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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행정수도특별법 위헌결정에 대한 진중권과 도올의 글…

페이지 정보

작성자 나디아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1건 조회 2,376회 작성일 04-10-30 02:50

본문

좀 늦은 감이 없지않아 있지만, 혹시 아직 읽어보지 않으신 분들을 위해 퍼왔습니다.



이름 진중권

제목
역사에 남을 ‘헌법적 코미디’


1면에 헌법재판소에서 행정수도 이전이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렸다는 소식이다. 나는 이 소식을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비행기에 올라타다가 집어든 한국 신문을 보고 알았다. 도착하기 전부터 짜증이 확 밀려온다.

당조직과 당문학

신문들의 태도가 재미있다. 조선일보는 이미 10여 년 전에 행정수도를 이전하지 않으면 나라 경제가 망한다는 주장을 폈던 것으로 기억한다. 중앙일보와 동아일보도 작년 국회에서 신행정수도 특별법이 통과될 때 별 말이 없었던 것으로 안다. 심지어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이 공히 행정수도의 충청권 이전을 선거공약으로 내세웠을 때에도 아무 문제제기도 하지 않았던 것이 보수언론들이다. 그런데 왜 갑자기 저러는 것일까?

내 기억에 따르면 보수언론들은 정확히 두 번의 큰 선거가 끝난 다음부터 행정수도 이전에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선거 전에 반대하고 나섰더라면 아마 한나라당이 충청권에서 표를 얻기란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선거 국면은 지나갔다. 게다가 지속되는 불경기에 “경기도 어려운데 웬 수도이전이냐”는 볼 멘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기 시작한다. 그러자 비로소 한나라당과 보조를 맞추어 행정수도 이전에 딴죽을 걸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신문은 뭘 해야 할까?독자들이 이 사안에 대해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찬반양론의 정확한 정보를 제공해줘야 한다. 하지만, 수도권 과밀 현황이 어떤가, 수도권 지가가 기업에 얼마나 부담을 주는가, 수도 이전으로 원하던 효과를 얼마나 거둘 수 있는가, 행정수도 이전에 따른 재정적 부담은 감당할 만 한가, 행정수도 건설로 인한 경기부양 및 고용창출의 효과는 어느 정도인가 등등을 따져보는 차분한 분석기사는 거의 없었다. 눈에 띄는 것은 오로지 권력의 욕망으로 가득 찬 정략적 기사들뿐이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자.그래, 행정수도 이전이 헌법에 위배될 정도로 못할 짓이라면, 왜 작년에 국회에서 행정수도 이전 특별법이 통과되도록 아무 소리도 하지 않다가 이제 와서 한나라당과 보조를 맞추어 난리를 치는가? 이럴 바에는 차라리 사장 이하 말단 기자까지 일제히 한나라당에 입당을 할 일이다.기자라는 이들이 하는 짓을 보면 ‘당조직과 당문학’을 쓴 레닌이 혀를 내두를 정도다. 특히 조선일보는 정부여당을 향해 헌재 판결을 받아들이라고 설치기 전에 자신들이 10여 년 전에 폈던 주장을 이제 와서 번복한 데에 대해 먼저 해명부터 해야 하지 않을까?

심지어 ‘A≠~A’ 라는 모순율까지 맘껏 범해도 되는 게 이 나라 보수언론이 누리는 자유의 수준이다. 해삼, 멍게, 말미잘도 아니고, 어떻게 인간의 정신을 가지고 한 입으로 서로 모순 되는 주장을 할 수 있을까?이렇게 인간으로서 합리적 정신이기를 포기해도 되는 게 이 나라 언론이 누리는 자유의 지표다. 전 세계에서 어느 언론도 이 만큼의 자유를 누리지는 못할 것이다.세상에 어느 나라의 언론이 대한민국 보수언론처럼 법적 자유, 정치적 자유를 넘어 모순율을 초월할 형이상학적 자유까지 누리고 있는가?

레스푸블리카

헌법에 따르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고 한다. ‘공화국’이 원래 사적인 용무(즉 res privata)에 반대되는 공적인 용무(res publica)를 가리키는 용어라면, 대한민국은 유감스럽게도 공화국이 아니다.이번 헌재 해프닝은 대한민국 정체가 ‘레스 푸블리카’가 아니라 ‘레스 프리바타’의 아귀다툼에 불과하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이 사안을 대하는 각 당의 태도를 보자.여당의 경우에는 행정수도 이전이라는 중차대한 문제를 너무 졸속으로 처리한 느낌이 있다. 일단은 계획 자체도 성급하게 수립했고, 소위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데에도 실패했다. 왜 그렇게 서둘러야 했을까?여당에서는 수도권 과밀 해소, 기업의 코스트 부담 절감, 국토의 균형 개발과 같은 것보다는, 호남에 충청을 든든히 묶어 두고, 거기에 수도권의 절반을 더해 한나라당을 포위하겠다는 정략적 발상에 치중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리라.

한나라당은 여러 겹으로 졸속이다. 그들은 신행정수도 특별법을 통과시킬 때에만 졸속이었던 게 아니라, 수도 이전 반대로 입장을 바꿀 때에도 졸속이었다. 아직도 한나라당에서 만든 어떤 사이트에는 행정수도 이전 공약이 그대로 내걸려 있다고 한다. 자기들이 선거에서 내건 공약을 뒤엎기 위해 한나라당 내에서 어떤 진지한 논의라도 있었던가? 내가 알기로는 전혀 없었다.한 마디로 그들은 정세의 변화에 따라 즉흥적으로 입장을 바꾸어 버린 것이다. 이것이 이들이 행정수도 이전과 같은 ‘레스 푸블리카’를 처리하는 방식이다.

두 번의 졸속에 이어 한나라당의 졸속 정치는 계속된다.행정수도 이전이 헌재에서 위헌판결을 받자, 곧바로 이들은 충청권 달래기에 들어갔다. 듣자 하니 ‘행정타운’을 건설하자, ‘기업도시’를 건설하자는 둥 엉뚱한 소리를 하는 모양이다.행정타운을 건설하든, 기업도시를 건설하든, 어차피 국가의 세금으로 추진하는 일이라면, 철저하게 국가발전전략에 따라 결정을 내릴 일이다. 얼마나 많이 세금이 들던 간에, 적어도 이런 문제는 기껏 지역 민심 달래기나 선거 분위기 조성 차원에서 접근할 문제는 아닌 것으로 안다.

하지만 저들에게 중요한 것은 어차피 ‘레스 푸블리카’가 아니다. 전략적 목표를 달성한 반대급부로 자기들이 받을 전술적 불이익을 최소화하는 것. 그게 저들의 유일한 관심사다.한 마디로 행정수도 이전을 좌초시켜 여당과 충청권의 전략적 결합의 고리를 해체해 놓고, 이어서 그 반대급부로 자신들에게 쏟아질 비난을 회피하기 위해 조삼모사의 전술을 쓰겠다는 것이다. (심지어 한나라당과 보조를 맞추는 어느 신문에서는 행정수도 이전이 무산된 책임을 정부여당에게 떠넘기는 발 빠른 행보를 보여주고 있다. 느끼하기가 파충류의 피부 같은 분들이다.)

헌법적 코미디

행정수도 이전에 반대하는 민주노동당에서조차 “‘관습헌법’을 근거로 한 위헌결정이 극히 이례적이고 납득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밝혔다.실제로 이번 판결은 대한민국 사법사상 가장 해괴한 판결로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참으로 불쌍한 것이 대한민국 국민 됨이다. 그래도 명색이 헌법재판소의 판결이니 절차상 따르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따르려니 헌재의 근엄하신 영감들이 연출하는 저 엄숙한 코미디 속에 들어가 살아야 하는 내 처지가 한심하게 느껴진다. 이런 식이라면 차라리 헌법재판소 대신 오랑우탄 우리를 가진 나라에서 사는 게 더 행복하지 않을까?

실제로 헌재의 판결은 거의 코미디 수준이다. 어쨌든 이번에 처음으로 내가 합의한 헌법에 행정수도는 반드시 서울에 있어야 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새롭게 알게 된 이 지식은 헌재 결정문에서 우기는 것처럼 수백 년 동안 만인이 암묵적으로 공유하고 있던 것은 분명히 아니다.
수백 년 동안 서울이 수도의 역할을 해 왔고, 지금도 서울이 대한민국 수도라는 사실은 관습적으로 인정된다. 하지만 그것이 헌법에 들어있고, 따라서 행정수도를 이전하려면 헌법의 개정이 필요하다는 것만은 분명히 ‘관습법’으로 그렇게 널리 공유된 사안이 아니다.

왜?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 보라. 그랬다면 어떻게 국회에서 여야의 합의로 신행정수도 특별법이 통과되는 일이 있을 수 있었겠는가. 국회에서 버젓이 이런 위헌적 행동을 하는데 어떻게 국민들이 항의를 하지 않는 일이 있을 수 있었겠는가.또, 그러잖아도 씹을 거리 찾아 혈안이 된 보수언론들이 아무 이의도 제기하지 않고 그냥 넘어가는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었겠는가? 따라서 내가 보기에 이번 헌재의 결정은 대한민국 헌법을 확인한 것이 아니다. 헌재에서 국민투표도 거치지 않고 아예 새로운 헌법을 제정해 버린 것이다.

헌재 결정문은 고교생 논술 답안지를 보는 느낌이었다. ‘관습법’의 관념에 끌어 맞추기 위해 펴는 논리도 억지스러웠지만, 논거들도 생뚱하기 짝이 없었다.수도 서울의 역사성을 강조하기 위해 어원까지 고찰한다. 이 대목에선 ‘서라벌-셔발-서울’ 어쩌구 하던, 고등학교 고문 시간이 생각났다. 그 논리에 따르면 ‘서울’은 고유명사가 아니라 보통명사인 셈. 그렇다면 앞으로 ‘일본의 수도는 동경’이 아니라 ‘일본의 서울은 동경’이라고 하는 게 헌재 결정의 취지를 따라 우리말을 사랑하는 길이 될 것이다.그리고 “경국대전” 운운하는 대목에선 박장대소를 했다. 2교시는 국사 시간인가 보다.

사법독재?

나는 헌재의 결정이 대단히 정치적이라고 느낀다. 헌재가 자신들의 우군이라고 생각했던지, 한나라당에서는 여당에서 추진 중인 나머지 개혁입법도 모두 헌재로 가져갈 작정이라고 한다.행정부를 빼앗기고, 입법부에서마저 소수로 전락하자, 사법부-한나라당의 연합전선을 펴서 행정부를 압박하겠다는 생각이다. 그 전에 한나라당은 의회에서 다수를 바탕으로 조중동과 연합전선으로 정부여당에 대항해 왔다. 하지만 보수언론의 정치적 영향력은 어차피 점점 감소하고 있다. 거기에 자신들마저 소수파로 전락해 버렸다. 그러던 차에 새로운 전략적 동맹자를 만난 것이다.

한나라당에서 나머지 법안들마저 헌재로 가져간다고 하자. 그리고 보수적인 헌재에서 또 다시 엉뚱한 결정을 내려대기 시작하면, 바야흐로 이 땅에는 사법독재의 시대가 펼쳐질 것이다. 그 뒤에 얼마나 많은 혼란이 벌어질지는 생각하기조차 싫다.보수언론도 그렇고, 헌법재판소도 그렇고,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과거에는 이 나라가 보수언론에 의해 다스려진다는 느낌을 받았다면, 요 몇 달 전부터는 이 나라가 온통 헌재에 의해 다스려진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럴 바에야 앞으로 헌법재판소의 재판관들도 선거로 뽑아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민주주의의 패러독스. 민주주의의 과실을 제일 먼저 따먹는 사람은, 그것을 쟁취한 이가 아니라 그것을 억압했던 이들이라는 것이다.독재는 물리력으로 반대자를 탄압하지만, 민주주의는 과거에 독재정권에 봉사했던 이들에까지도 민주적 권리를 부여한다. 이것처럼 부당한 것도 없다. 이것이 우리의 우울함이다. 하지만 우울해 할 것도 없다. 그게 바로 민주주의의 위대함이니까. 독재정권에 아부하던 언론들이 이제 와서 ‘비판언론’을 자부하며 까부는 것까지가 우리의 승리다. 독재정권의 형리 노릇하던 사법부가 뒤늦게 행정부로부터의 독립을 과시한 것까지가 우리의 승리다.

보수언론의 ‘비판언론’ 코미디 속에도 진보는 이루어지고 있다. 그것을 통해 우리는 최소한 언론이 정권에 아부하지 않아도 될 만큼 자유를 누리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헌재의 황당한 판결 속에도 진보는 이루어지고 있다. 최소한 사법부가 행정부의 시녀 노릇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주지 않았는가.물론 그 황당함이 짜증날 수도 있다. 하지만 절차는 지켜져야 한다. 민주주의는 원래 번거로운 것이다. 민주적 절차를 준수하느라 저 반복되는 황당함의 사회학적 해결이 불가능하다면, 그때는 느긋하게 문제의 생물학적 해결을 기다리는 여유를 가질 필요가 있다.


진중권 / 문화비평가

입력: 2004년 10월 27일 18:17:38 / 최종 편집: 2004년 10월 27일 18:17:38











가련하다, 헌재여!
당신들은 성문헌법 수호자였거늘...

[도올 김용옥 특별기고] 신행정수도특별법 위헌결정을 통박함 ①


헌법재판소가 지난 21일 신행정수도특별법에 대해 위헌결정을 내리자 사회적으로 큰 파문이 일고 있다. 그동안 대통령 탄핵, 총선, 남북문제, 행정수도이전 등 주요 현안과 관련, 날카로운 분석으로 관심을 모았던 도올 김용옥 중앙대 석좌교수의 헌재 비판 글을 두차례에 나눠 싣는다.... 편집자 주


헌재의 신행정수도특별법 위헌결정은 위헌이다. 법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위에 법 없다. 법 위에 사람 없다 함은 무엇을 일컬음인가? 1948년 7월 12일에 제정되어 9차의 개정을 거친 대한민국 헌법은 대한민국의 통치체제와 대한민국 국민의 기본권 보장을 규정한 기본법으로서 여타 모든 법에 대하여 상위를 점하며, 국가와 국민에 관한 기본원칙을 규정한 국가의 근본조직법이다.

대한민국 헌법은 지나간 왕조의 헌법이 아니며, 어디까지나 주권재민(主權在民)의 원리를 밝히는 근대입헌주의적 헌법이다. 따라서 헌법에 구현된 원리는 국민이 인간이기 때문에 가지는 천부적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것이며, 이러한 인도주의적이며 보편주의적인 원리를 떠나 특정한 이념이나 정파, 정략의 이권을 대변하기 위한 것으로 조작되거나 자의적으로 해석될 수 없다. 인간이라는 보편자를 지배하는 자연법적 원리에 대한 전관적(全觀的)인 통찰이 없이 헌법은 함부로 해석되거나 조작될 수 없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헌법재판소는 헌법의 존속과 더불어 성장한 유구한 전통을 지닌 기관도 아니며, 1987년 5년단임제 현행헌법이 만들어지고 1988년 9월 1일 헌법재판소법이 발효되면서 탄생한 극히 역사가 일천한 기관이다. 그전에는 헌법재판소의 기능은 헌법위원회가 명목적으로만 담당하였던 것이다.

더구나 한법재판소를 구성하고 있는 9명의 재판관은 헌법학을 전공한 사람이 단 한명도 없으며 헌법의 해석에 있어서 위헌적 오류를 범할 수 있는 소지가 얼마든지 존한다. 따라서 법위에 사람 없다 함은, 헌법이 몇 사람의 자의적 해석에 의하여 왜곡될 수도 있다는 것을 역설하는 명제이다.

2004년 10월 21일 윤영철 헌법재판소장에 의하여 낭독된 '신행정수도건설특별법 헌재결정문'은 행정수도이전이라는 거국적 사태에 대한 순수한 법리적 규명에서 귀납된 결론이 아니라, 오로지 현 행정부가 행정수도이전을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연역적 전제를 관철시키기 위하여 모든 논리를 조작해낸 느낌을 강렬하게 던져주는 문장이다.

이 결정과정에서 헌법의 해석 자체가 위헌적 소지를 지니는 많은 억지춘향의 논리를 내포하게 되었으며, 또 이러한 논리는 우리국가의 질서근간 자체를 해체시킬 수 있다. 헌법의 해석이 몇몇 편협한 법관의 주관적 독단에 좌우된다면 법치의 근원이 흔들릴 수 있다.

행정수도이전 못하게 모든 논리 조작한 느낌

헌법해석은 소꿉장난이 아니다. 전효숙·김영일 재판관을 제외한 헌재의 재판관은 우리나라 헌법의 근본원리와 성격, 그리고 그것을 보조하는 역사·철학·문학의 모든 지식체계에 관하여 중대한 오판을 범하고 있다.

첫째, 수도의 단순한 소재지(所在地. locality)의 문제를 헌법의 명문으로 규정하는 것은 헌법의 존재이유가 아니다. 헌법이란, 국민주권의 원리, 자유주의 또는 기본권보장의 원리, 대의제의 원리, 권력분립 또는 삼권분립의 원리, 법치주의의 원리와 같은 추상적인 원리를 규정하는 최고규범이며 한 나라의 행정수도가 어느 특정한 지역에 있어야 한다는 따위의 로칼한 문제를 다루는 법이 아니다.

그들은 헌법의 근원적 성격을 망각한 것이다. 20세기에 수도를 옮긴 나라 어느 한 나라도 헌법을 개정한 예는 없었다. 그래서 전효숙과 김영일을 제외한 7명의 헌재재판관들은 이러한 자가당착적인 비판을 회피하기 위하여 "불문헌법"이니 "관습헌법"이니 하는 엉뚱한 말을 둘러댔다.

그러나 이런 용어를 지어내는 동시에 그들은 더욱 극심한 자가당착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우선 그들 자신이 평생을 일제식민지를 통하여 수용된 대륙법 계열의 성문법만을 우리나라 법질서의 근간으로 생각하는 성문법 전통의 옹호자로서 자처해온 사람들이며, 불문헌법적 유연성이나 유동성을 거부해온 자들이기 때문이다.

성문법적 자구의 해석에 매달리며 독재권력의 시녀노릇을 해온 자들이, 이제 와서 통치권력이 권력행사를 삼가는 시대에 왔다고 해서 불문헌법 운운하면서 자의적 권력을 구사한다는 것은 참으로 가소로운 망발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은 법구절을 넘어서는 불문의 민족대의를 생각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며, 따라서 불문헌법을 말할 수 있는 자격이 없는 성문헌법론자들인 것이다. 그런데 왜 그들은 불문헌법 운운하는가?

그 이유는 매우 간단하다. 행정수도이전의 문제를 어떠한 무리수를 쓰더라도 헌법에 귀속시켜서 헌법개정이라는 어려운 입법절차를 거치게 함으로써 국민투표라는 대처방안까지를 원천 봉쇄시키려는 아주 악질적인 정치적 모략을 획책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야 뒤통수를 되맞을 수 있는 가능성을 모면하는 안전판이 설치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수도의 설정과 이전의 의사결정은 국민이 스스로 결단하여야 할 사항이다"라고 말한 그들 자신의 명제를 위배하면서까지, 정치적 이념과 정당의 이권의 노예로서 자처하고 나선 것이다. 그들은 근원적으로 국민을 불신하고 국민에게 여하한 논의의 기회조차 빼앗기 위한 기발한 방편으로써 "관습헌법"이라는 터무니없는 말을 날조해내야만 했던 어떤 허구적 논리로 빠져든 것이다. 국정을 국민 스스로의 결단이 아닌 보수적 관성체계의 손아귀에 장악케 하기 위해

그들은 불문헌법을 말할 자격이 없는 성문헌법론자였다

둘째, 재미있게도 "불문헌법", "관습헌법" 논의를 우리사회의 현안과 관련하여 사회화시킨 것은 2004년 3월 29일 여러 미디어를 통하여 게재된 '민중의 함성, 그것이 헌법이다'라는 나 도올의 글이었다.

그런데 당시 법조계의 몇몇 인사들이나 보수언론들은 불문헌법에 관한 나의 논의를 법에 대한 무지 운운하면서 부당하게 폄하하려고 애썼다. 그런데 지금은 바로 그들이 내가 말한 "불문헌법"의 논의를 도용하여 행정수도이전의 원천봉쇄의 법리적 무기로 오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나의 논의와 이들의 논의는 원천적으로 다른 것이다.

나의 논의는 헌법이란 반드시 헌법이 규정하고자 하는 정체(政體)의 역사적 체험으로부터 우러나와야 하는 것이며 일시에 고착된 성문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법이란 조문이 아니다. 우리나라 헌법은 분명 조선반도에 거주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발성체계의 기초적 약속에 의하여 일시에 기술된 것이다.

이 기술을 소쉬르의 말을 빌어 기표(記表. signifiant)라 한다면 그것은 분명 그것이 지향하는 기의(記意. signifié)가 있을 것이다. 노자(老子)는 도(道)라는 언어적 기표가 도(道)라는 의미체계 즉 기의에 영원히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역설했다. 『중론』을 쓴 용수(龍樹: 나가르쥬나)도 인간의 언어적 개념의 고착성은 영원히 그것이 표현하고자 하는 역동적 의미를 표상할 수 없다는 것을 입증했다.

이러한 생각은 서양에서도 최근 데리다의 해체주의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사조로서 흘러가고 있다. 성문법적 기표의 고정성은 순간순간 끊임없이 변해가는 역사적 현실의 기의를 다 담아낼 수가 없다. 그래서 성문법의 질곡으로부터 법을 해방시키기 위하여 영국은 불문헌법의 유동적 개방성을 선호한 것이다. 그것은 바로 인간을 해방시키기 위한 것이다.

헌재의 재판관들이 불문헌법을 들먹거리고자 한다면 그 소이연은 바로 우리사회를 법의 질곡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근원적 인도주의 철학을 내포하고 있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불문헌법의 문제는 불문적으로, 즉 개방적으로 해결되어야 한다.

그런데 헌재의 재판관들은 불문헌법을 빙자하여 성문법적 구속력을 강화시키는 데 악용한 것이다. 그들은 성문헌법에 명시되어 있지도 않은 수도의 문제를 불문헌법 운운하여 자의적으로 성문헌법화시킨 것이다. 그들은 현행헌법을 자의적으로 날조하는 위헌행위를 저지른 것이다.

불문헌법의 세계는 존재(Being)의 세계가 아니라 생성(Becoming)의 세계며, 법관의 관념의 세계가 아니라 국민 모두가 참여하여 만들어가는 역사의 세계다. 국민참여의 기회를 원천적으로 봉쇄한 헌재의 결정은 역사의 농단이며 권력의 횡포이다.

행정수도이전의 논의가 부적합하다는 그들의 판단은 그들의 양식에 속하는 문제라고 용납을 한다 해도, 국민투표로써 국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기회까지 박탈하기 위하여 관습헌법 운운한 것은 용렬한 속셈을 드러낸 것이며 어떠한 변명으로써도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국민참여 기회조차 원천봉쇄... 역사농단이자 권력의 횡포

셋째, 헌재 결정문은 처음부터 "신행정수도의 이전은 곧 우리나라의 수도의 이전을 의미한다"는 대전제를 내걸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삼단논법으로부터 오늘날의 논리학에 이르기까지 대전제가 잘못되면, 그로부터 도출되는 모든 결론은 잘못될 수밖에 없다는 것은 기초적 상식에 속하는 것이다. 모든 연역적 논리는 이미 그 대전제 속에 다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신행정수도의 이전은 곧 우리나라 수도의 이전을 의미한다"는 명제는 본질적으로 심판의 대상을 크게 왜곡한 것이다. 판관이 심판의 대상이 되는 안건 자체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는 수준의 지적 능력밖에 소유하지 못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헌법해석자로서의 자격요건을 구비하지 못한 것이다. 여태까지의 우리사회의 논의는 '수도이전'이 아니었으며 '행정수도이전'에 관한 것이다.

'수도이전'은 수도라는 개념의 전칭이다. 그러나 '행정수도이전'이라 할 때의 수도는 수도라는 개념의 부분칭이다. 이 양자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행정수도'란 말은 서울이 여전히 수도로서 기능할 수 있다고 하는 명제를 내포하는 것이다. 즉 행정수도이전은 수도를 이전하는 천도가 아니다.

바로 헌재 결정문에서 언급했듯이 고려는 중경(개성)·서경(평양)·남경(한양)의 3경제(三京制)를 유지했으며, 고구려도 평양성, 국내성, 한성의 3경제를 두었다. 발해는 5경을 두었고 통일신라는 5소경을 두었다. 다시 말해서 한 나라의 수도가 꼭 하나이어야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미국도 행정수도가 와싱톤일 뿐이며, 뉴욕은 미국을 상징하는 대표도시로서 그 중심적 기능을 어김없이 담당하고 있다.

공주·연기지역으로의 행정수도이전이 수도이전을 의미한다는 헌재결정문의 전제는 전적으로 논리적 대전제를 왜곡한 것이다. 행정수도가 공주·연기로 이전된다 하더라도 서울은 여전히 경제·문화·예술·금융·교육의 수도로서 기능할 수 있으며, 고려까지의 다경제(多京制)의 전통을 수용하여 두 개의 수도를 상정하지 못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이다.

더구나 공주·연기지역은 서울서 이제 고속전철로 한 시간도 안되는 거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몇십년 전 강북과 강남의 거리에도 못 미치는 것이다. 시간과 공간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며 문명의 이기의 발전과 인간의 인식의 변화에 따라 상대적인 것이다. 공주·연기가 와싱턴으로, 서울이 뉴욕과 보스턴을 합친 개념의 도시로써 연계적으로 발전한다 해서 당장 내일 하늘이 무너질 듯이 "천도불가"의 허황된 저주의 언사를 남발해야 할 하등의 이유를 찾을 수 없다.

헌재결정문의 이면에는 깊은 증오의 정조가 도사리고 있다. 그 증오의 실체는 특정한 정치인이나 정당에 대한 대적적 감정일 뿐이며 행정수도이전이라는 구체적 행위의 역사적 의의를 포괄적으로 형량하는 태도와 무관하다. 헌법의 해석은 특정 개인에 대한 증오로부터 출발할 수 없으며 특정한 정치적 입장을 정당화하는 방편으로서 악용될 수 없다.

정치권의 합의를 도출하는 방향에서 판결을 보류할 수도 있으며, 합의가 도출되지 않을 때는 대통령재량에 의하여 국민투표에 회부함으로써 국민 스스로가 설득될 수 있는 기회를 허용할 수도 있는 사안을, 굳이 안건의 성격을 왜곡하고 천도가 아닌 것을 천도라고 침소봉대하여 그릇된 대전제를 설정하고 특정한 정치적 목적을 관철시키는 결론을 유도한 것은 명백한 위헌이다.

대한민국 헌법 제112조는 헌법재판소 재판관은 정당에 가입하거나 정치에 관여할 수 없다고 명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헌재재판관들은 정치행위를 한 것이다. 그들의 결정은 법리적 판단이 아니라 정치적 술수다.

깊은 증오가 도사리고 있는 헌재 결정문

넷째, 헌재 결정이 다경제(多京制)를 일경제(一京制)로만 축소시키고, 그것을 수도이전이라는 그릇된 대전제 설정의 근거로 삼았다면, 그들은 조선왕조의 관례를 대한민국 현행헌법의 정당성의 근거로 삼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의 "관습헌법" 운운한 모든 근거가, "600여 년간 우리나라의 국가생활에 관한 규범적 사실"이라는 표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조선왕조의 법전체계와 그 문화적 관습을 적통으로 삼는 것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의미맥락에서 논의되는 관습헌법은 그 논의 자체가 위헌이다.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 불문헌법의 전통을 지니고 있지 아니하며 1948년 7월 12일 제정된 헌법으로부터 출발한 성문헌법을 법질서의 근간으로 삼고 있다.

1987년 10월 29일에 개정된 대한민국 헌법 전문(前文)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法統)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한다고 명기함으로써 3·1운동 이전의 어떠한 법통도 인정하고 있지를 않다.

그런데도 현행 성문헌법을, 그것이 거부한 조선왕조의 법통을 현재까지로 유효한 불문헌법의 근거로 삼아, 왜곡한 것은 명백한 위헌의 행위인 것이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바로 그들이 불문헌법의 근거로 삼은 조선왕조의 전통자체의 성격을 왜곡하고 자기들의 그릇된 정치적 관념을 정당화하기 위한 도구로서 오용했다는 것이다. 그들의 역사지식은 너무도 천박하고 너무도 착오적인 해석학적 오류에 기초하고 있다. 그들이 원용한 역사지식은 가련하고 빈곤한 레토릭일 뿐!

가련한 역사적 지식이여!

다섯째, "서울이라는 명칭의 의미에서도 알 수 있듯이" 운운하여 마치 '서울'이라는 명칭이 현재의 서울지역을 지칭하는 이름으로서 유구한 전통을 지니고 있으며, 최소한 600여 년간의 당연한 규범적 사실의 근거로 삼기에 충분하다는 궤변을 펼치고 있으나, 현재의 서울이 '서울'이라는 고유명사로서 불리기 시작한 것은 정확하게 1946년 8월 15일 이후의 사건이다.

광복 1주년 '서울시 헌장'에서 최초로 쓰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전에는 서울의 공식명칭은 경성(京城. 케이죠오)이었다. 일제가 우리나라를 합방한 경술국치(1910년 8월 29일) 한 달 이후부터 쓰이기 시작했다. 그전의 서울의 공식명칭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한성(漢城)이었다.

이성계가 고려의 왕도인 개성에 정을 붙일 수가 없어 신도궁궐조성도감을 설치하고 천도를 감행한 후, 태조 4년(1395) 6월 6일자로 선포한 이름이었던 것이다. 그 이전의 서울지역의 이름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이 바로 한양(漢陽)이었다.

다시 말해서 현재 서울지역의 명칭은 서울이라는 고유명사로서 일관되게 불린 것이 아니며 한양→한성→경성→서울로 변하여 왔다. 따라서 헌재결정문이 주장하는 바 "계속성", "항상성", "명료성"은 하등의 논리적 근거가 없다.

단지 '셔울'이라는 순수 우리말이 한자로서 표기되지 않았다 해도 구어로서 존재했다는 것은 문헌적으로 확인될 수 있으나 그때 '셔울'이라는 것은 전혀 불문헌법의 근거 운운할 수 있는 의미맥락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고려말에 성립한 역관학습서인 『노걸대』 『박통사』의 언해본에 '셔울'이라는 이름은 현재의 북경을 가리키고 있다.

그리고 『두시언해』에도 '셔울'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는데 그것은 두보의 시에 나오는 경(京)자 붙은 모든 도시를 지칭하는 말로 쓰이고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해서 서울은 모든 경(京)에 대해 쓸 수 있는 일반명사며 현대적 개념에서의 수도라는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현재의 서울은 조선시대까지 '셔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지 않았으며 한성일 뿐이었다.

그리고 헌재결정문은 "한성부가 경도(京都)를 관장한다"라고 한 『경국대전』 이전(吏典) 경관직 정2품아문 한성부조의 구절을 원용하여 한성의 수도로서의 권위를 주장하고 있으나 한성부는 6조와 같은 격의 한 중앙 행정부처일 뿐이며 한성부가 곧 수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춘추공양전』 이래 경도(京都), 경사(京師) 등의 의미는 어디까지나 천자가 거하는 곳을 의미하며, 오늘날과 같은 국민주권 국가의 모든 활동의 센터를 의미하지 않는다. 수도라는 개념의 현대적 의미와 왕조적 의미에는 항상 깊은 단절이 있다는 것도 지적되어야 할 문제 중의 하나이다. 왕도와 수도는 동일한 차원에서 연속적으로 이해될 수 없다.

서울, 고유명사가 아니었다

여섯째, 관습헌법의 연속성의 근거를 조선왕조의 『경국대전』이나 생활관습 관념에서 찾는다고 한다면 우리사회에는 앞으로 무수한 궤변들이 난무하게 될 것이다.

예를 들면, 호주제 폐지도 조선후기부터 조선인의 주요관습으로 등장한 장자상속제나 종법사회의 여러 인습에 근거하여 위헌으로 판결될 수 있을 것이며, 성매매처벌법도 조선시대의 공창제로부터, 아니 인류역사의 시작과 더불어 시작한 유구한 전통이라는 관습에 의하여 위헌으로 판결되어야 할 것이다.

번 벌로의 『매춘의 역사』가 웅변하듯이 매춘은 여성의 사회적 지위나 활동이 제약된 상황에서 유일한 독자적 생존의 길이었으며, 매춘부는 최초의 여성 자영업자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위치는 일반부녀자들의 사회적 위치와 반비례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한성부의 관장범위를 5부 52방에 한정한다면 현재 강남을 서울이라고 부르는 것도 위헌이 될 것이다.

일곱째, 서울이 유구한 600년 전통의 수도라는 관념이 관습헌법의 지위까지를 획득한다고 한다면, 동일한 논리에 의하여 대한민국의 수도는 서울을 벗어나야 한다는 관념도 당연히 관습헌법의 지위를 획득하여야 한다.

행정수도이전의 논리는 박정희 시대로부터 시도되어 광범위한 대중의 인증을 얻었으며, 노무현이 선거공약으로 행정수도이전을 내걸고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행정수도이전이라는 새로운 관습은 수적 우세를 과시하며 대중의 지지기반을 이미 획득하였다.

그리고 신행정수도건설특별법은 국민의 주권을 대행하는 의회라는 대표기관에서 투표의원 194인 중 찬성 167인으로 재적과반수와 출석 3분의 2 이상의 압도적 다수로 통과됨으로써 이미 대다수의 민의를 법제적으로 반영하였다.

현재 언론의 조작된 통계와는 달리 행정수도이전에 대한 찬성의사는 국민의 압도적 다수를 차지한다. 단지 많은 사람들이 행정수도이전에 관한 의견을 보류하는 것은, 경제적 불안감으로 인한 현명한 시기의 선택에 관한 여러 함수를 고려하는 것일 뿐이며 상황이 변하면 그들의 판단은 긍정적이 될 수밖에 없다.

관습헌법을 운운하는 자들이 그들이 주장하는 낡은 관습헌법의 논리에 의하여 새로운 이 사회의 관습헌법의 정당성을 성문법적으로 원천봉쇄하려 한다면, 나주시장 신정훈의 주장대로 헌재판결은 죽은 역사와 관습이 산 사람의 미래를 차단하는 불행한 결정일 뿐이다.

법치 근간을 무너뜨리는 법조인 횡포에 맞서야

마지막으로, 헌재 소수의견인 전효숙 재판관의 명쾌한 논리를 재확인함으로써 나의 논의를 끝내려 한다. : "서울이 수도이다"라는 사실로부터 "서울이 수도여야 한다"는 헌법적 당위명제를 도출하는 것은 논리적 비약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성문헌법을 지닌 법체제에서, 관습헌법을 성문헌법과 "동일한" 혹은 "특정 성문헌법 조항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효력"을 가진 것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헌재의 판결에 대하여 무한한 반박의 논리를 고안해낼 수 있을 것이다. 헌재의 판결 자체가 무지막지한 궤변덩어리며 이 사회의 건전한 상식을 반영하는 하등의 논리도 내포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국민은 위헌적 판단에 의한 헌재의 위헌결정을 수용해서는 아니된다. 헌재의 재판관들을 탄핵하고 헌재를 해체시키는 조직적인 활동을 벌여야 한다.

새로운 관습헌법의 위력을 과시하기 위한 국민적 공감대를 광범위하게 조성하는 자유로운 활동을 벌여야 한다. 법치의 근간을 무너뜨리는 법조인들의 횡포에 대하여, 그리고 우리 자신의 미래를 구성할 우리 자신의 법의 정신에 관해 자유로운 논의를 확산시켜야 한다. 나 도올은 심원한 민족의 대계를 우려하는 충심에서 다시 한번 외친다. 헌재의 신행정수도건설특별법 위헌결정은 위헌이다.

이제 이 외침의 본질적 의미를 보다 깊숙이 탐색하기 위하여 나의 "사람 위에 법 없다"라는 제2의 명제를 분석해야 한다. 사람 위에 법 없다 함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 "일곱 판관의 이름을 기억하자" 행정수도이전 특별법에 대해 '관습헌법'에 의한 해석을 내린 헌법재판관들. 위 왼쪽부터 권성·김경일·주선회·이상경 재판관 아래 왼쪽부터 송인준·김효종 재판관·윤영철 헌재소장.

ⓒ2004 연합뉴스


자아! 사람위에 법없다 함은 과연 무엇을 뜻하는가? 사람과 법! 이것은 고래 성현들의 말씀으로부터 인간세의 두 기둥으로서 줄기차게 논의되어 왔던 우리문화전통 속의 개념이다. 『논어』 「위정」편에는 정령(政)과 형벌(刑)로써 정치를 하면 사람들이 면하기만 할 뿐 부끄러움이 없고(民免而無恥), 덕(德)과 예(禮)로써 이끌면 사람들이 부끄러움이 있을 뿐 아니라 반듯해진다(有恥且格)라는 말이 있다.

모든 고대사회의 법이라는 개념이 민법적 개념이 박약하고 주로 형법에 관한 것이었지만, 이 『논어』의 유명한 공자의 말은 유가철학 전통을 법가철학 전통과 대비되는 것으로 인식케 만드는 근거가 되어왔다. 유가의 전통이란 바로 정령이나 형벌과 같은 법에 대하여, 덕(德)과 예(禮)를 인간세 통치의 질서근간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이에 전통적으로 법치주의란 말에 대하여 덕치주의·예치주의라는 말이 생겨났다. 사실 여기서 말하는 덕과 예는 오늘날의 법률용어로 말하자면 관습법(Gewohnheitsrecht)의 대표적인 것이다. 입법기관의 법정립행위를 기다리지 않고, 사회생활 속에서 관행적으로 행하여지고 있는 법으로서 대부분 성문법에 선행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세계적인 중국학계에서는 예치·덕치라는 말을 별로 쓰지 않는다. 『중국정치사상사』를 쓴 샤오 꽁취앤(蕭公權) 선생의 개념정립 이래 '인치'(人治)라는 말을 주로 쓴다. 공자사상의 핵심은 인(仁)이며, 인의 정치(仁政)는 곧 인치(人治)라는 것이다. 덕과 예라는 말은 성문법의 하위개념으로 인식될 우려가 있고, 인(仁)이라는 개념이 규범적으로 또 다시 실체화될 우려를 동반하기 때문이다.

인치(仁治)는 예치(禮治)가 아니라 인치(人治)일 뿐이다. 사람이 사람을 위하여 질서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거기에는 어떠한 실체적 고착성도 허용될 수 없다. 오로지 사람! 사람이라는 총체적 인격체야말로 법에 선행하며, 항상 법에 우선하며, 법을 초월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사람위에 법이 없다 함은, 바로 유가가 법가와 싸우며 지키려고 노력해왔던 유구한 인치(人治)전통의 한 측면을 단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관습헌법은 불문헌법과 차원이 전혀 다르다

헌재 재판관들이 결정문 속에서 불문헌법과 관습헌법을 거의 동의어로 쓰고 있다는 이 단순한 사실 하나로도 그들이 얼마나 헌법에 무지한 자들인가 하는 것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법률용어로서 관습(Custom)이나 관습법(Customary Law)이라는 말은 있으되, '관습헌법'이라는 말은 별로 용례가 없다.

그리고 어떠한 경우에도 불문헌법(Unwritten Constitution)과 관습헌법(Customary Constitution)은 일치될 수 없는 것이다. 관습이 불문헌법의 많은 참고자료 중의 하나가 될 수 있으나, 관습이 성문헌법을 뒤엎는 권위를 지닐 수 있는 헌법의 지위를 획득할 수는 없는 것이다.

관습헌법이라는 용어 자체가 엄밀하게 말하자면 불가능한 법률용어이며 넌센스에 속하는 것이다. 멍청한 헌재 재판관들이 '관습헌법'이라는, 법률학 사전에도 없는 말을 지어낸 이유는 매우 단순하다. 그들의 편협한 법지식 체계 속에서는, '불문헌법'이라 할 때 '불문'의 실제내용이 관습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문과 관습은 철학적으로 전혀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다. 관습헌법이라 할 때 이 말의 존재론적 의미는 곧 헌법이 관습으로서 실체화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불문헌법의 근본정신은 법의 실체성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런데 관습헌법이라는 개념은 이미 실체적으로 고착된 것이다. 관습이 불문헌법의 한 레퍼런스가 될 수는 있다.

그러나 관습헌법은 불문헌법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유가가 편협한 예치(禮治)를 말하지 않고 본질적인 인치(人治)를 말하는 것과 동일한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이다. 관습헌법은 존재(Being)의 세계며 불문헌법은 생성의 세계다. 관습헌법은 고착된 실체의 세계이지만 불문헌법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인간세의 실상에 대해 고정적인 규정을 거부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예치는 존재의 세계며 인치는 생성의 세계다.

다시 말해서 사람위에 법이 없다는 말은, 사람이라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생성의 세계에 대하여 법이라는 고정적 존재자가 군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이라는 생성체를 도외시한 법이라는 존재자는 없다는 것이다.

법이란 근원적으로 실체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헌재의 결정은 이러한 철학적 성찰도 없이 마구 "불문헌법 내지 관습헌법" 운운함으로써 바로 우리나라 실정법 체계의 모든 근간을 흔들어버린 것이다. 그들은 노무현이라는 특정한 인격체의 행위를 제어하기 위하여 바로 그들이 서있는 법질서, 바로 그들 존재의 존립근거를 붕괴시킨 것이다.

왜 이런 바보짓을 했는가? 왜 앞장서서 무리한 총알받이 노릇을 자처했는가? 그 이유는 단순하다. 그들 자신이 뭔 짓을 하는지를 스스로 몰랐기 때문이다. 역사와 법률과 철학에 대해 근원적으로 무지했기 때문이다. 무지한 자들일수록 용감하다.

자아∼ 이제 우리는 동학혁명이래 우리민족의 끈질긴 민본(플레타르키아)의 열망의 구조적 성취를 좌절시킨 을사오적 아닌, '갑신칠적(甲申七賊)'으로서 권세의 애사에 빛날 일곱 판관의 이름을 기억하자! 윤영철, 이상경, 주선회, 김경일, 권성, 김효종, 송인준! 이 슬픈 일곱 이름이 이 땅의 자손만만대로 불명예스러운 귀감의 가치를 전하도록 기억하고 또 기억하자! 그리고 법이라는 권력을 남용하여 낭독하는 그들의 판결문이 이 땅의 영원한 정의의 판결의 대상이 된다는, 우리 민족 양심의 불꽃으로써 타오르고 있는 불문헌법의 원리를 끊임없이 확인하고 또 확인하자!

윤영철, 이상경, 주선회, 김경일, 권성, 김효종, 송인준, 이 '갑신칠적'의 만행이 우리에게 남겨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바로 사람위에 법없다는 명제의 확인이다. 이것은 곧 제도에 인간이 우선한다는 유가의 인치주의의 근본원리를 우리에게 새삼 천명해주는 것이다. 아무리 위대한 합리적인 제도가 있다 할지라도 그 제도를 운영하는 인간이 잘못되면 그 제도는 영원히 잘못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법치에 대해 인치를 우선할 수밖에 없다는 우리 민족문화의 유구한 전통이다.

'갑신칠적' 일곱 판관의 이름을 기억하자





ⓒ2004 오마이뉴스 남소연

공자는 말했다: 법으로 인간을 다스리면 면할 줄만 알지 수치와 염치를 모른다(免而無恥). 물론 인치의 한계도 있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도 법치가 인치를 제압할 수는 없다. 우리가 원하는 인간은 모면키만 하는 인간이 아니라 부끄러움을 알고 반듯하고 떳떳한 인간이다(有恥且格). 천하의 광거(廣居)에 거하며, 천하의 정위(正位)에 입하며, 천하의 대도(大道)를 행하는 인간이다.

노무현, 그리고 우리나라의 정치를 지망하는 수 없는 법률가들에게 내가 우려하는 것이 하나 있다. 그들의 머리 속에는 암암리 법이 실체화되어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제도에 대한 환상이 있다. 합리적 제도만 정립이 되면 모든 것이 잘 돌아가리라는 믿음이 있는 것이다. 물론 제도는 중요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인간이 도외시되고 있는 것이다.

행정수도이전이라는 민족의 중대사가 오늘의 불행한 위헌적 위헌결정 사태에까지 이르게 된 것은 바로 이 모든 과정에서 인간이 소외되었기 때문이다. 합리적 제도가 합리적 결론을 도출시켜주리라는 낙관적 믿음 때문에,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제도적으로만 해결되어야 한다는 안일한 믿음 때문에, 정작 중요한 과정적 정치행위를 포기한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손을 놓고 멍하게만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는 동안 황당한 인간들에 의한 조작적 게임만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오늘의 사태에 대해 중대한 책임을 모면할 길이 없다.

대부분 법률가의 또 하나의 특징은 반성할 줄을 모른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확신을 변호하고 주장하고 변명하는 데만 익숙하다. 그것이 바로 법이라는 권력에 의해 보호받고 있는 그들의 직업이기 때문이다. 나는 노무현 대통령이 오늘의 사태에 대하여 자신의 선함을 변호하기보다는 본질적인 반성의 계기를 획득하기를 희망한다.

우리 국민이 노무현이라는 인격체를 대통령으로 선택한 것은 바로 여태까지의 정의롭지 못한 모든 관행에서 벗어나 우리 역사가 새로운 길을 걸어가 주기를 바랬기 때문이었다. 누군가 돈을 더 많이 벌어주기를 바랐다면 굳이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선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만큼 우리 민족에게는 정의로운 사회로의 변화에 대한 갈망의 골이 깊었던 것이다.

여기에 우리가 정직하게 형량해야 할 중요한 사실은, 이러한 국민적 갈망을, 그리고 역사적 사명을 노무현은 결코 배반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과거의 어떠한 대통령보다도, 노무현은 권좌에 앉았다 해서 권좌에 앉기 전의 신념과 삶의 태도를 저버리는 인간이 되지는 않았다.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불만은 그의 도덕적 신념의 일관성의 결여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이상을 실현하는 방법적 미숙함과 서투름에 있으며, 그 서투름이 국체의 근간을 흔들어버리는 데까지 이르고 있다는 불안감이 국민의 칠정을 엄습하고 있는 것이다.

한번 돌이켜 생각해보자! 2002년 12월 19일 아침까지만 해도 우리 국민 대다수의 사람들이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리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투표장에 가서 노무현이라는 이름 위에 빨간 도장을 찍으면서도 그러한 확신을 갖지 못했다. 그런데 이 모든 예측이 역전되었다.

이 역전은 노무현이라는 개인의 행운이 아니라, 단군이래 우리 민족사의 최대의 역전이다. 나의 표현은 결코 과장법이 아니다. 국민 과반수의 순결한 합의에 의해, 완벽하게 권력의 비호로부터 단절된 한 인간, 기존세력에 철저히 억압받던 한 개인이 최고의 권좌의 위를 획득한 사건은 유사이래 최초의 사건이라는 사실에 우리는 동의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민본사상에 의한 꾸준한 민권의 확대과정의 결과이며, 가깝게는 인내천의 보편주의적 인간관을 확립하고 반상의 차별과 적서의 구별을 폐지하고 다시 개벽의 대동세계를 꿈꾸었던 동학혁명의 좌절된 이상이 일세기 동안 암흑의 터널을 빠져나와 새롭게 분출된 한민족 혼의 정화라 할 것이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민주의 축복은 불란서혁명 덕분도 아니요 미국독립혁명 덕분도 아니다. 그것은 오로지 우리 민족사에 내재하는 구조적 변화의 결정적 계기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구조적 변화의 계기를 구조적으로 유지시켜야 할 의무가 있다. 우리는 21세기에까지 와서 불란서역사가 19세기에 되풀이했던 공화제와 왕정복고의 어지러운 번복의 시련을 되풀이할 수는 없다.

한나라당과 조·중·동, 헌재 재판관을 가련하게 보는 까닭



▲ 지난 3월 20일 저녁 광주 금남로 촛불시위.

ⓒ2004 안현주
2002년 12월 19일 밤, 나는 신문기자로서 취재의 기나긴 여로를 마친 후 피곤한 육신을 잠자리에 뉘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우리 민족의 진정한 여명은 이 자리부터 시작이다라고. 나는 이 희망을 지금도 포기할 수가 없다. 우리 민족사의 최대의 과제상황은 노무현이라는 역사적 개인을 통하여 표출된 민중의 갈망, 그 혁명의 계기를 어떻게 구조적으로 내면화시키는가에 있다. 이것은 노무현 개인에 대한 호오와는 무관한 우리 역사 자내(自內)의 사명이요 과제상황이다.

나 도올이라는 사상가는 노무현도, 박근혜도, 한나라당도, 조·중·동도 모두 품안에 안을 수 있다. 사상가에게 우리 민족 동포 그 어느 누구도 대적적 타자로서 이립(離立)할 수 없다. 그러나 내가 한나라당이나 조·중·동, 혹은 헌재 재판관을 가련하게 바라보는 까닭은 바로 우리 역사가 갈망하고 있는 혁명적 변화, 그 민중의 함성에 역행하는 짓만을 역사의 정도라고 굳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 참으로 변소간에 앉아있는 사람에게 구린내를 맡게 할 방법이 묘연한 것이다.

도대체 전후에 모든 역사가 거쳐야만 했던 과거사청산이 왜 나쁜가? 지금 와서 국보법 폐지가 뭐가 그렇게 대단한 일인가? 어째서 45분 거리의 행정수도이전이 천도에 해당되는 어마어마한 일이며 망국의 길인가? 일산이나 분당 하나 더 짓는 것보다도 더 가벼운 일로 생각할 수는 없는가? 왜 그렇게 생각의 여유들이 없는가?

왜 노무현이 정책으로 내걸었다고 그렇게도 숨넘어갈 듯이 반대만 일삼아야 할까? 진보와 보수의 차이는 오로지 우리 역사의 혁명적 이행의 효율성에 관한 견해차이 정도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무조건 역방향으로 가려 하고 무조건 봉쇄하려고 하고 무조건 증오하기만 한다면 과연 대화나 타협이나 화해의 가능성이 있을까?

우리 국민이 신행정수도특별법 위헌결정을 수용하지 않아야 되는 가장 중요한 이유, 그리고 노무현이 이러한 결정에 대해 굴복하지 말아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바로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당선시킨 우리 민족사의 혁명적 과제상황을 가장 구조적으로 내면화시킬 수 있는 결정적 계기가 바로 신행정수도였기 때문이다. 사실 행정수도이전에 비한다면 국보법 폐지는 코스메틱한 것이요, 과거사청산은 센티멘탈한 것일 수 있다. 이런 것들은 가끔 '쨉'으로나 써먹을 작전들이지 전면공세의 주요전략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과거사청산? 좋다! 아무개 아버지가 일제의 하수인 노릇한 적이 없다고 아무개는 일제의 죄악으로부터 당당히 면죄부를 받을 수 있을까? 과연 이 땅의 어느 누구가 과거의 죄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있을까? 독립운동한 사람은 훌륭하지만 독립운동 안 했다고 나쁜 놈일까? 괜히 신기남만 쌩피본 것 아닌가?

국보법 폐지? 아∼ 좋지! 그런데 형법 보완해야 할 거라면 그까짓 것 그렇게 들먹여서 공연스레 시끌저끌한 빌미만 주고 말 일이 아닐까? 이렇게 따지다 보면 남는 것이 무엇인가? 명백한 죄악의 몇몇 케이스를 적절한 절기에 상징적으로 바로잡아 바른 사회적 가치와 기강을 세우면 될 것을, 정권의 존재이유나 되는 것처럼 그런 것들에 전적으로 매달린다면 그것은 작전적으로 좀 우매하다 해야 하지 않을까?

국보법 폐지나 과거사청산, 기타 개혁법안들은 행정수도이전에 비한다면 우리역사의 구조적인 변화를 틀 지우기에는 미흡한 것들이다. 행정수도이전은 얼핏 보기에는 비정치적인 사건같이 보이지만 우리 사회를 구조적으로 변화시키는 데는 가장 결정적이면서도 구체적인 계기를 마련하는 것이다.

본말을 이야기한다면, 본(本)을 봉쇄당하고 과연 말(末)의 개선이 가능해질 수 있을 것인가? 그렇다면 행정수도이전의 공약도 못 지키고 나머지 개혁법안 흐지부지 흘러가고 이제 민생에 전념한다고 대기업 꽁무니만 좇아 다닌다면 과연 참여정부·개혁정부의 존재의의가 무엇일까? 노무현이라는 역사적 개인을 통하여 우리 역사가 성취하려 했던 것이 과연 무엇일까?

노나라의 실세며 삼환의 패자였던 계강자가 공자에게 물었다: "정치란 무엇입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정치란 바르게 하는 것입니다."(政者, 正也.) 여기 정(正)이란 타동사이다. 그것은 그릇된 것을 바로잡는다는 뜻이다. 그것은 아무 것도 없는 황량한 벌판에 새 집을 짓는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잘못된 집을 때려부수는 작업이다. 노무현의 정(正)은 바로 부정(不正)들의 한가운데 포위되어 있다는 원초적 사실을 직시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하는 것이다. 그는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같은 집을 지을 낭만이 허락되어 있질 않은 것이다.

행정수도이전에 비하면 국보법 폐지나 과거사 청산은 '쨉'이다



▲ 헌재의 위헌판결이 내려진 지난 21일 노무현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국제전기기술위원회 회장단을 접견, 다과를 함께하는 자리에서 참석자의 연설을 듣고 박수를 치고 있다.

ⓒ2004 연합뉴스 김동진
국민의 과반수가 그를 대통령으로 뽑은 민족사적 사건은 그에게 혁명적인 권력을 부여한 사건이었다. 그는 도덕적으로 단군이래 어느 치자보다도 순결한 국민의 지지를 획득한 권력자이다. 탄핵을 받으면서까지도 또 다시 순결한 국민의 지지를 통해 그 위를 공고히 한 권력자이다. 조선역사를 통틀어 그 어느 누구도 이렇게 순결한 대중의 지지기반을 획득한 치자는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국민으로부터 부여받은 권력을 노무현은 철저히 거부했다. 대통령이 지시적인 권력을 행사하지 않음으로써만이 과거의 모든 위압적인 권력구조로부터 우리나라가 해방될 수 있다는 것이다. 대통령 취임 후 50일 내가 그를 최초로 인터뷰했을 때도 그는 이러한 소신을 피력했다.

나는 그를 "무위(無爲)의 대인"이라 표현했다. 과연 그의 무위는 소기의 성공을 거두고 있을까? 그의 무위는 그의 무능력과 무기력을 변명하는 레토릭에 그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의 무위적 도덕성이 헌재위헌 결정까지를 유도했다면 과연 우리 역사는 이런 방식으로라도 값비싼 민주의 교훈을 축적해나가고 있는 것일까?

일례를 들어보자! 노무현은 대통령취임 후 이런 말을 했다: "저는 국정원 보고를 받지 않겠습니다." 국민들은 이 한마디의 함의를 잘 모른다. 대통령이 집무실에 출근하면 매일매일 먼저 국정원의 직접보고를 받는 것이 관례였다. 거기서 어떠한 얘기가 오가는지 대통령 이외의 사람들은 잘 모른다. 밀실정치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노무현은 양지바르고 깨끗한 것을 좋아한다. 어두운 밀실정치가 싫은 것이다. 그래서 국정원 보고를 받지 않겠다고 말한 것이다. 정보원들의 횡포를 통한 과거의 모든 비리로부터 우리사회를 해방시키겠다는 신념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국정원은 사회비리만을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를 지탱하는 모든 국내·국외의 정보를 관장하는 업무를 수행한다. 생각해보라! 대통령이 직접 보고를 받지 않는다면, 어느 정보원이 목숨 걸고까지 세계를 주름잡으며 위험한 정보수집행위를 감행하겠는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차장급의 정보수집을 위해 과연 국정원이 소정의 임무를 수행할까?

대통령이 과연 국정원 보고를 받지 않는 것은 도덕적으로 숭고한 일처럼 보이지만 그러한 제스츄어는 우리나라 정보체계 전체기능을 마비시킬 수도 있다. 따라서 형식적이고 표면적이며 유치한 정보들만 유통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나라가 유치해지고 대통령 자신의 정보체계가 단조로와지는 것이다. 민주화의 대가란 과연 이런 것일까? 양지가 있으면 그늘이 있고, 밝음이 있으면 어둠이 있게 마련인 것이다. 한 국가사회의 기능방식은 너무도 컴플렉스한 것이다.

내가 지금 노무현의 통치스타일에 관하여 좀 노골적인 정보들을 여기 다 상술하기에는 너무도 복잡한 문제들이 얽혀 있다. 그러나 내가 국민들에게 확언하는 것은 노무현은 우리 역사가 일찍이 경험하지 못했던 매우 단순한 도덕적 신념의 대통령이라는 것이다. 그 도덕적 신념이란 사람이 사람위에 군림해서는 아니된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현재 우리 민족은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어떠한 정치체제에서보다도 더 큰 자유를 누리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자유의 향유가 아이러니칼하게도 언론권력의 대중조작을 조장시키고, 불필요한 집회·시위를 가중시키며, 법권력의 남용과 타락, 행정관료들의 무능과 무사안일주의, 국가정보체계의 피상화, 대외정책의 불민함, 경제의 비활성화 등등의 부작용을 초래하고 있다면 우리 국민은 민주라는 레바이아탄의 근원적 파라독스에 대한 뚜렷한 비전을 새롭게 설정해야 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노무현의 무능과 도덕성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것이다. 그것은 노무현의 문제라기보다는 진실한 모든 인간의 파라독스일 수도 있다. 인간세의 무명(無明)의 비극일 뿐이다. 노무현은 처음부터 단추를 잘못 끼웠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제 와서 그에게 단추를 다시 끼라고 명령하기에는 이미 잘못 낀 단추가 그의 확고한 스타일을 형성하고 있을 수도 있다.

한비의 지혜를 권하고 싶다

진시황이 죽기 전에 한번이라도 만나고 싶어했던 희대의 사상가 한비(韓非)는 치자의 무위에는 반드시 두 개의 칼자루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그것을 이병(二柄)이라 불렀다. 이병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아닌 상(賞)과 벌(罰)이다. 상과 벌이라는 칼자루만 확실하게 쥐고 있다 할지라도 나머지는 무위적으로 돌아가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나는 노무현 대통령에게 한비의 지혜를 권고하고 싶다. 이제 통치 2년의 세월이 흘렀다고 한다면 더 이상의 낭비나 시행착오, 초보적 학습과정을 거쳐서는 아니된다. 자신의 도덕성에 엄격한 만큼 국민에게도 치열한 규율을 요구해야 한다. 노무현은 상을 줄 줄도 모르고 벌을 줄 줄도 모른다. 이것이 국민 대다수의 불만이다.

노무현 대통령에게 국민 대다수가 바라는 것은 도덕적 결백성의 지속적인 입증이 아니라 국민이 부여한 권력을 확실하게 그리고 효율적으로 사용해달라는 것이다. 도덕적 무위 속에 표류하고 있는 국정에 보다 프로펫셔날한 기준을 설정해달라는 것이다. 개혁의 궁극목표는 제도가 아니라 인간이다. 이 목표를 위해 내가 일전에 말한 소언(少言), 호문(好問), 치대(治大)의 충언은 여전히 유효하다.

한 사람과 한 시간 대면한다면 그대는 10분 이상 이야기를 해서는 안된다. 그 10분도 오직 상대방의 이야기를 꺼내기 위한 추임새로 만족해야 한다. 그런데 그대는 50분 이상을 자기 얘기로 메꾸고 있다. 결국 타인의 이야기를 듣지 못하고 자기 상념만 되풀이하는 것이다.

말을 줄이고(少言) 많은 적재적소의 긴요한 정보를 수집함으로써(好問) 국가대강의 기틀을 잡아가는(治大) 모든 기회를 빠짐없이 포착해야 한다. 무위의 진정한 기틀은 통치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집을 파기시키고 끊임없이 생성되어가는 자기존재의 모습에 있는 것이다.

우리 국민은 이제 더 이상 노무현이라는 실존적 개인에 대한 호오를 얘기해서는 아니된다. 노무현이라는 역사적 개체와 더불어 우리 역사가 무엇을 성취해갈 수 있는가를 고민해야 한다. 그의 도덕적 실천을 통하여 우리 사회가 밝아지고 보다 합리화되고 혼란 속에서도 자율적 규제능력을 획득해가고 있다는 총체적 비전의 가치를 형량할 줄 알아야 한다.

이제 우리 국민은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의 가치를 자율과 규율의 가치로 전환시키는 어려운 작업들을 감행해야 한다. 헌재의 재판관처럼 힘이 있다고, 힘을 마구 쓸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되어 있다고 해서, 총체적 국가비전에 대한 저울질이 없이 그 힘을 사용하는 방자한 행동을 해서는 아니된다. 우리는 이제 성숙한 인간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성숙이란 자기 자유를 자율적으로 규제하는 능력이다.



▲ 도올 김용옥


지난 목요일 헌재결정이 난 후 홀로 낙한재 골방에서 눈물을 뚝뚝 떨구며 다시는 이 사회의 진보에 대한 소망을 갖지 않겠노라고, 절망의 절필을 선언켔노라고, 노무현을 다시 쳐다보지도 않겠노라고, 열린우리당 동포들의 치졸한 아마츄어리즘을 더 이상 용인치 않겠노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건만 어쩌다가 또 다시 붓을 들어 이렇게 만연의 산필을 흩뜨리고 있는 나 도올 자신의 모습을 애처롭게 쳐다본다.

운필의 노동으로 어깨근이 파열되어 피멍이 맺히도록 나의 육신이 고통스러워하는 이 깊은 새벽 밤에, 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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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디아님의 댓글

나디아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진중권의 글과 도올의 글을 붙여서 올렸습니다. 이 두 사람은 모두 넓은 적군과 아군을 획득한 사람일 것입니다. 어쨌든 그들의 이야기에서 생각할 수 있는 무엇을 얻어낸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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