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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지만 말씀 드리겠읍니다…

페이지 정보

작성자 세토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9건 조회 1,858회 작성일 04-09-02 15:31

본문

>
> 저는 동성애에 대해 호기심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읍니다만 그냥 제경험, 들은 이야기, 판단으로 순수한 개인적인 의견을 피력한것 뿐입니다. 그런데 한분 한테는 꼭 말씀 드려야 하겠군요.
> 동성애자 친구중에 기독교인이 있다고 한것은 기독교인 입장에서는 그것이 잘못 되엇다고
> 꼭집고 넘어 가야 겠읍니다. 그리고 동성애자는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동성애자이면서 기독교인
> 임을 자처하는 것은 기독교인 입장에서 보면 소위 기독교 탈을 쓴 이단입니다. 즉 기독교를 표방하는척 하면서 자신의 소리를 내는 거지요.
>
> 기독교는 동성애를 인정하지 않읍니다. 그리고 동성이든 이성이든 결혼외의 성행위를 인정하지
> 않읍니다. 즉 미혼남녀의 성행위나 하룻밤 사랑등등 그 어떤 형태이건 혼외의 성행위는 인정하
> 지 않읍니다. 물론 저를 포함한 모든 기독교인들은 이런데 유혹 끌리기도 하고 완전히 넘어가는 경우가 많이 있죠. 그것은 기독교인의 삶속에서 이겨내야 할 끊임없이 일어나는 유혹내지 과제이죠. 언젠가 폼페이 갔는데 그곳에서 느낌은 사람들이 폼페이 멸망보다는 그속에서 일어나 음란
> 함에 관심이 더 많더군요.
>
퍼온글

영과 진리 안에서 - 숨밭 김경재의 이야기 신학

대한기독교서회, 1999.8.


[13] 만유 위에, 만유 안에, 만유를 통하여 계신 하나님

1959년 내가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어린 청소년으로서 무등산 갈대 숲속에서 일어나서 신학수업의 길에 들어선 후 40년이 지난 오늘 이글을 쓰게 되었다. 40년동안 이런 저런 과정을 밟았으나 결국은 하나님을 찾아, 하나님을 알려고, 하나님을 만나려고 40년의 영적 순례를 한 셈이다. 하나님이 누구인가를 알려고 한다는 말은 결국은 내가 무엇인지, 우주가 무엇인지를 알려고 한다는 말과 깊은 관련을 갖게 된다. 참된 인간의 본래모습 곧 깨달음을 얻기 위하여 소를 먹이던 한 목동이, 잃어버린 소를 찾기 위해 길을 떠나고, 산 속을 헤메고, 시련을 겪다가 마침네 소를 찾아 소 잔등에 올라타고 귀가하는 그림언어가 있는데 이름하여 '십우도'(拾牛圖)라는 것이 불교의 선종에 전해온다.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내가 찾던 하나님을 찾았고, 알았고, 만나게 된 이야기를 들려줄 나이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깨닫고 체험한 하나님은 불교 '십우도'가 말하는 그림이 은유적으로 말하려는 진리와 통하는 점이 있으면서도, 기독교의 독특한 특성이 더 두드러지는 그림언어가 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그 말은 불자(佛子)가 찾던 '진리자체'와 기독자인 내가 찾던 '진리자체'가 별도로 두개 따로 있고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나는 그리스도교 신앙전통의 선배들이 맛보았던 진리체험의 이야기와 경험담에 의하고 그것들에 의해 안내 받아 체험하고 알게된 하나님이 더 나에게 옷이 몸에 맞듯이 실존적으로 내가 믿는 하나님이라고 고백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내가 믿는 하나님을 이야기하는 근거를 내가 좋아하는 성경구절 한구절을 인용함으로서 시작하려고 한다.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하여 일하시고, 만유 안에 계시도다"(신약성경, 에베소서 4:5-6) 이 성경 구절은 내가 신학공부 하는 동안 항상 내 맘을 떠나지 않았던 '신학적 화두'가 되었던 것이다. 위에 인용한 성경말씀은 사도 바울 말년의 신앙고백이 표현된 목회서신의 한구절이다. 거기엔 이스라엘 신앙전통 속을 꿰뚫고 면면이 흐르던 '유일신 신앙'의 참된 의미가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마음 속에서 숙성되어 더 높고, 깊고, 넓은 향을 발하면서 나타난 것이다.
우선 첫째, 위 성경 앞 구절에서 강조되는 것은 '하나'라는 말이다. '하나'는 둘과 셋과 넷에 비교되는 수량을 의미하는 '하나'가 아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진정한 의미에서 성서가 증언하는 '한분이신 하나님, 유일하신 하나님' 신앙을 오해하지 않으려 한다면 수량적 의미의 '하나'라는 좁은 생각, 평면적 생각, 단순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 성경구절에서 말하는 '하나'는 한민족이 오랫동안 종교적 심성에서 말해온 '한'(韓)과 도리혀 통하는 말이다. 그 '하나'는 모든 것을 그 안에 포용할 수 있는 '하나'이며, 삼라만물은 그 '하나' 안에서 나와서, 노닐다가, 그 '하나'에로 돌아간다고 믿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다. 단순한 '하나'가 아니고 '유일'하다는 말은 비교할 다른 신적 존재들중의 어느 '하나'라는 말도 아니고, 신적 속성 안에 '다'(多)를 능히 포용 할 수 없는 폐쇠적인 단독자로서의 '하나'라는 말이 아니다. 사실 모든 종교와 형이상학은 이 '하나'를 손가락으로 가르키고 있다.
둘째, 이 '한 분이신 하나님'은 '만유 위에 계시는 이'라는 것을 성경은 말한다. '만유'는 '만물'보다 더 그 의미가 깊다. '만물'이라고 표현하면 형상이 있는 가시적 존재에 국한 되는 감을 풍기게 된다. 그러나, '만유'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않는 것, 사도 신경이 말하는 하늘에 속한 것과 땅에 속한 것, 철학적으로 말해서 형이하학적인 것 과 형이상학적인 것, 그 모두를 말한다. '만유' 안에는 이데아들, 이념들, 원리들, 권세들, 천사들, 영물들, 신령한 귀신들, 생명체들, 무생명체들, 원칙과 법칙들, 그 모든 것들을 다 포함하는 말이다.
그런데, 성서적 신앙이 신앙 고백하는 '한 분 하나님'은 '만유 위에 계신 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물론 공간적 은유가 동원되었다. 위, 아래, 중심, 변두리등은 모두 공간적 상징이다. 하나님은 '만유 위에 계신 분'이라고 신앙고백한다는 말은 하나님이 공간적으로 저 은하계넘어 어디 삼층천에 좌정하고 계신는 '천상세계의 군주' 같이 그렇게 존재하시는 분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물론 요한 계시록을 비롯하여 신구약 성경의 많은 구절에서 그런 공간 상징적 표현이 있다. 그러나 그러한 표현들을 문자적 의미 그대로 이해하면 성경의 참뜻을 다 파악하지 못하게 된다. 그렇게 맘 속으로 이미지를 그리면서 하나님 신앙을 지닌 사람들의 신앙이 모두 틀렸다든지 잘못이라고는 할 수 없다. 보통 사람들은 그렇게 어떤 이미지를 동반하지 않으면 쉽사리 하나님의 실재성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인지상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그 사람의 영성이 더 깊어가고 생각이 높아가고 심령이 맑아져 간다면 굳이 그러한 공간적 이미지에 메이지 않고도 '만유 위에 계신 이' 라는 의미를 받아드리게 된다.
'만유 위에 계신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절대초월성을 가르키는 말이다. 하나님의 초월성은 소극적 의미와 적극적 의미가 있다. 하나님의 초월성이 말하려는 소극적 의미는 하나님은 만유의 주(主) 이시므로 만유중 어느 것과 하나님을 동일시하거나, 만유와 혼동해서는 않된다는 것을 이미한다.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말이다. 사람은 영적으로 감동하기 쉬운 존재이기 때문에 조금만 신성한 것을 만나거나 체험만 해도 곧바로 그 앞에 절을하고 경배하려는 습성을 지닌 존재이다. 천사들, 영험한 종교지도자들, 고귀한 이념들, 심원한 종교적 상징물들, 감동적인 예술적 가치들, 무한하고 거대한 질료들, 숭고한 도덕적 가치들과 정신능력들, 민족과 국가의 불멸성등 이러한 것들을 '하나님과 같은 것'이라고 동일시하는 과오를 범한다. 기독교 종교를 절대시하고, 성경 경전을 절대시하고, 교리신학체계를 절대시하고, 교회의 신성한 전통을 신상불가침한 것이라고 절대시하지만, 그것들을 '하나님 처럼' 절대시하지 말라는 것이 우상숭배 금지 계명의 참 뜻이다.
'만유 위에 계신 이'는 하나님의 초월성을 가르치려는 말인데, 초월성의 적극적 의미는 하나님의 절대자유, 허나님의 비규정성, 하나님의 무궁하신 신비를 말한다. 하나님은 바람이 불고 싶은대로 불듯이, 하나님의 초월성은 하나님의 절대자유를 말한다. 하나님은 절대자유하신 주(主)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피조물들 곧 유한한 존재자들이 하나님은 이렇다 저렇다, 이래야한다 저러해야 한다라고 제약과 제한을 가할 수 없다. 하나님의 초월성은 절대자유이시기 때문에, 텅빈 무(無)나 '충만한 空' 이시기도 하고, 아주 무력한 '無'이시도하고, 가장 비천한 '낮고 천한자'이시기도 할 수 있다.
'만유 위에 계신 이'로서 하나님신앙을 지닌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언제나 겸허, 침묵, 찬양, 경배, 감사의 맘을 갖는다는 말이요, 그 무엇보다도 '경외하는 맘'을 잃지 않는다는 말이다. 내가 기독교신앙 전통에서 깨닫고, 체험하고, 알게 된 하나님은 다름 아니라 하나님은 '만유 위에 계신 분'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사람은 경외감을 지녀야 한다는 점이다. 건방지지 말라는 말이다. 지적인 교만, 도덕적인 오만, 종교적인 오만을 떨지 말라는 말이다. 설혹 어떤사람이 깨달음의 자기정진과 수도원의 기도생활에 들어선지 40년만에 천상천하의 모든 이치를 깨달아 득도하고, 천상의 하나님과 하나되는 체험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가 진리 그 자체 앞과 안에서 교만을 떤다면 나는 그런 경박한 태도를 용납하고 싶지 않다. 예수님의 표현대로 말하자면 "하나님은 영이시다. 예배하는자는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해야 한다".
'만유 위에 계신이'는 곧바로 동시에 '만유 안에 계신 이' 라는 것이 성경이 증언하는 임마누엘 하나님이요, 내가 체험하고 알고 깨닫고 고백하는 하나님이다. 어떤 시간에는 '만유 위에' 계시다가 그 다음에는 돌연이 '만유 안에 계시는 이'가 된다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은 피조물들 처럼 어느 장소나 시간에 제약되어 계는 분이 아니고 '스스로 계신이' 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만유 안에 계시는 이'는 그 분이 바로 '만유 위에 계시는 이"로서 절대자유하신 당신의 초월성 때문에 만유 속에 내재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말이다. '만유 안에 계심'을 전통적 신학용어로서 하나님의 '내재성'이라고 표현해왔다.
'만유안에 계시는 이'는 하나님이 초월적 절대자 이실뿐만 아니라, 철저히 동시에 내재적 절대자라는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 분은 하나님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만유의 주(主)이시기 때문에, 만유를 사랑하시고, 만유에 관심을 가지시며, 만유가 당신의 창조목적에 부합되게 생명의 충만, 아름다움, 진실, 정의로움, 사귀임 가운데서 존재를 향유하도록 깊은 관심을 가지시며 만유와 함께 하신다. 우주만물과 하나님을 곧바로 동일시해서는 않되며 구분해야하지만, 그 경고 못지않게 중요하게 기억해야 할 거은 그 양자를 분리시켜 떼어놓고 생각하는 것은 그 보다 더 큰 잘못이라는 사실이다.
대체적으로 지난 2,000 기독교 역사는 항상 그렇게 '만유 안에 계시는 이'로서 하나님을 바르게 신앙고백하는 일에 실패하거나 소홀해왔다. 하나님의 '내재성'을 강조하면 곧바로 동양종교가 빠져든 '범신론'이 된다는 강박관념에 붙잡혀 왔었다. 그리하여, 창조세계와 철저히 구별되는 '전적타자'로서의 하나님의 타자성과 초월성을 강조해 왔었다. 그렇게 강조하지 않을 수 없었던 시대정신의 위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서구문명의 이념을, 인간성과 역사과정을, 상대적인 가치나 이념을 하나님과 혼동하는 우상숭배 과오를 경고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신학적 동기는 좋았으나, 그 방법이나 발상법이 성서적 신앙과는 달리 변질되어 버렸다. 그 결과, 이 세계는 하나님의 말로다할 수 없는 은혜로운 임재와 상관없는 '하나님 없는 무신성의 세계'가 되어 버렸다. 세계는 물질덩어리와 인간 욕망의 실현장으로 간주되게 되었다.
그러나, 내가 믿고, 깨닫고, 알게된 하나님은 철저하게 '만유 안에 계신 이'이다. 하나님은 새싺이 돋아나고 꽃봉오리가 터지고,열매가 맺히고, 새 아기가 탄생하고, 늙은이가 죽고, 결혼하고 노동하고, 태풍불고, 가뭄이 드는 모든 일에 내재하신다. "하나님은 빛도 짓고 어둠도 지으셨으며, 평안도 창조하고 환난도 창조하시나니"(사45:7) 하나님이 세계 안에 있고, 세계가 하나님 안에 있다. 하나님의 내재성을 부인하면, 이 세계는 힘있는 자들의 점령지가 되고 인간욕망을 실현하는 식민지가 된다. '만유 안에 계신 하나님' 신앙이 약화되면, "하늘나라에서는 하나님이 왕이시고, 땅 위에서는 힘있는 자들이 왕이되는" 놔눠먹기식의 분활통치, 역할분담, 성속이원론, 종교와 정치분리, 영혼세계와 현실세계의 분리,등등이 일어나게 된다. "당신의 뜻이 하늘에서 이뤄진것 같이 땅 에서도 이뤄지이다" 라는 주님의 기도는 공허하게 되어 버린다.
'만유 안에 계신 이'로서 영원한 하나님을 고백한다는 말은 삶의 매 순간 순간이, 하나님의 은혜의 햇빛과 붙드시는 은총 안에서 살고있다는 신앙체험과 같은 말이다. 생명의 매 순간이 은혜의 사건이요, 창조의 기적이요, 속량과 구원의 사건이다. 창조와 구원이 손바닥과 손등 관계처럼 불가분리적인 것으로 이해된다. '만유 안에 계신 하나님'이 동시에 '만유 위에 계신 하나님'이라는 역설적 신체험은 주관적으론 사람의 심령을 '황홀한 이성'과 함께 찬양경배의 마음을 일의키고 사람을 겸허하게 만든다. 객관적으로는 초월적 유신론도 아니고, 내재적 범신론도 아닌 제 3의 길 곧 '만유재신론'(萬有在神論,Pan-en-theism) 입장을 지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묵상하는 성경구절 에베소서 4장 6절은 나머지 한구절을 더 말하고 있다. 그것은 신적 생명의 세번째 존재양식으로서 '만유를 통하여 일하시는 이'로서 하나님의 모습이다. 하나님은 절대군주처럼, 영웅처럼, 독재자처럼 일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만유가 아무리 연약한 존재요 유한하고 부족한 존재일지라도, 그러한 만유를 통하여 일하시기를 기뻐하신다. 하나님은 만물을 당신의 창조기쁨과 고난에 동참하도록 배려하시는 사려깊은 하나님이시다.
'만유를 통하여 일하시는 하나님'을 21세기 그리스도 신앙과 영성은 주목하고 강조하며, 바르게 응답해야 한다. '만유를 통하여 일하신 하나님'의 속성을 하나님의 창조적 '과정성'이라고 이름 붙여보자. 하나님의 초월성,내재성, 과정성은 셋이면서 하나이고, 구별되지만 분리되어 있는것 아니다. 역설적이게도, 하나님이 진실로 만유를 초월하실 수 있는 이시며, 동시에 철저히 만유 안에 내재하실 수 있는 하나님 이시기에, 그 하나님만이 두려움없이 '만유를 통하여' 일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 되신다. 참된 권위와 자신이 없는 군주나 독재자는 자기의 권력과 기회를 국민과 나누려하지 않고 움켜쥐고 독점하려한다. 자기혼자서 모든 것을 해 낼 수있다고 과시하려 한다. 그러나, 진정한 현군은 그렇지 않는다. 권력, 기회, 책임, 의무, 창조의 기쁨과 슬픔을 함께 국민과 자발적으로 나눠 가지려 한다.
'만유를 통하여 일하시는 하나님' 신앙을 지닐때, 우리는 진정으로 성숙한 신앙인으로 살아 갈 수 있다. 하나님은 만유를 통하여, 특히 인간의 자유의지와 결단과 선택을 통하여 일하시고, 기쁨과 고난, 성공과 실패를 함께 맛보신다. 하나님은 스스로 '피조물과 함께 일하시는 동반자'가 되시기로 자신을 비우시고 내어주신다. 피조물들을 당신의 창조와 구원사역에 동참시키신다. 피조물들에게 새로운 비젼을 부어 넣어주시며, 영성이 익어가게 하시며, 숭고한 도덕의식과 아름다운 예술혼으로 충만하도록 영감을 불어넣으시는 생명의 영이시다. 창조적 진화, 진화적 창조를 이끌어 가신다.


나는 만물이 하나님 안에서 알곡은 알곡대로 보존되고 완성되며, 죽정이는 죽정이대로 타서 없어진다는 예수님 말씀대로, 만유가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하나님 안에서 노닐다가, 하나님 안으로 돌아가며 성취된다고 믿지만,시한부 종말론자들이 주장하는것과 같은 그런 종말심판은 믿지 않는다. 그것은 당시 1세기 묵시문학적 종말론자들의 영향이 짙게 표현된 성경의 멧시지이지만, 그 멧시지의 핵심은 지구를 불로 태워버리는 '불의 심판'에 강조점이 놓여있는 것이 아니고, 만유의 궁극적 주인이 '하나님'이시라는 고난 속에서의 신앙고백이다. 고난 속에서 낙심하지 않으며, 세계역사 현실 속에서 횡횡하는 악의 횡포에 굴복하거나 타협하지 않으며, 마지막 승리와 생명역사의 주인이 하나님임을 고백하는 신앙이 종말론 신앙의 참 뜻이다.
거듭 명심해야 할 점은, 성경구절과 우리들의 제한된 이해능력 때문에, 어쩔수 없이 '만유 위에 계심', '만유 안에 계심', 그리고 '만유를 통하여 일하심' 이라는 삼중적 양태를 구별하고 따로 따로 살폈지만, 살아계신 진리자체이신 하나님, 생존자체신 하나님, 거룩 자체이신 하나님, 무엇보다도 사랑자체이신 하나님 안에는 이 세가지 측면이 하나로 통전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바로 그 특징 이야말로 하나님의 하나님 다우심 이며, 피조물들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찬양해야 할 이유이다. 나는 내가 기독교 신앙전통을 따라, 기독교의 진리체험과 하나님 이해를 한 그 내용이, 원효와 동시대에 중국에가서 공부하고 돌아온 의상대사의 작품 '화엄일승 법계도' 안에 30구절의 종교시 형태로 경배찬양되고 있는 것을 보고 매우 놀라고 기쁘게 생각한다. 그는 불자이기 때문에, 불교적 용어로서 말했고, 불교적 사유방식과 패러다임에 제약되며, 그래서 불교적 특성을 나타내지만, 의상대사가 체험하고 깨달은바 그 진리이야기와 나의 이야기 사이에 나는 깊은 통함을 느낀다. 왜냐하면 7세기에 불교를 통하여 의상을 깨우치게하신 이, 진리자체이신 하나님이 20세기를 살고있는 그리스도인 나를 진리안에서 부르시고, 목사되게 하시고, 증언하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시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또한 만유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말은 신앙은 이해나 사상이 아니고, 체험이며 실천이라는 것이다.살아있는기독교 신앙은 생명적 이어야하며 실천적 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14장의 말씀을 항상 마음에 두고 하루 한번씩 말씀을 묵상하고 싶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것을 너희가 알리라. 나 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14:20-21)

기독교 신앙이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통하여 하나님 안에 있음을 경험하는 신앙이요, 이웃을 사랑하고 정의를 실천하라는 주님의 계명의 준행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주님의 현존을 구체적으로 경험하는 종교라고 믿는다.
추천4

댓글목록

나디아님의 댓글

나디아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저도 정독을 한 것은 아니지만, 대충 요약해보니,,
'하나님' 이라는 단어에서 하나를 설명하고
만유 위에 계신 이기에 초월적 존재이니, 만유 안(만물)의 무엇을 그와 동일시 하는 오류(우상)를 범하지 말지니, 이념과 예술과 도덕이라는 사념과 성서에대한 절대 가치측정을 신적 영역에 담으려하지말고, 성서 또한 문자라는 음가 주변적 의미에 얽매이지 말고 영적 체험이며 마음으로 깨닫는 것이고,
만유 안에 계신 이 이며 동시에 만물을 통해 일하시는 이 이니, 그의 절대 초월성과 함께 이제 내제적 절대자가 된다. 그러니 모든 사건과 존재 안에 그가 계시다... 이 즈음에서 동양 철학과 연결이 있는 듯 합니다.
 
제 사견으로.. 이글이 동성애와 관련된 답글로 있는 이유를 대답하라고 고딩식 문제를 제가 받았다면, 그 모든 존재하는 이가 신의 뜻이니 너희의 이해력으로 잣대질을 삼가하라.. 라는 다분히 동성애 감싸안기식 답변을 제출하렵니다... 아~! 답변하지 말지어다..??

m&uuml;ssen님의 댓글

m&#038;uuml;ssen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저도 그런 뜻으로 이해했습니다. 정말 다양한 의견들이 있네요...정말 갈수록 모르겠습니다. 어느 것이 맞는 이야기 인지. 저 역시 한편의 생각으로는 당연히 하나님의 신적영역은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음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근데 성서는 성령으로 쓰여진건데...이거에 절대가치를 두어야 될거 같기도 같고...머리가 복잡해 지는군요. 살면서 해답을 찾아나가도록 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디아 님...취스~

Okdol님의 댓글

Okdol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교인이 아니시다고 말씀하신 나디아 님의 고견도 본래 기독교에서 추구하는 생활자세와 그리 다르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도보님의 진술에 대해 또 존경을 표합니다.  교역자인 저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도보님께서 갈등하시고 혼란스러워하시는 소위 '회의'란 것을 어느정도 품고 살았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모든 모순과 교회 내외적 부패를 무마하려는 교회, 혹은 기독교인들의 시도는 오랜 역사적 흐름이었지만, 제대로 교회 내에서 비판되지 않았기 때문에 현재와 같은 부정의가 교회 내에서 버젓이 자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한국의 대부분의 교회는 그 본래적 사명에서 멀어져 있습니다. 자기도취에 빠져있다던지, 자본주의적 논리에 빠져서 허우적 대고 있는 것들이 바로 안타깝게도 현실교회의 모습입니다.
또한 한국교회와 외국의 한인교회 내에 소위 직급(본래 이것은 봉사와 섬김을 위한 것인데)이라는 게급적 차별이 엄연하게 존재하고 그것으로 고압적 명령과 순종이라는 것이 발생합니다. 이러한 폐단은 종교개혁 이후의 교회에서 여전히 발생하고 있습니다.
오로지 하느님에 대한 순종을 강요하면서도 응근슬쩍 목회자나 교회내 서열을 통해 자신이 그 자리에 앉으려 하고, 신도들의 각종 어려운 사정들에 대해서 이해하기는 커녕 불신앙의 태도라고 나무라는 일이 도처에서 발견될 수 있습니다. 상당수 교회 목회자들은 자신이 유대교 사제인지 기독교 교역자인지 분간하지도 못하고 있을 뿐더러, 설교를 통해 복음선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죄의식과 이로인한 보상으로의 순종만을 강요할 뿐입니다. 가령, 도보님이 언급하신 '십일조'라는 제도는 유대관습일 따름이지 기독교의 교회 내 순종원리가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기독교는 본래 그것을 뛰어넘는 사랑의 배품, 즉 자신의 재산 반이라도 아무런 보상을 바라지 않고 기꺼이 베풀수 있을 만한 믿음이나, 혹은 십의 일조가 아니라 이조, 삼조라도 낼 수 있을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준은 성과 속의 구분이 없는 '구제'가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혹 자신이 진정 부족하면 교회공동체에 요청할 수 있는 것도 포함되어야 합니다.
속시원하게 충족되지 못하셨으리라 생각되지만, 앞으로도 계속 대화하면서 다른 분들과 함께 나누며 갈들의 실마리를 하나씩 풀어가면 좋겠습니다.

나디아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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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인이 아닌 제 삼자가 드리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종교라는 것이 '우리 종교가 최고야'를 표면에 강하게 비추고 있으면 오히려 거부감이나 갈등을 일으키고, 교회만 나가면 된다(삶의 태도는 생각이 없어 보일 정도로)는 모습은 반감을 일으키는 원인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교회를 일주일에 일회 이상 꼭 나가야만 한다, 하나님을 믿지않으면 지옥간다, 우리 신만이 유일신이다. 십일조를 해야만 진정한 믿음이 있는자다, 전도의 능력을 마치 믿음의 크기로 생각하고 초면부터 '교회나가세요~'를 외치는 분들.(그 마음이야 이해를 합니다만..)

이보다 종교인으로서 사회에서 먼저 보여주고 노력해야할 모습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모습, 남의 것을 탐하지 않는 마음, 외식하지않는 겸손, 진심으로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 등등이 또 하나의 믿음이 아닐까 합니다.

외부와 차단된 교회건물 안에서 신과의 만남에서 느끼는 충만함은 아마도 교회건물 밖에서 타인(교인외의 이웃)들과의 사랑(사랑은 자신의 뼈를 깎아내리는 희생이라는 고통?이 없으면 불가능 할 것입니다.)의 댓가일지도 모른다는,,,

베리가 많이 편안하게 느껴지나 봅니다. 제가 엄청나게 용감해 졌습니다.^^ 저의 용감하게 주절대는 모습 관대히 용서해 주세요..(_ _)

dobo님의 댓글

dobo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저는 모태신앙을 토대로 시작햇습니다. 어찌 보면 축복이고 어찌 보면 어설픈 교인이죠. 부모의 훈육과 양육이 어렸을 땐 잘 되었는데 20세가 되면서 무지 혼돈 스럽더군요. 사랑하라 하면서 기독교의 역사는 피로 얼룩져있고. 봉사하라 베풀어라 하면서 성전 건축에 여념이 없고 그리 높고 훌륭하게 지은 교회는 일주일 내내 잠겨져있고.. 너무 많은 모순들로 점철된 기독교의 현실을 느끼면서 사실은 지금 마흔을 내다보는 지금도 많이 힘들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믿음의 문제라더군요, 물론 머리로 하나님을 믿는건 아니죠. 하지만 내가 신이 아닌 사람이다 보니... 요즘 꼬마가 주일 학교에서 배운 내용을 제게 질문합니다. 부처 믿는사람은 지옥 가지요. 그럼 우린 하나님을 믿으니 천국가지요. 누구집 아주머니는 정말 착하고 사랑이 많으신데 그 분도 지옥을 가는건가요 등등.. 하루는 학교에서 불교를 종교로 둥 친구와 무지 싸웠다는 군요. 물론 제가 믿음으로 똘똘 뭉친 신도라면 별개의 문제겠죠. 우기면 되니까. 하지만 제가 아는 제법 많은 사람들이 교회의 직분을 가지고 계시면서 교회 안과 밖의 행동이 다르시고 사람들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모습을 보면서 아이에게 뭐라 대답하기가 많이 어려웠습니다. 그리고 제가 어릴 때 장로님이나 목사님의 아이들과 겨우 힘도 없고 돈도 없는 집사의 딸인 제게하는 차별화된 대우가 아직도 마음에 있기에... 제 어머니는 정말 고지식하시고 사랑밖에 없으신 너무나 절실하신 기독교 신자이므로 제가 지금 배신 할 수도 없고 답도 해서 사실은 많은 고민을 안고 삽니다. 저는 십일조 대신 기부를 하거든요. 너무 반항적인가요. 누군가 속시원하게 뭐라 말씀좀 해주시면 좋겠어요. 물론 기독교에 관한 장은 아니나 유럽의 생활속에 묻힌 종교에서 보여지는 그러한 신앙인의 모습이 궁금해서 글을 올립니다. 두서 없습니다. 그래도 좀 예쁘게...

realpine님의 댓글

realpine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dobo 님께,
저 또한 같은 문제를 가지고 고민을 했읍니다.
저 나름대로의 찾은 해결점을 나누었으면 합니다.

1. 착한 사람이 예수님 모른다고 또는 알고도 안 믿는다고 천당못가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저의 입장:

    일부 한국의 개신교 신자들은 주저없이 지옥간다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런데 어떤 천주교 신부님(미국인)하고 이야기
    하면서 들었는데 하나님을 모르고 살던 사람들은 하나님 뜻대로 살면
    천당에 간다는 말씀하시더군요. 즉 기독교인의 장점을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깨우치고 살수 있다는 게 장점
    이라고 합니다.
    저는 예수를 안믿어도 예수님 말씀대로 살면 천당갈수도 있는지 없는
    지 모릅겠으나 믿는 이들을 예수를 믿고 그말씀대로 순종하며 살려고
    하는것이 저의 입장입니다. 저는 마흔줄이 조금 넘었는데요 믿지않는
    남의 구원에 대해서 보다 저의 구원에 대해서 더 더욱 조심스러워 지는
    군요.
2. 아이와 타종교믿는 아이와의 종교문제에 대한 다툼:

    믿는자의 복음 전파의 사명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 예수님을 알리는 것
    입니다. 받아 들이고 않받아 들이고는 듣는 이와 하나님의 문제 입니다.
    타종교를 가진이가 예수 믿는 것을 틀리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우리
    의 믿음 이다라고 말하고 더이상 다툴 필요가 없읍니다. 우리에게는
    수많은 아직도 추수할 곡식이 많이 있읍니다. 즉 아직도 예수님을 모
    르는 이들이 많아서 하루 속히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국에는 이
    미 무수한 교회들이 있어서  누구나 예수를 알려고 원한다면 얼마든
    지 알수 있읍니다. 우리는 인도 아프리카 동남아  남미 아랍권 등지로
  눈길을 돌려야 한다고 생각 합니다. 
     
3. 십일조와 기부
  저는 십일조와 기부가 같다고 생각합니다. 십일조 기부 다 돈이기
  때문에 이 돈을 관리하다 보면 꼭문제가 생기더군요. 교회가 거대해
  지면 진정 말씀하신대로 하나님의 사업 보다는 인간의 사업이 우선
  시 된느 경우를 종종 봅니다. 기부를 할때도 저는 직접 기부를 하는것이
  그 단체를 잘 살펴보고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십일조를 하든
  기부를 하던 하나님께 십일조 바치는 정성으로 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4. 교회 조직과 직책에 대한 소고:
    집사나 장로 목사등등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기능적 역활을 위해
    있는 것이지 조직내의 직급과 권위를 내세우기 위해 있는것이 아닙
    니다. 신약의 집사를 만든 과정을 보면 사도들이 구제하는 일을 하다보
    니 영적인 일 즉, 기도 예배 묵상 성경공부를 하기가 어려워져서 이런
    구제 업무를 위해 집사를 세워 맡기었읍니다.  초대집사 스테판을
    순교를 당할시 유태인들에게 믿음을 소상히 전달하고 순교 했읍니다.
    이를 볼때 장로(즉 목사: 장로교는 목사도 장로입니다. 즉 목사 장로
    이지요)많이 말씀을 전달하라는 법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속이 시원해 지셨으면 하는 약간 교만한 바람도 해봅니다.

dobo님의 댓글

dobo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글쎄요 옥돌님의 말씀엔 어느정도 위안이 됩니다만 realpine님의 말씀은 몇가지 예를 들어 십일조 부분은 이해가 되는데... 저희 교회 목사님의 기도의 대부분은 위정자들이 모두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경외 하게 해달라는것과 우리 지역 모든 사람들이 교인이 될 수 있게 해달라는거죠. 근데 이러한 종교관을 목사님은 또 설파해야 하는 의무도 있겠지만 우리의 행위로 그들을 감동시켜야 하고 그들을 사랑 할 수 있는 마음을 강요하거나 요구 해야하는게 더 기독교적인게 아닌가요. 추수할 곡식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익히기위해 덜 여문곡식을 거두어 찐다거나 익힐 순 없는것 아니겠어요. 지금은 그러니까 신약에서의 믿음과 전도는 행위에 근간을 둔게 아닐런지요. 제가 이러한 마음이므로 아이들에게도 그래 예수님 믿어야 천당갈 수 있는거고 부처님 믿고 착하게 사는 사람들은 극락에 가는거야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아냐고 그 분의 삶을 쫒기 위해 얼마나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하는지 그래야만 천당에 갈 수 있는거라고 말은 합니다만 교회의 가름침과 제 말이 다르다 보니 참 어렵네요. 저 역시 간이 많이 부엇습니다. 감히 이러한 자리에서 가감없이 발씀드린다는것과 혹시 이러한 논의가 종교색을 띤다고 부담 스러워 하시는것은 아닌지 그러나 사람이 존재하는 이상 끈임없이 고민과 논쟁의 대상이 되어야 할 조건인것 같네요.

realpine님의 댓글

realpine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제 바램을 어떻게 받아 이해하셨는지 잘 모르겠읍니다.
1. 교회 목사님의 위정자를 위한 기도 그리고 지역민의 구원을
위한 기도 그리고 우리의 행위(좋은모범)를 통한 전도 내지는 감동
다 맞다고 생각합니다.

2. 덜여문 곡식 가두어 찐다 예에 대해서 이해가 잘안됩니다.

3. 저라면 부처님 믿고 착하게 살면 극락간다고 말하지 않겠읍니다. 불교
믿는 사람들을 그렇게 믿고 있으며 예수믿는 우리는 우리의 믿음으로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살것이라는 믿음을 가졌다고 말하겠읍니다. 그리고 부처님 믿어 극락간다고 저는 믿지 않는다고 말할 것입니다.

4. 예수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셨읍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많은 어필을 받았던거 같읍니다. 모든이 들은 살면서 누구나 자신이 문제가 있지 않읍니까. 그리고 모두 자신의 짐이 가장 무겁다고 생각하는 경향 있는거 같아요.
그런데 실제로 예수를 믿으면 어쩌면 더 무거운 짐을 지는 느낌이 있읍니다. 어쩜 오히려 질수 없는 짐이 저에게 오는 느낌이 있읍니다.

예를들어 절대 윤리와 상대윤리와의 갈등이 우리에게 항상있읍니다.
1). 장기 이식수술을 하는데 법에따라 이식 수술을 받아야 할 수혜자가 곧
  사형 집행이 될 사형수인데 다음번 수혜자가 공교롭게도 국가적으로
  중요한 과학자라면 과연 누구에게 이식수술을 해야 하는가
2). 어떤 엔지니어가 갖 결혼하고 집을 샀는데 자신이 맡은 프로젝트에
    안전문제에 대한 결함을 발견했다. 그러나 그 안전문제는 계약서상에
    굳이 밝힐 필요가 없는 문제이다. 이 안전문제를 제기하면 계약이
    무효가 되며 더나아가 집뿐만 아니라 새신부가 암에 결려 보험으로 치
    료가 안되는 상황에 처해있고 상사에게 이야기 하니까 상사는 그냥
    넘어 가라고 한다.

저의 믿음으로는 이런문제가 닥쳤을때 과연 모든 문제를 절대윤리적으로
보고 따를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지혜 인간의 방법을 포기하고 오직 겸손히 기도해야한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결단의 시기가 왔을때 온전히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런 결단의 순간에 나름대로의 미약하나마 그짐을 예수님이 져주셨다는 걸 살면서 많이 경험 하였읍니다.

5. 저는 신앙이 강요나 논리로 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말씀해 주셨듯이 목사님 장로님 자녀들이 오히려 탈선(기독교신앙으로부터)을 하는  경우도 많이 있읍니다.
역사, 현실생활, 학문속에서 발견하는 하나님의 섭리와 이해를 깨닫고
나누는 과정에서 신앙의 전파가 더욱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신앙생활 가운데 믿음이  자신의 내부로 부터 혹은 외부로 도전 받는 경우도 있었습니다만 갈등하고 고민하고 기도하는 가운데 그 도전을
극복한 경험이 쌓이면서 더욱더 조심스럽게 하나님과 교통하는 삶을
살아야 겠다 마음이 생기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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