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얘기 작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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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권세훈이름으로 검색 조회 3,442회 작성일 02-01-15 06:34본문
▣ 작성일 : 1999/02/22 [Time: 06:58] IP from 131.220.244.251
작은 이야기
-권세훈(독문학)
열 여덟... 열 아홉... 스무울...하아나. 삐걱거리는 세발 자전거로 마당을 한 바퀴 돌 때마다 셈을 하였지만 언제나처럼 스물을 넘지 못하였다. 국민학교에 다니는 형은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머리 좋기로 소문난 형은 스물 이상을 알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신문도 줄줄 읽을 수 있는 형에게 물어보면 필경 '그것도 몰라, 이 멍청아'하며 머리통을 쥐어박힐 것도 뻔한 일이었다. 울음보를 터뜨리면서도 대들기는 하겠지만 형제간의 티격태격은 어머니가 늘 동생을 꾸중함으로써 막을 내렸다. '엄마는 맨날 형만 좋아해'라는 항의를 후렴처럼 남기며.
여태껏 형이 지금처럼 보고싶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주인집 아저씨의 검은 고무신을 자전거로 타고 넘는 재미도 만만치 않았다. 그 고무신이 자전거 바퀴 밑에서 이리저리 뒤틀리는 묘미에 셈하는 것도 곧 잊어버리고 말았다. 자전거는 여전히 삐걱거렸지만 방안의 어머니는 내다보지 않았다. 다른 때 같으면 한 마디 했을 텐데.
11월의 쌀쌀한 날씨에 내맡겨져 있던 아이에게 방안으로 들어갈 좋은 구실이 생겼다. 울타리라 없던 집들이라 동네를 어슬렁거리던 형의 동갑내기들이 자전거를 뺏아 간 일이었다. 그들은 학교에 다니지 않았다. 그들은 잠시 장난치다가 자전거가 도랑에 처박히자 깔깔 웃으며 그대로 가버렸지만 아이는 엄마를 부르며 방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창호지문 고리를 잡고 선 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등을 보이고 앉아 있던 어머니는 돌아보지 않았을 뿐더러 하얀 천을 깐 앉은뱅이 책상위에 올려 놓은 두 손에 머리를 묻고서 작은 소리를 내어가며 울고 있었다. 조금씩 들썩거리던 어깨가 언제라도 무너져내릴 것만 같았다. 그제서야 방안에 들어와서는 안된다는 어머니의 다짐을 깨닫고 아이는 금방 의기소침해졌다.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내던 어머니가 잠시 고개만 돌리며 말했다.
"부엌에 삶아놓은 고구마가 있으니 그거나 갖다 먹어라."
울고 있던 어머니가 관심을 가져준 것이 기쁘기조차 하였다. 그래서 아이는 얼른 대답했다.
"응, 알았어."
다시 밖으로 나온 아이는 그러나 고구마를 먹지 않았다. 진흙이 잔뜩 묻은 자전거를 끌어다 놓았을 뿐이다. 어머니는 며칠 전 누군가가 다녀간 다음부터 바깥으로 잘 나오지 않았다. 형은 그 까닭을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물론 형마저도 '너는 알 필요가 없어'하며 상대해 주지 않기는 매 일반이었다.
마땅히 들어갈 곳이 없어진 아이는 쪽마루에 걸터앉았다. 어머니가 항시 깨끗이 닦아 놓아 번들거리던 그곳에는 이미 먼지가 쌓이고 있었다. 주인집의 커다란 감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아침에 일어나 그리로 달려가면 홍시 한두 개는 떨어져 있기 마련이었다. 흙을 대충 털어내고 입에 넣으면 꿀맛이었던 그 감은 아이의 특권이기도 했다. 수확이 끝난 지금 앙상하게 변한 가지마다에는 그래도 감이 몇개씩은 달려 있었다. 김의 수를 세기 시작했다. 열 여덟, 열 아홉, 스무울, 하아나... 형은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매일 아침 하얀 천을 씌운 모자에 까만 교복을 입고 우쭐거리던 형은 집마당 스무울 개 보다 훨씬 큰 운동장이 있는 학교에 다닌다고 했다.
그날 밤 아이는 어머니와 함께 기차를 타고 가는 꿈을 꾸었다.
'엄마, 저게 뭐야?"
"그건 하늘에 떠 있는 별이란다."
"저건 무어지?"
"반딧불을 본 모양이구나."
아이는 엄마의 말을 전적으로 믿으면서도 별이 땅에 떨어졌다고 생각했다.
(함지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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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이야기
-권세훈(독문학)
열 여덟... 열 아홉... 스무울...하아나. 삐걱거리는 세발 자전거로 마당을 한 바퀴 돌 때마다 셈을 하였지만 언제나처럼 스물을 넘지 못하였다. 국민학교에 다니는 형은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머리 좋기로 소문난 형은 스물 이상을 알 것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신문도 줄줄 읽을 수 있는 형에게 물어보면 필경 '그것도 몰라, 이 멍청아'하며 머리통을 쥐어박힐 것도 뻔한 일이었다. 울음보를 터뜨리면서도 대들기는 하겠지만 형제간의 티격태격은 어머니가 늘 동생을 꾸중함으로써 막을 내렸다. '엄마는 맨날 형만 좋아해'라는 항의를 후렴처럼 남기며.
여태껏 형이 지금처럼 보고싶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주인집 아저씨의 검은 고무신을 자전거로 타고 넘는 재미도 만만치 않았다. 그 고무신이 자전거 바퀴 밑에서 이리저리 뒤틀리는 묘미에 셈하는 것도 곧 잊어버리고 말았다. 자전거는 여전히 삐걱거렸지만 방안의 어머니는 내다보지 않았다. 다른 때 같으면 한 마디 했을 텐데.
11월의 쌀쌀한 날씨에 내맡겨져 있던 아이에게 방안으로 들어갈 좋은 구실이 생겼다. 울타리라 없던 집들이라 동네를 어슬렁거리던 형의 동갑내기들이 자전거를 뺏아 간 일이었다. 그들은 학교에 다니지 않았다. 그들은 잠시 장난치다가 자전거가 도랑에 처박히자 깔깔 웃으며 그대로 가버렸지만 아이는 엄마를 부르며 방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창호지문 고리를 잡고 선 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등을 보이고 앉아 있던 어머니는 돌아보지 않았을 뿐더러 하얀 천을 깐 앉은뱅이 책상위에 올려 놓은 두 손에 머리를 묻고서 작은 소리를 내어가며 울고 있었다. 조금씩 들썩거리던 어깨가 언제라도 무너져내릴 것만 같았다. 그제서야 방안에 들어와서는 안된다는 어머니의 다짐을 깨닫고 아이는 금방 의기소침해졌다.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내던 어머니가 잠시 고개만 돌리며 말했다.
"부엌에 삶아놓은 고구마가 있으니 그거나 갖다 먹어라."
울고 있던 어머니가 관심을 가져준 것이 기쁘기조차 하였다. 그래서 아이는 얼른 대답했다.
"응, 알았어."
다시 밖으로 나온 아이는 그러나 고구마를 먹지 않았다. 진흙이 잔뜩 묻은 자전거를 끌어다 놓았을 뿐이다. 어머니는 며칠 전 누군가가 다녀간 다음부터 바깥으로 잘 나오지 않았다. 형은 그 까닭을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물론 형마저도 '너는 알 필요가 없어'하며 상대해 주지 않기는 매 일반이었다.
마땅히 들어갈 곳이 없어진 아이는 쪽마루에 걸터앉았다. 어머니가 항시 깨끗이 닦아 놓아 번들거리던 그곳에는 이미 먼지가 쌓이고 있었다. 주인집의 커다란 감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아침에 일어나 그리로 달려가면 홍시 한두 개는 떨어져 있기 마련이었다. 흙을 대충 털어내고 입에 넣으면 꿀맛이었던 그 감은 아이의 특권이기도 했다. 수확이 끝난 지금 앙상하게 변한 가지마다에는 그래도 감이 몇개씩은 달려 있었다. 김의 수를 세기 시작했다. 열 여덟, 열 아홉, 스무울, 하아나... 형은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매일 아침 하얀 천을 씌운 모자에 까만 교복을 입고 우쭐거리던 형은 집마당 스무울 개 보다 훨씬 큰 운동장이 있는 학교에 다닌다고 했다.
그날 밤 아이는 어머니와 함께 기차를 타고 가는 꿈을 꾸었다.
'엄마, 저게 뭐야?"
"그건 하늘에 떠 있는 별이란다."
"저건 무어지?"
"반딧불을 본 모양이구나."
아이는 엄마의 말을 전적으로 믿으면서도 별이 땅에 떨어졌다고 생각했다.
(함지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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