재평가 작업에 소극적으로 대응한다는 판단이 들자 "나는 표모으러 다니는 기계가 아니다"라며 자신의 대중적 파괴력을 무기로 당을 긴장시켰고 그와 관련 이총재의 역사관이 불확실하다며 한동안 당무를 거부하기도 했다.

지난 해 초 한나라당을 탈당할 때 그녀를 따르는 국회의원은 한 명도 없었지만 국민들은 24%의 지지를 보냈다. 결국 이회창 총재는 대선을 앞두고 삼고초려 끝에 박근혜를 다시 한나라당으로 복귀시켰다. 현실적인 정치적 지분이 있어서 가능했던 일들이다.

하지만 정치인 박근혜의 성장에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못마땅한 눈길을 보내는 이들은 그녀의 정치적 지분이 거품에 불과하다고 비토한다. 그녀의 정치력의 핵심은 한마디로 박정희 신드롬으로 만들어졌고, 여성 정치인이라는 신비함이 보호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한나라당 일부 의원들은 그녀를 '공주'라고 부른단다. 아버지의 후광으로 자신의 정치적 위상이나 능력보다 지나친 대접을 받고 있는데 본인은 그게 온전히 자기 힘인줄 알고 자기 위상을 착각하고 있다는 의미다.

그녀가 정치에 입문한 이후 아버지 박정희와 관련된 비난과 논란은 쉬지 않고 계속된다. 하지만 붕어없는 붕어빵처럼 박근혜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설전의 한 가운데 박근혜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박정희에 대한 온갖 폄훼와 덕담만 난무한다. 어쩌면 그것은 자신의 위상과 상관없이 스스로 아버지의 대리인을 자처하는 박근혜의 태도에서 말미암은 현상인지 모른다. 이른바 '부성 콤플렉스'다.

정신분석가 융이 기술한 '부성 콤플렉스'는 마치 박근혜의 삶을 관찰하고 그대로 옮겨 적은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정신과 의사라는 직업을 핑계로 한 사람의 인격을 찧고 까불려는 의도는 조금도 없다. 실제로 박근혜가 '부성콤플렉스'의 공식을 그대로 보여주기에 하는 말이다.

어린 아이에게 자기 부모를 그리게 하거나 연상시키면 현실적인 부모와는 전혀 다르게 표현되는 경우가 흔하게 나타난다. 어린 시절에 인지하는 부모의 상은 실제 부모의 모습이라기보다 아이의 풍부한 상상에 의해 채색된 부모상이다.

일반적으로 인간의 父性像이나 母性像은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나오는 인간의 보편적인 집단무의식으로 신화적 성격을 띄고 있다. 모성상의 원형은 모든 것을 품고 둘러싸는 따뜻한 대지같은 감성적 존재로, 부성상의 원형은 신적인 존엄성을 갖춘 권력자 즉 제정일치 시대의 왕과 같은 존재로 무의식에 자리잡고 있다.

유아기가 지나면 아이는 부모에 대한 적지 않은 실망과 함께 원형적 부모상과 현실적 부모상을 구별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같은 심리적 과정에 문제가 생길 때 모성, 부성콤플렉스가 발생한다. 여기서는 부성콤플렉스에 대해서만 살펴보자.

부성콤플렉스는 현실의 아버지가 지나치게 일방적인 경우(매우 권위적, 폭력적이거나 혹은 극도로 약할때) 신화적인 부성상이 그대로 남아 자식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이들이 인식하는 신화적 아버지는 실제의 아버지와 거리가 있다.

우리 현대사에서 '대통령 박정희'는 '인간 박정희'의 모습을 밀어내고 제정일치 시대의 왕처럼 절대권력을 가진 신화적 부성상 그 자체로 존재한다. 아직까지도 일부 국민들에게는 그 이미지로 존재한다.

박근혜는 9살 때부터 27살 때까지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성장했다. 박정희처럼 거의 신적인 존재같은 아버지일 경우 부성콤플렉스가 나타나지 않으면 그게 오히려 이상하다.

분석심리학에서는 부성콤플렉스를 가진 여성을 "영원한 소녀(puella aeterna)"라고 부른다. 그들은 성장 후에도 여전히 현실적 부모와 신화적 부모를 분리하지 못하는, 부모 문제에 관한 한 유아적 심리상태에 머물러 있다.

박근혜는 아버지 박정희를 기억하는 게 아니라 신화적 부성 원형으로서의 박정희를 기억하고 있는 듯 하다. 박근혜는 아버지를 "그냥 아버지가 아니라 국가와 세계에 대한 안목을 갖게 해준 자상한 선배이자 스승이며 나침반과도 같은" 존재라고 말한다.

박근혜는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하면서 동생들보다 더 아버지를 신화적 존재로 인식하게 되었을 것이다. 대통령인 아버지를 보좌하면서 '아버지 중심으로 세상을 살게 되고, 모든 대화도 아버지를 통해서 진행' 되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역사관이나 개인적 가치관도 당연히 부성콤플렉스의 영향권 아래 놓일 수밖에 없다.
'영원한 소녀'가 강력한 아버지의 권위와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자신의 무의식에 있는 미분화된 남성성(아니무스)을 끊임없이 드러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갖게되는 되는 것이 여성의 아니무스화로, 곧 부성콤플렉스이다.

아들(남성)의 경우는 무의식에 미분화된 여성성(아니마)을 가지고 있으므로 부성콤플렉스보다는 모성콤플렉스가 더 문제가 되고, 부성콤플렉스는 딸에서 더 문제가 된다.

자기절제, 그리고 사라진 개인적 삶

부성콤플렉스에 사로잡힌 여성의 첫 번째 특징은 극도의 자기절제를 보인다는 것이다. 분석심리학에서는 이런 여성의 삶을 "특수요원 훈련받듯 사는 삶"으로 묘사한다.

이들은 아버지로부터 '특별한 부름'을 받았다고 느끼며 그에 부응하기 위해서 극단의 의지를 발휘한다. 주변에서 칭송을 받는 사람이 되는 경우가 많다.

개인적인 삶에서 최종 목표가 '자기를 완전히 이기고 절제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라는 박근혜는 9년째 단전호흡을 하고 있으며 지금도 세 손가락으로 팔굽혀펴기를 20회이상 할정도의 요가 고수라고 한다.

그녀가 물리적인 면에서만 극단의 의지를 보이는 것은 아니다.
박근혜의 수없이 많은 인터뷰 기사에서 법칙처럼 반복되는 키워드는 크게 두 가지다.

아버지 박정희와의 연관성과 인간 박근혜의 엄청난 절제력이다. '예외없는 법칙은 없다'는 격언도 박근혜에겐 예외다. 나는 아직까지 단 한번도 이 법칙에서 벗어난 그녀의 인터뷰 기사를 본 적이 없다.

박근혜를 직접 만난 인터뷰어들은 하나같이 감동과 함께 경악에 가까운 심정을 털어 놓는다. "박근혜는 상냥하고 친절하며 사려깊다. 쉽게 감정을 드러내 상대방을 불편하게 하는 법도 없으며 악수는 정중하고 따뜻하다.

은은한 미소, 단정한 자세, 그리고 상대방의 말을 듣는 진지한 태도 등이 그를 처음 본 사람에게 감동을 준다." 인터뷰어들이 감동하는 부분은 대충 그런 것들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경악에 가까운 감정을 느끼는 것은 어떤 이유인가. 그녀의 절제력 때문이다. "시종일관 차분한 목소리를 유지했으며 단 한 번도 자세를 고치지 않는 모습. 두시간 동안 다리도 한번 움직이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처음의 꼿꼿하고 단아한 자세를 한번도 바꾸지 않았다. 처음 들어와서 앉았던 자세 그대로 일어섰고 나갔다. 무더운 사무실에서 땀 한방울 흘리지 않고 물 한잔 입에 대는 일없이 2시간을 자세 한번 고치지 않고 앉아 있었다."

일생 한시도 긴장을 늦추지 않고 사는 태도가 중요하다는 게 그녀의 철썩같은 신념이다. 학창시절 "나는 어떤 면을 고쳐야 하는가? 나의 부족한 점은 무엇인가?"를 노트에 적어두고 고칠 때까지 노력하곤 했다는 그녀의 삶은 지금도 흠잡을데라곤 전혀 없는 '그림자없는 생활'의 한 표본이다.

"하늘을 닮아가는 과정, 그것이 바로 인생길"이란 그녀의 일기에선 극한에 달한 자기절제가 연상된다.
부성콤플렉스를 가진 여성의 두 번째 특징은 개인적, 여성적 삶이 소멸되며 외부 세계에 몰입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이다.

이들에게 외부 세계란 상징적으로 아버지의 세계이며 아버지의 세계는 이들의 유일한 지향점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여성적 역할을 하지 않는 삶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박근혜의 개인적인 삶은 '국가와 민족'으로 점철된다. 잘 알려진 것처럼 그녀의 조국애는 남다르다. 정치입문 2년 후 그녀는 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개인적인 행복이 없다고 행복하지 않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조국이 아름다워지고 든든한 반석 위에 서는 것을 보는 게 가장 큰 행복일 겁니다. 조국이 편치않으면 자신도 편치않은 거잖아요"

다른 정치인이 이렇게 말하면 썰렁할텐데 박근혜에겐 그것이 마치 가족애를 말하는 것처럼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녀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저녁 밥상에 앉아 '남부 지방에 가뭄이 들어 걱정'이라거나 '미국문제가 고민'이라는 식의 아버지 말을 듣고 자라면서 나라를 생각하는 사고의 틀이 형성되었다고 말한다.

그런 환경탓에 어린 나이에도 자연스럽게 '오늘은 비가 오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곤 했단다. 70년대 당시 여성으로서는 아주 드물게 대학에서 전자공학과를 선택한 것도 국가 경제 발전을 위해서 수출을 획기적으로 늘릴 전자산업이 중요하다는 아버지의 말씀에 영향을 받은 때문이었다니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녀에게 조국애란 거의 모태신앙과 흡사하다. 스스로의 판단으로 선택하기 이전에 그녀에게 주어진 원초적 가치관같은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박근혜에게 있어 조국은 아버지 박정희를 통해서만 존재한다는 데 있다.

그녀가 40대 중반에 뒤늦게 정치에 뛰어든 이유는 이렇다. "저는 외환위기 사태를 당하면서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 나라가 어떻게 세운 나라인데 망할 수가 있는가'하는 생각에 가만있어도 울컥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나는 그녀에게 구체적으로 '이 나라가 어떻게 세운 나라'인지 묻고 싶다. 아마도 그녀는 '사심없이 소신을 가지고 국익을 위해서는 어떤 경우도 양보를 하지 않았던' 아버지 박정희의 피땀과 고뇌를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설마 단군 신화나 태조 이성계의 개국 설화를 말하고자 함이었겠는가. 실제로 박근혜는 처음으로 국회의원 뱃지를 달고 나서 "아버지께서 평생을 바쳐 이루어 놓은 나라의 경제가 지금 병들어 있으니 이것을 다시 부활시키는 것이 최대의 꿈"이라고 말했다. 그녀에게는 아버지 박정희가 조국 그 자체인 것이다.

이회창 총재의 제왕적 총재관을 비판하기도 했지만 그녀의 지도자 상은 의외로 보수적이고 가부장적이다. 상냥하고 친절한 그녀의 태도만 보고 지레짐작할 일은 아니다.

그녀는 지도자 결정론을 신봉하는 듯 하다. "좀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한 지도자가 이끌고 있는 나라의 모습, 그 현주소는 바로 그 지도자의 마음을 펼쳐놓은 것일 뿐이다"라고 말한다.

국가의 중요 대소사가 모두 아버지의 절대권력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자란 박근혜에게 그것은 당연한 지도자관일 것이다. 한 기자가 '아버지의 업적 중 가장 의미있는 것은?'이라는 질문을 던졌더니 박근혜는 '근면한 국민성 배양'이라고 답한다.

국민을 자신과 똑같이 아버지의 훈육을 받아야 하는 자식의 입장으로 보기 때문에 가능한 대답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이회창 총재가 정치적 갈등으로 대립할 때 박근혜는 "집안에서 부모님이 감정대립으로 싸우면 어린이들이 불안해서 어디다 마음을 붙여야 될지 모르죠"라며 국민 걱정이 늘어진다.

그녀에게는 아직도 제정일치 시대의 왕같은 아버지 박정희가 지도자상의 모든 것이다. 부성콤플렉스의 한 모습이다.
부성 콤플렉스가 있는 여성은 실제적 세계를 사는게 아니라 신화적 색채가 가득한 세계를 산다고 한다.

일상적이고 사소하고 소모적인 일을 경멸하며, 지나친 정신주의자로 어떤 경우에도 무너지지 않는 고집을 가지고 있으며, 지적인 여성으로 인정받는다. 그러나 곁에서 보는 사람에겐 '살아있다고 느껴지지 않는 인격'을 가지고 사는 사람으로 비친다.

극복해야 할 '신화적 부성상'

한 기자는 박근혜의 가장 큰 장점으로 10.26이후 국회의원이 되기까지 거의 20여년 동안 사색과 자기수양을 가졌다는 점을 꼽는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그녀의 정신주의는 더욱 확고해지고 부성콤플렉스는 더욱 강화되었을 것이다.

1980년대를 돌아보며 그녀는 '갑자기 피가 거꾸로 콱 솟는 것 같고 가슴을 도려내는 듯 고통스러운 순간들이 많았다'고 말한다. '인간으로서 고통의 바닥끝까지 갔다온 기분'이라는 그녀의 심정을 이해할 만하다.

부모가 모두 흉탄에 돌아 가시고 신과 같았던 아버지의 모든 것을 부정하고 매도하는 현실이 그녀는 너무 고통스러웠던 것이다. 80년대에 쓰여진 그녀의 일기에는 권력에 대한 허무감과 인간에 대한 배신감이 곳곳에 배어 있다.

"지금 상냥하고 친절했던 사람이 나중에 보니 利에 기가 막히게 밝은 사람이 아니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덧없는 인간사이다(81.3.2)" "(인간을) 신뢰할 수 없다는 사실이 모든 것을 슬프고 우울하게 만든다(81.8.14)"

무균상태에서 살다가 갑자기 세상에 내던져진 박근혜에게는 아버지 앞에서 결재서류를 들고 뒷걸음치다 다리가 꼬여서 나동그라졌던 장관이나 아버지 앞에서 충성을 맹세하며 목을 놓아 흐느끼던 정치인들이 조금만 달라진 모습을 보여도 모두 배신자로 보였을 것이다.

권위주의 시대의 비정상적인 행태들이었지만 신화적 부성상에 사로 잡힌 그녀에겐 허무하고 또 허무한 일이었을 것이다.

지난 98년 그녀는 "그들이(앞서 말한 장관이나 중견 정치인같은 부류) 서로 발뺌하고 용기를 못내는 바람에 지금와서는 유신이 무슨 커다란 범죄처럼 되버렸다"고 한탄한다.

실제로 당시에 기회주의적 행태를 보인 숱한 인간까지 변명해 주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대학 졸업당시 이과계열을 수석졸업했던 박근혜의 총명함이 흐려진 것만큼은 분명하다.

그녀는 81년 10월 28일 일기에 유신에 관해 이렇게 적고 있다. "유신없이는 아마도 공산당의 밥이 되었을지 모른다. 공산당 앞에 수백만이 죽어갔다면 그 흐리멍텅한 소위 민주주의가 더 잔학한 것이었다고 말할지 누가 알 수 있으랴"

박근혜 입장에서는 그렇게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박정희는 220개월의 통치기간 중 절반에 해당하는 105개월간 계엄령, 위수령 등 각종 비상조치를 발동했다. 그만큼 비정상적인 권력이었다는 의미다.

그 대부분은 유신시대 때 이루어진 비상조치다. 1970-79년까지 10년간 국가보안법, 반공법, 노동법, 긴급조치 등을 위반한 죄로 구속된 양심수는 2704명에 달한다.

많은 사람들이 고문을 당하거나 옥에 갇히거나 의문사했다. 정적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과 보복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이 무시무시한 공포정치와 공작정치는 박정희의 절대권력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박근혜는 "아버지의 통치를 사전적으로 해석하면 '독재'가 되겠으나 그 당시 시대상황 전체를 보면서 유신을 이해해야 한다"고 강변한다.
1980년대, 나치의 일급 전범이었던 아버지를 혹독하게 비판한 책 한권이 독일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폴란드 총독으로 있으면서 하루에 15만명 이상의 폴란드인을 학살했던 한스 프랑크의 아들이 쓴 '나의 아버지, 나치의 살인마'라는 책때문이었다. 그 책에서 아들은 아버지를 비겁하고 부패했으며 권력에 눈이 먼 기회주의자였다고 기록해 놓았다.

그러나 사회의 반응은 전혀 예기치 못한 것이었다. '어떻게 아들이 아버지를 그토록 저주할 수 있는가'하는 것이었다. 정신병 치료를 받아 보라고 권하는 사람도 있었을 정도였다.

나치에 관련된 오욕의 역사를 정리하는데 엄격하다는 독일에서 1980년대에 생긴 일이었다. 천륜은 때로 모든 역사적 진실을 뒤덮는다.

박근혜는 자신의 신화적 부성상을 사람들이 공유해 주길 원했다. 1989년 그녀는 10.26후 처음으로 언론에 나와 "아버지가 매도당하는 세상에서 제가 개인적으로 무엇을 얻더라도 저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한다.

아버지의 명예회복을 위한 그녀의 노력은 처절하고 고단했다. "왜곡을 바로 잡기 위해 기념사업을 시작하기 이전의 세월, 나의 생의 목표는 오로지 아버지에 대한 것이었다. 그 왜곡을 바로 잡아야 한다는 일념 때문에 나 개인의 모든 꿈이 없어져 버린 상태였다"

그 심정이야 이해하지만 자신의 신화적 부성상을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박근혜의 모습을 보는 일은 불편하다.
나는 지금 박정희 시대의 功을 전혀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것인가. 아니다.

박근혜가 관념적으로는 아버지 시대의 功過를 구분해서 생각한다고 하지만 실제는 '공'만 기억하고 '과'가 무엇인지 실감하지 못하는 것 같아서 하는 소리다.

김한길 전 의원이 TV에서 토크쇼를 진행하고 있을 때 박근혜가 초대손님으로 출연하였다. 김한길은 대담을 이렇게 마무리했다.

"저는 박근혜씨와 동갑내기로 같은 시대를 살았지만 박근혜씨가 어머니를 대신해서 청와대의 안주인으로 지내던 즈음에 저는 박대통령의 긴급조치 때문에 감옥에 갇혀 있던 아버지를 면회하러 다녀야 했습니다"

녹화 뒤에 박근혜는 '김한길의 마지막 인사말을 빼지 않으면 방송을 내보낼 수 없다'고 강력하게 항의했단다. 박대통령의 긴급조치 운운한 부분이 걸렸던 모양이다.

김한길은 '그녀에게 있어 세상이란 박대통령의 치적만 가득한 장소였다'라고 한탄한다.

지난해 여성정치세력화의 화두로 박근혜를 '사유'하자는 논란이 벌어졌을 때 김정란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중언부언하는 내 글과 달리 김정란의 메시지는 날카롭고 명징하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이 거기 다 들어 있으므로 좀 길게 인용하자.

"(내가 박근혜를 문제삼는 건) 그녀의 개인적 자질의 문제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차지하고 있는 정치적인 상징 지분의 위험성 때문이다. 그녀는 철저하게 박정희 신화에 편승했으며 박정희에 대한 어떤 비판에도 진정으로 귀를 기울인 적이 없다.

박근혜는 박정희 철권통치의 적극적 지지자였고, 그것을 여성적 이미지로 위장하는 역할을 수행했다.......내가 박근혜가 누리고 있는 정치적 후광이 위험하다고 여기는 것은 바로 모든 합리적 판단을 마비시키는 그 신화적 요소 때문이다....

박근혜는 자신의 의지와 아무 상관도 없이, 비이성적 수준에서 작동하는 신화적 아우라에 감싸인 채 유권자들에게 다가간다. 유권자들은 박근혜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박정희 신화의 살아 있는 이미지를 선택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박근혜는 박근혜임에도 불구하고 박근혜가 아니다. 박근혜는 언제나 박근혜의 타자이다"

박근혜가 우리나라에 277명밖에 존재하지 않는 국민의 대표가 아니라면 그리고 엄청난 대중적 파괴력을 가지고 있지 않은 정치인이 아니라면 그녀가 아버지를 어떤 식으로 추억하든 문제삼을 일도 없다.

그것은 그대로 집안 일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언제 박근혜의 두 동생들에게 아버지의 공과를 따져 보자고 하던가.

나는 그녀가 부성콤플렉스의 실체를 인지하고 자신의 정치지분만큼만 아버지 혹은 아버지 시대를 투명하게 인식할 수 있기를 바란다. 단순히 '립서비스' 차원에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말이다.

6월 중순의 한겨레 신문 조사 결과에 따르면 박근혜의 호감도는 99년 조사 때와 비슷하지만 자질 평가는 껑충 뛰었다고 한다. 즉 99년에는 23%에 불과했던 자질평가가 이번엔 31.3%로 올랐다는 것이다.

예전에 박근혜가 가지고 있는 대중적 파괴력의 알파와 오메가는 '박정희 신화'였는데 이제는 개인적 자질까지 인정 받아 대중적 파괴력이 더욱 강해지고 있다는 증거다.

미국의 차기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고 있는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은 퍼스트 레이디와 상원의원의 차이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퍼스트 레이디는 환상적인 경험이다. 그러나 상징적인 존재다. 반면 상원 의원은 직업이다. 내 역할과 내가 내린 결정을 통해 평가를 받는다는 것이 매우 만족스럽다"

우리나라에서 퍼스트 레이디를 거쳐 국회의원이 된 사람은 박근혜가 유일하다. 더구나 마음에 드는 사람을 박정희 대통령이 선심쓰듯 임명했던 유정회 국회의원도 아니다. 국민이 뽑은 국회의원답게 자기 '직업'을 통해 정당한 평가를 받기 바란다.

문성근스러움

문성근의 논리는 열정적이다. '뜨거운 얼음' 따위의 황당한 단어 조합이 문성근에 이르면 현실성을 획득한다.

지난 86년 서른 세 살의 나이에 연극배우로 데뷔한 이후 문성근은 연극배우, 영화배우, TV탤런트, 방송진행자 등으로 활동하고 있는데 장르에 관계없이 그의 이름 앞에는 '이성적이고 지적'이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는다.

93년 문성근은 한 대담에서 이지적인 배우라는 중평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물음에 기자들은 자기 통로를 통해서 듣고 기사화하기 때문에 무슨 얘기를 해도 똑같은 기사가 될 수밖에 없다며 '진짜 한심하다'고 표현한다.

그런 이유로 영화에서는 살인자, 포르노작가, 탈주범, 포악한 막노동자 등등 '지랄같은' 역할을 자청했다는 게 문성근의 말이다. 98년에 '문성근 나와라'라는 캐릭터 차용 연극이 있었는데 제목과 달리 문성근은 나오지 않았다.

왜 하필 문성근이었을까. 미남은 아니지만 '연기폭이 넓은 문성근의 캐릭터'를 차용한 패러디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문성근을 보면서 여전히 지적인 이미지를 떠올린다.

언론인 설호정은 문성근에 대해 "연기가 아니라 '생시'에 조차 소위 지성적 체취를 감추기 어려운 배우"라고 말하며 강준만 교수는 "나는 문성근씨의 연기보다 그의 탁월한 분석과 이론에 깊이 매료된 사람이다"라고 고백한다.

본인이 아무리 아니라고 부정해도 사람들이 문성근에게서 지성적 체취를 느낀다면 분명 그 까닭이 있을 것이다.
문성근은 '연예인답지 않은 연예인' '스타면서 스타같지 않다'는 평을 많이 듣는다.

문성근은 주위의 이목을 별로 두려워 하지 않는다. 평범하게 산다. 조영남, 전유성처럼 개인적인 자유를 추구하는 스타일과는 조금 다르다. 문성근의 평범함은 '자신과 사회'의 관계를 규정하는 실용적 태도의 한 상징이다.

영화계에서 문성근은 근심많고 생각많고 말많은 영화정책가로 통한다. 배우보다 영화운동가에 가깝다. 스크린쿼터 문제 등 영화 관련 궐기대회를 하거나 언론에 기고를 하거나 이론적 뒷받침을 제공하는 일에는 항상 그가 맨 앞자리에 앉아 있다.

문성근은 예술을 기능이 아니라 전체 인문과학 수준에서 바라볼 수 있는 작업이 매우 필요하고 중요하다고 역설한다. 예술을 기능이라고 생각하면 아무리 천재적인 감성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도 5년내지 10년을 견디기 힘들다는 말이다. 생각이나 사상이 없기 때문이다.

어느 신인감독이 간곡하게 출연 요청을 했는데 시나리오를 다 읽어본 문성근은 "이 작품엔 이데올로기"가 없다며 거절했단다. 그의 연기관도 다분히 문성근스럽다.

"백기완 선생이 대중연설할 때의 그 힘같은 것, 또 백무산 시인의 면도날도 사시미칼도 아닌 도끼같은 무서움, 김남주 시인의 무거움같은 것 등등 사방에 널린 게 연기의 선생님이죠"

자신의 연기관을 이런 식으로 말할 수 있는 배우가 문성근말고 또 있는가. 문성근이 자주 이용하는 서점의 분석에 의하면 그는 영화서적 뿐 아니라 인문과학 서적 전반을 섭렵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영화계 최정상급 스타 배우로 활동하고 있지만 영화출연에 관한 한 공명심이나 물욕이나 명예욕을 버린지는 오래다. 하지만 영화운동가로서의 욕심은 버리지 않고 있단다. 스크린쿼터 문제에 관한 그의 노력은 집요하다.

기자들에 의하면 스크린쿼터 사수 영화인 집회에서 그는 배우가 아니라 선동가다. 다른 배우들이 성명서를 앵무새처럼 읽을 때 그는 즉흥연설로 영화인들의 의식부터 깨우친다.

강우석 감독은 문성근이 주도한 스크린쿼터 폐지 반대운동을 통해 한국 영화가 오늘날과 같은 성장을 이룰 터전을 마련했다고 말한다. 문성근은 스크린쿼터폐지 반대운동이 단순한 밥그릇 싸움이 아니라 문화 주권을 지키는 일임을 알린 일등 공로자다.

'버거운 아버지'의 그림자에서 벗어나다

나는 문성근이 이성을 감성적으로 전달하는 능력을 지녔다고 생각한다. 대중을 상대로 하는 스타는 이미지 관리가 매우 중요하다. 이미지 전략에서 이성보다 감성에 호소하는 것이 훨씬 파괴적이라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하지만 문성근은 이성과 감성의 구분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희안한 대중적 파괴력을 가졌다.
문성근이 뿜어내는 대중적 파괴력의 실체는 품새 위주가 아닌 실전무술의 필살기와 닮아 있다.

올해 초 문성근은 새로운 영화 촬영계획에 관한 질문을 받은 자리에서 "지난 2년 '길길이' 날뛰면서 에너지를 소모했다"며 무엇보다 빨리 건강하고 싶다고 말한다.

나는 지난해 두 번 정도 노후보의 유세현장에서 문성근의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울컥 피를 토하듯 쏟아내던 그의 연설, 목에 노란 목도리를 두르고 연단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개다리춤을 추던 모습 그 어디에서도 지성적 이미지를 관리하려는 문성근은 없었다.

수많은 노사모 회원 중에 유독 문성근만 그렇게 열정적으로 활동한 것은 아닐테지만 나는 당시 그의 전력투구가 인상깊었다. 문성근은 매사가 그런 식이다.

어느 영화평론가가 '스타는 노출되지 않아야 하므로 대중스타가 운동가나 경영자로 활동하기는 어려운 게 아니냐'는 질문을 던지자 문성근은 "나는 환상 속의 스타가 되려고 하지 않았다"고 딱 부러지게 자른다.

94년 '너에게 나를 보낸다'에서 문성근이 과감한 섹스신을 선보이자 일부에서는 문성근에게 '혹시 이 영화를 끝으로 은퇴할 각오를 한 것 아니냐'는 농을 던졌는데 그때도 문성근의 대답은 단호했다. "작품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에 동의한다면 배우가 무슨 연기를 하든 그게 무슨 상관인가"

문성근은 대학생을 대상으로 한 강연에서 감독 지망생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지금 비디오카메라로 찍으세요. 조명 비용이 없으면 야간 장면은 없애면 되잖아요"

그의 행동과 말에는 화려한 장식이 전혀 없어 보인다. 그의 연기도 그렇다. 89년 신군부 부역언론인을 다룬 TV드라마에 문성근이라는 배우가 처음 등장했을 때 방송관계자들은 '실제처럼 행동하는' 그의 연기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고 표현했다.

93년 이창동 감독은 연기자로서의 문성근을 평가하며 "나는 지금까지 한국영화에서 그처럼 자연스럽고 실감나는 인물을 만나본 경험이 별로 없다"고 말한다.

그의 아버지 문익환 목사는 살아 생전 아들에게 100% 완벽한 연기보다는 관객에게 3할정도 생각할 여유를 주는 '여백이 있는 연기'를 하라고 충고했단다.

'너에게 나를 보낸다'를 찍을 때 굉장히 슬퍼하는 장면이 있었는데, 어떻게 찍고 싶냐는 감독의 질문에 문성근은 벽을 보고 누워 있겠다고 했다. 등이 슬퍼 보일 수도 있는 연기를 하고 싶었다는 것이다. 문목사가 주문한 '여백이 있는 연기'란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문성근에게 아버지 문익환은 여러 가지 의미로 특별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박정희와는 또 다른 관점에서 '행복한 가정'보다는 '평안한 나라'를 더 큰 가치로 여긴 문목사가, 생산적인 혹은 건설적인 개인주의를 역설하던 문성근에겐 버거운 아버지였을 것이다.

아버지 생전에 이미 유명인사였던 문성근은 언론으로부터 수도 없이 아버지와의 공동인터뷰 제의를 받았다. 그러나 "호기심 차원에서 대담을 시키려는 것은 이해하지만 아버님은 나와 차원이 다른 분이다. 섞어놓지 말라"며 거절했다.

아버지가 워낙 큰 나무여서 곁에 조용히 있었다는 것이다. 문성근은 특히 아버지 문익환의 징검다리 감옥살이를 '감당이 안되었던 부분'으로 기억한다.

"아버지는 1976년 59세에 처음 구속된 이래 94년 77세로 돌아가실 때까지 17년 중에서 11년간을 교도소에서 사셨습니다. 정치범에게는 난방을 해주지 않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보면 머리맡에 놓아둔 물이 10cm, 15cm씩 얼어 있습니다.

그런 방에서 70살먹은 노인네가 담요 몇 장만 가지고 맨몸으로 버티는 겁니다"
90년대 중반까지도 문성근은 아버지 이야기만 나오면 약간 화가 났단다.

술 마시다가도 옆 자리에서 느닷없이 뛰쳐나와 문목사님의 뒤를 이으라고 충고하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고 조금 야한 장면이 있는 영화를 찍으면 그의 팔을 부여잡고 "왜 아버지 이름에 먹칠을 하느냐"며 언성을 높였다니 얼마나 당혹스럽고 난감했겠는가.

"아버지는 인간이 아니었어요. 인간 저편에 계신 분이었어요. 사람들이 아버지의 인생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있다면 저보고 그 길을 따르라고 그렇게 쉽게들 말하지 못할 거예요"

박근혜가 그랬던 것처럼 문성근도 마찬가지로 특별한 아버지로 인해 엄청난 심리적 압박감을 느끼면서 살았다. 그러나 문성근이 다른 점은 아버지에 매몰되지 않고 심리적 거리를 둘 수 있었다는 것이다.

96년 문성근은 한 대학의 강연장에서 아버지와 아들은 각자 개성을 가지고 있는 인간으로서의 관계를 바탕으로 부자관계가 형성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아버지와의 일정한 거리두기가 필요하다는 말일 것이다.

하지만 문성근은 아버지 살아 생전에 끊임없이 아버지의 고난의 삶에 동참했다. 1980년 당시 비공개로 진행됐던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의 재판 과정을 전부 외워서 문서로 기록해 바깥 세상에 알린 사람이 문성근이다.

아버지 문익환 목사도 '내란예비음모죄'로 구속되었기 때문이다. 1989년 방북 사건으로 아버지가 감옥에 다섯 번째 들어갔을 때 문성근은 재판과정을 지켜보다가 울화가 북받쳐서 판사에게 쌍욕을 퍼부었다가 법정 모독죄로 구속되어 열흘동안 아버지와 같은 안양교도소에 수감되기도 했다.

모든 아들에게 아버지는 산이다. 우리나라에는 세계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대물림 공안수'가 있다. 안재구, 안영민 부자가 바로 그들이다.

세계적인 수학자였던 아버지 안재구박사는 1979년 남민전 사건에 연루되어 아들이 초등학교 5학년일 때 무기징역을 선고받는다. 그후 10년 만에 가석방되었지만, 1994년에는 아들 안영민씨와 함께 '구국전위' 사건으로 재구속되었다.

부자가 함께 옥살이를 하던 시절, 긴 겨울징역이 시작되면 아들은 젊은 사람도 견디기 힘든 곳에서 지내는 아버지의 안부에 목이 메인다. 자신이 엄청나게 춥다는 대전교도소에 있고 아버지가 그래도 조금은 남쪽인 순천교도소에 있다는 사실 정도가 그나마 위안거리다.

그러면서도 아들은 아버지와의 끈을 놓지 않고 이렇게 말한다.

"제 인생에 있어 가장 큰 행복은 남다른 아버지를 만난 것입니다. 사실 아버지로부터 직접 배운 삶의 지혜는 거의 없습니다. 저희 두 부자는 함께 있던 시간보다 헤어진 시간이 훨씬 더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 헤어졌던 시간들이 한 발 떨어져 아버지의 삶을 관조할 수 있게 했는지도 모릅니다"

다른 사람은 어떨지 몰라도 문성근에게는 마치 자신의 일처럼 가슴을 때리는 얘기일 것이다. 문성근은 곧잘 "아버지의 삶을 보면서 인생은 추운 날씨에 발가벗고 동산 위에 서있는 것이라는 걸 알았다. 그런데 내 삶은 뭔가 하고 생각하다 보면 한심스러웠다"고 말한다.

그런 자기혐오의 과정을 거쳐 98년 초 문성근은 아버지의 무거운 그림자를 일부나마 떨쳐 버렸다고 고백한다.

예전에는 작은 봉사단체에서 참여 요청을 받아도 아버지만큼 진실되고 일관되게 해낼 자신이 없어서 피해 다녔는데 세상 일 가운데 흐름이 옳은 게 있다면 거기에 얹히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90년대 초반부터 지금까지 무수히 많은 연예인 중에서 문성근만큼 사회참여 활동을 많이 한 사람을 알지 못한다. 얼핏 추려봐도 이런 정도다.

세계성폭력추방주간 행사(92년), 정치수배자 해제 기원 무대(93년), 성폭력센터 명예지킴이(93년), 비닐하우스촌.노점상.결손가정 아동보호 등 도시빈민 문화 한마당 잔치(93년), 공연윤리심의위원회 사전심의제도 폐지 운동(93년), 북한산의 환경보전을 위한 연대 서명 운동(97년), 인혁당 사건 진상규명 대책위원회 집행위원(98년), 베트남전 민간인학살 진실위원회가 주관한 평화문화제(2000년)......

거의 시민운동가 수준이다.
지난 3월 주간조선 함영준 편집장은 문성근을 향해 "영화배우가 본업인지 아니면 선거기획가, 사회운동가, 언론비평가, 정치가, 정치브로커 또는 대통령 인사참모인지 등등 헷갈릴 정도"라고 고까움을 토로한다.

이어서 그는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한다.
"과연 누가 그에게 그런 다양한 공적역할을 하도록 권한을 부여했는지 그의 자유의사에 의한 것이라면 과연 어떤 판단이 그로 하여금 본업을 제쳐 두고 그토록 '열혈한'으로 뛰게 만들었는지 궁금하기만 하다"

문성근의 대변인은 아니지만 상식적인 수준에서 누구나 조금만 생각하면 답을 알 수 있는 문제를 함편집장이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 급한대로 문성근의 발언을 근거로 내가 일단 답을 해보자.

우선 정치브로커나 선거기획가, 언론비평가 등의 개념을 문성근에게 적용하는 것은 부적절해서 동의하기 어렵다는 전제를 달아야 겠다.

나를 이용해달라

지난 해 3월의 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웃이나 공동체를 위해 사용하는 '참여 및 봉사 활동' 시간은 하루 평균 4분에 불과하다고 한다. 누가 권한을 부여하지 않아서 참여나 봉사활동이 이렇게 저조한 것은 아닐 것이다.

본업을 제쳐두고 문성근이 '열혈한'이 된 이유를 한번 들어볼까. "사회의 한 사람으로서 정치의식, 비판의식을 갖고 있는 것, 어쩌면 비연기적인 활동에 나서는 것은 나로서는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어떤 사고의 틀에 매이는 것은 딱 질색이지만 어떤 생각을 갖고 있다면 그것을 현실화하기 위한 모든 활동에 나서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문성근이 사회참여 활동을 하는 방식은 이렇다.

1988년, 문성근은 인혁당 사건의 진실을 다룬 연극에서 박정희로 대표되는 당시 권력자의 하수인인 고문자의 역할을 연기했던 적이 있다. 그때 연극을 하면서 어떻게 권력이 사람의 생명을 그렇게 쉽게 앗아갈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단다.

그러다가 10년이 지나서 우연히 진상규명에 관한 기사를 보고 자신이 할 일이 없을까 해서 전화를 했다는 것이다. 물론 진상규명위원회에선 쌍수를 들고 환영했을 것이다.

문성근은 오래전부터 자신의 대중성, 상업성을 누군가 이용해 주기 바란다고 노래를 불러왔다. 그런 이유로 예술과 스타의 사회적 책무를 누구보다 강조한다.

스타가 대중의 퇴행적 욕구를 만족시키는 대상에 불과하거나 영화가 단순한 오락으로만 기능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의 예술관까지 100% 수긍할 수는 없지만 사회운동에 스타의 대중성을 이용하자는 문성근의 주장에 나는 전폭적인 지지를 보낸다.

그런 관점에서 스타 파워에 대한 신호균 PD의 분석은 매우 흥미롭다. 안재욱이라는 탤런트가 '별은 내 가슴에서'라는 드라마에서 감짝 스타로 부상했을 때의 일이다.

안재욱이 스타로 부상하자 그가 이전부터 출연하던 "짝"이라는 아침 드라마의 시청률이 상당 수준으로 오르는 현상이 발생했다. 그 드라마가 별다른 변화와 개선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시청률이 상승한 것은 안재욱이라는 스타이외에 다른 요인으로 설명할 방도가 없다는 게 신PD의 분석이다.

스타의 파괴력이란 그렇게 대단한 것이다. 그런 파괴력을 TV-CF 따내는데만 사용하지 말고 시민들의 사회 참여 활성화에 사용하자는 게 무엇이 문제인가.

근자에 지난 대선 기간중 문성근의 적극적인 정치참여 활동을 문제삼으며 그의 사회 참여 운동 전반에 딴죽을 거는 사람들이 있는 모양이다. 실상 사람들의 관심이 높은 정치참여 활동이라서 유독 눈에 띄었을 뿐이지 앞서 살펴 본 것처럼 문성근의 사회참여 활동은 역사가 깊다.

그동안 그가 참여했던 시민 운동의 무대는 음향도 시원찮고 조명도 볼품없으며 심지어 비바람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기도 했다. 그의 스타성은 스모그를 뿌리며 '짠'하고 등장하는 다른 스타들의 파괴력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지난 10여년 온갖 사회활동에 참여할 때는 박수도 보내고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는 덕담을 보내다가 정치개혁 운동에 동참했다고 쌍심지를 켜는 이유는 무엇인가.

정치참여는 가장 큰 의미의 사회활동이라는 운동론까지 들먹일 것도 없다. 문성근의 말처럼 '공화국 시민으로서의 정치참여. 발언에 대한 기본권'을 행사하는 것 뿐이다.

처음부터 정치개혁 운동을 출세 수단으로 삼으면 안되지만 순정적으로 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정치를 하든지 말든지'라는 식의 냉소적 표현은 온당치 못하다.

문성근의 분석에 의하면 그것은 그동안 정치를 농락하기 위해 수구언론이 만들어 놓은 잘못된 통념이다. 그런 논리라면 일제시대 독립운동을 했던 독립투사들은 해방 이후 어떤 정치활동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정치에 참여하는 순간 독립운동의 순수성이 여지없이 훼손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이념적 동지라고 생각하느냐'는 물음에 문성근은 "저는 이론가도 아니고 전면에 나서 사회운동을 할만큼 깊이 있게 아버지의 일을 알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방북사건 후 관련서적을 찾아 읽으면서 아버지의 생각을 이해하게 됐습니다"라고 대답한다.

나는 문성근의 사회참여 활동도 그런 맥락에서 계속 이어져 왔다고 생각한다. 문성근 본인의 말에 의하면 자신이 배우로 활동할 때는 문성근이지만 정치활동을 하면 문익환의 아들로 본단다.

특별한 아버지를 둔 아들의 숙명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문성근은 정치활동에서도 아버지와 별개로 막강한 파괴력을 가진 사람이 되었다. 그 파괴력이 권력화되지 않도록 파괴력의 사용 방식에서 더 신중해지길 바란다.

나는 문득 문성근의 형이자 인권운동 연출가로도 존경받았던 고 문호근씨의 말 한마디를 떠올린다. 문호근씨가 사회활동을 하면서 일의 성과가 좋지 않아 안달할 때면 아버지가 하던 말이란다. "이놈아, 관뚜껑에 못질할 때 알아보는거야"

나는 그 말을 그대로 문성근에게 다시 돌려주고 싶다.

철사장(鐵砂掌)은 중국 무술에 있어 최고의 파괴력 및 살상력을 발휘하는 최강의 장법을 가리킨다. 철사장의 연공에 힘써 고도의 경지에 이른 고수는 타격시 일체의 외상을 남기지 않고 적의 내부 또는 내장만을 상하게 하여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다고 한다.

이처럼 철사장 숙련자의 일격은 상대방에게 치명적인 중상을 가하는 파괴력을 가지고 있어서 전수자가 극히 제한되어 왔단다.

박근혜나 문성근처럼 한꺼번에 철사장 수백만개를 날리는 것과 같은 규모의 대중적 파괴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파괴력의 원천을 따져 보고 그 힘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고민해야 마땅하다.

철사장의 전수자를 극도로 제한했던 이유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 보라는 말이다.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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